글 수 395

-프롤로그2-


“흑흑흑.  흐윽흑흑흑…….”

 

누군가 폐부를 쥐어짜는 듯 좀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단단한 덩어리가 가슴 언저리를 무겁게 짓누르자 신우는 본능적으로 밀쳐내려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조차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축 늘어진 팔, 다리가 몸뚱이에게서 떨어져 나간 듯 감각조차 없었다. 전신의 근육이 뭉개지고 뼈마디가 형체도 없이 녹아내린 듯 그녀에게는 손끝하나 움직일 여력조차 남아있질 않았다.

 

쏴아아아아 -.
먼 곳에서 울리던 환청이 점점 형체를 갖추고 잠시 마비되었던 신경들도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거대한 자연이 울부짖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서걱거리는 모래가 잡혔다. 신우는 그제서야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왜 자신이 차가운 모래사장 위에 고장난 인형처럼 내팽겨쳐져 있는지…….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듯 흩어진 기억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나친 영상을 되돌리듯 뇌리에 남은 마지막 기억까지도 모조리 들춰내고 있었다.

 

아직……끝나지 않은건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어 마냥 달아나고 싶었다. 성난 바다에 내던져 졌을땐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녀를 옭아매는 지독한 현실속에서, 차마 죽이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남자의 순정앞에서 할 수만 있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천천히 눈을 뜬 신우는 칼로 후벼파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어둠을 주시하는 내내 소금기 짙은 눈물이 하염없이 얼굴을 적셨다.

 

쏴아아아아 -.

 

“흑흑흑…….”
 
가늘게 흐느끼는 울먹임. 애써 외면하려고만 했던 남자의 진심. 달궈진 쇳날이 가슴을 후벼파는 통증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몸이 튕기듯 발작했다. 심장을 관통하는 익숙한 통증 앞에서 신우는 맥없이 눈을 감았다. 질긴 목숨에 이렇게 또 살아났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내야만 하는 걸까. 하루에도 수십번이나 심장이 욱신거려 한참동이나 숨을 골라야할 정도였다. 진후를 떠올릴때마다 으레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 아픔을 동반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한 통증. 한 남자를 사랑한 죄의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달콤했다.

 

어느새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신우는 망령처럼 따라붙은 환영에 사로잡혔다. 조금씩 이별을 준비하던 그때부터였던가. 뒤돌아서 걸어갈때면 여지없이 뒤따르는 슬픈 눈동자. 마치 그녀의 속내를 꽤뚫어버린 듯... 그 습기어린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터 애원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한 여자를 향한 무한한 애정으로 눈부시게 빛 나던 남자가, 사랑을 갈구하던 예의 갈증어린 소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본능적인 직감에 어느새부턴가 그녀를 향하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별을 고하며 차갑게 돌아서던 날에도 남자는 말없이 울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에워싸던 그 순간에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마지막 순간에도 남자의 흐느낌은 그녀를 깨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굳이 보이지 않음에도 떨고 있는 양 어깨가 그녀의 두 눈에 선했다. 젖은 옷자락을 움켜쥔 두 주먹은 엄마의 옷자락에 매달린 어린아이처럼 잔뜩 힘이 실렸다. 이대로 놓쳐버린다면 엄마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떼어놓으리란 걸 아는 아이의 손짓마냥 안쓰러웠다.끊어질 듯 간간히 터져나오는 울음소리에 아픈 심장이 함께 울었다. 가슴을 적시는 남자의 뜨거운 눈물에 신우의 꼭 감은 눈가에도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

 

신우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웅얼거리는 속삭임만 간신히 토해냈다. 목청을 가다듬을 때마다 쉰 듯한 괴성만 입안을 맴돌뿐이다. 떨리는 호흡을 고르며 숨을 내쉴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 뿐이었다.

 

“진……후야.”

 

어두운 사위조차 무색하리만치 히끄무리한 빛으로 둘러싸인 인영을 바라보았다. 거센 폭우를 헤쳐온 듯, 짙은 바다내음을 물씬 풍기는 일그러진 그 얼굴을 신우는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터져나오는 오열을 씹어 삼키며 남자를 향해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진후……야, 나 여기 있어.
괴로워 말라고, 아파하지 말라고 다정하게 속삭여 주고 싶다. 거친 파도에 젖은 그 아픈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안아 보듬어 주고 싶다. 비록 오늘이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아아아아악!”

 

퍽퍽퍽-. 
단단한 뭔가가 모래를 파헤치고 하늘을 울리며 땅을 때리는 끔찍한 괴성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미쳐 그녀의 손이 닿기전이었다. 진후의 머리가 튕기듯 모래속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진후는 스스로를 벌할듯 온몸으로 모래사장을 내리쳤다. 떨리는 손끝이 간신히 닿았다.

 

“진……후야.”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분명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행여 거친 파도에 휩쓸릴까, 쏟아져내리는 함박눈에 가려질까……, 가냘픈 음성을 힘껏 쥐어짰다. 신우는 다시 한번 손끝에 힘을 실어 진후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가늘게 흔들리던 머리칼이 그녀의 손끝 아래서 얼어붙은듯 정지했다. 쉴새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던 잔뜩 억눌린 음성조차 잦아들고, 미세하지만 확연히 느껴질만큼 뻣뻣하게 경직된 진후의 상태를 신우는 쉽게 알아차렸다. 

 

“진……후야.”
“미……안해. 나,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나……괜찮……아.”

 

제대로 된 말 한마디는 커녕 침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까짓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후의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정말 널……죽일 생각은 없었어.”
“…….”
“어떻게……, 어떻게 내가 널 죽일 수가 있어. 넌……, 내가 남은 유일한 사람인데. 흑흑흑…….”
“진……후야.”
“신우야, 내가 점점 두려워져.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너에게 또 무슨 고통을 가할 지…….”

 

또 다시 머리를 내리찍으며 울부짖는 진후의 거친 몸짓에 작은 온기나마 만끽하던 그녀의 하얀손이 모래 위로 허무하게 떨어졌다. 손바닥을 적시던 온기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뼈속까지 파고드는 상실감에 신우는 저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나 좀 일으켜줘.”

 

저만치 떨어져 한참을 머뭇거리던 진후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안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주고는 다시 물러섰다 . 마치 불에 데인 아이처럼 흠칫 몸을 사리는 그 행동이 가슴 아파 신우가 먼저 진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후들거리는 두 팔로 간신히 진후를 감싸안았다.

 

“미안……. 너에게 상처만 줘서 미안해.”

 

젖은 니트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육체가  손끝 아래 그대로 느껴졌다. 신우는 아이처럼 흐느끼는 진후를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나와 함께…… 있을거야? ”

 

함께 있어달라는 애원도 아닌, 단지 그녀의 진심을 캐려는 듯……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힘주어 끌어안아도 가늘게 떨리는 경직된 몸. 단지 추위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태연을 가장한 그 음성에 더 가슴이 아프다. 자신이 이 남자를 망쳐 놓았다는 생각에.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와 나, 인연의 끈이 마주 닿지 않았다라면…….
신우는 쏟아져내릴것만 같은 차가운 밤하늘을 응시하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마치 벼랑끝으로 내몰리는 듯한 아득함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순간, 마법처럼 하늘을 뒤덮는 새하얀 장막. 쏟아져 내리는 하얀 눈송이가 또 다른 거짓을 일삼는 입술 위로 화인처럼 녹아내렸다.

 

“그래. ”

 

오늘만……, 오늘까지만 네 곁에 있을게.
아직 내일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까.
잠시만……, 조금만 더 너의 옆자리 욕심낼게.

 

차마 못다한 고백을 가슴으로 품던 그 순간, 진후의 단단한 품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가슴이 아프도록 짓눌리고 덩쿨처럼 죄여오는 두 팔에 숨이 막혔지만 신우는 더 없이 행복했다. 흠뻑 젖은 몸에서 발산되는 차가운 한기가 서로의 체온을 빼앗았지만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추워? ”
“으응…….”

 

입술을 다물었는데도 치아가 딱딱거리며 부딪혔다.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던 진후가 바다에 뛰어들기 전 잃어버렸던 코트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너도 춥잖아.”

 

미안함과 안쓰러운 마음에 신우는 코트를 칭칭 감아대는 손길을 가만히 저지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그의 대답.

 

“하나도 안 추운걸. 이 신우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비록 아니라고는 하지만 흐릿하게 드러난 진후의 얼굴이 창백해보이는 건 비단 달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싱긋 미소 짓는 얼굴은 구름사이로 빛나는 달빛보다 환한 빛을 머금었다.

 

지켜주고 싶었는데……, 정말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는데, 진후야!
지금 나, 너무 행복한데……, 그런데 내 얼굴은 왜 자꾸만 굳어지는 걸까.
신우는 점점 굵어지는 눈송이를 맞으며 진후의 가슴 한켠에 얼굴을 묻었다. 자꾸만 터져나오는 눈물을 보이게 될까 두려워 다정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울음을 삼켰다.

 

그의 품안으로 다정하게 밀착된 채 그대로 몸이 붕 떠올랐다.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든든한 두 팔이 어깨와 무릎을 감싸안고 지친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신우야, 우리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자. ”
“응.”

 

그래, 진후야.
만약에……, 만약 정말 다음 생이란게 있다면.
그때는 정말……, 너 하나만 바라볼께.

 

“진후야, 나 졸……려. ”

 

졸음기 가득한 음성에 그녀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신우는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노곤함에 저항할 힘을 잃은 채 몸을 맡겼다. 점점 무겁게 느껴지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래. ”

 

진후의 부드러운 입술이 젖은 머리칼을 부비며 신우의 정수리에 차가운 뺨을 부드럽게 눌렀다. 미풍처럼 밀려오는 따스한 숨결에 꼭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졸린 눈꺼풀 위로 깃털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가에는 단잠을 꾸는 듯 미소가 가득했다.


 

비록 육체는 잠에 빠져있었지만 의식만은 깨어있는 듯 기묘한 느낌. 차가운 밤 공기가 싸악 걷히고 눅눅한 기운이 코끝을 찔렀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를 맞이 한 건 진후의 품안이 아닌 딱딱한 바닥이었다. 순간 파팟- 거리는 소리에 이어 짙은 기름 냄새가 공기중으로 퍼졌다. 역하게 번지는 기름 냄새에 텅 빈 위장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신우는 갈라지고 터진 입술을 깨물며 요동치는 뱃속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잠시 후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미미하게나마 그녀의 뺨을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이곳은 진후의 어머니가 그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유산인 바닷가의 별장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 몇개월이란 시간동안 그의 어머니는 서울을 떠나 줄곧 이곳에서 지내셨다 했다. 지난 여름의 끝무렵, 진후가 이끌던 곳도 바로 여기였다.

 

삐걱거리며 어지럽게 울리던 발자국소리가 어디론가 향하자 신우는 전신을 휘감은 코트속에 푸욱 파묻힌 채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벽난로의 불길이 활활타오르며 어둠에 잠긴 집안을 조금이나마 밝혀 놓았다. 

 

타닥타닥-.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새빨간 불꽃이 너울거리며 춤을 춘다. 탑처럼 쌓아올린 장작들이 제 몸을 태우며 빛을 내뿜는 광경에 신우는 현실마저 잊은 채 빠져들었다. 노오란 빛깔에서 해지는 저녘 노을을 담은 붉은 핏빛까지, 제각기 다른 빛깔들로 녹아들어 온몸을 불태우는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벌서 깼어? ”
“어? 으응…….”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 선 진후의 양손에는 두툼한 담요가 들려 있었다. 딱딱한 나무바닥위로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손길에 의해 커다란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고 모래투성인 노란 코트마저 벗겨냈다. 신우는 볼품없이 늘어진 니트를 비롯해 블라우스로 서슴없이 손을 뻣는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블라우스 깃이 열리고 촘촘하게 박힌 단추가 하나둘씩 벌어질때마다 새하얀 속살이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신우는 부드럽게 이끄는 진후의 손길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양팔을 들어올렸다. 마지막 장막인 스커트마저 사라지는 광경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하얀 속옷 차림으로만 앉은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빠른 속도로 옷가지들을 벗겨내던 진후의 손길 역시 어떤 욕망의 흔적도 없었다. 창백한 그녀의 나신을 응시하며 미안한 마음에,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입가에 따스한 미소만 머금었을 뿐이었다.

 

“속옷은 벗을 수 있지? ”

 

진후는 바닥에 내려놓은 담요를 두 손 가득 펼쳐 신우의 어깨위로 둘렀다. 행여 찬 바람이라도 파고들까 목언저리까지 꼭꼭 여며주며 돌아섰다.

 

“그 동안, 줄곧 어디에 있었어? ”

“왜……, 새 어머니가 전화서 물었어? 둘이 같이 있는 거 아니냐고?”

 

질펀하게 늘어진 니트를 바닥을 향해 거침없이 벗어 던지던 진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신우를 향해 돌아선 진후가 잔뜩 이죽거린다. 비틀린 입술에는 차가운 실소가, 그녀를 쏘아보는 눈동자에는 거센 분노를 머금은 불길이 타올랐다. 어쩌면 신우의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그의 새어머니를 향한 시선일지도.

 

“진후야, 그렇게 비꼬듯 말하지마. 그게 아니란거…… 너도 잘 알잖아.”
“잠시 바람 쐬러 갔었어.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지. 바람따라……, 후우…….”

 

진후는 그때 그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지 깊은 숨을 몰아내쉬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바람따라 그냥, 발길 가는 데로 흘러가다보면 한 여자를 잊을 줄 알았는데……. 아니, 이젠 과거 따윈 신경 쓰지 않을거야.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앞만 바로볼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속삭이던 진후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신우에게 머물렀다. 오가는 시선속에서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눈에 띄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였다. 어쩌면 뭔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내심 그녀가 불안에 떨 만큼……. 살피는 듯한 집요한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벽난로의 불길로 시선을 돌렸다.

 

“자, 한 모금 마셔봐. 조금은 따뜻해질거야. ”

 

어디서 가져왔는지 진후가 손에 든 양주를 권했다. 신우는 양 손으로 호리한 병을 움켜쥐며 입술로 가져가 망설임 없이 쭈욱 들이켰다.

 

“푸욱. 켁켁켁. ”
“이 바보! 술도 못마시면서, 그렇게 무작정 들이부으면 어떻게해!”
“콜록콜록……. 목이 말라서 나도 모르게 들이켰어. 바닷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으윽. 입안이 온통 소금 투성이다.”
“아쉽게도 물은 없어. 조금만 참아. ”

 

목구멍을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한참동안이나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 주면서도 마치 철없는 아이처럼 그녀를 나무라는 짖궂은 눈동자에 신우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음……. 바닷물은 어떤 맛일까? 아직 한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피이, 거짓말. 지난 여름에…….”

 

팔만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던 진후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와 시아를 가득 매우자, 서늘한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겼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했던 신우는 검푸른 바다처럼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에 사로잡힌 채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검게 투영된 눈동자 가득 그녀가 보였다. 한 남자에게 사로잡힌 한 여자의 영혼이……, 가엽게도 올무에 걸린 짐승마냥 떨고 있었다.

 

진후의 부드러운 입술이 미끄러지듯 볼을 쓸어내리며 느릿느릿 부딪혀오자, 거실 한켠이 아득하게 기울어지는 듯 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제 기능을 잃은채 떨리던 호흡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사그라진다.

 

“으음……, 어디보자. 짭짤하게 잘 익은 과일맛인걸? 아찔하게 쏘는 한 잔의 술과 향긋한 과일 안주라……, 금방이라도 이 신우란 여자에게 취해버리것 같은데?”

 

신우의 입술을 간질이며 부드럽게 누르던 입술이 싱긋 미소지었다. 마치 와인을 음미하듯 세심하게 그녀의 입술을 품평하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소년같았다. 장난기 어린 그 미소에 심장이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뛰기 시작했다.

쿵-쿵-쿵-.  

 

“한잔으로는 부족하지.”

 

부드러운 입술이 도톰한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가도 달아나듯 살포시 입술을 떼어낸다. 메마른 그녀의 입술을 단비처럼 적시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입술은 이제 갓 시작하는 연인의 몸짓처럼 달콤했으며 또 조심스러웠다. 달콤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한 진후의 입맞춤에 신우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달콤한 그 입술에 그녀의 입술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진……, 진후……야.”

 

살며시 벌어진 입술은 허락이 아닌 거절을 말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몸과 마음은 한 남자에게 속한 지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 작은 속삭임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헤집는 진후의 입술이 불꽃을 일으키며 그녀를 뜨겁게 탐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고통을 모두 보상 받으려는 듯…… 아니, 어쩌면 그녀의 배신을 마음껏 벌하고 싶었을까.  

 

이게 아닌데…….
몸과 마음이 따로 향하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행동에 신우는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서로를 갈구하는 욕망에 한껏 취한 이 순간에도 고장난 그녀의 심장은 눈물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그의 향기에 취해, 달콤한 그 전율에 취해 신우는 정녕 내일을 잊고 싶었다.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잔뜩 달아오른 입술의 열기를 식히자 진후가 아쉬운 듯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진후야, 나 너무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바보처럼 눈물만 흘러…….”
“울보가 따로 없네. 나, 아직 가진 거 하나 없지만, 한 번만 ……. 이번 한 번만 믿고 따라와줘. 행복하게 해 줄게.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애써 환한 미소를 머금었지만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지도 못하는 그녀를 향해 진후의 얼굴이 내려왔다. 촉촉한 입술이 다시 한번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온통 눈물로 얼룩진 얼굴 가득 깃털같은 입맞춤이 이어지고, 따스한 입술 아래 신우가 흘린 눈물이 하나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으음……. 여기에 바닷물이 잔뜩 고였나? 짭짤한 소금기 가득한…….”
“나, 졸려…….”
“이제 그만 자고, 아침 일찍 떠나자.”

 

진후는 버클을 풀어 물먹은 청바지를 구석으로 벗어 던지고는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몇 개의 장작을 던져 넣었다. 여분의 담요를 바닥 위로 평평하게 펼치더니 자리를 잡았다.

 

“담요가 이거 밖에 없어서 나눠 써야겠는 걸?”

 

신우는 초대하듯 두 팔을 벌리는 진후를 향해 몸을 던지며 안겼다. 답삭 안긴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에 감겨있던 담요를 그의 몸으로 옮겼다. 진후는 마치 한 몸인냥 묶여 있는 그들의 몸에 담요를 두르고는 알을 품는 어미닭처럼 그녀를 품에 안고 바닥에 누웠다. 맨살에 와닿는 서늘한 한기에 신우는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흘렸다.

 

“조금만 참아. 금방 따뜻해 질거야.”
“으응.”

 

한 팔로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아 팔 베개를 하고 남은 손으로는 잔뜩 경직된 등을 어루만졌다. 마찰을 일으키며 쉼없이 쓸어내리는 손길에 어느새 구석구석 온기가 돌았다. 서로의 다리가 얽힌 채 허리 아래로는 빈틈없이 밀찰되어 있었고 달리 손을 둘 곳이 없었던터라 자연스럽게 진후의 가슴 한 구석에 손이 닿았다. 어찌할 수 없는 떨림에 무섭게 뛰고 있는 그녀와는 달리, 손끝 아래 규칙적인 박동을 보이는 그의 심장. 서로를 보지 못했던 일 주일 이란 시간이 그에게도 힘들었던 것일까. 탐스럽게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 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느릿느릿 고른 숨을 내쉬는 진후였다. 등에서 내려와 허리에서 배회하던 손가락의 움직임 역시 느려지고 베개 역활을 자청한 단단한 팔뚝에도 조금 힘이 빠졌다. 

 

신우는 아른거리는 모닥불을 벗 삼아 진후의 얼굴을 조금씩 뜯어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렇게 불빛 아래서 보는 진후의 모습은 또 달랐다.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햇는지 매끄러웠던 피부마저 까칠해 보였고, 좀 더 야윈 듯 튀어 나오는 광대뼈와 날카로운 턱선이 눈동자를 아프게 찔렀다. 

 

강 진후, 이 바보…….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구는거니? 못난 여자 때문에, 왜!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 하는 거야! 너에게 난,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할 뿐인데. 시간이 흐르면 그저 한때의 추억인 과거에 불과할 뿐이야.
그래 한 동안은 아프겠지.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 질거야.

 

신우는 눈을 감은 채 진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따스한 그의 체온을 만끽하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꿈 길 그 어딘가에서도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는지, 한결 부드러워진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신우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두 눈에 새겨 넣고 떨리는 가슴 한 켠에 묻었다. 언제고 그리움을 이기지 못할 그때를 위해 생애 단 한번만 허락된 사랑을 가슴 속 깊숙히 담은 채 빗장을 질렀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웠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현실 따윈 외면한 채 그냥 이대로 진후의 품안에서 잠들 수만 있다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있을텐데……. 신우는 저릿하게 번지는 심장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몸을 움직였다. 행여나 진후가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날 것만 같아서 그의 다리 사이에 얽힌 다리를 빼는데 식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깊게 잠들었다고 확신했지만 또 모를 일이었기에.

 

허리를 가로지르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진후의 품안에서 벗어났을 때, 쿵쾅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속옷은 물론 벽난로 근처에 늘어뜨려 놓은 블라우스와 스커트도 채 마르질 않았다. 형태가 틀어진 모직 스커트를 대충 걸치고 허둥지둥 블라우스를 꿰어 입었다. 피부에 축축하게 들러붙는 감촉이 써억 좋을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불편함을 따지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옷을 걸치고 소지품을 챙기는 내내 불안한 그녀의 시선은 진후에게서 떠나지 못할 정도였다.

 

한 손에는 한쪽 굽이 부러진 구두를, 다른 한 손에는 코트와 가방을 챙겨 든 신우는 잠든 진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단호히 돌아섰다. 현관까지의 거리를 대충 가늠해보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다행히 그리 멀지 않았기에 성공을 확신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거야. ”
“…….”

 

현관을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리치고 고요한 어둠속을 한 바탕 휘저었다. 신우는 차마 바닥에 주저앉을 수가 없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아직 동이 트르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젖은 옷을 입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추울 것 같지 않아?”

 

끓어 오르는 분노를 필사적으로 억누른 듯한 음성. 분명히 자고 있었는데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는 목소리에는 졸음기조차 없었다. 신우는 내려앉은 가슴을 다독거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강 진후. ”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여봐! 정말 후회하게 될거야! 아니,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나란 놈의 참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미자막 경고야. 이 신우, 지금 당장 돌아서!”

 

협박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달랐다. 안달난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것이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치고 떼를 쓰는 치기어린 행동. 비록 인정하기 싫을 테지만 포기란 걸……,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도 가질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배워갈 나이기도 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마음을……, 소중한 걸…… 잃을 거란 슬픈 현실 앞에서 넌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 할까.
하지만 진후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말이야.

 

“이제는 너도, 알 때가 되지 않았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여자인지……. 단지 흥미로웠어. 어쩌면 네가 불쌍했는지도 몰라. 세상을 겉돌면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널 잡아주고 구원해주고 싶었어. 날 필요로하는 누군가의 손길을 내치는 거, 너무 잔인하잖아. 나에겐 넌 하나의 일탈같은 존재였어. 내가 바라던 미래와는 달랐지만 쉽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하고 달콤했지. 사랑이라……, 단순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게 사랑이란 감정인가? 소유한다는 생각 너무 이기적인거 아냐? 그러니 강 진후가 하는 사랑도 단순히 이기적인 혼자만의 욕심이잖아. 네 혼자만의 감정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 역시 네가 아닌……나잖아. 조금 전에도 넌 네 욕심에 날 죽이려 들었어. 결국 죽이진 못했지만 아니 그럴 용기조차 없었던 거겠지. 단지 너의 그 대단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잖아. 사랑이란 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거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 그럼 날 그토록 사랑한다는 강 진후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죽도록 사랑한다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따위가 아니라, 그저 도망칠 줄 밖에 모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진정 날 위해 해 줄 수 있는 거 말이야. 훗……, 대답하기 힘들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랑 하는 거짓 사랑놀음도 이제는 재미없다. 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그러니 너도 이제 그만 정신차려. 꿈에서 깨어나란 말이야.”

 

신우는 한자 한자 내뱉을때마다 무덤하게 그 어떤 감정조차 싣지 않은 채 냉정함을 더했다.

 

“그만! 그만해, 이 신우! 거짓말 이란 거 다 알아! ”
“거짓말 아니야.”

 

진후가 흥분할 수록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페이스에 휘말려 초라한 감정이란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독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어느 새 등 뒤로 다가왔는지 거칠게 끌아당기는 강압적인 손길이 그녀를 돌려세웠다. 크게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할 새도 없이 양 어깨가 붙잡혔다. 분노와 상처로 일그러진 얼굴,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어두운 눈동자를 신우는 피하지 않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받아쳤다.

 

“내 눈을 보고 똑똑히 말해봐! 내 시선 피하지 말고, 머리 나쁜 내가 알아 듣게 말하란 말이야! 날 보란 말이야!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 따위로 장난 하지마.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너……, 나 사랑하잖아.”
“사랑? 꼭 내 입으로 우리 사이를 확인 시켜 줘야만 해?”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한 음성이었다. 아니, 신우의 귓가에는 마치 비명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똑 같은 말 두번이나 말해야 해? 이런 감정적인 소모따위, 더 이상 반갑지 않아. 잘 들어, 강 진후! 우린 잠시동안 짧은 불장난을 즐겼을 뿐이야. 매력적인 연하남……, 세상 어느 여자나 다 환영할걸?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줘? 네가 말하는 사랑을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불륜……, 패륜? 세상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으로 얽힌 관계. 우리가 즐긴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을 남들은 그렇게 말할테지. 불결해! 더럽기 짝이 없어!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이를 너만이 겉포장을 씌우는 거야! 너 역시 세상 잣대가 두려워 감히 사랑이라고 거짓을 말하는 거야!”

 

짝-.
순간, 뺨을 가로 지르는 따끔한 충격에 잠시 비틀거리던 신우는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머리회로가 멈추었는지 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랑을 모욕하는 건! 너와 내가 했던 그 시간들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건……, 그 누구도 용서못해. 아무리 이 신우 너라 해도 용서할 수 없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해야 할 말이 아직 남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렸다. 욱신거리는 뺨을 손으로 감싸던 신우는 말없이 진후를 바라보았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눈동자가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폭력에 그 조차 놀랐는지 떨리는 오른손을 잠시 노려보더니 주춤거리며 한 발 물러서는 진후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지. 저렇게 상처 받은 얼굴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눈동자로 날 원망스럽게 바라 본 적이 없었는데. 철없는 아이라고 비난했지만 정작 어렸던 건 그녀 자신이었다. 오로지 그녀만 바라보고 커다란 나무처럼 보듬어 주던 그 였는데. 그런 진후를……,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사랑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가 모독한 것이다.

 

이 바보…….
왜 네가 더 미안해하는 거니?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그녀가 내뱉은 독기어린 말들을 죄다 주워 담고 싶었다. 후회와 절망으로 가슴을 후려치던 신우는 나약한 마음을 이내 바로잡았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라. 그래 진후야, 날 욕하고 증오해! 나 같은 여잔 너의 기억에서 지워버려! 그게 널 위한 길이야!

 

“이제라도 내 마음 알았다면, 우리 이쯤에서 정리하자. 짐짝처럼 매달리는 네 모습, 보기에 좀 그렇네.”
“그래, 짐짝처럼 매달리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할테지? 더럽고 추악한 욕망 따위가 전부였으니까. 이미 처음이 아니었으니 마지막이라 한 들 누가 알까. 안 그래? 하아 이별의 선물……이라.”

 

잠시 미세한 균열이 일었던 눈동자 가득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행여나 도둑 고양이처럼 비겁하게 빠져나가지 않아도 될거야. 내가 쥐죽은 듯이 잠들면 문제될 게 없겠지. 또 미친놈처럼 잠에서 깨어나 도망간다는 여자 붙잡고 울고 늘어지는 일 따윈 없을테니까. 지난 일주일 내내, 아니 너란 여자의 본심을 알게 된 후부터 맘 편하게 잠든 적 없으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거야. ”

 

뒤 돌아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진후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몇 모금 마시고 남겨둔 양주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채 숨도 쉬지 않고 들이키켰다. 신우를 사납게 노려보는 매서운 눈동자가 경멸과 짙은 모멸감으로 붉게 타올랐다. 독한 양주가 어느새 목구멍까지 차올랐는지 얼마 남지 않은 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퍼억-.
한 방울도 남기없이 모조리 비워낸 술병이 진후의 손에서 떠난 채 바닥을 향했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발치 아래로 무수한 파편들이 흩어졌지만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채 그제서야 뒷걸음질 치는 신우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의 흔적을 손등으로 쓰윽 훔처냈다. 순간, 피식거리는 조소와 함께 소름끼치도록 음울한 미소가 진후의 입가로 번졌다. 신우를 향해 한 발 한발 걸음을 뗄 때마다 바닥으로 흥건하게 핏물이 고였다.

 

“진, ……진후야!”

 

소스라치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신우의 음성이 냉정을 잃고 가늘게 떨렸다.

 

“왜, 걱정돼? 아…… 바보같이 내가 또 어리석은 질문했지. 킥킥킥. 이러면 새벽부터 득달같이 쫓아갈 수 없을 테니까 오히려 다행스럽지 않아? 걱정마. 내 발목을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같이 중요한 날을 망칠 일은 없을테니까.”
“진후야, 제발 이러지마. ”

 

진후가 서서히 다가 올 수록 신우는 궁지에 몰린 작은 생쥐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도망갈 빈틈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네 안에……, 너의 몸 구석구석 날 새길거야. 날 떠나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게…….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내 머리속에서는 내 이름 석자가 깨끗하게 지워질지 몰라도 네 심장은, 보잘것 없이 더러운 네 몸뚱이는 날 기억하겠지.”

 

서서히 마음의 평정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아마도 그의 의도가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전신에서 발산되는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지 않을까, 신우는 덜컥 겁이 났다. 본능적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던 신우는 등 뒤로는 딱딱한 기둥을 마주함과 동시에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선 몸뚱이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거침없는 손길이 가늘게 움츠린 어깨를 거칠게 낚아챘다. 단단한 손길 아래 잡힌 어깨죽지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투둑-.
양 손에서 밧줄처럼 움켜쥐었던 코트와 가방이 차례데로 떨어졌다. 

 

“큭큭큭. 지금 떨고 있는 거야? 내…… 가 그렇게 무서워?”

 

미처 단추를 다 채우지 못해 블라우스 틈 사이로 뽀얗게 드러난 빗장뼈를 차가운 손길이 어루만졌다. 진후는 노골적으로 적대를 드러내보이며 성적 기대감에 들뜬 남자처럼 음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섬세한 뼈대를 하나 하나 그리듯 느릿느릿 쓸어내리는 그 손길을 따라 좁쌀처럼 자잘한 소름이 끼쳤다. 의도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거라면 성공한 셈이었다. 신우를 향한 눈동자는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치 술집 작부를 대하듯 경멸과 멸시에 가득 찬 눈빛. 점점 아래를 향해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차가운 손길에 신우는 떨리는 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이 뛰는 게 느껴져. 이상하지, 너란 여자에게는 심장따윈 없을 줄 알았는데. 부드러운 이 가슴을 갈라, 뜨거운 심장을 꺼낼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부셔버릴텐데. 날 아프게 한 만큼, 너란 여자도 고통속에서 몸부림 치게 말이야.”

 

가슴 언저리를 쓸어내리던 손길이 가는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머리칼을 헤집었다. 진후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점점 아득해지는 귓가를 마구 어지럽혔다. 단단한 손바닥이 봉긋한 가슴을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심장을 강하게 압박해 오자, 신우는 터질 듯한 흐느낌을 간신히 삼켜야만 했다.

 

“넌, 한 남잘 버린 대가를 치루게 될 거야! ”
“흐윽…….”

 

가늘게 떨리는 입술 위로 상처투성인 입술이 거세게 부딪쳤다. 매끄러운 입술이 신우의 부드러운 입술을 단숨에 가르며 입안을 마구 유린했다. 진후의 거친 입맞춤…… 아니, 입맞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자비한 행위에는 욕망은 커녕 단지 그녀를 벌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자비심 따윈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정복자의 공격만이 전부였다. 진득한 타액과 함께 입안 가득 진한 알코올의 열기와 비릿한 혈향이 번지자 꼭 감은 두 눈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집어삼킬 듯이 파고들면서도 숨 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정함에 가는 흐느낌이 비집고 흘렀다.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리는 신우의 헛된 몸부림에 진후는 소리없이 웃었다. 이윽고 하늘거리는 블라우스가 찢어지며 조각 조각들이 바닥으로 흩날렸다.

 

“하아……, 하아…….”

 

입술의 압박에서 숨이 차오르기 직전까지 다다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게 된 신우는 끊어질 듯한 호흡을 가쁘게 토해냈다. 벽에 기대 선 다리마저 힘없이 꺾인 채 차가운 바닥으로 주르륵 몸이 미끄러졌다. 축 처진 시체처럼 널브러져있던 그녀의 몸을 잡아채는 손길조차 인지하지 못해 눈만 껌뻑거렸다.

 

“다시 한번…… 말해봐.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란 말이야.”

 

아득한 의식 너머에서 울리는 열기에 찬 음성이 그녀를 현실속으로 이끌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보니, 잔뜩 구겨진 담요위로 맥없이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신우는 매끄러운 어깨를 미끄러지듯 방황하던 뜨거운 입술이 머뭇거리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성이란 끈을 다시 붙들었다.

 

“넌……, 단 하나뿐인……. 이 세상에서 유일한…….”
“아니, 아니야!”

 

분노로 흐느끼는 입술이 어지러운 방황을 시작했다. 새하얀 나신을 아프게 짓누르며 잔인하리만치 뚜렷한 흔적을 그녀의 몸 구석구석 새겨놓았다. 살아 있는 동안, 평생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 할 상처……. 그래 내가 다 지고 갈테니까, 넌…….
차마 진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구석진 어둠 한 구석을 응시했다.

 

“날 믿고 있는 네 아버진……. 소중한 아들을 마치 창부와 다들바없이 가지고 농락했다는 걸 너의 가족들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후후후.”
“그만, 그만해! 그래, 네 소원대로 오늘이 지나면! 이 시간이 지나면 널 버릴거야! 내가 먼저 널 지울테니까! ”

 

울며 매달리는 한 남자를 신우는 끝끝내 부인했다.
그래, 마음껏 날 미워하고 증오해.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만남까지도 지워버려. 진후야……, 이렇게 너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네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너에게로 달려가고 싶을 때 난……, 그때의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가르쳐 주지 않을래?

 

끝내 의지를 저버린 물기가 꼭 감은 눈가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새하얀 목줄기를 거침없이 탐하던 입술이 탐스런 가슴의 둔덕에 올랐다. 부푼 정점을 지나 점점 아래를 향해 미끄러지는 불길에 발작처럼 온몸이 떨렸다. 단단한 무릎이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가르고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이 파고들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욕망도 아닌 거센 분노를 머금은 그저 동물적인 욕구가 전부였다. 거침없는 손길에 젖은 팬티가 단번에 찢어지고 음부가 다 드러나도록 허벅지가 활짝 벌어졌다. 연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물론 그녀를 한숨 짓게 만들던 지난날의 애틋함도 없다. 차가운 두 손이 허리를 잡아채며 들어올린 순간, 잔뜩 성난 육체가 여린 몸을 단숨에 갈랐다.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날카로은 이를 번뜩이며 닥치는 대로 찢어 발기며 짓밟았다. 오로지 고통만을 안겨주기 위한 행위에 간헐적인 신음소리가 앙다문 잇새를 뚫었다. 미친듯이 파고드는 몸부림에 신우는 딱딱한 바닥에서 인형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껏 어둠 그 어딘가를 향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느릿느릿 정면을 향했다. 그녀와는 다르게 두 눈을 꼭 감은 채 굵은 땀방울을 쏟아내던 진후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절박하기까지 하였다. 지난 여름 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을 한 슬프디 슬픈 인연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이토록 무섭게 일그러진 진후의 얼굴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올만큼 지난날의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신우는 육체의 아픔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눈물인지 땀방울인지 모를 젖은 눈가를 닦아주고 굳은 입매를 펴 주고 싶었다.

 

손끝이 닿으려던 그 순간,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건지 격렬하게 파고들던 가슴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무겁게 짓눌려 형체도 없이 이지러진 그녀의 나신에는 진후가 쏟아낸 땀으로 흥건했다. 신우가 간신히 뻗은 손끝을 내려야할만큼 잔인한 현실속으로 내동댕이쳐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헉헉…….”

 

무겁게 토해내는 숨결이 정수리 가득 쏟아져내렸다. 그녀는 철저하게 농락당했다. 그녀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으니, 하얗게 드러난 나신과 차가운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행위에 수치심마저 느꼈으니 분노가 이는게 옳았다.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게 마땅하다. 하지만……진후의 거친 손길에는 분노에 가득찬 그 몸짓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가지 말라고, 날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온몸으로 외치는 무언의 절규가 그녀를 흔들었다. 그러나 신우는 끝까지 외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진후의 그의 방식대로 그녀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그의 흔적을, 아픈 상처를 새겨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다짐대로 잠이 들었다. 진후가 새겨놓은 흔적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은 채로 그녀의 몸에 남을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그의 뜻대로, 한땀 한땀 새겨진 문신처럼.

 

묵직한 머리가 가슴을 파고들고 단단한 근육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 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시 없을 순간이었다. 신우는 후들거리는 두 팔로 잠든 진후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등 뒤로 교차시킨 양팔을 힘껏 당겨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의 몸에 꼭 끼워져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진후의 힘찬 고동 소리에 맞춰 신우의 심장도 수줍은 듯이 두근두근 울렸다. 그 유혹적인 리듬에 신우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언제 어디서나 진후를, 그의 심장을,그의 숨결을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 두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땡- 땡- 땡- 땡-.
신우는 불만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과 함께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집안 어디선가 울리는 괴종시계 소리가 새벽을 알린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 이제는 정말 그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시간. 운명은 새로운 출발을 알리고 자꾸만 머뭇거리는 그녀를 재촉하듯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후야 나, 널 잊을 거야.
너에게서 나란 존재를 남김없이 지울거야. 그래서 오늘, 널…… 버리는거야.
이렇게 잔인한 나를 넌 결코 용서 할 수 없을테지. 
아니다…… 결코 용서하지도, 그리워하지도 마.

 

“진후야, 생일 축하해.”

 

신우는 잠든 진후의 얼굴을 바라만 보다 달콤한 숨결을 조심스레 훔쳤다. 떨리는 입술을 촉촉하게 감싸안는 따스한 열기에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애써 입술을 떼어냈다. 조심스럽게 진후의 품에서 빠져나온 신우는 무릎을 굽혀 엉망이 되어버린 그의 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온통 검붉은 핏자국 투성인 발을 들어다보고 있자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흐윽. ”

 

신우는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박힌 유리조각을 조심스럽게 뽑았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해도 족히 여럿은 되었다. 큰것으로만 간신히 뽑아내자 조각이 박혀있던 그 자리에 또 다시 선명한 핏줄기가 비친다. 신우는 바닥을 뒹구는 핸드백을 뒤져 손에 잡히는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찢었다. 찌익거리며 천이 찢기는 소음에도 잠든 진후의 숨결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러개로 조각낸 손수건을 이어 상처난 발을 꼼꼼히게 동여맸다.

 

너무 작아 미처 뽑아내지 못한 조각들이 있어 병원이라도 가야 할테지만 이제는 그런 당부의 말조차 아껴야 한다. 저린 다리를 펴고 일어선 신우는 후크까지 떨어져나간 스커트를 애써 고정시키고 그대로 코트를 걸쳤다. 이미 넝마조각이 되어버린 블라우스는 걸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행여나 속살이라도 보일까 목 아래까지 단추를 꼼꼼하게 채웠다. 망가진 구두에 발을 끼워 신은 신우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근처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담요를 넓게 펼쳐 잠든 진후의 몸 위로 둘렀다. 새벽녘 불길이 꺼질까 장작도 몇 개 더 던져넣었다. 
  
새로운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불길에 또 다시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눈물이날만큼 따스한 그 빛깔은 위태로운 그녀의 앞날을 밝히는 작은 등처럼 보였기에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다.

 

애써 시선을 돌린 신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며 울리는 구두소리가 도둑처럼 그녀의 뒤를 밟았다. 이른 새벽을 울리는 발소리에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난 진후가 그녀를 붙잡을 것만 같아서 신우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어리석은 그녀를 비웃는 듯 고른 숨소리만 깊어져갈 뿐이다. 신우는 입안을 감도는 씁쓸함에 싱긋 웃으며 마지막 남은 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5시를 향해 달리는 데도 짙게 깔린 어둠은 걷힐 줄 몰랐다. 마치 지금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듯……. 답답한 가슴을 숨이 막히도록 짓누르는 이 어둠이 신우는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하는 바람마저도 지독히도 차갑다. 또 다시 길을 가야하는 그녀를 위한 달빛조차 제 모습을 감춘 채 보이질 않는다. 작은 희망의 불꽃조차 없는 암담한 그녀의 미래처럼, 온통 암흑뿐인 그곳에서 신우는 또 다른 첫 발을 내딛었다.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오늘은 이 신우,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댓글 '1'

Junk

2011.08.01 01:38:49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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