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프롤로그 -1-

 

겨울이 온 탓일까. 따사로운 햇살을 잠시라도 내어주던 오후의 태양도 어느덧 서편 하늘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도시를 무겁게 뒤덮은 하늘마저 한바탕 눈이라도 뿌릴 듯 흐린 잿빛으로 온몸을 물들인다. 스산한 바람이 텅 빈 거리를 휘젖고,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땅거미가 내려앉는 해질녘의 풍경은 그 어느때보다 쓸쓸해보였다.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신우는 벌어진 코트깃을 여미며, 차갑게 얼어붙은 다리를 무작정 이끌었다.  폐부 깊숙히 찔러오는 차가운 공기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거침없이 할퀴었지만 뒤엉킨 머릿속은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무겁다 못해 더딘 발걸음은 해질무렵 텅 빈 놀이터를 뒤로한 채 엄마손에 이끌려 집으로 향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렇다. 지금 그녀의 처지는 운명이란 손아귀에 잡힌 채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형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녀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허락되질 않았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또각거리며 날카롭게 울려퍼지는 구둣소리만이 그녀의 몸을 매섭게 떠밀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시렸다. 형형색색의 네온싸인으로 둘러쌓인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힘겹게 지상으로 내려선 신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한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어디로 가야 할까. 물론 지금 이 순간 이후의 일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무작정 발길을 돌린 신우는 붉게 물든 거리의 끝즈음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멍하니 눈을 감았다 뜬 순간에도, 볼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이 입술을 적시는 순간에도, 환영처럼 나타난 그림자는 사라질 줄 몰랐다. 이리저리 떠밀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도 남자의 실루엣은 가슴을 뚫어버릴만큼 강렬했다. 파닥거리며 세차게 요동치는 심장이 그녀보다 먼저 남자를 향해 달려나갈만큼…….

 

“흐윽…….”

 

터져나오는 흐느낌을 애써 삼키던 신우는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에 가슴 언저리를 꾹 눌렀다. 텅 빈 가슴을 채우지 못해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아니, 까맣게 타버려 한 줌의 재로 흩어져버린 심장이 가슴을 무겁게 죄였다. 신우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깨지고 부서져 무수한 파편들로 가득했던 그 자리에, 상처투성인 심장이 더운 피를 내뿜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 며칠 동안 죽어가던 그녀였다. 정작 상처를 주었던건 자신이었으면서도 떠나버렸다고 믿었던 그 지옥같은 순간에도, 다시는 볼 수 없을거란 생각에 심장을 죽여가며 그가 없이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던 그녀였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함께 한 추억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아니, 그 실낱같은 믿음하나에 매달렸다. 그것만이 그녀가 살 수 있는 길이라 여겼다. 하지만 수 없는 다짐 따윈 헛되고 헛되 바람앞에선 흔적 없이 사라질 뿐…….

 

신우야, 이젠 정말 잊을 수 있을거라 여겼잖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게 죽을만큼 힘들테지만, 또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오늘이 지나기를 기다리면 참을 수 있을 거라 했잖아! 그래서…… 그를 기다리는 심장 따윈 아무 소용 없는 거라고! 이제는 정말 버려야 한다고!
심장이 죽어 버리면…….
누군가를 향한 아픔, 그리움 따위는 이제 더 이상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저녁 노을 아래 붉게 번지던 검은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자, 신우는 속절없이 떨리는 두 눈을 힘없이 감았다. 꼭 일주일만이었다. 울부짖는 그를 뒤로한 채 잔인하게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그 날 이후로……. 지금 이 순간만 지나면, 오늘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이 그리움의 끝도 사라질 거라 여겼다. 아니, 실낱같은 희망조차 무참히 버려야 할 내일이 온다면, 이 지긋지긋한 욕망의 사슬도 서슴없이 끊어내리라 마음 먹었다.

 

이렇게 숨도 못 쉴 만큼……. 이미 산산조각난 심장이 활활 타올라 죽을만큼 아픈데…….
진후야……, 이런 내 마음을 넌 알까?

 

“타!”
“진후……야!

 

한참을 머뭇거리다, 무거운 한숨 사이로 그를 불렀다. 

 

“이 신우, 타란 말 안 들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가냘픈 속삭임은 바람에 묻혀, 사납고 메마른 음성에 짓눌린 채 도시의 우울한 회색빛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진후의 거친 비명 소리에 차가운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길게 이어진 대리석 계단을 어지럽게 울리던 사람들의 발길이 멈춰서고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신우를 지나쳐 곧장 진후에게로 향했다. 개중에는 그녀를 알고 있을 이들도 있을 터였다. 지금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게 급선무였다.

 

신우는 흐트러진 코트를 다시 한번 꼭꼭 여몄다. 진후의 서늘한 시선에 야윈 몸을 더욱 움츠리며 길가에 세워둔 검정색 바이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면서 간신히 한발한발 내딛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신우는 말없이 뒤따르는 진후때문에 아린 가슴을 추스릴 여유조차 없었다.

 

이제는 상상속에서만 가능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 환한 미소로 두 팔을 벌리던, 따스하게 안아주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지런히 쓸어넘겨 주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를 향한 진후의 눈빛은 그 어느 해의 겨울보다 차가웠다. 

 

그래 신우야 , 이번 한 번만…….
오늘이 너와 그에게 있어, 마지막이 될테니까.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달리자, 어느덧 까만 어둠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신우는 휙휙 스쳐가는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바람을 타고 흐르는 공기에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잊혀질…… 아니, 기억의 끝자락까지도 무참하게 잘라내 버려야 할 지난 여름날의 바닷가. 일렁이는 옥색바다위로  눈부시게 부서지던 햇살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그 여름 날.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 꼽을 수 있었다. 감히 그 행복이 영원하리라 꿈꾸었을만큼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근 몇개월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그 여름날의 추억이 언제였냐는 듯, 칠흑같은 어둠으로 그들을 반기었다. 마치 암울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미래처럼 손짓했다. 

 

손목을 압박해 오는 강한 손길에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속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힘겹게 바이크에서 내려선 신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릴 새도 없었다. 냉정하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달리 끝없는 절망감이 그녀를 헤일처럼 덮쳤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거칠게 손목을 잡아끌던 진후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진후는 얇은 코트차림의 신우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면서도 그의 온기가 녹아 있는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싸는 걸 잊지 않았다. 목 아래까지 빈틈없이 채워진 코트의 따스한 기운이 쉴새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달래듯 감싸안았다. 귀까지 먹먹한 차가운 밤 공기에는 진후만의 체취가 함께 어울어져 있었다. 잡아끄는 손길은 거칠었지만 마주한 손바닥은 못내 감추지 못한 온기로 훈훈하기만 하였다.

 

그녀가 달콤한 망상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새 그들은 거친 샛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두운 시야에 익숙하지 않은 신우가 얼어붙은 길에, 보이지 않는 둔덕에 넘어져 가쁜 숨을 토해내는 순간에도 진후는 숨 소리 하나자 변하지 않았다. 순간, 어둠을 헤치는 흐릿한 달빛 아래 드러난 차가운 눈동자에 익숙치 않은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신우는 꽉 잡힌 손목을 조심스레 비틀며 달래듯 속삭였다. 

 

“진……후야, 우리 놓고 얘기하자. 응?”
“…….”

 

신우는 가슴을 헤집는 불안함에 애원했지만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거센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비틀거리는 그녀를 거침없이 끌어당기는 진후는 오직 단 한곳만을 응시하는 듯 했다. 어둠에 잠긴 그 어딘가를…….

 

공포에 질려 질려 잔뜩 움츠려든 콧날 사이로 느껴지는 공기가 어느새 바뀌었다.
쏴아아아아-.
검게 포효하는 바다가 바로 지척에서 느껴졌다. 거친 파도가 부서지며 내지르는 음산한 비명소리에 얼어붙은 몸뚱이가 경련을 일으켰다. 진후의 움직임이 멈춰버린 걸 깨달은 건, 한참 후였다. 신우는 갈고리 같은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짙게 깔린 어둠속에서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발씩 조심스레 내딛으며 달아날 곳을 가늠해보던 다리가 예고도 없이 어둠속으로 잠겼다. 발을 딛을 수 있는 바닥이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온 몸이 빨리듯 떨어지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차가운 피가 뜨럽게 역류하고 신우는 숨이 멎음란큼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허리춤을 잡아채며 끌어당기는 섬뜩한 손길에 목구멍이 얼어붙은 듯 그 흔한 비명조차 나오질 않았다. 검은 아귀처럼 벌어진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몸뚱이를 휘감아 힘껏 끌어당기는 강인한 손길이 없었더라면 날카로운 절벽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신우는 허리를 잡아채고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손길에 온몸을 던지며 힘껏 매달렸다. 뻣뻣한 나무토막 같은 두 다리가 지상에 닿을때까지 숨 한번 내쉬질 못했다. 그녀가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으로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자, 흔들림 없는 차가운 손길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끌어당겼다. 뜨거운 심장이 꿈틀거리는 넓은 가슴으로 안아주며 거친 호흡이 잦아들때까지 공포에 젖은 육체를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진후의 커다란 두 손이 코트를 열어젖혀 떨림가득한 여린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따뜻한 니트를 파고드는 손길이 전해주는 서늘한 한기에 신우는 서서히 현실속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신우……, 오늘이 마지막 기회야.  다시 한번 물을께.”

 

단단한 손길이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을 내리누르며 또박-또박- 내뱉듯 말했다. 신우는 또 다른 두려움에 흠칫 몸을 떨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냉기에 뼈속까지 시리다. 단호한 의지를 담은 진후의 손가락이 두개골 사이를 아프게 파고들었다.

 

“오늘 밤, 나와 함게 있어 줄거지? 지난 여름날, 이곳에서 했던 그 약속……잊은 거 아니잖아. 아직 늦지 않았어. 너만 좋다면 우리 둘이서 어디로든 떠나는 거야.  내곁에서 영원히 함께 할 거란 그 약속, 지켜줄 거지? 어서……, 어서 대답하란 말이야!”

 

안된다는 거……, 그럴 수 없다는 거…… 진후야, 네가 더 잘 알잖아.
신우는 안타까운 마음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지만 강철같은 손길을 그런 작은 몸짓마저 허락질 않았다. 목덜미에서 번지는 뻐근한 통증에 왠지 서글픈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신우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후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무작정 뱉어버리면 모든 걸 내던진 채 매달릴 것만 같았다. 신우는 흐트러진 마음을 되잡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텼다. 이 어둠때문에, 아니 하늘이 도와 칠흑같은 어둠 아래에 가려진 젖은 눈동자를 볼 수 없음에 감사할 정도다. 아직까지도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나약하기짝이 없는 못난 이 신우가 숨어 있었다. 신우는 작은 어깨를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그녀를 차갑게 외면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야. 지금 이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네가 날 붙잡는다해도 우리 인연 오늘 여기서 끊어내버릴거야. 이 신우, 신중하게 대답해. 나랑 함께 가. 많이 힘들테지만 함께라면 우린 이겨낼 수 있을거야. 신우야, 제발…….”
“우리 그냥 한때 즐거웠던 추억으로 간직하자. 이 바닷가는 그냥 잊어버려. 한 순간 꿈이었던 거야. 뜨거웠던 지난 여름 따윈 이제 그만 지워버리자. 진후……야, 이제 그만 날 놓아줘. 너와 난…….”

 

신우는 자꾸만 갈라지는 음성에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린 그냥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야. 강 진후, 제발 어린아이처럼 이러지좀 마!”
“큭큭큭큭. 어린아이라……. 나 어린거 이제 알았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설거면서 왜! 왜 날 받아 준건데! 너에게 난 단지, 불장난에 불과했던 거야? 몇번 가지고 놀다 버릴 장난감처럼, 그런거야? 하하하하하…….”

 

진후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어두운 밤 하늘을 울리며 차가운 공기사이로 흩어졌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서 있는 그녀의 몸을 잡아채듯 흔들며 울부짖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이럴 거면서…… 이렇게 잔인하게 버릴거면서,왜! 사랑에 굶주려 있던 남자에 대한 동정심이었던 거야? 날 비참하게 만들려고 이러는 거라면……. 좋아, 널 보낼바엔 차라리…….”

 

짝-.
세상이 떠나가라 웃다가 한 순간 돌변하여 상처입은 짐승처럼 울부짖는 진후를 향해 신우는 죽을 힘을 다해 손을 날렸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점점 짙어지는 달빛 아래, 확연히 드러난 눈동자 가득 충격의 빛이 흘렀다. 마치 영문을 몰라하는 순진한 아이처럼 놀란 그 얼굴에, 울컥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였다. 상처 입은 짐승같은 눈동자를 애써 외면하려 하는 신우의 가슴에도 어느새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짝-.
다시 한번 힘껏 손을 휘두르던 신우는 진후의 가슴을 헤집고 심장을 향해 비수를 내리꽂았다.

 

“정신 차려, 강 진후!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어. 사랑? 웃기지 말라고 그래! 네가 내게 해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강 진후란 남자가 뭘 해 줄 수 있냐고! 나도 이제 지쳤어. 능력 있고 나만 위해주는 남자 품에서, 이제라도 행복을 되찾고 싶다구! 이런 내 마음을, 니 까짓게 알기나 해? 네가 감히 내 마음을 알기나 하냐고!  바보처럼 매달리며 징징대지 말란 말이야. 난 널 버렸어! 버렸다고! 강 진후란 한 남자를, 무참히 짓밟았단 말이야! 그래, 나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에게 원없이 사랑받는거……, 이 세상 모든 여자가 한 번쯤은 꿈 꾸는 일이지. 하지만 영원히 함께할 꿈은 아니야. 넌 내게 스쳐지나간 과거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야!”

 

이제는 정말 어른이 되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리다 못해 어리석기까지 한 자신이었기에, 이 지경이 되도록 멈추지 못한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는 한 남자의 미래를 위해,  모두를 위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한다. 가여운 한 여자에게는 끝을 향해 달려갈 기력따윈,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제껏 날 이용한 거였어? 단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데, 바보 같은 난 그것도 몰랐네. 큭큭큭. 그래…… 그런 거 였군. 이 신우란 여자가 한낱 보잘 것 없는 남잘 택한 이유가. 킥킥킥킥.”
“이런 감정 소모 따위도 내겐 피곤할 뿐이야. 이제 그만 돌아가, 진후야. 네가 있어야 할, 네 자리로.”
“돌아가라……, 헌데 이걸 어쩌지? 똑똑한 이 신우가 모르는 사실도 있네. 난 더 이상 돌아갈 자리가 없는데. 너에겐 장난이었어도 난, 아니야.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이 모든 걸 되 돌리기엔 너무 늦었단 말이야! 여자 하나에 미친 강 진후란 새끼가 이 신우한테 모든 걸 걸어버렸거든. 하하하하. 그래, 너와 함께가 아니라면 이곳에 대한 미련 따위도 없어. 내가 아닌 다른 사내에게 보낼바엔 차라리 살인자가 되는 것도 좋을테지!”
“강 진후!”

 

마치 처음처럼……. 서로가 처음 만났던 지난 여름으로 되돌아 간 듯한 진후의 비명소리가, 그 메마른 웃음 소리가 지칠대로 지쳐버린 그녀를 또 다른 암흑속으로 내몰았다.

 

이 바보야, 왜 내 말을 안 든는 거니?
우리 인연은 여기가 끝인 걸, 왜…… 왜 믿지 못하는 거야?
끝이 보이는데, 우리에겐 이미 함께 할 미래 따위는 없는데…….
앞도 보이질 않으니,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거잖아!
진후야…… 돌아갈 곳이라도 남아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는 거니?
마지막 기회마저, 선택할 기회마저 놓쳐 버리고 만다면.
우리에게 남은 건 지옥 뿐이란 거, 빛도 없는 암흑 뿐 이란 걸……, 너 역시 잘 알고 있잖아. 

 

“널…… 용서하지 않을거니까, 너도 날 절대 용서하지마.”

 

앙 다문 잇새로 다짐처럼 내뱉던 진후가 가녀린 손목위로 붉은 낙인이 찍힐만큼 거칠게 끌어당겼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그녀를 이끌며 가파른 벼랑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꽉 잡힌 팔목이 끊어질 듯 아파왔다. 메마른 가지에 스친 종아리가 쓰라리고 거친 돌부리에 걸린 구두의 굽이 나가는 순간, 신우는 그만 삐끗 주저앉고 말았다. 볼썽사납게 널브러진 그녀를 사정없이 끌어당기던 진후는 자꾸만 비틀거리는 신우가 무척이나 성가신 듯 바둥거리는 육체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단단한 덩쿨처럼 파고드는 팔뚝이 허리와 가슴을 압박해오자, 짐짝처럼 매달려 있던 신우는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안돼…… 진후야!
아니, 처음부터 그를 따라오는게 아니었다. 진후의 심장이 무서우리만치 폭주하고 있었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해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거란 확신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코 죽음 따위가 두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남겨질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죽음이 더 큰 불행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신우는 그것이 두려웠다.

 

쏴아아아아 -.
비탈진 벼랑을 타고 내려간 진후는 차갑게 젖은 모래사장을 헤치며 거친 파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사시나무처럼 쉴새없이 떨리는 몸뚱이로 인해 코트가 벗겨진지 이미 오래전이란 걸 깨달았다. 추위와 공포로 인해 새파랗게 질린 신우는 온몸을 비틀며 진후의 어깨를 주먹으로 내려쳤지만 전의를 상실한 주먹은 힘없이 튕겨졌다.

 

쏴아아아 -.
귀청을 때리는 성난 파도소리에 빙글거리며 돌아가던 세상이 멈추었다. 거친 파도가 쉴새없이 몰아쳤다. 부서지는 파도의 잔해가 폭우처럼 쏟아져내린다.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엄청난 굉음에 귓속까지 먹먹해진 신우는 검은 아귀처럼 떠억 벌어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빠르게 휘몰아치는 물살에 시야가 어지러웠다. 세상과 단절된 그곳에서, 음산한 춤사위를 시작하는 검푸른 물결이 진후와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이 에워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앞만 향하는 진후의 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힘없이 추욱 늘어진 다리에서부터 차고 올라오는 바다의 냉기는 실로 엄청나, 무섭게 요동치던 심장마저도 서서히 전력을 잃어갔다. 파도에 몸을 맡긴 진후가 한 발 더 나아가자 바다는 그녀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자포자기하듯 몸을 내맡긴 신우는 심장이 마치 돌덩이처럼 굳어져가는 걸 느꼈다. 진후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언듯 뇌리를 스쳤지만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는 이미 그녀의 손길에서 멀리 벗어나 저 먼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칼날 같은 바람에 쓸려 뜨겁게 달아오른 뺨 위로 차가운 뭔가가 스치듯 내려앉았다. 신우는 자신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깨끗하고 서늘한 결정체가 나풀나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차가운 눈발이 그녀의 얼굴을 적시고 어두운 바다를 순식간에 뒤덮기 시작했다. 바다에 몸을 맡긴 채, 회색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올려다 보는 기분이 실로 묘했다. 이상하게도 추위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끝도 없는 바다 깊숙히 밀어넣는 진후의 손길조차 따스하기만 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녀의 몸을 인도하는 바다조차 온기로 가득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도가 전신을 감싸고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정히 위로했다.

 

그동안 너무 달려왔던 걸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늦은 밤에서야 찾아오는 노곤함이 지친 그녀를 반긴다. 신우는 달콤한 수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더 없이 따스한 손길이 지친 몸을 어루만졌다. 마치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엄마의 뱃속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토록 따스하니 기억에도 없는 엄마의 뱃속에서도 이렇게 행복했으리라.

 

진후……야!
문득……섬광처럼 번쩍이는 영상에 신우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검은 장막 저 너머, 잔뜩 일그러진 형상 하나. 힘없이 그를 불렀지만 소리 없는 메아리만 터져나왔다.

 

행복했다.
절망이란 이름의 끝에서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모든 것이 생생했다.
언젠가, 지난 여름 이 바닷가였을 것이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 처음으로 서로를 가졌다. 곤히 잠든 진후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먼 훗날 마지막을 꿈꿀 때 그의 품안에서 눈 감을 수 있게 기도드렸다. 그런데 그 소원이 정말 이뤄진 것이다. 비록 이토록 가까운 미래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입안 가득 차가운 파도가 떠밀려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진후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던 신우는 감각없는 팔을 힘껏 뻗었다. 하지만 힘없이 늘어지는 두 팔은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바다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끌어당기는 듯 오히려 진후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제 등에 날개라도 달린 듯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몸이 부웅 떠올랐다. 보잘 것 없이 하찮은 그녀의 몸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을 시작했다.

 

이승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줄기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슬퍼보이는 눈동자가 못내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 동안 왜 그토록 악착같이 버텨왔는지…….
신우는 이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랑이 무엇인지, 집착이 무엇인지…….

 

진후야, 날 용서하지마.
눈부신 네 미소, 끝까지 지켜 줄 수 있을거라 믿었는데…….
허나, 모든 건 한 순간의 꿈에 불과할 뿐. 

 

어지러이 돌아가던 세상이 어둠 저너머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댓글 '1'

Junk

2011.07.30 11:08:22

두 사람의 과거가 궁금하네요... 어땠기에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지...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85 불꽃처럼 -3- secret [1] 몽상가 2011-08-09
284 맛있는 계승 <11> [4] Lian 2011-08-08
283 맛있는 계승 <10> [4] Lian 2011-08-01
282 불꽃처럼 -2- secret [1] 몽상가 2011-07-31
281 불꽃처럼 -1- secret [1] 몽상가 2011-07-28
280 맛있는 계승 <9> [6] Lian 2011-07-25
279 불꽃처럼 -프롤로그2- [1] 몽상가 2011-07-25
» 불꽃처럼 -프롤로그1- [1] 몽상가 2011-07-25
277 맛있는 계승 <8> [4] Lian 2011-07-18
276 맛있는 계승 <7> [4] Lian 2011-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