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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하가 오븐에서 빵을 꺼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 시간이 벌써 손님이?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드는 순간 진하의 시야에 놀이터 강동원이 떡하니 들어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생각지도 못 한 방문에 진하는 순간 얼떨떨해졌다. 관심, 접근. 어제 브라운슈가 유선에게서 들은 단어 두 개가 남긴 후폭풍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강동원 앞에서 뭔가 행동을 하기가 영 거북스러웠다.
“왜 그렇게 놀라요? 음식 모니터 해달라고 하더니 빈말이었나 보네.”
강동원의 말이 갈팡질팡하던 진하의 마음을 한 방에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음식 모니터를 해주겠다는 이유로 출근 시간까지 앞당겨가며 찾아와준 고마운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인가 말이다. 진하는 서둘러 메뉴판을 건네고, 요리사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잡았다. 주문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내자. 그게 지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일이다.
강동원은 주방에서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묵묵히 진하가 내준 요리를 먹었다. 맛있다는 빈말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음식을 씹는 남자의 표정에서 평가를 하는 사람 특유의 진지한 기운이 느껴져 진하는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스파게티 괜찮으셨어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진하였다.
“글쎄요.”
강동원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궁금해 하는 진하의 시선을 여유롭게 받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툭툭 농담을 던지는데, 도통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는 묘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런 점이 이 잘 생긴 남자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 일조를 하는 것일 테고.
가벼운 줄다리기 끝에 남자가 내놓은 한 마디는 진하를 붕 뜨게 만들었다.
“근래에 먹어본 파스타 중 최고예요.”
해냈다는 뿌듯한 성취감에 젖은 것도 잠시 잘 나가던 분위기가 마르게리따 피자에서 삐걱거렸다. 겨우 한 조각, 그것도 딱 두 번 베어 먹더니 그대로 접시에 내려놓은 채 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남자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진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뭐가 문제지? 토마토소스? 모짜렐라 치즈? 지나치게 많이 구웠나? 그게 아니라 덜 구워진 걸까?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 본인이 만든 요리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불 꺼진 방에서 모기를 잡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일이었다. 문제점을 알고 있다면 미리 고쳤을 것이다.
“피자는 입맛에 안 맞으세요?”
진하는 아직 절반 이상 남아 있는 물 잔을 채워준다는 핑계로 현우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네?”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강동원이 미처 잊고 있었다는 듯 진하와 피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피자가 입맛에 안 맞으시냐고 물었어요.”
“아니요. 맛있네요.”
진심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형식적인 답변. 그 속에 숨겨 있는 진실을 알고 싶어, 진하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렇데 왜 한 조각도 제대로 안 드세요?”
“아침 식사로는 양이 너무 많기는 했죠.”
강동원이 이제 식사는 끝이라는 뜻을 명확하게 밝히며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더 이상 묻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피자를 왜 한 조각도 채 먹지 못 했는지, 피자를 앞에 두고 생각을 그렇게 깊이 했으면서 왜 한 마디 언급도 해주지 않는 것인지, 묻고 싶은 질문들을 모조리 마음속에 담아둔 채 진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요. 저도 출근 해야죠.”
무뚝뚝하게 자르는 말이 어쩐지 그녀를 밀어내는 것처럼 들려, 진하는 내심 당황했다. 후식으로 커피를 권하는 것도 관심 어린 접근처럼 느껴지는 걸까.
“일부러 이렇게 들러서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식 오픈을 앞두고 힘이 많이 됐어요.”
아무 사심 없었음을 어필하기 위해 진하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저야말로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강동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가정집을 개조한 탓에 레스토랑 치고는 높이가 낮은 천장이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와, 키가 정말 크시네요. 좀만 더 크셨으면 천장에 닿겠어요.”
진하가 고개를 위로 꺾어 천장과 강동원의 머리 사이의 공간을 가늠하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제가 큰 게 아니라 천장이 좀 낮은 것 같은데요.”
날카로운 지적에 진하가 박장대소하였다.
“저희 집이 원래 천장이 좀 낮아요. 사장님은 부모님 두 분 다 키가 크세요?”
강동원의 얼굴 표정이 확 굳는 바람에 진하는 순간 당황했다. 부모님의 키가 크냐고 물은 게 그렇게 불쾌감을 주는 질문이 아닌 건 확실하고, 혹시 질문을 잘못 이해한 건 아닐까 물으려는데 강동원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뭐. 나이 감안하면 두 분 다 장신인 편이에요.”
“우리 집에선 엄마가 최장신이에요. 아버지가 남자치고는 좀 작은 편이셨거든요. 아무래도 우리 집 천장이 이렇게 낮게 지어진 데는 그 영향이 크지 싶어요. 개조하면서, 천장을 높을 수 있나 알아봤는데 그렇게 되면 공사가 많이 커지더라고요. 비용도 그렇고 기간도 그렇고.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포기했어요. 에이, 가정집 콘셉트로 소박하고 아늑하게 가자, 핑계거리 만들어서요.”
그러자 강동원이 유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중요한 말을 나오려나 보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계산서는 없나요?”
출근해야 하는 사람 붙잡고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길었나 싶어서,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뇨, 아뇨. 계산은 괜찮아요. 모니터 요원한테 돈을 받을 순 없죠.”
“첫 개시부터 공짜 손님 받는 건 아니죠. 이건 모니터 요원으로써 진심으로 하는 충고예요.”
“그 충고는 내일부터 유념할게요. 대신 오늘 제 요리 중에 뭐가 제일 맛없었는지 한 가지만 얘기해주세요.”
진하는 내심 그의 입에서 피자에 대해 얘기가 나오길 기대하였다.
“다 맛있었어요.”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것 같은 대답에 피시시, 김새는 소리가 들렸다.
“피자도요?”
“아까 이미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맛은 있지만, 배가 불러서 못 먹었다고.”
그렇지만 그는 분명히 피자를 먹고 뭔가에 놀란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피자를 먹다 말고 굉장히 깊은 생각을 했다. 한 조각도 채 안 먹은 것으로 미루어 판단컨대 그의 생각이 좋은 쪽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좀 집요하게 굴었죠. 실은 아까 피자 드실 때 좀 놀란 표정으로 피자를 내려놓으시는 것 같아서 뭣 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 해서요.”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강동원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얘기를 꺼내었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히 다른 생각 중이었을 거예요. 피자를 먹었을 때는 이미 배가 불렀고, 그래서 음식에 집중할 수가 없었거든요. 모니터 요원으로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어머, 제가 오버했나 봐요. 당연히 음식 드시면서 다른 생각하실 수 있죠. 저 혼자 괜히 피자에 집착해서. 아, 무안해라.”
진하가 양손으로 화끈 달아오른 다 뺨을 감싸 쥐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다. 가만히 진하를 쳐다보고 있던 강동원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애초에 저 같은 문외한이 요리 모니터를 한다는 게 주제 넘는 일이었어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전 음식을 평가할 정도의 미식가가 전혀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죠. 요리를 예술로 비유하는 요즘 추세가 굉장히 유난스러운 숭배처럼 느껴지거든요. 음식은 음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고는 있지만 전 요리사가 아니라 사업가예요. 요리에 대해선 오히려 제 쪽에서 오히려 사장님께 모니터를 구해야 할 입장인 것 같네요. 다만 요리 외적인 부분에서 조언을 드리자면 음식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요.”
생각지도 못 한 지적에 진하는 머리가 띵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격이 높다는 평가는 정말이지 억울했다.
“제 음식이 비싼가요? 그렇지만 원가 대비 절대 높은 가격이 아니에요.”
“치즈와 오일, 모두 최상급 재료를 쓴다는 것은 음식 맛을 보면 알겠더군요. 그렇지만 삐꼴로 자르디노는 일자르디노가 아니에요. 아까 직접 말씀하셨죠. 소박하고 아늑한 가정집 같은 분위기라고요. 그렇다면 음식 가격도 레스토랑 분위기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손님 입장에서는 소박한 가정집을 기대했다가 메뉴판의 가격을 보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그렇지만 음식을 드셔보면 납득하지 않을까요? 방금 사장님도 음식을 먹어보니 재료가 좋다는 걸 알겠다고 하셨잖아요.”
“요는 선입견의 문제인데요. 일단 메뉴판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 손님은 열린 마음으로 음식을 즐기기 힘들죠.”
“그렇지만 재료를 바꾸게 되면 음식 맛이 전혀 달라져요.”
“제 말이 백 퍼센트 확실한 진리인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의견일 뿐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이제 정말 출근을 해야겠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죠. 오늘 감사했어요. 다음에라도 시간 나시면 종종 들러서 도움 말씀 주세요.”
강동원을 배웅하고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출입문이 쌩하니 열렸다.
“지금 여기서 나간 사람 놀이터 강동원이지?”
가게 앞에서 귀신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유선이 흥분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네, 맞아요.”
가격 생각 때문에 진하는 지금 유선의 흥분에 동참할 여유가 없었다.
“그 사람이 여길 왜 왔대?”
“그냥 요리 모니터 해주러 온 거예요. 좌우지간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뜻은 전혀 없으니까 흥분 가라앉히고 여기 잠깐 앉아 봐요.”
진하는 잔뜩 흥분해 있는 유선을 테이블에 앉히고 메뉴판을 펼쳐 보여주었다.
“나 아침 먹고 왔는데.”
진하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선을 붙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요, 언니, 우리 집 음식 가격이 비싸요?”
“왜. 강동원이 비싸대?”
진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유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진짜? 강동원이 의외로 좀 조잔한 면이 있었네. 그러니 돈을 벌었지.”
유선이 엉뚱한 데로 화살을 돌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언니, 그게 아니라 사장님이 모니터해주신 거예요. 우리 집이 소박한 가정집 분위기인데 가격은 소박하지가 않다고.”
그러자 유선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야, 모니터? 일부러 아침 일찍 여기 들러서 네가 해준 음식 먹고 음식이 비싸다 뭐다 얘기까지 해줬단 말이야? 자기야, 아무래도 강동원이 자기한테 마음이 있나 보다.”
진하가 무슨 얘기를 하든지 결국은 멜로로 빠지는 유선을 정색하며 바라보았다.
“언니! 나 진짜 심각해요. 우리 집 음식이 비싸요, 안 비싸요.”
그러자 유선이 뜨끔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면 비싼 것도 아니지. 이게 뭐 그렇게 비싸다고. 청담동 쪽에 가보라 그래. 여기 보다 싼 데가 있는가.
“그렇지만 청담동에 있는 레스토랑은 우리처럼 소박하고 아늑한 가정집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거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데.”
“여기가 청담동보다 재료를 후지게 쓰는 것도 아닌데 미리 주눅 들 거 있나.”
“그 문제가 아니라요, 사장님 얘기는 손님들 입장에선 소박한 분위기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메뉴판 보고 가격이 비싸면 배신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이 정도 가격일 거야, 하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비싸면 안 좋은 선입견을 갖게 된단 거죠.”
그러자 유선이 비밀스러운 정보라도 전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자기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놀이터로 찾아가서 강동원한테 직접 물어봐. 상담을 하면서 싹트는 사랑의 씨앗. 캬, 죽이네.”
진지한 표정으로 유선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진하가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소리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언니! 계속 이러기에요! 난 삐꼴로 자르디노에 사활을 걸었어요. 이거 성공하기 전까진 사랑 같은 거 없다고요.”
아무 의도는 없고, 참 밝은 유선 이지만...지금 진하에게 유선은 만냥 귀찮은 존재 같아요..
사람이 속의 말을 다 하고 살지는 않지만...왠지...자꾸 숨기려고만하는게 안타깝고..
그럴수록...본인만 더 마음의 짐이 무거워 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