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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스레인지에서는 된장찌개가 바글바글 끓고 있고, 보리밥을 앉혀둔 압력밥솥에서는 삐, 하는 경적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을 토해냈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무채를 써는 진하의 손놀림의 맞춰서 탁탁탁 칼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식탁 위 양푼에는 한 입 크기로 썰어놓은 야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무생채를 맨손으로 쓱쓱 버무리고 있는 진하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어 놓았다. 이렇게 주방에 서서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을 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충만한 기운을 진하는 감히 행복이라 정의 내린다.
오늘 아침 메뉴는 어머니랑 이모가 가장 좋아하시는, 갓 지은 보리밥에 무생채 나물과 상추를 넣은 다음 팔팔 끓은 된장찌개를 대충 떠서 비벼 먹는 비빔밥이다. 여기에다 시원한 오이냉국을 곁들이기만 하면 먹는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아침부터 무슨 냄새가 이렇게 좋아?”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주방으로 들어온 이모가 크리스마스 날 머리맡에 놓여 있는 선물 상자를 뜯어보는 꼬마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된장찌개예요. 무생채에 비벼 먹으려고요.”
이모를 바라보는 진하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아우, 너무 맛있겠다.”
이모가 바글바글 끓고 있는 강된장 뚝배기를 들여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엄마는요? 아직 주무세요?”
“엄마? 깨워야겠다. 얼른 밥 먹어야지!”
서둘러 부엌을 나서는 이모의 급해 보이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진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에서 깨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콧속에 스미는 날은 이불 속에서 미적거릴 새도 없이 총알처럼 박차고 나와 부엌으로 다다다 달려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콤한 잠의 유혹을 단박에 뿌리치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음식의 힘인가.
“아우, 맛있어. 강된장에 오징어를 썰어 넣으니까 씹는 맛도 있고 좋다.”
“요즘엔 마트에서 파는 강된장이 맛있게 나와서 거기에다 양념만 더 넣고 끓이면 돼요.”
“아무나 끓인다고 이 맛이 나니. 이것도 다 손맛이 좋아야 돼.”
“하기야 언니는 라면 맛도 못 내는 사람이니.”
어머니의 뼈아픈 지적에 이모가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반박하였다.
“어머, 얘! 내가 끓인 라면이 어때서? 잘 퍼져서 씹는 맛이 얼마나 부드럽다고.”
단점을 장점으로 둔갑시키는 궤변에 모두들 박장대소하였다.
“나 정말 이모가 끓인 라면 처음 먹어보고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라면에다가 깨소금에 참기름까지 그렇게 아낌없이 뿌리시는지. 게다가 어찌나 뭉근하게 끓이셨는지, 무슨 라면 국물이 풀 국처럼 걸쭉해.”
진하가 이모네 집에서 얻어먹은 라면의 기괴한 점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요리솜씨 출중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 요리를 업으로 삼으려고 하는 진하인지라, 이모의 백전백패 요리 솜씨가 개그 쇼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얘, 그래도 너희 이모부는 그 라면 국물을 얼마나 좋아했다고.”
새침한 표정으로 밉지 않게 투덜거리는 이모의 말에 진하는 어쩐지 가슴이 뜨끈해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난 아직도 신기해. 어떻게 언니가 해준 음식을 불평 없이 먹을 수가 있는지. 참 여러모로 천생연분이었다, 두 사람.”
“그래서 내가 요즘엔 요리를 안 하잖니.”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 없어서? 하시기만 해 봐. 억지로라도 먹어 줄 테니까. 게으름 피우고는 괜한 핑계야.”
“어머머. 자기야말로 지 서방한테는 매일 아침마다 김밥 싸다가 바치면서도 힘들다 소리 한 마디 안 하더니, 이 언니한테는 별로 해주는 것도 없이 유세를 엄청 떨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자매의 모습에 진하는 코끝이 찡했다. 가슴 찢어지는 상처를 추억으로 되새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눈물로 보내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다.
“진짜 그때는 어떻게 그랬는지 몰라. 내 신랑 아침 굶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몰랐어.”
어머니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행복 충만하던 주방을 별안간 쓸쓸한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아침 식사를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출근을 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김밥을 쌌다. 매일 똑같은 김밥을 먹일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어머니는 틈만 나면 김밥 속 재료를 고민하고 연구하였고, 봄나물부터 겨울 동치미 무까지 어머니의 손맛만 들어가면 사철 재료가 김밥 속 재료로 변신하였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비로소 요리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빠진 요리는 반복적이고 기능적인 작업에 불과할 뿐이다.
“그때가 좋았지! 아침에 눈만 뜨면 참기름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는데, 와, 오늘은 또 무슨 김밥을 쌌을까, 두근두근 거리는 거야. 발딱 일어나서 주방으로 막 뛰어가면 식탁 위에 김밥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진짜 천국이 따로 없더라니까.”
진하가 넉살스럽게 웃으며 쾌활함을 가장하였다.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부엌으로 뛰어 들어와 김밥을 향해 탄성을 지르던 진하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엄마가 박장대소하였다.
“맞아, 맞아. 눈 비비면서 주방으로 들어오는 네 얼굴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런데 오늘 아침 이모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얼른 아침 먹어야 된다고 엄마 깨운다고 나가시는데, 내가 김밥 냄새 맡고 뛰어오던 속도랑 완전 비슷했어요.”
“엄마야, 내가 진하랑 똑같은 속도로 뛰었으면 엄청 선전한 거네.”
“나이 들어도 식탐은 안 줄어드나 봐.”
“줄다니, 더 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모가 당치않다는 표정으로 버럭 언성을 높였다.
“나는 진하 오고 몸무게가 2킬로나 늘었어.”
“그러게 너도 운동을 좀 해야 된다니까. 젊어서 몸매가 계속 갈 줄 알아, 얘가.”
이모의 잔소리에 어머니가 대놓고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운동 따로 할 게 뭐 있나? 밭일 좀 하면 얼마나 땀이 나는데.”
“일하고 운동하고는 다르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어머니와 이모의 입가와 눈가에 깊게 자리 잡힌 주름이 새삼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부디 오래 사시기를.
어릴 때는 나이를 먹는다는 게 혼자 늙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줄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아버지, 이모부, 그리고 아저씨. 이렇게 건강하게 웃고는 있지만 어머니와 이모도 언젠가는 저 세상으로 떠날 날이 오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자, 그럼 후식으로 달달한 거 한잔씩 드실래요?”
진하가 식탁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오, 달달이 좋지!”
달달이는 다방 커피를 가리키는 진하네 나름의 애칭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다음의 코스는 으레 설탕을 듬뿍 넣은 다방 커피인데 찬 걸 싫어하는 어머니는 푹푹 찌는 여름에도 항상 뜨거운 커피고, 이모는 우유와 얼음을 듬뿍 넣은 아이스커피이다.
“달이달이달달이~”
이모가 어깨춤을 추며 구성진 목소리로 즉석에서 트로트를 개사해 부르자 어머니가 얼굴을 뒤로 젖히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어머니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진하의 가슴 속으로 벅차게 내려앉았다. 다시는 이 웃음소리를 듣지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모처럼 쉰다고 내려온 애를 식당 당번이나 하게 만들고, 미안해 죽겠네.”
이모가 냉커피가 가득 담긴 유리컵을 식탁 위로 내려놓는 진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에이, 전혀요. 솔직히 저야말로 이모랑 엄마가 아무것도 아닌 음식을 맛있게 드시니까, 진짜 신난다니까요.”
고소한 커피 향이 식탁 주변을 활기차게 뛰어다닌다. 커피는 맛보다 냄새가 더 좋다는 아저씨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그래서 책상 앞에 앉을 때면 무조건 커피를 한 잔 놓아두셨다. 앞으로도 책상 위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보면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언니, 진하는 요리가 천직이야.”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진하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진하야, 다른 취직자리 알아 봐야 되지 않아? 어디 따로 생각해 둔 데는 있니?”
이모의 갑작스러운 질문과 맞닥뜨린 순간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네, 당연히 그래야 되는데 아직은 마음이 내키질 않아요.”
이모가 풀이 죽어 있는 진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돌아가신 사장님 때문에 그렇지. 그래, 왜 마음이 안 쓰이겠어. 그렇지만 진하야, 식구도 안 챙기는 의리 혼자 챙길 필요 없다. 결국에는 각자 다 제 갈 길 가는 거야.”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전부인과 살고 있는 외아들한테 일자르디노의 소유권이 넘어갔는데, 장례식 치르고 보름도 안 돼서 건물을 완전히 부수고 새 주인한테 소유권을 넘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일자르디노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가족조차 미련을 두지 않은 일자르디노를 그녀마저도 미련 없이 돌아선다면 일자르디노에 평생을 바친 아저씨가 너무 가여웠다. 이미 사라져버린 일자르디노를 어찌해볼 도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한 달도 채 안 돼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다른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전심전력으로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의리일지라도 은혜를 베풀어준 아저씨에게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싶었다.
“차차 생각해 볼게요.”
그렇지만 요리사를 업으로 삼겠다고 2년 동안 이탈리아로 유학까지 갔다 왔는데 아저씨께 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년 째 버는 사람 하나 없이 쓰기만 하고 있는 형편에 고집 부려 간 유학이었다. 어머니가 앞으로의 여생을 불편하지 않게 보내려면 그녀가 제 밥벌이를 확실하게 해결해야 한다.
“그래,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당장 밥 굶는 것도 아니고, 서두를 거 하나 없지, 뭐.”
이모가 다독거리듯 말을 하자 어머니가 짐짓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니, 혹시 진하 취직해서 서울 가면 내가 해준 밥 먹어야 되니까, 그거 싫어서 물은 건 아니지?”
농담 섞인 질문에 이모가 뜨끔한 표정을 연출하였다.
“어머, 그게 티가 났니?”
“뭣이라! 그럼 언니가 직접 해 잡숴.”
진하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해주기 위한 만담 쇼에 억지로 웃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취직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어째야 좋을지.
“근데 서울 집말이야. 그거 계속 그렇게 놔둘 거니? 어차피 진하 혼자 지낼 건데, 그냥 팔아버리고 조그만 아파트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아?”
갑작스러운 이모의 제안에 어머니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이론적으로는 이모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는 그 집은 어머니에게 필요에 의해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은 그대로 놔두고 싶어.”
어머니가 꾸지람을 피하려는 어린 아이처럼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외로 꼬았다. 이모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어머니를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진하는 괜스레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그래, 그렇게 뒀다가 진하가 결혼해 들어가 살면 되겠다.”
이모의 한 마디에 팽팽하던 긴장감이 툭 끊어졌다. 언니로서 입바른 소리를 하기 보다는 동생의 여린 속내를 이해해주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가족이기 이전에 같은 상처를 가진 동료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앗. 전 그럼 시집도 가기 전에 내 집 마련 된 거예요?”
진하가 짐짓 들뜬 표정을 지으며 쾌재를 부르자 어머니가 냉큼 반격을 했다.
“내 집이지! 다달이 월세 받을 거야.”
“월세 밀리면 쫓겨나는 거네?”
“당연하지!”
“그런데 그 동네에 카페나 레스토랑이 엄청 많이 생겼더라. 나중에 진하 이름 내걸고 레스토랑으로 개조하는 것도 괜찮겠어.”
툭 내뱉듯이 던진 이모의 말이 신의 계시처럼 진하의 머리를 쾅하고 두드렸다.
내 스스로 레스토랑을 연다!
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규모로 보나 비용으로 보나 일자르디노와 똑같은 레스토랑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가능하다. 2층은 살림집으로 놓아두고 1층만 개조하면 진하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아담한 규모의 레스토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일자르디노, 그러니까 이탈리어어로 정원이라는 뜻의 상호에 걸맞도록 마당을 꾸미자. 머릿속으로 이미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담을 허물어 야트막한 울타리를 만들고, 마당에는 널찍한 나무 테이블을 하나 놔두면 근사할 것이다. 봄, 가을에 불어오는 산바람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출입문 쪽 벽을 허물어 자바라 창으로 바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기꺼이 구원의 손을 내밀어준 아저씨와 일자르디노를 위하여 원통해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산길에서 환하게 불이 켜진 인가를 발견한 것처럼 진하의 가슴이 희망으로 가득 찼다.
대입 합격 발표 소식을 듣고 진하가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일자르디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1년 만의 첫 방문이었다. 진하의 얼굴을 발견하고 주방 앞에 서 있던 아저씨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전화로 해도 될 것을 굳이 방문까지 한 이유는 따로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평생을 통틀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손꼽는 일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아저씨가 무언가 묻는 것 같은 표정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거의 15년간을 한 달에 두어 번은 꼭 들르던 가족이 1년이 넘게 발걸음을 뚝 끊었으니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저 혹시 여기 요리를 포장해갈 수도 있나요?”
아저씨가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진하를 쳐다보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맛이 많이 떨어질 텐데요.”
맛이 똑같지 않을 거란 생각은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건 괜찮아요.”
뭔가 살피는 것 같은 눈빛으로 진하를 쳐다보고 있던 아저씨가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실례지만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아저씨는 아마도 진하의 축 처진 어깨에서 뭔가, 수상한 조짐을 느끼셨던 모양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한 달에도 몇 번 씩 들리던 단골 가족이 벌써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들르지 않았으니 무슨 사정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특별히 가깝게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5년 가까이 꾸준히 얼굴을 본 레스토랑 사장님께 그녀는 마음의 문을 열어 보이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순간 아저씨의 차분한 눈빛이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이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엄마는 외식은커녕 외출도 변변히 안 하고 집에만 계세요. 아빠는 돌아가셨는데 우리끼리 즐겁게 다닌다는 게 괴로우신가 봐요. 제가 올해 수능을 봤는데, 어제 합격 통보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합격 축하 기념으로 일자르디노에 가자고 엄마한테 말씀을 드렸는데 엄마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그냥 집에서 먹자고 하세요. 그런데 전 엄마한테 꼭 여기 요리를 맛보게 해드리고 싶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꼭 좀 부탁드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어머니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일자르디노의 음식을 먹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 없는 세상도 여전히 근사하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저씨는 진심을 다 해 부탁하는 여고생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었다.
“포장을 해 가면 요리 맛이 제대로 살지를 않을 텐데 걱정이군요. 코스 요리라 앞에부터 먹기 시작하면 정작 본 요리는 다 식어버릴 테고.”
일자르디노는 점심부터 저녁까지 빈 테이블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는 인기 레스토랑이었다. 더군다나 15년 가까이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하면서 단골손님이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여고생 손님의 부탁을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깜짝 놀랄만한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하죠. 지금 미리 메뉴를 정해주시면, 내일 저녁에 시간 맞춰서 출장 서비스를 해드릴게요.”
출장 서비스! 정말이지 황홀한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만만치 않게 들 비용이었다.
“근데, 그럼 비용은 얼마나 들까요?”
“가격은 메뉴판에 적인 그대로예요.”
아저씨가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하를 향해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답하였다. 혹여나 괜한 온정으로 비춰져 받는 쪽에서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아저씨 나름의 배려였다.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 없어요. 그냥 포장만 해주시면 제가 알아서 데워드릴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서 있는 진하를 바라보며 아저씨가 했던 말의 울림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명헌님은 일자르디노 개업 이후 첫 번째 단골손님이에요. 제게는 특별한 손님이죠. 특별 손님께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 날 저녁 5시, 적막하던 진하네 집에 조그만 기적이 일어났다. 아저씨가 일 자르디노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테이블보와 식기들을 직접 들고 일 자르디노의 주방장과 함께 진하네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어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사이 진하네 6인용 식탁에 식탁보가 휙 깔리고, 일자르디노에서 사용하는 식기들이 정갈하게 세팅 되었다. 주방에서는 지글지글 올리브유 냄새가 물씬 풍기고, 30분도 안 되어 일 자르디노에서 먹었던 것과 똑같은 정찬이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원래는 코스대로 서빙 하는 게 맞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을 불편해 할 어머니를 위한 배려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임무를 모두 마친 두 사람이 집에서 나가고, 집에는 오로지 진하와 어머니 둘만 남았다. 식탁에 앉은 어머니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진하를 쳐다보며 가까스로 한 마디를 하였다.
“먹자.”
다소 거친 질감의 식전 빵과 올리브 소스, 호박 향이 물씬 풍기면서 달지는 않은 호박 수프, 모시조개가 듬뿍 들어간 봉골레 스파게티, 꿀에 찍어 먹는 고소한 고르곤졸라 피자, 연한 식감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준비한 안심 스테이크. 아버지의 얼굴, 아버지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도록 놓아두면서,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세 식구가 함께 일자르디노에서 공유하였던 행복한 기운과 충족감이 조그마한 주방을 꽉 채웠던 순간 어머니가 했던 말은 굉장히 단순한 것이었다.
“여전히 맛있구나.”
어머니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에 새로운 의욕이 배어났다. 스스로 가둬놓은 절망에서 빠져나와 아버지 없는 세상과 맞서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눈앞에서 목도한 음식의 거대한 힘에 진하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을 느꼈다. 뭐랄까, 눈앞이 환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부여 받은 기분이었다. 다음 날 진하는 무작정 일 자르디노를, 아저씨를 찾아갔다.
“저 요리를 배우고 싶어요! 요리사가 되고 싶어요.”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절실하게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하는 여학생을 아저씨는 냉정한 말로 내치는 대신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적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믿는다. 지금 진하가 꿈꾸는 기적은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만들어 아저씨의 일자르디노를 계승하는 것이다.
저런 계기로 아저씨와 진하의 인연이 새롭게 시작되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