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20>

 

 

“두 시진 후쯤이면 묘산에 도착합니다. 곧 무호사의 군사가 나와 맞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마차로 굵은 목소리가 퍼져왔다. 황주성부터 함께한 호위 무사 몇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사사롭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피해야 까닭에 길을 멈추고 쉬어가는 순간에 그들은 없는 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서대비전의 노상궁을 비롯한 궁인만이 연과 서대비를 받들고 있었다. 곤히 잠든 서대비와 달리 연은 꽤 오랜 여정에도 홀로 잠들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들로 침묵의 시간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쳐 잠든 서대비의 머리가 연, 자신의 어깨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무사의 음성에 깊어진 생각에서 뼈져 나온 후에 안 것이었다. 연은 서대비가 더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어깨를 부드럽게 젖히며 조심스럽게 작은 창을 밀어보았다. 오래 머물러 뒤틀린 나무문은 먼지를 흩날리며 갈라져 터지는 낮은 소리를 만들었다. 아침까지 희미하게 보이던 묘산은 저물어가는 햇살 뒤로 붉게 타는 듯 또렷하게 다가와 있었다. 깊어지는 산길에 마차의 흔들림은 조금씩 세기를 더해갔다.

 

“아직 멀었다 합니까.”

 

잠에서 막 깬 듯, 서대비의 잠긴 목소리는 자갈소리처럼 버석거렸다.

 

“이제 곧 도착할 듯 합니다. 곧 무호사의 군사가 나와 맞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서대비는 희미한 웃음을 연에게 보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워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졌다. 깊게 주름이 잡힌 손이라고는 하나, 세월을 비껴간 듯, 모양새는 곱고 날렵하기만 했다. 한올 한올 부드럽게 자리를 찾아가는 머리채 위로 화려하게 빛나는 장신구가 은은하게 흔들렸다.

 

“많이 보고 싶겠지요?”

 

연을 가만히 쳐다보며 꺼낸 말에 연은 몰래 감춰둔 마음이라도 들킨 냥 양 볼이 수줍게 붉어졌다. 그러하다는 짧은 대답과 깊어진 눈은 흡사 봄바람을 닮은 듯 환히 빛이 났다,

 

“하지만, 이리 가는 것이 괜한 짐이 될까 하여 마음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덧붙여진 연의 말에 서대비는 조용히 연을 응시했다.

 

“어미로 한마디 해도 자리를 넘는 것이 아니라면 단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주상은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입니다. 백성에겐 칭송받는 성군이자, 서국의 역사 이래 가장 태평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지만, 마음이 아팠던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 친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해 내게 의지하였고, 깊게 준 첫 마음을 살기로 돌려받은 사내입니다. 그런 그가 단비에게는 마음을 열었으니, 다른 것은 따져묻지 말고 온 마음으로 그를 안아주세요. 한번 다친 자리는 아문다 하여 쉬이 잊혀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작은 상처에도 다시 벌어지고 더 깊게 아려오곤 하지요. 다시는 아물지 못할 만큼,...그리 깊게 말입니다.”

 

낮게 이어진 말끝에 붙은 서대비의 근심은 한숨처럼 희미했지만, 어쩐지 듣고 있는 연의 귀에는 확신처럼 힘있게 들려왔다. 말이 흐릿하다고 하여 생각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연은 그리 들린 까닭을 더 깊게 살펴 묻지 못했다.

연이 알고 있는 음성 하나가 마차 안을 채우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대비마마, 신 무호사부 인규이옵니다.”

 

근심이 깊은 듯, 아니면 불안이 퍼진 듯 마른 입술을 깨물던 서대비의 얼굴로 알 수 없는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

무호사부를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좋아하는 서대비의 모습은 연에게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단비가 창을 더 열시겠습니까.”

 

서대비는 눈짓으로 연이 작게 열어둔 창을 가리켰다. 흔한 가락지 하나 없는 연의 가는 손은 열린 창틈으로 들어갔다 이내 큰 공간을 만들고 멈춰섰다. 갑자기 쏟아지는 저녁볕처럼 마주한 무호사부의 얼굴은 지나치게 가까워 연은 저도 모르게 놀라 주춤했다. 마주선 사내도 마찬가지 인 듯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말이 흠칫 서며 인규의 중심을 흔들었다. 놀라움이라고 온전히 돌려 말하기엔 알 수 없게 붉어진 인규의 목덜미를 물끄러미 보던 서대비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 이네.”

 

“예. 대비마마, 지금부터는 신이 안내를 하겠습니다.”

 

찰나의 흐트러짐은 없던 듯, 이내 딱딱하고 곧은 사내는 깊은 인사를 올리고 말머리를 당겨 앞서 갔다. 사내의 뒷모습을 보던 연은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입술을 떼려 하였지만 점차 멀어진 걸음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숨을 내쉬었다.

 

“무호사부를 아십니까.”

 

무엇을 안다는 물음인지 뭉실하기만 한 질문이나, 연은 당연하다는 듯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서부에서부터 동행하였습니다.”

 

곤전의 자리에 올리는 여인을 모셔오는 일도 아닌데, 어찌 주상이 여인의 호위를 무호사부에게 맡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서대비는 까닭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눈에 드러나는 연에게서는 더 파헤쳐 알아낼 것이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상에게 물어 볼 필요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미 서대비는 알고 싶었던 것을 충분하게 알아냈다 확신하고 있었다.

 

“주상이 가장 믿고 아끼는 사내지요. 어린 시절엔 벗으로 지금은 호휘 무사로, 때론 책사라 불리 우기도 하지만, 그림자처럼 뒤를 받칠 뿐이니 책사라 부르기엔 부족하고, 너무 가깝게 불러 위험하다고 느껴질 때면, 쳐내 멀리 정배를 보내니 그림자라 부르기엔 돌아선 시간을 대변할 방법이 없겠지요. 허나, 주상의 모든 것을 가장 많이 알고, 보고, 들은 사내임은 누가 뭐라 해도 확고한 사실입니다. 단비가 보기엔 그가 어떠합니까?”

 

서대비의 눈썹이 살짝 쳐들렸다.

연은 잊고 있던 날의 일을 떠올렸다. 목숨을 구해준 사내인데, 어쩌면 이리도 잊고 있었던 것일까? 부서부에서 오던 길, 지유근을 받아 상처를 치료했던 것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는데, 차가운 얼음물에 빠져 가라앉던 순간 잡았던 손길을 잊어 버리다니.! 미안함과 민망함에 연의 숨이 무거워졌다.

 

“좋으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명료한 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눈앞의 단비는 지켜보는 자신의 시선을 비켜내지 않았다. 다른 마음이 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서대비는 훤히 드러나는 단비의 마음을 마음껏 살폈다. 비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했다. 황주성이 어떤 곳인가? 황주성으로 발을 들인 자는 그것이 여인이든 사내든 마음을 쉽게 드러내면 살아낼 수 없는 곳이었다. 춤추는 칼끝은 언제 목으로 들어올지 모르고, 사방이 꽃밭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돌아보면 발끝은 절벽 끝에 서있는 것이 황주성의 삶이었다. 헌데, 이 계집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될 즈음에는 이미 목숨이 끊어져 차갑게 내던져있거나, 황주성 밖,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쫓겨나가 남은 생을 하루하루 후회하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서대비가 마음으로 길을 택한 것은 전자이나, 문득 무방비로 환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이 계집에게는 후자가 더 괴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헌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뒷일을 모르는 채, 단단하고 곱게 자라는 열매를 짓밟아 던지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꽤나 유쾌한 일임이 분명한데, 서대비는 알 수 없게 기분이 나빴다. 어느 사이에 서대비의 미간은 일그러졌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근심 가득한 말투. 서대비의 기분은 더욱더 곤두박질 쳤다. 발톱을 감춘 것이 수 십 년인데, 무지하고, 셈조차 할 줄 모르는 계집 앞에서 표정을 들킨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주상의 친모.! 그래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묘하게 사람을 뒤틀리게 하는 것이 꼭 그 계집과 닮아있었다. 주상이 지 애미와 같은 여인을 골라 담은 모양이었다.

 

“노곤이 밀려와 그런가봅니다. 나이는 속일 수가 없는 법이지요.”

 

서대비는 넘치려는 짜증을 서둘러 숨기며 연의 손을 꼭 잡았다. 무릎에 단정하게 모여 있던 여인의 손은 갑작스런 손길에 놀란 듯 하였으나, 이내 살갑게 서대비의 손으로 부드럽게 맞닿아왔다. 따뜻하게 위로를 전하는 것 같은 손길에 서대비는 물끄러미 연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인데, 오늘따라 사내의 눈에 든 산길은 사뭇 달랐다. 저녁볕이 어느사이에 사라지고 어둠이 지긋하게 깔려와 그런 것이라 생각하다가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깜깜한 밤에도 말을 내달렸던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닌데...오늘따라 낯선 길을 잡은 것처럼 인규의 몸으로는 긴장이 타흘렀다.

 

“황주성의 파발을 따로 받은 것이 있느냐.”

 

가라앉은 사내의 하문이었다.

 

“올린 것이 전부입니다.”

 

왕께 전하는 문서였다. 감히 무호사병 따위가 감추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당연하다는 듯 짧으면서도 그 당연한 것을 묻는 이유를 알지 못해 의아한 음성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인규의 길어진 침묵에 참지 못한 무호사병은 재차 입을 열었다. 대비가 타고 있는 마차에 다녀온 후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내의 어깨로 퍼진 강직이 꽤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헌데, 어찌 그러하십니까?”

 

인규 스스로가 묻던 질문을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인규는 무호사병이한 질문에 쉬이 답을 찾지 못했다. 옥국에서 벌어진 전선에 서대비가 온다는 파발이 당도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깊어진 성심이 한결 가벼워질 만큼 반가운 소식에 그의 마음도 편안해 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환후가 깊었던 날이 길었던 지라, 차마 청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한다는 듯 앞서 살펴준 서대비의 마음에 사은을 표하는 것이 그의 몫이라 여겼는데, 어찌하여 열린 작은 창 사이로 단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가슴이 어지러워 숨이 답답해 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자로서, 혹여 단비의 동행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렇다. 그 때문이다. 하며 답을 찾아 낸 후에도 말고삐를 잡은 인규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마디마디가 붉게 변한 것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해는 넘어가고, 어둠이 짙어질 무렵에야 묘산의 정상부근, 진영에 당도한 마차는 느리게 멈춰섰다. 뒤를 따르던 궁인들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시립했다. 병사에게 말고삐를 넘겨준 인규는 주변을 살핀 후 다가갔다.

 

“진지에 당도하였습니다.”

 

대비라고 하여도, 사사롭게 왕의 막사 앞까지 마차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주성에서 처럼 몇 겹의 성문을 돌고 돌아, 들어간 이가 길을 잊을 때 쯤에 서야 앞을 가리고 왕의 침전에 들 수 있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 진중이지만, 십년 전 그 일이 있은 후, 왕의 곁으로 가는 방도는 있으되, 멀고, 빠르지 않았다.

느리게 마차에서 내린 서대비는 뒤를 따르는 연을 살짝 돌아보았다. 두 손에 곱게 접어 싼 견직을 들고 서 있는 연의 얼굴은 지나다 얼핏 보아도 뒤를 돌게 할 만큼 은은한 빛이 돌았다. 아니, 다시 보면 은은하다기보다 생기 넘치는 환한 빛이었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진중을 휘감은 밤의 정막도 단비의 곁에서는 한줄기 미명을 받은 듯,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서대비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삼일도 되지 않는 짧은 날이었다. 사람의 크기만큼 큰 수자를 편히 하기엔 더없이 모자랐을 시간,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을 범이, 얼마나 정성스러울 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리 소중히 들고 있는 모양새란.!

서대비는 감추려고 해도 자꾸 번지는 비웃음을 삼키며 연에게 다가갔다. 일렁이는 횃불 뒤로 서대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주상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습니까. 단비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전장의 일이니 다 알고 근심하는 것 보다야 모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럽니다.”

 

연이 마치 내알內謁을 재촉하며 투정이라도 했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서대비의 당부였다. 그리 하겠다고 답하는 연의 귀끝은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허면..어찌한다..? 무호사부, 단비를 여기서 기다리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잠시 단비가 머물 곳을 준비를 해주시게. 이곳이 진영이라고는 하나, 사사롭게 병사들의 손에 단비의 잠자리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 위험할 수도 있고...그대가 알아서 잘 살펴주리라 믿네. 노상궁. 네가 남아 무호사부를 도와드려라.”

 

끝까지 따뜻한 음성으로 당부를 한 서대비는 병사들의 안내에 따라 점점 멀어졌다. 멀어지는 서대비를 향해 낮은 허리 인사를 마친 인규의 생각이 복잡해졌다. 단비의 걸음을 알지 못했기에 따로 막사를 준비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나으리.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멀뚱히 서있는 인규에게 다가온 노상궁의 재촉에 인규는 긴 숨을 내쉬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영 중, 왕의 막사를 제외하고 병사들이 사사로이 출입할 수 없고, 안전한 곳은 무호사부, 그 자신의 막사뿐이었다.

 

“단비 마마께서 오심을 미리 알지 못하였네.”

바로 옆으로 따르던 노상궁의 짙은 입술이 움찔거렸다.

 

“허면, 어디로 모시려 하십니까? ”

 

“대비마마의 막사 외에 따로 준비한 것이 없으니, 잠깐 따로 준비하는 동안만 내 막사로 모시려 하네.”

 

노상궁의 뒷머리에 따끔한 소름이 돋았다.

 

‘아마 단비는 무호사부의 막사로 들게 될게다.’

 

‘하오나, 마마 만일 그렇지 아니하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근심이란 말이다. 미리 준비하지 못한 이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허니, 그런 근심은 할 것 없다. 막사에 들거든 그저 네가 할 일을 찾아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거라.’

 

‘마마,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자리를 피한다고 하여, 설마...무호사부께서

전하의 여인을 어찌 하려 하시겠습니까.’

 

몇 번을 생각해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어 되물었던 노상궁이었다.

 

‘어릴 때 말이다. 강가에 뱃놀이를 나갔다가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 적이 있다. 차가운 물 속에 빠져든 순간 숨도 쉬지 못하고, 두려움에 온 몸이 굳어져 소리도 치지 못했지. 그 후로는 강가에 나간 적이 없었다. 하여 그날의 일은 다 잊은 줄 알고 있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다 서국에 오게되고, 황주성에 도착해 청해에서 열린 환영연에 참석 한 날, 수년 만에 배를 타고 전하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떠했을 것 같으냐.’

 

‘또 빠지실까 두려워 하셨나이까.’

 

‘배에 오르기 전까진 그러했지. 허나, 배를 타고 난 후에는 계속 같은 생각이었다. 배가 뒤집히면 어떤 것을 잡고 떠 있어야 할까. 내 몸을 지탱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그게 사람이다. 한번은 온전히 아파할 수 밖에 없었다면, 두 번째는 준비를 하게 되지. 절대 배가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 아무리 보아도, 들어도 믿지 못하고, 백에 하나,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를 자꾸 생각하며 만일 그러하다면... 만약 그리된다면 내가 어찌해야 할까. 어찌해야 내가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까 하며 말이다.’

 

‘대비마마, 하오시면 성심을 말씀하시는 것이 옵니까.’

 

‘백의 하나가 백이 되게. 천의 하나가 천이 되게. 한번 해볼 참이다. 하하’

 

노상궁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사라져 흔적 없는 서대비이나, 꼭 그날의 웃음 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몇 걸음 이어지지 못해 당도한 막사는 안에서 타고 있는 화로의 불길로 밖까지 흐린 불빛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규는 가만히 장막을 걷어 길을 내주었다.

장막안은 작은 침상과 나무를 짜서 만든 탁자, 그리고 그 위에 겹겹이 펼쳐진 지도와 장계들을 제외 하고는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들리는 무호사부의 성품만큼이나 단정한 내실이었다.

 

연은 노상궁을 따라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위에 놓인 종이들을 차례로 말아 곁으로 치우고 침상에 깔린 피륙사이에 손을 넣어 감춰둔 검을 꺼내는 손길은 자기 막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기 것을 대하는 사내의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무호사부의 막사입니까.”

 

인규를 향한 물음에 노상궁의 허리가 굽어졌다.

 

“제 불찰입니다. 이곳에 제대로 말이 전해지지 못하여, 마마의 걸음을 미리 대비 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잠시만 계시면 짐을 풀어 편히 쉴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빠져나간 노상궁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연의 까만 눈동자로 난처함이 번졌다. 정리를 마친 인규는 뒤를 돌아 연을 바라보았다. 아랫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조차, 편히 부리지도 편히 쉬지도 않는 작은 어깨가 불연 듯 떠오른 기억 속의 날과 꼭 같아보였다. 그날도 저렇게 굳어져 꼿꼿하게 있었지. 단단하게 버티지만, 우는 것 보다 아픈 모양새로 서있었지. 인규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반가움이 일렁였다.

 

“매번 뵐 때 마다 폐를 끼치게 되는군요. 정말 미안합니다.”

 

꼬리를 물던 생각을 자른 것은 연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어찌..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호사부가 왕의 측긴이라하나, 연은 왕실의 계통에 몸을 담은 여인이었다. 함부로 부려 대할 사이는 아니라고 해도 연의 말은 지나치고, 황망했다.

 

“산허리에서 뵈었을 때, 미리 준비치 못한 신의 잘못입니다. 책망 받아 마땅한 일이오니, 마마께서 마음 쓰실 일도, 사과를 하실 일도 아닙니다.”

 

저도 모르게 급해진 음성에 끝난 후의 정적은 더 어색했다.

인규의 등줄기가 뜨끈해졌다.

이대로 나가야 하나, 아니면 궁인이 올 때까지 곁을 지켜야 하나, 어찌할 바를 몰라 춤추던 생각은 흐릿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눈동자에 닿아 아득히 멀어졌다.

 

“일전에 무호사부께 실수를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청해에 빠졌던 날, 무호사부께서 절 구해주신 것도 모르고 다른 소리만 했으니 많이 당황하셨지요. 허나, 실은 조금 무호사부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날 뵈었을 때, 제가 착각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 어찌 모른 척 하셨습니까.”

 

듣고 있던 인규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착각한 것은 연인데,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허리를 숙이는 인규였다.

 

“신이 미욱한 탓입니다.”

 

간신히 찾아낸 답은 짧기만 했다.

가만히 인규를 보던 연은 눈동자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전하의 곁에 배려가 깊으신 분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제가 착각하는 것이 있거든 바로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허면, 더는 무호사부 앞에서 부끄럽고 민망할 일이 없지 않을 까 합니다.”

 

잠시 멍해져있던 인규는 그제서 연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앞에 놓인 발도 없이, 얼굴을 가린 천도 없이 바로 마주하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살짝 붉어진 양 볼에 머금은 웃음기가 지나치게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그리 하겠습니다.”

 

“지난 일도 잊어 주시겠습니까.”

 

쑥스러운 듯 덧붙인 말에 인규의 입가에도 피식 웃음이 번졌다.

 

“물에 빠지셨으니 기억이 혼미하셨을 것입니다. 그 탓이라 여겼을 뿐, 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더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도 먼 길 오시느라 많이 노곤하셨을 텐데,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사실은 많이 생각하고, 배려하여 왕이 구해주었다고 믿고 있는 단비를 두고 모른 척 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데도 마음이 편안해 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은 많이 긴장되던 터였는데, 무호사부를 뵙게 되어 마음이 조금 놓이는 듯 합니다. 먼 길인데, 멀다고 느끼지 못하고 왔습니다. 괜한 걸음을 하였나. 오지 않는 것이 더 좋았던 건 아닐까. 몇 번씩 묻고 또, 묻다보니 이리 도착하였습니다.”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머뭇거리는 연의 음성과 달리 아주 단호한 인규의 음성이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마치 장난을 하듯 되묻는 연의 입술 끝은 흔연히 올라가 있었다.

 

“이번에는 참입니다.”

 

싱긋 웃는 사내의 답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마음이 통한 지기를 만난 것처럼 편히 오가던 대화는 어느덧 멈춰있었다. 문득, 단비가 계속 서있음을 깨달은 인규는 서둘러 탁자아래 놓인 나무 의자를 꺼내 단비에게 권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연은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조심스럽게 나무 의자에 앉았다.

 

“탁자에 두셔도 됩니다.”

 

언뜻 이해하지 못해, 잠깐 동안 뜻을 살피던 연은 무호사부의 시선에 제 손에 닿아있는 것을 알고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계속 내려놓지도 못하고 두 손에 들고 있던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헝겊을 싼 종이가 움직임에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연은 구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조심스럽게 눌러 폈다.

 

“중한 물건이십니까.”

 

“진중에 여인이 오면 부정한 기운이 든다라는 속신에 말이 있다지요. 꼭 믿어 그리한 것은 아니지만. 괜한 근심이 되어 준비했습니다.”

 

인규의 눈썹이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보기좋은 용이겠습니다.”

 

제 아무리 구중심처에 앉아 세상을 살폈던 서대비지만 여기까지 예상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서대비의 눈이 잘못 본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단비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무호사부의 마음 끝자락을 서대비는 보았고, 사내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연심을 서대비는 보았고, 성심에 깃든 상흔의 깊이를 서대비는 보았다. 제가 만들어낸 상흔이니 그 깊이와 너비를 모를 리 없음이 당연했다.

균열.! 백의 하나가, 백이 되는 균열은 인규의 말 끝에 지근하게 달라붙어 따라왔다.

 

“용이라 하셨습니까.”

 

까맣게 번진 눈동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를 위한 것이니, 표징이 용이라 짐작하였을 뿐입니다."

 

종이 위를 부드럽게 오가던 연의 손길은 어색하게 멀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단비를 보며 인규는 알 수 없이 불안해졌다.

 

"대비마마께서..아니, 제가 실수를 하였나 봅니다."

 

대비마마라는 말 뒤에 한 참 동안 멈춘 숨결은 서둘러 제탓을 하고 있는 연이었지만, 연 스스로 아무리 곱씹어도 그날 들었던 것은 범이 분명했다. 오랜 환후에 탓이라 그러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연의 마음은 못나게 섭섭하고 답답했다.

 

"영문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상황을 짐작하지 못한 사내는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조급해 말이 달려나갔다. 애써 괜찮은 듯 웃어보이는 연은 느리게 매듭을 풀렀다. 몇 겹으로 곱게 싸여 있던 헝겊 안으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사내를 덮칠 듯 용맹해 보이는 범 한 마리가 수자되어 있었다. 그 크기와 솜씨에 놀란 것도 잠시 인규는 마른침을 삼키고 멍해졌다. 그의 눈 길이 탁자 위에 놓인 범과 그의 침상 옆에 세워진 그의 귀호, 범기치(旗幟)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비를 위해 뭔가 다른 말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전, 여인의 눈빛도 그와 같은 곳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인규는 어정쩡하게 발걸음을 옮겨 귀호를 가리고 섰다.

 

"무호사부의 표징이 범인가 봅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듯, 나지막히 가라앉은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의 귀호는 그가 정한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왕의 그림자가 되어, 왕을 지켜왔던 그의 선조부터 받들어 온 수 백년도 더 된 표징이자, 전장의 앞에 나설 때마다 자랑스럽게 들었던 그의 자부심이었다. 헌데, 어찌하여 지금은 그의 표징을 감추고 서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귀호가 범이 아니었으면 할 정도로 면구함이 들었다. 어색하게 얽힌 두 사람의 눈 빛이 제 자리를 찾기 전, 막사 밖 흐릿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하!!"

 

바람을 가르는 옷자락 소리와 익숙한 군왕의 음성이 번갈아 들려왔다. 한걸음, 한걸음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와 달리 막사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공기도 멈춘 듯, 굳어있었다. 어느 사이에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비슷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마.”

 

인규의 단호한 음성이 난처함에 흔들리는 연을 강하게 잡았다. 연은 아무말 없이 펼쳐둔 헝겊을 차례로 덮었다. 설레며 한 땀 놓았던 바늘, 기쁘게 한 땀 놓았던 바늘, 그 날카로운 끝이 이제는 연의 가슴을 찌르는 듯 느껴질 뿐 이었다.

 

“어찌 하려 하십니까.”

 

“보여드릴 수 없으니, 버려야겠지요. 무호사부께서 대신 해주시겠습니까.”

 

예를 갖춘 말에 담긴 허탈함을 모를 리 없는 인규였다. 그는 가만히 일어나 탁자의 것을 집어 침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느리게 뒤를 돌았을 때, 걷힌 장막 뒤로 황금색의 옷자락이 보였다.

 

“연아!”

 

한껏 들뜬 옥음은 눈빛보다 빠르게 막사 안으로 퍼져 들어왔다. 그리고 음성을 따라 들인 시야에 위태하게 서있는 연과 자세를 갖춰 허리를 숙인 인규의 모습이 차례로 들어왔다. 알 수 없게 미묘한 막사안의 공기에 해단의 눈빛이 깊어졌다. 반가움과 웃음으로 슬쩍 올라갔던 사내의 입술 끝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틀어졌다. 허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를 향해 환히 웃어주는 연의 어깨가 왜인지 모르게 안쓰러워 보인다는 것과 허리를 펴 군왕을 마주한 인규의 눈빛이 왜인지 모르게 근심스러워 보인다는 것 뿐, 해단을 긴장하게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 이런....”

 

아주 잠깐, 그저 한 두 번의 숨결이 머물 다 갈 짧은 순간,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여인 곁에 사내가 있을 뿐인 것을..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연이...인규가.. 그의 연이..그의 인규가... 못난 질투심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한심한 스스로의 모습에 허탈하게 웃은 해단은 성큼성큼 다가와 연을 덥썩 끌어안았다.

 

“보고싶었다.”

 

어떤 말 보다 긴하게 전해오는 마음은 연에게 그대로 와 닿았다. 물론 인기척 없이 막사를 빠져나오던 인규에게도 올곧게 전해졌다. 연은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들이 쉬었다. 코끝으로 사내의 숨결이 진하게 퍼져왔다. 너무나 편하고, 너무나 그리운 해단의 품에 연은 빨려들어가 듯 파고 들 뿐이었다.

 

“보고 싶다 하지 않느냐.”

 

연의 턱 끝을 들어 올린 사내의 음성이 짐짓 엄했다. 깊어진 까만 눈동자에 담긴 무안한 애정에 연의 눈동자로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혔다. 연을 내려다보던 해단의 얼굴로 당황함이 번졌다.

 

“아니. 연아. 탓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답이 없기에 채근한 것이지. 어찌하여 눈물을.. 그러면 내가..”

 

두서없이 이어지는 말이었다. 조롱과 비웃음, 비아냥이라면 서국 최고의 구변인 사내인 해단의 더듬는 말투에 연의 붉은 입술이 그만 웃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만 하십시오. 바보같습니다.”

 

웃음기 가득한 말에 해단은 부러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나 연의 웃음과 환한 눈동자로 이미 마음은 두서없던 말 큼이나 두서없이 뛰고 있었다.

 

“바보 같았지.”

 

해단은 진심이었다.

 

“예. 진정 그러했습니다.”

 

연은 사내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며 동의했다.

해단은 느리게 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감기는 손끝으로 연의 향내가 번져왔다. 해단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연아, 잠시 바보같은 생각을 하였다. 허나, 그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깊게 담고 있는 지 알 것 같다. 세상 사내들을 다 베어 없앨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해단의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하지 못한 연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무슨..”

 

그러나 해단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그의 마음을 연에게 다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감추고 날카롭게 찔러보고, 상처내며 알아 보며 알아보면 안 되는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가, 또 어느 순간 들뜨게 흔들다, 어느 순간엔 그의 모든 것을 품어주는 포근한 마음을 가진 소중한 그의 여인이 연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사내와 함께 있는 모습만 보아도 피가 더워진다.”

 

처음 여인을 대하는 사내처럼 수줍은 고백이었다.

 

“무호사부와 그런..”

 

“어떤 일도 없고, 어떤 마음도 없다는 것을 알아도 그러하다.”

 

해단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인규와 어떤 것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보아도 괜한 질투가 나는 못난 사내의 마음 탓이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하는 말이니 못나다 웃지 말거라.”

 

어느 사이에 슬쩍 올라간 연의 붉은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해단은 중얼거렸다.

 

“진정 바보 같은 분이십니다.”

 

“뭐가 말이냐.”

 

“제가 아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멋지다 생각합니다. 또, 가장 잘생겼다 생각합니다. 또, 가장 따뜻하다 생각합니다. 헌데, 다른 사내에게 눈을 돌릴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연의 말이 거듭될 수록 연의 볼은 점점 붉어져 끝내 귀끝까지 붉게 물들었다. 연의 고백을 멍하니 듣고만 있던 해단은 그대로 연을 안아 들고 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도 모르는 사이에 사내의 몸 아래에서 그의 입술을 받고, 그의 숨결을 받던 연은 한참 만에 손으로 사내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어찌 이곳에서.. 이곳은 무호사부의 막사가 아닙니까.”

 

반쯤 드러난 어깨와 허벅지까지 올라 고스란히 다리를 드러낸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만, 애써 옷가지를 추스르는 연이었다.

 

“서국에 내 것이 아닌 곳이 있다 하더냐.”

 

사내는 여인의 어깨를 따라 붉은 낙인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하오나, 이곳에서...”

 

“연이 네 몸에 내 것이 아닌 곳이 있다 하더냐.”

 

사내의 입술을 점점 내려와 봉긋한 가슴을 삼켜 물었다. 발끝까지 전해지는 지릿한 떨림에 연의 눈썹이 바르르 떨려왔다.

 

“아닙니다. 전하의 것입니다.”

 

물론 해단은 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기다릴 수 없었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사내의 몸이 깊고, 뜨겁게 연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단의 움직임에 따라 연은 흔들렸고, 연의 나지막한 숨결을 따라 해단은 가빠졌다. 수 십번, 아니 수 백 번을 더 가져도 부족한 여인의 몸 안에서 사내는 몇 번이나 긴한 것을 쏟아 부었다. 땀과 더운 숨결로 가득한 막사 안, 곤하게 잠든 사내의 곁에서 연은 가만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한꺼번에 쏟아진 검은 머리카락이 사내의 가슴으로 퍼졌다.

 

“간지럽다.”

 

잠결인 듯...나른하게 번지는 사내의 음성에 연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소리에 연의 가슴도 어느 덧 함께 뛰고 있었다.

 

“진정 바보는...전하가 아니라 연입니다. 다른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려오고, 다른 여인을 보고 웃으시면 눈물이 맺히는, 바보는 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여인을 감춰두고 싶은... 저는 어찌합니까.”

숨소리보다 낮게 들리는 여인의 말끝으로 뜨거운 눈물 방울 하나가 따라 흘러 내렸다.

 

 

 

 

 


댓글 '6'

so

2011.05.17 22:49:44

으흥...

역시 서대비..;;;

연은 뭐, 인규도 뭐, 근데 해단은 걱정일세.-_-

아무튼 지현님 방가방가.ㅠ_ㅠ

Junk

2011.05.18 12:13:08

222222222

어찌 저랑 감상이 똑같으신지... ㅎㅎㅎ

신지현

2011.05.18 20:50:07

저도 방가방가요^^

근데, 저는 어째 다 걱정되지만~ 진심 홍비가 걱정된다는 ㅎㅎ

은근 어설퍼서

Junk

2011.05.18 22:47:43

악... 작가님이 그런 말씀하시면 우째요...ㅜ_ㅜ;

근데 <헛소동> 때부터 느꼈지만 남주가 칼쑤마에 자기 앞가림 잘 하고 기품도 있는데 뭔가............ 되게 귀여워요. 해단....... 아우......ㅇ........

큐리

2011.05.18 13:15:19

사랑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해단의 최대 약점인건가요?

음... 연이 해단을 잘 이끌어줘야할 텐데 말이죠.

신지현

2011.05.18 20:51:11

그러게 말이에요.

잘들 살아야 하는데, 이래 저래 앞으로 꽤나 울게 생겼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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