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95

19.

 

 

겨울의 끝은 따뜻한 봄이 맞을 진데, 황주성의 초봄은 훈훈하게 부는 바람과 달리 매섭게 차기만 했다. 옥국에서 보낸 조공을 가로채는 도적이 점점 세를 불린다는 밀관사의 보고를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이 끊긴 지 열 이틀만에 그는 밀지 대신 목이 잘린 주검이 되어 황주성에 도착했다. 전쟁은 그렇게 피를 보며 시작되었다.

 

"신 인규 이옵니다."

 

급하게 들리는 음성은 미세하게 떨렸다. 진중한 사내에게서 전해진 팽팽한 긴장감은 해단의 어깨위로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어쩌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며 붙잡고 있던 단단한 줄 하나가 해단의 가슴에서 툭 하며 떨어져나갔다. 허리부터 팽팽하게 조여오는 긴장감에 해단의 등허리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명으로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청해 너머를 애써 응시하려던 해단은 시선을 거두며 뒤를 돌았다.

 

봄바람이 불어온다고는 하나, 아직은 서리가 내리는 쌀쌀한 이른 새벽인데, 인규의 얼굴은 굵은 땀방울이 엉겨 붙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의 그 뺨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밤새 달려왔음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급한 걸음마다 이끌려 붙은 흙먼지가 자욱한 옷가지를 보며 해단은 깊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밀관사의 주검을 보고 조공을 가로챈 무리가 단순한 도적이 아님을 단숨에 알았지만, 사실 전쟁만은 피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던 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은 해단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쟁이로군. 그대를 보내고 어쩌면 그대가 홀로 마무리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믿었다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지. 그럴 리 없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야."

 

"송구하옵니다. 이미 신의 손을 떠난 일이었습니다."

 

사내가 면구할일이 아님에도 진심으로 전해지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대와 전장에 나가는 것도 꽤나 오래간 만이다."

 

“십년 가까이 되었지 싶습니다."

 

"벌써 그리 되었는가. 그렇지. 따져보니 그렇기도 하다. 피로 거둔 영토위에 옥좌를 세우고 올라 앉은 지가 십년 이니...그 땅 끝에 그대와 나의 땀, 그리고 군사들의 피가 단단히 뭉쳐있어 무너질 리 없다 여겼는데, 과거의 영요에 꽤 길게 기대고 있었던 듯하다. 긴시간 늘 지킬 것이 한결같았던 그대의 검은 여전하겠지만, 과인의 검은 과연 그러할지 모르겠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을 누비던 기억은 어느 사이에 십 년이라는 세월 뒤로 흘러가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서국을 만들고자 선왕대부터 피를 뿌렸던 긴 시간에 비하면 누렸던 평온은 짧기만 했는데, 몸은 어느 사이에 전쟁의 긴장감을 놓아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단은 가만히 손바닥을 펴 보았다. 손 마디마디 단단하게 굳어진 검의 흔적은 세월을 비껴 돌아 그대로 남아있었다. 허나 그것은 흔적일 뿐, 살기흐르는 검두를 재잡기에는 미묘하게 틀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장을 나가지 않으셨으나 무예를 놓지 않으셨으니, 예전과 다른 것이 없다 생각하옵니다."

 

"예전과 다를 것이 없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답은 짧게 뭉개졌다. 다를 것이 진정 없다는 것인지, 다른 것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인지 옥음에 담긴 뜻을 살피러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인규는 날카롭게 빛나는 군왕의 눈빛을 마주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잠깐 나눈 것은 사내의 마음이었을 뿐, 서국의 군왕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얼굴로 근심할 것 없다. 예전과 달리 소중히 지킬 것이 생겨났다 하더라도...이 자리에서 가장 먼저 지킬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옥체가 감춘 속내를 애써 살피는 것은 그의 몫이 아님을 알지만 알 수 없게 인규의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인규의 근심은 왕의 뒤로 숨겨두려는 의미에 닿아 반대로 불쑥 솟아올랐다. 마땅히 백성을 근심하는 왕의 뒤에 있을 여인의 여린 얼굴 하나가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신의 근심은 오직 성심에 있사온데, 성심은 오직 백성 하나만을 지키고 위해야 하는 것인지는 부족한 식견으로 헤아릴 수 없나이다."

 

단단하게 고추 세웠던 해단의 어깨가 살며시 흔들렸다.

 

잘라야 하는 것인가. 모른 척 해야 하는 것인가.

찰라의 숨에 생각이 휘몰아쳤다. 살며시 떨리는 입술 끝은 아둔한 사내가 제대로 인지하지 조차 못한 마음을 꺼내 잘라쳐 주고 싶으나,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인규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일 것 같아 해단은 손 끝에 힘을 주어 인규의 어깨를 잡을 뿐이었다.

 

연을 두고 가고 싶지 않다. 연을 보지 못할까 두려워진다. 전장을 피하고 싶다. 나는 그러하다. 너는 무엇이냐. 너도...

 

"길게 말을 달려 고생하였다."

 

내지 못한 말을 버리고 나온 짧은 말은 한숨처럼 무거웠다.

 

"마땅히 할 일 일 뿐, 고생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밀관사가 올리려던 계장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간의 일지를

 

면밀하게 파악해본 결과 옥국의 난군들은 처음부터 조공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 도적으로 가장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들은 이미 상당한 군량미와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나이다. 점차 세가 늘어났다는 밀관사의 보고는 정찰 보낸 밀사들의 것과 일치하지만, 보고가 끊겼던 열 이틀 사이에 열 배 가까이 합류된 군세로 보아서는 오래 전부터 계획을 하고 흩어져있다 어떠한 지령에 따라 모인 것이라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계기도,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뚜렷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속국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라면 먼저 중심이 되는 인물을 왕으로 세워 추앙해야 백성의 신뢰까지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들에게는 수장이 되는 인물도 뚜렷하지 않았나이다."

 

"백성의 움직임은?"

 

해단은 왕이었다. 군사의 움직임을 따져 묻기 전 백성의 뜻을 묻는 왕! 인규는 서둘러 답했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자에 오가는 이들은 이전과 다를 것 없는 셈을 하고 있었나이다. 전쟁을 목전에 둔 저자라 할 수 없었습니다. "

 

해단의 눈매에 날이 섰다.

 

"여러 가지로 매듭눈이 맞지 않는 것이 걸린다. 그대의 말처럼 목적도 뚜렷하지 않는 세력인데, 그 세는 군사처럼 조직력을 가졌고, 조직력의 바탕에는 마땅히 백성이 있을 진데, 백성은 인지하지 못한다? 무엇을 위함인가. 무엇을 노림인가.."

 

옥국이 속국이 된 것은 선왕대의 일이었다. 험준한 산지가 많은 서국과 달리 옥국은 비옥한 토양과 따뜻한 기후, 옥국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과 국토를 배안하듯 맞닿은 바다로 이루어져 백성에게 온부한 삶을 쉽게 주고 있었다. 하여 서국 뿐 아니라, 옥국의 주변국들은 군사력이 증강될 때마다 가장 먼저 옥국을 피탈해왔고 그 피탈의 종지부를 낸 것이 선왕이었다. 오랜 시간 피탈에 시달렸던 옥국은 오랜 전통의 모계사회로 여주가 나라를 다스려왔고, 그 여주를 서국의 왕후로 맞아 전쟁을 끝내며 자연스럽게 옥국을 서국의 속국으로 만들었으니, 옥국의 백성 역시 큰 거부감 없이 서국을 받아들였다. 서국 역시, 다른 예속국과 달리 옥국에게는 무조건 적인 피탈을 피하고 옥국의 관료들을 널리 등용하는 등 왕후의 나라에 갖춰야할 예를 갖췄기에 서국안의 옥국은 온전한 국가로 서지 못해도 난군이 뭉쳐 모이거나, 백성이 수탈되는 일 없이 긴 시간 평온했다. 이러한 평화가 깨졌으나 까닭이 분명치 않으니 꽤나 기묘한 일임에 분명했다.

 

"그 수는 어떠한가."

 

"국경지대로 집결하는 수가 이만에 가까웠습니다. 허나, 그 뒤로 얼마나 더 있을 지는 신도 가늠할 수 없었나이다. 대비마마의 병세가 오랜 시간 깊어 불안감이 시초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할 뿐입니다. 출병준비는 마쳤으니 명을 기다리겠나이다."

 

"밝은 날 바로 떠날 것이다. 일각의 시간"

 

잠시 숨을 멈춘 해단은 뒷말을 낮게 읍조렸다,

 

“그것이 허락된 전부이다."

 

 

 

 

 

갑자기 들어선 사내는 문 안으로 쉽게 들어서지 못하고 문가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사내의 등 뒤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새벽바람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은 굳어진 어깨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연은 조심스럽게 사내의 앞으로 다가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잔뜩 구겨진 치맛단이 바스락 거리며 내실을 울렸다. 출정준비로 바빠서 오지 않으실 것이다 하며 애써 마음을 잡아두었다 생각했는데, 어두운 사내의 얼굴이라도 이리 반가운 것을 보니 마음은 제멋대로 사내를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반가움과 두려움에 헛된 소리가 나갈까 입술을 깨문 연은 사내의 깊은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또렷하게 앞을 쏘아보는 검은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난히 흔들렸다. 연은 마주잡고 있던 따뜻한 손을 가만히 들어 사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굳어진 몸으로 날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까치발을 들고서야 겨우 보듬을 수 있는 사내의 품은 여느 때처럼 넓고 단단했다.

 

"안아달라는 것이냐.? 이리 적극적이니 좋긴 하다만, 아쉽게도 오늘은 불가하겠다."

 

시간을 잃은 듯 침묵하던 해단은 농처럼 툭 던졌다. 자신을 안아주려는 연의 마음을 알면서도 해단은 모르는 척 했다. 두려움이 차오르는 속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렵지 않은 듯 연을 안심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보다는 연의 허리를 휘감고 따뜻함이 샘솟는 여인의 안으로 파고들어 숨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허면 섭섭하여 어찌합니까."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연은 어색하기만 한 해단의 농을 받아주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뜨끈하게 이불을 덥혀 기다리거라. 다녀와 안고 또 안아 섭섭함일랑 느낄 수 없도록 노력할 터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한 연의 어깨는 농을 받던 밝은 음성과 달리 미세하게 떨려왔다. 해단은 허리춤에 어색하게 굳어져있던 손을 들어 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주 본 까만 눈동자는 새벽서리를 머금은 풀잎마냥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허롭기만 한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뜻밖의 말이었다.

 

“어찌 허락을 구하느냐.”

 

“큰일을 앞두고 괜한 부정한 기운이..”

 

뒷말은 해단의 입술이 삼켜 이어지지 못했다. 욕정과 갈망 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한 입술은 연의 붉은 입술을 강하게 빨아 당겼다. 거친 손길이 치맛단을 파고들지도 않았고, 가는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오지도 않았지만 입맞춤은 어느 때보다 긴하고 진하게 이어졌다. 몇 시진, 아니 며칠이라도 할 수 만 있다면 놓고 싶지 않은 여인의 숨결이었으나, 해단에게 허락된 시간은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입맞춤이 아쉬워 단칼에 끊어내지 못하고 이어지고 이어져 마지막에 이른 해단은 연의 어깨를 잡고 느리게 뒤로 물러섰다.

 

“이리 좋은 것이 어찌 부정하다 할 수 있겠느냐.”

 

괜한 근심을 하였구나. 연을 안심시키며 보기 좋게 웃어주는 사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해보였다.

 

“본디 이리 따뜻한 분이십니다. 그리 백성을 품으시니 분명 무운도 따를 것입니다.”

 

연의 목소리를 떨리고 있었다. 해단의 손아래 있는 어깨도 함께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애써 웃고 있었다. 본디 따뜻한 것은 해단이 아니라 연이었다.

 

“힘든 것은 감춰 삼킬 필요는 없다.”

 

“힘들지 않습니다.”

 

“닮았다.”

 

해단은 긴 기억 속 묻어둔 꽃향기가 문득 스쳐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도 그랬던 가. 전장을 떠나는 그에게 웃어보이던 여인은 진짜 웃고 있었던 것일까. 해묵어 이제는 가슴을 찢을리 없다고 믿은 기억이 왜 하필, 연을 두고 떠나는 시간에 떠오른 것인지 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돌아오면 탈을 버릴 것이다.”

 

연은 해단의 말이 급작스러웠는 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너무 두려운 것이 많아졌다.”

 

“허면..어찌 벗으신다 하십니까.”

 

“두려운 것이 너무 많아 탈 뒤에 숨어도 소용이 없기에 버리려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말이다. 나의 것을 네게 온전히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아 너도 내게 그리해주면 좋겠다. 애써 참는 것도 없이, 억지 웃을 것도 없이, 마음 그대로 너를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네 앞에서만은 나도 그리해도 되지 않겠느냐. 살기 가득한 황주성안 네게는 그리 해도 된다 믿고 싶다. 너도 내게는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해단의 긴 말에 연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몸이 떠올라 허공에 있는 듯 아득했다. 연은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앞을 보지 못했던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사내는 해도 된다 얘기해주고 있었다. 같은 마음으로 그도 그리 한다 약조하고 있었다. 벅차다는 말로는 백 번, 아니 만 백번 부족한 마음에 연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돌아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다. 사내로 들을 것, 사내로 품을 것, 사내로 볼 것.. 그때까지 아프면 아니된다.”

 

 

마치 연의 마음이 다 전해진다는 듯 해단은 연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연의 손 아래 느껴지는 떨림은 너무 진했다. 연은 웃고 있는 해단의 입술을 올려다보다 그처럼 웃었다. 애써 웃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웃었다.

 

“예.”

 

“울지도 마라.”

 

전장을 앞둔 것이 마치 여인인 것처럼, 근심가득한 해단의 음성은 낮게 퍼졌다. 울지 말라는 말인데, 이번에 연은 자꾸 눈물이 나려 했다.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며 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 나오더라도 물리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

 

바보같은 걱정이었다. 그러나 연은 사내의 마음을 물리지 않았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피비린내나는 전장을 목전에 앞둔 해단의 마음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밥이 아니라, 불을 삼키라 한들 삼킬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 바람이 차니.. 외감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너무 긴히 기다리면, 누군가를 너무 기다리다보면 마음이 차고 아련하니 너무 많이 생각지 말거라.”

 

왕이기 이전, 한 사내로 할 수 있는 미련한 근심은 끝이 없었다. 당부의 말을 이어가던 해단의 짙은 눈동자는 허하기만 한 방안을 돌다 한 참 만에 연의 까만 눈망울에 멈춰 섰다.

 

“더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음성을 꾹꾹 눌러 담은 연이었다.

 

“더 말씀치 않으셔도 이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프지 않고, 끼니 거르지 않으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병이 되지 않도록 다스리고 다그쳐 그리 기다리겠습니다.”

 

간신히 보이는 엷은 웃음을 건드리면 울음이 될까 해단은 연을 안지 못했다.

 

“좋은 마음으로 보내줘서 고맙다. 잘 다녀오마.”

 

해단은 넓게 퍼진 들내음처럼 시원한 미소를 연에게 보이며 뒤를 돌았다. 단단하게 벌어진 사내의 등허리는 조금씩 연에게서 멀어져갔다.

 

“꼭...살아서..”

 

작지만 또렷한 연의 목소리가 방을 나서려는 찰라 해단의 귓가를 울렸다. 해단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연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은 그가 떠난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내의 시선을 옭죄던 까만 눈동자 아래로 눈물방울이 솟아올라 맺혀 굴러 떨어지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하지 않으냐. 설사...아니다. 꼭 그리하도록 노력하마.”

 

왕으로, 사내로 그가 할 수 있는 약조는 그 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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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는 어떠하답니까.”

 

청해주변을 걷던 서대비는 느릿하게 한걸음 앞서며 물음을 던졌다. 시간을 멎은 듯 한참동안이나 청해너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연은 그제서 발걸음을 옮기며 뒤를 따랐다.

 

“잘 알지 못합니다.”

 

“서찰은 받았습니까.”

 

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첩에게 따로 보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루 하루 꼬박 꼬박 사내에게 보낸 서찰들은 벌써 수 십 통이었다. 허나, 전장에 머문 해단에게는 답이 오지 않았다. 황주성에서 받은 전장의 소식은 왕으로 보내온 명과 전운에 대한 공것이 전부였다.

 

“섭섭치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답을 기다리며 보내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저 혹여라도 이곳을 향한 근심이 무거워지실까 하여

잘 지낸다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 보면 그곳이 보일 것 같아 그럽니까?”

 

“예?”

 

서대비는 연의 작은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쥐며 보듬었다. 어느 사이에 연의 시선은 또 청해너머를 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첩이 바보같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단비. 나도 그러했지요. 밤에는 달무리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서도 저 하늘이 보일 텐데...코 끝으로 느껴지는 흙냄새가 유독 진한 날이면 그곳에서 말을 달려 바람에 실렸나보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 그 물줄기 어느 곳에서는 그곳의 땀방울과 눈물 방울도 함께 뒤엉켜 내려왔을 텐데..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연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서대비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여인의 긴했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하여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어느 사이 연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끼니 거르지 않고, 병나지 않아 생각보다 잘 지내는 듯 하였는데, 오늘 보니 아닌 듯도 하여 이 늙은이가 근심입니다.”

 

“약조 하였습니다.”

 

눈을 깜박여 눈가에 맺힌 눈물을 서둘러 지워낸 연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엇을..누구와 약조했기에 그리 웃습니까. 혹여 주상이 그리 당부하덥니까.”

 

서대비의 말끝이 미세하게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멀지 않은 날의 좋았던 기억을 더듬는 연의 감각은 서대비에게 이르지 못했다.

 

“예.”

 

연의 대답은 짧았지만, 긴한 다짐을 품은 듯 단호했다. 힘든 기다림도 사내를 향한 것이라면 오롯이 참아낼 수 있는 여인의 성품은 연의 작은 체구를 잊게 할 만큼 담대했다. 서대비는 한참동안 여인의 가녀린 어깨를 쏘아보았다. 서대비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다른 곳도 아닌, 옥국의 일이라 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늙은 몸이지만 주상을 위해 도울 것을 찾다보니 아무래도 이곳에 앉아 보는 것보다야 그곳에 가서 직접 살피면 답이 나올 듯도 하여 움직여볼까 하는데, 단비도 아시다시피 내 몸이 이러하여 결심이 쉬이 서지 않네요. 이 늙은 몸이 짐이 되지 않는다면 좀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먼 길 떠나게 되니 걱정이 앞서네요.”

 

느릿느릿 이어진 서대비의 말을 듣고 있던 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짐이라니요.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사람을 풀어 길을 알아 두라 일렀으니 사나흘 후 쯤이 될 듯 한데...”

 

서대비는 부러 말을 흘렸다. 수없는 삶이 죽고 밟히는 전장을 끝낼 수 있는 희망이라면 그것이 한낱 실오라기 같은 일 지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연의 마음이었다. 사내를 위해서, 사내가 지키고 싶은 백성을 위해서, 사내가 단단히 다져 만든 나라를 위해서.

 

“마마, 제가 따로 할 것이 있습니까?”

 

“시일이 촉박하여 가능할지 모르나, 예로부터 전장에 여인이 가는 것은 부정하다 하여 그 것을 액때움하려 하던 것이 있습니다. 수자繡刺를 하는 것인데, 시일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주로 무엇을 수놓습니까.”

 

조급해진 연의 음성은 서대비의 말 끝에 촌각을 두지 않았다.

 

“가려는 여인의 크기와 같은 범을 수자해야 할 터, 어찌 하겠습니까?”

 

부러 긴 한숨을 내쉬는 서대비였다. 그러나 연의 답은 이미 정해져 다른 길이 있을 리 없었다.

 

 

 

 

 

 

 

수화전(秀華) 앞뜰은 고요했다. 알수 없는 긴장감과 팽팽한 긴장감이 엇갈리는 기분을 느낀 서대비는 타고 있는 화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마. 홍비 들었습니다.”

 

서대비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서책 안에 서둘러 끼워놓고 낮은 헛기침으로 허락을 알렸다. 지난번 요란하던 발걸음과 달리 걸음마다 마루가 짓눌린 소리는 무겁게 전해졌다. 고삐풀린 개가 제법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마마, 일전엔 신첩이 큰 잘못을 하였습니다.”

 

넙쭉 업드려 절부터 하는 홍비였다.

 

기쁨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웃음기로 서대비의 짙은 주름이 넓게 퍼졌다.

 

“되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더냐. 잊은 지 오래이니 고개를 들거라.”

 

그제서 홍비는 조심스럽게 서대비를 올려다보았다.

 

“준비한 것은 다 마쳤느냐.”

 

“예. 가장 귀한 실을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수놓았습니다.”

 

홍비는 치맛단 속에서 넓게 접은 천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얇은 금사위로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 붉은 용이 튀어나와 하늘로 올라갈듯 상서롭게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오랜 시간 공을 들은 표가 나는 자수였다. 한참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서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섬세함이니, 누구를 시켰느냐.”

 

편하던 홍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잘했다 하는 것이다. 허나, 함부로 말이 나면 안될 일... 지금 나는 뒤처리를 묻고 있는 게다.”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서대비의 물음이나 음성은 차갑기만 했다.

 

“저자에 수자로 꽤 이름 높은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찾아 은밀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허나, 근심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근심치 않아도 된다?”

 

“예. 마마. 이름 없는 자의 유고遺孤인지라, 딱히 왕래하는 이도 없거니와..”

 

뒷말을 이으려는데 서대비가 말을 잘랐다.

 

“천하에 이름 없는 고아라 괜찮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것이냐? 세상에 이름 없는 자가 어디있더냐.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는 보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들었을 것인데!”

 

“곧 맹안이 될 것입니다.”

 

홍비는 서둘러 답했다.

 

“맹안?”

 

“예. 이미 손을 써놓아, 점점 안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혀도 굳어져 더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있는 답에 홍비의 목소리엔 힘이 실렸다.

 

“이번에는 제법 생각이라는 것을 했구나.”

 

칭찬인 듯 부드러워진 서대비였다.

 

“허나, 홍비야. 평생 수를 놓았던 손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고 하여 기억을 잊을 리 없고, 말은 못하고, 눈은 보이지 않는 다 하여도 손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땀 한땀 놓았던 손끝은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말이다.”

 

섬뜩할 만큼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를 뱉는 서대비의 눈동자는 오히려 담담했다. 듣고 있는 홍비의 등으로 소름이 번져갔다. 서대비는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등 뒤에 걸린 긴 발을 걷어 올렸다. 색색의 화려한 장식으로 이어진 염자 뒤로 투박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벽장문이 보였다. 마치 늘 열어보는 사람처럼, 망설이는 손길 없이 서대비는 벽장문을 열어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흙빛으로 칠해진 작은 유리병은 단단한 매듭으로 입구가 막혀있었다.

 

“가서 뒷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오너라.”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은 서대비에게 큰 절을 하고 물러난 홍비는 수화전의 앞뜰에 와서야 긴 숨을 뱉어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처마엔 붉은 등이 술에 취한 듯 흔들거렸다. 술에 취해, 계집에 취해 정신을 놓은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는 기방 이곳 저곳을 울리며 뒤흔들었다. 쌀 열가마인지, 은 촛대 몇 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윤설의 값은 어림잡아 그러했다. 낡은 옷가지 대신 색고운 비단을 두르고 처음 끌려 간 곳은 사내 둘이 장기를 두고 있는 방이었다. 지체 높은 이들은 원래 그러한 것인지, 사내들은 윤설을 보고도 모르는 척 장기만을 두었다.

오늘 밤 너를 산 분들이시다. 벗으라면 벗을 것이고, 입으라면 입을 것이고, 춤을 추라면 춤을 출 것이고, 네 발로 기어 오라하면 기어야 한다며 싸늘하게 명하던 늙은 기방주의 입술은 방안에 타오르는 촛대보다 더 붉게 번들거렸다.

 

“꼭..피 같았어.”

 

윤설의 중얼거림이었다.

장기를 두던 사내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뭐라 하였느냐.”

 

윤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놓은 듯 보이는 계집을 보던 사내는 킥킥거리며 장기판의 말을 움직였다. 오른쪽이었던가? 아니 왼쪽이었던가? 분명치 않은 기억 속에서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 이라지?”

 

이긴 쪽인 사내는 다가와 윤설의 턱을 잡아 올렸다.

 

“허면 많이 기대하고 있을 텐데, 어찌하면 좋다? 나는 본디 몸을 쓰는 것을 그리 즐겨하지 않아서 말이다.”

 

짐짓 난감하다는 말투에 장기판위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렇지. 자네는 늘 그러하지 !하하하!”

 

턱을 잡은 사내의 입꼬리가 흥에겨워 슬쩍 올라갔다.

 

“이름이 뭐냐.”

 

“설..윤설입니다.”

 

뭔가에 이끌린 듯 이름을 입에 올린 윤설의 허연 뺨으로 사내의 손바닥이 날라왔다. 철썩! 방안을 울리는 끔찍한 소리가 먼저인 듯, 한참 후에 윤설은 자신의 뺨을 감싸쥐었다.

 

“손은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는 여전히 웃는 말투로 말을 뱉었다. 볼을 감싸쥔 손을 내리자마자 다시 사내의 손이 뺨을 향해 날라왔다. 철썩! 철썩! 철썩! 얼마나 이어졌는지도 모르는 순간 설의 눈앞에 사내의 물건이 들어왔다.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퉁퉁 부어오른 입안으로 사내의 것을 우겨넣는 순간 피맛이 느껴졌다. 입안에 고인 피와 함께 밀고 들어오는 사내의 물건에 설은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단지 그래서였다. 그의 것을 악물은 것은 숨을 쉬고 싶기 때문이었다.

 

비명! 그리고 따라 들어온 사람들! 이어진 매질에 아득해질 무렵 누군가 다가와 설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왜 그랬느냐?”

 

분명 차갑기만한 손길인데, 윤설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몸은 타고난 기녀인데, 아직 길을 잡지 못했구나. 기녀로 살아도 너는 언젠가 치맛폭에 사내를 휘감아 꿀리는 최고가 될 아이다. 허나, 나를 따라 온다면 치맛폭에 사내 대신 부와 권력을 담을 수도 있을 터, 생각이 있다면 따라 오거라.”

 

온 몸은 끊어지고 부서진 듯 아파왔지만 설은 홀린 듯 길을 따랐다. 부와 권력을 손에 넣게 해준다는 그 말을 꼭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었다. 볼을 쓸던 서대비의 손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귀한 보석이라면 더는 굶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기방주가 그날, 손님을 대신 밥을 먼저 던져주었다면 선택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름도 신분도 배경도 달라져 황주성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홍비는 지금 문득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 끝일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서대비는 한 번도 끝을 말해준 적이 없었다. 서대비가 병석에 누워있던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부르지 않았기에 잊고 있던 질문은 이제 다시 꼬리를 물고 커져갔다. 어쩌면 진정 병환에 앓아 누워있던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홍비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홍비가 잡을 줄은 이것 밖에 없었다. 계집은 잊은 듯 지내던 왕은 홍비, 자신이 아닌 다른 계집에게 마음을 주고 있고, 아직 아들도 생산하지 못했으니 만개한 몸뚱아리가 지고 나면 달리 내세울 것도 없었다. 홍비는 차라리 차분해지는 마음이 되어 소맷단에 넣어둔 작은 유리병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근본도, 배경도 없이 몸 하나로 온 자리인데,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수 없다 다짐하는 홍비였다.

 

“마마. 염려가 되십니까.”

 

펼쳐놓은 수를 물끄러미 보던 서대비는 노상궁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마 잘 처리 할게다. 생각이 깊고, 셈이 빠르지 못해도 앞뒤가 분명히 보이는 계집이 아니더냐. 설사 다른 생각과 의구심이 든다하여도 지금은 달리 어찌할 방도를 찾을 수 없을게다, 수족이 되던 아이도 없거니와 주상의 마음도 없는데,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나 서대비의 음성은 여전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면 달리 근심이 있으십니까.”

 

서대비는 서책에 넣어둔 서찰을 가만히 꺼내들었다. 희미하게 퍼져오는 묵향은 마치 단비의 모습처럼 은은했다.

 

“내 제법 사람을 잘 본다 여겼는데, 이번엔 사람을 잘 못 보았다. 여리고 고운 꽃이라 사내가 빠졌구나 했더니 단단하고 강한 열매라 사내가 넣어 품었더구나. 여린 꽃이야 뿌리를 꺽어 내면 그만인데, 열매는 뿌리를 꺾어 내어도 홀로 살아 날 듯 하여 근심이구나.”

 

“회유할 방도는 없을 듯 합니까.”

 

“이미 마음을 다 준 계집이니, 무엇으로 회유하겠느냐. 상처를 내고, 끄집어 내도 견딜 제법 그럴싸한 계집.”

서대비는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햇살은 산허리에 비껴 퍼지고

바람은 은근히 언덕을 스치고

바위 틈 어디라 하여

봄이 잊고 갈 리 없으니

새순은 그렇게 돋아

봄볕을 타고 자라납니다.

 

“왜 이런 글귀를..”

 

곁에서 한참을 보던 노상궁은 말끝을 흐렸다.

 

“사내가 약해지는 것이 여인의 영루라 하지 않았더냐. 눈물로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내의 기게는 무너질 수도 있겠지. 서찰에 대한 답이 없어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믿으니 괜찮다.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겠지.”

 

전장에 지친 왕에게 보내는 단비의 서찰은 대부분 이러했다. 구구절절히 연모의 마음을 적어 보내지도, 그리운 마음을 사무쳐 보내지도, 그저 짧게 담아낸 여인의 속내에는 깊은 배려가 있었다.

노상궁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그럴싸한 마음이다.”

 

서대비는 인정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허나, 전하께서는 받지 못하셨으니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까.”

 

서대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꽤 오랜 시간을 걸어 잠갔던 마음을 연 주상이 아니냐. 쉽게 열지 않았던 만큼 쉽게 닫치지도 않을 터, 여인에게서 서찰이 오지 않는 다고 하여 깨질 인연이 아니다. 시일을 두고 천천히 가야 될 길이다.”

 

서대비는 탁자위에 놓인 서찰을 집어 하나씩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일렁이는 불꽃은 종이를 화르륵 삼켜 흔적 없이 만들었다. 수 십 여통의 태운 서대비는 마지막 서찰을 집어 노상궁에게 건넸다.

 

“알아두라 했던 이를 찾아냈느냐.”

 

“예.”

 

“태워 없애야 할 것을 태우지 않았다. 그만큼 위태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니 은밀히 처리하거라. 한 치의 실수도 있으면 아니 될 것이야.”

 

두 손으로 서찰을 받은 노상궁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고요가 감도는 수화전 내실 안으로 서대비의 그림자가 길게 번졌다.

 

 

 

 

 

 

****************************

 

 

전장은 넓었다. 맞서야할 적은 실체가 또렷하지 않아 시작과 끝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느덧 늦 봄, 눈이 많기로 유명한 묘산의 진지마저도 녹아내린 눈으로 제법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열흘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묘산을 차지했지만 해단의 군대는 꽤 많은 수의 병사와 군마를 잃어야만 했다.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여유를 둔 이틀간의 휴식은 더 없이 달콤했다. 군사들의 요란한 기합소리와 아궁이마다 솟아나는 뿌연 연기로 가득한 묘산의 아침은 꽤 번잡했다.

해단은 묵묵히 앞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긴 침묵을 끊어낸 것은 인규였다.

 

“전면적으로 대치하던 적군은 이제 세를 잃었으니, 승기는 잡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끝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대답지 않은 말이다. 수백의 희생이 있었으니 승리한다 하여도 너무 잃은 것이 크질 않느냐.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적군이던, 하늘이던 달려가서 베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라면 그대의 말에 당장이라도 군사를 내어 끝을 보았겠지만, 지금은 함부로 군사를 낼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군사를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숨어있는 적의 수도 가늠할 수 없고, 그들의 목적도 알 수 없으니, 언제고 다시 벌어 질 수 있는 전쟁이다.”

 

해단, 자신이 한 말에 인규의 헤아림이 미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해단의 말은 괜히 퉁명스러웠다. 확실하지 않은 매듭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희생을 감수하고 끝을 봐야 하는 것인지 해단은 결정할 수 없었다.

 

“괜한 말이다. 괜한 탓. 개의치 말라.”

 

“신은 오직 성심을 위할 뿐입니다.”

 

짧은 답은 언제나처럼 우직했다. 해단은 고개를 돌려 인규를 바라보았다. 봄볕에 그을린 까만 얼굴은 사내에게서 남자다운 기운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얼핏 보아도 또렷한 이목구비, 곧은 심성만큼이나 눈을 잡아끄는 외관이었다.

 

“벗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전쟁틈에 맞은 달콤한 휴식에 해단도 잠깐이나마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뜻밖의 말에 사내의 눈매가 커졌다.

 

“하문해도 되겠는가.”

 

“언제든...무엇이든 하문하셔도 됩니다.”

 

벗이라는 말은 그저 해단에게만 허용되는 말인 듯, 인규의 태도는 변화가 없었다. 해단은 희미하게 웃으며 인규의 어깨를 잡았다.

 

“혼처를 거절하는 것인가? 아니면 혼처가 들어오지 않는 것인가?”

 

순간 인규의 목덜미가 붉게 변했다.

 

“집 안 일이라 잘 알지 못합니다.”

 

“허면, 매일 궁에 잡아둔 내 탓도 있다는 말이로군.”

 

“어찌 그런 생각을..”

 

“되었다. 전장이 끝나면 그대에게 긴 휴가를 주어 쉬게 할 것이니 그때는 머리를 올리고 진정한 사내가 되어야만 황주성에 들일 것이다.”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그대의 곁을 챙기는 것 또한 나의 일이다. 꼭 그대 때문은 아니니, 뜻을 따라주었으면 좋겠다.”

 

해단은 뒷말을 덧붙이며 인규의 굳어진 어깨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마음과 달리 생각은 그를 염려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쳐내게 될까 자신을 염려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낯선 두려움이 가져오는 미세한 균열은 벌써 해단의 마음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댓글 '2'

Junk

2011.05.18 00:32:23

어억, 이게 웬일-0-입니까. 앞부분부터 다시 읽어야겠슴다... 그나저나 글을 옮기면서 전에 올리신 글 제목이 깨졌어요. 제가 고쳐놓겠습니다.

신지현

2011.05.18 20:53:32

앗. 그러합니까?

홈피~더 멋져졌단 얘기 제가 했나요? ㅎㅎ

사실 했지만, 한번 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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