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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칙 2. Glasses
“죄송합니다.”
오늘 이 말을 대체 몇 번 한 건지 모르겠다. 한 백 번쯤 했나? 허리도 몇 번을 굽혔는지 얼얼하다 못해 이제는 눈물마저 찔끔 나올 지경이다.
휴우, 누구한테 뭐라겠어. 실수한 장본인이 난데. 너무 막강한 발주 미스였다. 민망한 것은 나 때문에 팀장님까지 곤욕을 치루고 있다는 거다. 팀장님 도움으로 어찌어찌 사태는 수습했고 이제 지금은 사과하러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정말 무섭게도 강문우 팀장은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과하는 중에도 내 탓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지만 진심어린 표정으로 사과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사무실에 돌아왔지만 이미 다들 퇴근한 참이었다. 빈틈없는 팀장은 미리 시간되면 나머지 멤버들은 퇴근하라고 전화해두었다.
굳어 있는 내 앞에서 팀장은 자기 데스크 앞에 앉더니 넥타이를 풀어버린다. 그리고 와이셔츠 단추도 두어 개 끄르고, 안경을 벗더니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른다. 서류 더미 사이로 보이는 동안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팀장님…….”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확실히 20대, 아니 좀 과장한다면 1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겠……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죄송합니다.”
“그러잖아도 벌칙 생각중이야.”
“……네.”
입이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슴돠.
고개를 푹 수그린 나를 빤히 보던 팀장은 안경을 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안경 쓰고 와.”
“예?”
기분 탓일까, 그가 희미하게 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렌즈 끼지? 그럼 안경도 여분으로 있을 거 아냐.”
“그렇긴 한데요…….”
“그럼 쓰고 와. 단, 이게 벌칙이란 건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 것. 오늘따라 렌즈가 안 맞아서 그렇다고 해.”
나는 멍하게 서 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앞에 있는 그의 눈빛이 지독히 심술궂게 보인다는 거다.
“그건 너와 나만의 비밀로 하는 거야.”
왜 웃으시죠? 그게 그렇게 즐거운 건가요?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요? 도무지 기분을 파악할 수 없는 남자는 곤란하다.
“저기요, 제가 저번에 안경 깬 것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아직까지 화나셨으면 지금이라도 보상해드릴게요.”
필사적으로 말했지만 팀장은 가차 없었다.
“그딴 거 필요 없어. 현수 씨는 월요일에 안경만 쓰고 오면 그만인 거야.”
“팀장님, 너무하세요. 저, 안경 쓰면 진짜 촌스러운데…….”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다시 고개를 숙인다. 안경이란 예쁜 사람이 쓰면 더 세련미를 풍기지만 평범한 얼굴에게는 쥐약과 같은 건데, 너무해요.
“벌칙은 벌칙. 난 김현수 씨 안경 쓴 얼굴이 보고 싶은 걸.”
그는 가타부타를 따질 수 없게 하는 태도로 잘라 말하고는 코트를 입었다.
“월요일에 보자고.”
-
꿀꿀한 주말, 쇼핑으로라도 기분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친구와 삼성동에 나왔다. 청바지를 한 벌 사자 조금 무거웠던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으악……!”
친구와 지하 몰의 샌드위치 가게에 앉아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여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왜 그래?”
“어, 응? 아, 아무 것도 아니야.”
하고 말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방금 지나간 사람들의 잔상이 남아 떨어지지를 않았다.
분명 강 팀장이었다. 그것도 여자와 함께 있었다. 내가 아는 여자와…… 그것도 여느 때와는 다른 캐주얼한 복장으로…….
같이 있던 사람, 분명 비서실의 윤예지 씨였지?
비서실 윤예지 씨는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비서실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다. 일도 잘하고 스타일도 좋을 뿐 아니라 지적인 매력이 있고, 게다가 드물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미인이다. 게다가 유학파라 영어도 잘하고, 지난번에 내가 안경을 깼을 때도 팀장의 영문 자료 검토 작업을 도와주었다.
데이트? 저 두 사람이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지. 사실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윤예지 씨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미인이라 그런지 안경이 정말 잘 어울린다. 내가 안경을 쓰면 그저 우스워 보이는데……. 이런 나한테 안경을 쓰라니, 강 팀장님 정말 짓궂은 사람이야! 남들 앞에서 날 톡톡히 망신시키고 싶은 게 분명해!
나는 친구가 옆에 있는 것도 잊고 탁자 위에 납작 엎드렸다.
-
하지만 벌칙은 벌칙이라 월요일 아침, 안경을 쓰고 출근한 내 기분은 딱 죽고 싶었다.
“웬일이야? 안경을 다 쓰고?”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이다. 영업부 희주 선배가 웃으면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 저어, 렌즈가 안 맞아서요.”
“그래? 인상이 좀 달라 보이긴 하지만 어울리네.”
“고맙습니다.”
어차피 빈말인 거 다 알거든요.
짧게 대꾸하고 걸어가는데 누군가 붙잡는다.
“여, 정말 김현수 씨 안경 쓰니 또 달라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다가선 사람은 제1기획부 박상우 대리다. 기분 탓인가, 가끔 나한테 치근덕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도 역시 그렇다.
“오늘 같이 식사라도…….”
“어이, 김현수 씨.”
그 때 뒤에서 침착하고 싸늘한 음성이 들린다.
“아, 팀장님.”
어제 보여준 심술궂은 웃음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강문우 팀장이다.
“어제 실수 뒤처리 하려면 오늘도 야근해야 한단 사실 알고 있겠지?”
“……네.”
그렇죠, 네에. 안경으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습니다요.
-
“김현수 씨, 안경 썼네?”
탕비실에서 마주친 것은 오늘 가장 마주 대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경이 어울린다. 그렇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안경을 벗었을 때도 미인이란 이야기이고, 안경을 쓰면 플러스로 한층 세련된 인상을 준다. 나는 강렬한 질투를 느끼면서 윤예지 씨를 올려다봤다. 나보다 키도 한참 크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은데 피부는 훨씬 매끈한 것 같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매혹적이다.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날씬한 다리는 타이트스커트 슬릿 사이로 눈부시게 뻗어있었다.
“왠지 색다르고 귀엽다.”
긴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예지 씨가 웃었다. 반어법인가? 농담인가? 나는 뭐라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좀 지쳐 보이네. 회사 일이 고되죠?”
“괜찮습니다, 선배님.”
“그럴 리가. 강 팀장이 좀 깐깐한 성격이어야지. 시어머니가 따로 없죠?”
“아닙니다.”
“어머, 괜히 뺄 것 없어요. 나 안 이르니까.”
“아닙니다.”
말하며 윤예지 씨를 보다가 흠칫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려니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구 웃기 시작했다.
“아, 미, 미안해요. 갑자기 웃음이 나서…….”
그녀는 한참 웃은 끝에 눈물을 닦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안경, 혹시 강 팀장이 쓰고 오라고 한 거예요?”
“예?”
갑자기 머리가 번개를 맞아 텅 빈 것처럼 멍해져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더니 예지 씨가 손가락을 딱 튕긴다.
“맞구나! 그죠?”
“…….”
“그럴 줄 알았어. 근데 어울려, 어울려요. 정말……. 후후후……. 아아, 미안. 이만 갈게. 근데 안경 정말 귀엽네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나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몸을 돌리는 윤예지 씨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게 무슨 말이지? 너와 나만의 비밀이라고 하더니 예지 씨한테까지 털어놓은 건가? 기가 막혀! 기가 막혀서 정말!
-
팀장이 준 일을 끝마치고 나니 벌써 9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 다른 사람들은 일이 없어서 텅 빈 사무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저녁을 건너뛰고 일에만 몰입했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가지고 퇴근할까…… 하며 일어서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끝났어?”
강문우 팀장은 내 책상 옆으로 오더니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네, 지금 출력해서 드리겠습니다.”
“됐어. 그냥 파일로 보내. 그건 내일 하고, 식사 아직 안했지? 같이 나갈까?”
“괜찮습니다.”
“……?”
무뚝뚝한 내 대꾸에 팀장이 눈썹을 가늘게 찌푸리며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식사 안했잖아.”
“배 안 고픕니다. 저, 일 끝냈으니 이만 퇴근해도 되겠죠?”
나는 코트를 집어 들고 나가려다가 팀장을 돌아보며 쌀쌀하게 뱉었다(그 순간 분노 때문에 간탱이가 부은 게 틀림없다!).
“벌칙은 이걸로 된 거죠? 내일부터는 절대 안경 쓰고 오지 않을 겁니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큰 손이 불쑥 뻗어 나오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강 팀장. 문이 닫히고 단 둘 뿐인 엘리베이터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싸하니 감돈다. 내가 침을 삼키고 싶은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녁 같이 안하겠단 얘기야?”
“왜 갑자기 이 시간에 저녁을요?”
“둔한 거야, 아니면 둔한 척하는 거야. 새삼스럽게 왜 그래?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잖아.”
데이트? 뭐? 데이트라고라? 사람 놀리는 것도 유분수지!
“데이트는 윤예지 선배랑 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으시나 봐요?”
“뭐?”
팀장은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여기서 윤예지 씨 얘기가 왜 나와?”
“코엑스에서 봤어요. 정말 잘 어울리던데요, 두 사람.”
“지금 질투하는 거야?”
“네.”
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질투가 나요, 솔직히. 지금 뭐하시려는 거죠? 안경미녀 윤예지 선배랑 저랑 둘이 세워놓고 비교라도 하시려는 거예요?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인데 왜 맘대로 붙이고 그러세요. 그런 장난, 딱 질색이니까 삼가주셨으면 좋겠어요. 둘만의 비밀이니 뭐니 해놓고 남들한테 다 불고 다니지도 마시고요.”
“하!”
뒤에 서 있던 팀장은 갑자기 내 앞으로 돌아오더니 화가 실린 동작으로 어깨에 손을 짚었다.
“김현수 씨,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예지 선배, 다 알던데요? 팀장님이 안경 쓰고 오라고 했다는 거.”
“예지가?”
예지가……라니, 역시 그렇게 친근한 사이였나? 한층 울고 싶은 기분이 되려는데 갑자기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너, 정말…….”
그러더니 이마에 손을 얹고 피식 웃는다. 뭐니, 정말!
“왜 웃으세요? 사람 우습게 만드시려는 거예요?”
“어이, 김현수 씨.”
강 팀장은 고개를 들더니 입술 끝에 미소를 띠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나름 똑똑한 줄 알았는데 눈치 제로였어.”
“예?”
“꼭 말로 해야 알아? 내가 김현수 씨 좋아한다는 거.”
그 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아 문이 열렸다. 내가 멍하니 서 있는데 팀장이 손을 턱 잡더니 밖으로 끌어낸다.
“지난 번 생일 건이 있었는데도 몰랐단 말이야?”
“아니,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로 암말 없으셨고….”
“그럼 이 자리에서 확실히 짚어주지. 나 김현수 씨 좋아해.”
강 팀장은 힘을 실어 또박또박 말했다.
“네 얼굴도 좋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 확실히 윤예지 씨, 안경미녀긴 한데 그렇다고 사람을 좋아한단 것도 좀 웃기지 않아?”
“하지만…….”
“난 분명히 그쪽이 좋다고 했어. 하긴 윤예지 씨가 객관적으로 봐서 미인이긴 하지. 그렇지만 김현수 씨는 나하고 같이 있을 때 현빈이나 조인성이 지나가면 쫓아가서 사랑고백할 거야?”
“말이 돼요?”
“그럼 그만 좀 튕겨. 그쪽도 날 보고 있잖아.”
“예?”
“나도 계속 보고 있었다고.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돈 파악할 수 있어.”
1층 로비에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라 싶다. 막으려고 해도 저절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잽싸게, 하지만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태연한 척 빠른 걸음으로 회사 문을 빠져나온다. 골목을 돌고 돌아 인기척 없는 곳으로 와서야 겨우 돌아보았다. 팀장은 느긋한 태도로 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몰랐는데 자뻑이셨군요, 팀장님.”
“어울려.”
어이없음에 툴툴대고 있는데, 팀장이 딴 소릴 했다.
“뭐가요?”
“안경, 어울린다고. 예지보다 더 잘 어울려.”
또 예지란다…….
“이쯤에서 말해두지 않으면 또 삐칠 것 같으니 얘기하지. 예지는 내 이종사촌이야.”
“이종……사촌?”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서 상대 취향 정돈 잘 알아. 그 녀석, 결막염이라 렌즈는 못 끼고 보기와는 다르게 라식 같은 건 무서워서 못하지. 그래도 다행이야, 안경이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니까. 현수 씨보다는 못하지만.”
“……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근데 왜 오늘 일 시키셨어요? 안경 쓰는 걸로 벌칙은 끝난 거 아니었어요?”
“취미생활에 호응해주는 것 정도로 실수를 보상할 순 없지. 일에서 치른 빚은 일로 갚는다.”
냉정한 목소리에 나는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팀장은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보더니 또 예의 심술궂은 미소를 날린다. 아, 열 받아. 뭐라도 좋으니 다박다박 받아치고 싶어.
“사디스트라고 하는 거죠, 팀장님 같은 사람.”
“요즘 받아치기가 부쩍 늘었는데?”
“거기다 이중인격이에요. 그런 얼굴을 하고 안경 페티시라니.”
“내 여자 안경을 내 손으로 벗기는 걸 좋아하거든. 단, 안경을 벗기는 건 나만 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팀장 본인도 안경을 쓰고 있다. 쿨하고 진지한 안경 속에 감춰진 것은, 나이보다 상당히 어려보이는 동안. 그리고 다름 아닌 심・술・보. 안경 안쪽에서 눈동자가 달콤하게 빛나고 있다. 아아, 얄미로워라.
“이기주의자.”
“표현이 좀 엇나갔어, 둔탱이 부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안경이 벗겨지고, 거의 동시에 입술에, 그리고 스치듯 귓전에 뜨거운 것이 닿는 걸 느꼈다.
“둔한 너한테 말해두는데, 이런 건 독점욕이라고 하는 거야.”
팀장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가볍게, 그리고 이어서 격렬하게 훔친다.
이 남자가 진짜? 이곳은 아직 회사 근처란 말이에요!
하지만 생각과 달리 내 팔은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벌칙 2. Glasses [完]
리뉴얼 기념으로 또 하나 올립니당. m(_ _)m
아이고 이아침에 이런 달달한 ㅋㅋ
아주매 맴이 놀랬어요 지금 누가 옆에 없는 게 천만 다행입니다
정크님 이런 달달한 거 마이 기대해도 될까요 ^^
캄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