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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얼음에 흔들리다
56
조명에, 함성에, 뇌가, 심장이 흔들린다.
앞에서 들어오는 날렵한 차기를 피해 검은 가면의 남자, 아니 강인이 몸을 뒤로 젖힌다. 이어서 또 한 명이 얼굴로 손을 뻗어온다! 붙잡히나…… 했으나 강인은 그것도 손으로 차단하고는 팔꿈치를 뒤로 강하게 뻗는다. 뒤에서 쳐들어오던 한 명이 뱃속에서 울리는 비명을 토하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강인은 사이드 스텝으로 돌아서더니 다가서는 놈의 후두부를 가격한다! 그리고 로 킥! 종아리를 후려친다! 일시적으로 비틀거리거나 고꾸라지는 것도 그것도 잠시, 다시 단 한 사람을 둘러싸고 흡사 폭격 같은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심장박동이 자꾸만 거세진다. 이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미칠 듯이 숨이 막혀오는데, 그런데도 계속해서 펌프질을 해댄다. 뭐지……? 붉은 얼룩이 그의 어깨 위에 번져간다.
피……?
피…… 맞다.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어!
강인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의 눈에 살기가 번뜩이고 있다. 그냥 덤벼드는 게 아니야! 죽이려 하고 있어! 어떻게 이런 세계가 있을 수 있지? 이런 곳이 있으리란 상상도 못했다! 그냥 치고받는 정도가 아니잖아! 정말로 죽을지도 몰라! 아아, 이런 걸 보러 온 게 아냐! 이런 걸 알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시선을 뗄 수 없다.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저 남자는.
벗어나야 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마구 젓는다.
“바보, 오늘따라 움직임이 둔하네. 수면부족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저 사람들, 장갑 안에 뭔가 넣고 있는 것 같은데? 뭐지? 내 착각인가?”
“무슨 소리에요? 무기는 쓰지 않는댔잖아요!”
진연은 가면을 벗더니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애니? 하고 묻는 표정이다.
“이게 스포츤 줄 알아요? 모든 걸 룰대로만 하게.”
말문이 막힌 민하를 보더니 진연이 진지하게 링 쪽을 가리켰다.
“봐요, 강인도 그렇고 넷 중 두 사람, 손에 낀 거. 스파이크 장갑이지 글러브가 아니잖아. 주먹 아닌 손가락으로도 찌를 수 있단 말이죠. 저기 있는 바보도 다를 바 없어. 스포츠에서 팔꿈치를 쓰거나 뒤통수를 공격하는 것 봤어요? 여긴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치명타를 감안한 뒤 들어오는 곳이야.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구요. 이봐요, 순진한 아가씨. 조언 하나 할까요?”
그녀는 사탕수수를 짜낸 것처럼 달짝지근한 웃음을 웃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해요, 저 녀석.”
“네?”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 없다구요. 뭘 봐도,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짓을 당해도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아.”
왠지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어떤 조건을 걸었는지,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적당히 상대해주다가 아가씨 갈 길을 가요. 호기심 같은 건 절대 갖지 말고.”
“왜…… 왜, 제가 호기심을 가질 거라 생각하세요?”
“저 앨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은 다 똑같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온전히 저 앨 아는 사람은 없어요. 알 필요도 없겠지만…….”
진연이 그렇게 말하며 가면을 도로 쓴 순간, 민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안 돼……! 피해, 어서! 아아, 그만해, 제발……!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이 새어나올 것 같다.
ㅡ후회할 걸.
아니야! 틀려!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무서워…… 무서워서…… 떨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
늑골 한 대는 나간 것 같군.
몸이 밀려 강하게 로프에 부딪친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을 길게 할 여유는 없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나기 같은 공격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네 명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헤비급의 주먹들이다. 이미 강인은 몇 대를 맞았지만 급소만큼은 절대적으로 빗겨나도록 하고 있었다. 다른 곳보다도 안면을 맞으면 바로 뇌가 흔들리는 쇼크가 올 것이다.
강인은 링에 오르는 사람치고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축이었지만 스텝만큼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치 빨랐다. 덕분에 안면과 명치, 하체만큼은 양팔 가드와 빠른 몸놀림으로 인해 어떻게든 보호할 수 있었지만 어제 부상을 입은 어깨만큼은 미처 방어할 수 없었다. 타격을 입는 것보다 더 곤란한 것은 잡혀서 그라운드 게임이 되는 것. 절대로 바닥에 등을 대면 안 된다. 네 명한테 붙잡혀서 바닥으로 쓰러지면 그걸로 게임 오버다.
강인은 전날 거의 자지 못했다. 민하를 데리고 나와 방에 눕히고, 다친 팔을 치료한 후에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 같은 건 사치였고, 그래서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재수 없게 바로 전 날 어깨를 다쳐 봉합한 상태.
2차로 찢어진 환부에서 계속해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붕대는 이미 흠뻑 젖어 있다. 솔직히 다친 본인은 어깨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는 참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ㅡ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정명회는 어디까지나 청현회의 하수야.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부술 수 있지.
승인은 1대4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지만, 만약 했다 쳐도 강인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고보스가 병석에 있고 파가 셋으로 갈린 정명회는 솔직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실제로 청현회 휘하에 있다가 독립한 조직 중에 청현회의 손가락 하나에 물방울로 산화한 것들은 즐비하다.
유감이지만, 정명회도, 중간보스인 강인도 약자. 청현회 보스의 막내아들이라는 레테르에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제3자들은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싸움이란 원래 속임수인 것을. 능하면서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가까움을 먼 것처럼 보이게 하는 동시에 먼 것을 가까운 것처럼 보이게 함일 뿐인 것을.
어차피 자신이 속한 상황 자체가 1대4나 다름없었다.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 그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를 자신과 타인의 의지에 의해 시험해볼 뿐. 네 명과 맞붙는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상대가 어지간히 강한 상대여도 마찬가지다. 단, 뒷골목에서의 싸움이라면 말이다. 강인은 그런 싸움을 몇 번이나 했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이용했다. 12살 때는 상대방의 급소를 이로 물어뜯었던 적도 있다. 14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저 이국의 뒷골목에서 그를 만만하게 보는 이는 없을 정도로 악명이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갇힌’ 공간이다. 링 주변에는 빽빽하게 사각의 철망이 쳐져있어 빠져나가 반격을 노릴 틈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뒷골목에서처럼 하나씩 자기 페이스로 끌어들여 각개격파하기가 힘든 환경인 것이다.
파이터 1의 손이 급소인 옆 갈비뼈 아래쪽으로 뻗어왔다. 링에 등을 대고 있던 강 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해 사이드로 돌았지만, 절묘한 타이밍으로 파이터 2의 주먹이 어깨를 가격해온다. 맞기도 전에 다쳐서 땜질한 어깨 부분이 다시 찢어진 걸 강인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약간 움직임이 둔해진 걸 알고 있었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다. 다치지 않은 왼팔을 주로 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 팔을 쉬게 하면서까지 넷을 이기기는 힘들 것 같다. 놈들은 노골적으로 급소와 함께 오른팔도 같이 노리고 있었다. 첫 타격을 주고받을 때 이미 간파했을 터.
게다가 네 놈들의 눈 흰자위에는 기묘한 핏발이 서있다. 약물을 복용하고 지하투기장 링에 오르는 놈들은 많지만 눈앞의 놈들은 예사롭지 않다. 머릿속 상념 일체를 마비시킬 수준의 각성제를 복용했을 게 분명했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은 구하기도 힘들 강력한 마약이겠지.
불쾌함이 목구멍 끝까지 치받혀 올라온다.
그 어떤 것이라도 손대는 걸 겁낸 적은 없었다. 단 하나, 약을 제외하고.
누군가가 약에 중독되어 죽었던 기억. 환각상태에 빠져서 자신의 목에 밧줄을 감고 텅 빈 눈이 되어 침을 흘리며 죽어갔던 광경을 본 이후로 약에만은 손을 댈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상처 틈에서 스며 나온 피가 붕대를 흠뻑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다.
입술 틈에서 습기어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약 같은 건 필요 없다.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데는 피 냄새만으로 충분하기에. 그런데 거기에 불순물이 섞이다니 불쾌하군. 만약 나를 우습게보지 않았다면 이보다는 오래 끌어줄 생각이었는데, 형님들.
“이제 그만 빙빙 도시지. 슬슬 끝을 보자고.”
한 놈이 켈켈 웃으며 말했다. 거친 웃음소리가 상대의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강인은 대답 대신에 흐트러진 숨을 한데로 모았다. 입가에 긍정의 미소가 피어오른다. 요청에 동조해주지.
솔직히 지겨워서 못해먹겠거든?
파이터 1이 안면을 가격해온다. 강인의 얼굴이 슬쩍 움직여 피함과 동시, 번개 같은 속도로 검지와 약지를 뻗어 양 눈을, 그리고 중지로 미간을 찌른다. 눈은 격투가에게 있어서 제2의 생명 같은 존재다. 그리고 미간은 그 자체가 급소다. 당한 놈이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붙들어 무릎을 들어 올려 또 하나의 급소인 갈비뼈 아래를 가격……! 뼈가 부러지는 충격으로 쓰러지는 상대를 발로 차올려 덤벼드는 파이터 2에게 날려버린다……, 하나.
최강수준 파이터들의 복부는 대개 단련되어 있지만 급소는 별개다. 피하지 못할 강도와 스피드로 공격하면 성공한 순간, 상대는 움직이지 못한다. 파이터 3의 명치에 왼손 주먹,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왼손 중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의 튀어나온 부분이, 그리고 바로 연타로 목젖에 손가락이 파고든다! 목에서 붉은 피 보라가 튀어나온다.
컥!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남자가 무너진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둘.
그리고 덤벼오던 파이터 4의 안면에 확실한 클린히트(clean hit), 그리고 무릎치기로 연타를 보내려는 듯 했으나, 페인트(눈속임)였다! 타격지점이 일순 전환, 엄지발가락 끝이 날카로운 드라이아이스 조각처럼 날카롭게 4의 눈을 찌른다.
몸은 가장 무서운 흉기, 안구 터지는 감각이 발끝에서 진동하고 이어, 경기장 내부를 진동시킨다! 시야가 보이지 않게 되면 그걸로 게임 끝. 다음은 후방에서 덤벼드는 2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한 후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4의 급소를 발로 차 터뜨린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대의 급소에 차있던 물이 흘러나와 옷을 흥건하게 적시자, 이제는 바닥으로 쓰러지는 일만이 남는다……! 셋.
몸무게가 제법 나갈 법한 상대로부터 보디블로가 들어온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상대, 파이터 2는 깊숙이 파고든 강인에게 붙들렸고 다음 순간,
여기저기서 가쁜 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강인과 얽혀 바닥에 떨어진 남자……. 그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진다. 제대로 된 타격을 할 때의 팔꿈치는 피부를 찢고 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흉기가 된다. 강인의 팔꿈치가 한 조각 검이 되어 상대 어깨의 쇄골을 뚫었다. 몸이 얽혀서 바닥에 떨어지는 동안 압력은 몇 배가 되었을 것이다!
허공을 가르는 비명. 쇄골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텅! 하고 링 바닥에 두 개의 몸이 뒹구는 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넷, 그리고 마지막.
붉은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넘쳐 바닥을 흥건하게 물들이고 있다.
관중들은 잠시 동안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정적ㅡ 이어지는 탄식.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환호가 사각의 공간을 채운다.
“후…….”
장내의 소란 속에 VIP석에 앉아 있던 지승인은 가볍게 숨을 토해냈다.
이런, 강인이 녀석. 쇼는 쇼다워야 재미있는데 답지 않게 성급했군. 어느 정도 주고받는 과정은 있어야 하지 않나. 뭐, 됐어. 건질 만큼은 건졌으니. 이 정도면 이곳에 있는 년 놈들 파괴욕구도 어느 정돈 채워졌겠지. 게다가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걸 건진 것 같고.
그의 시선은 철망 앞에 붙어서있는 어떤 여자에게 멎어 있었다. 얼음조각처럼 굳어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떤 여자에게. 가면을 반쯤 쓰고 있었지만 느낌이 온다. 자신이 넘겨준 사진속의 어린 얼굴이 그 가면과 서서히 겹쳐진다. 여기까지 데려왔을 정도라면, 오, 이런. 벌써 클리어 한 건가? 제법인 걸?
그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기가 서서히 퍼져나간다.
하지만 어쩌지, 동생.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57
밤새도록 꿈을 꾸었다.
끝도 없는 어둠 속, 누군가가 서 있는 꿈을.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공간, 손을 뻗어보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누구? 당신은…… 누구죠?
민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신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자도 잔 것 같지 않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40분.
지하투기장의 시합이 끝나자마자 차에 태워져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만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도 벌써 옛날 일처럼 아득한 동시에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영상이 선명하다.
똑똑, 하고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냐?”
“오빠?”
며칠에 한 번 꼴로나 집에 들어오는 민호의 목소리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벌써 일어나다니 오늘도 출근하는 건가? 민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오빠, 아침 먹고 나갈 거야? 오늘도 일하지?”
“아니, 오늘은 안 해. 주말 푹 쉴 거야.”
거의 밤새고 들어오다시피 한 다음날이라 피폐한 모습의 민호가 대꾸했다.
“와, 잘 됐네. 성은 언니 안 만나?”
“만나야지. 그 전에, 용인 갈 생각인데 괜찮냐?”
“당연히 가야지.”
용인에는 부모님 산소가 있다. 두 분이 돌아가셨던 날은 하필 그 해의 음력설 다음 날이었다. 제삿날은 음력으로 따지기 때문에 편의상 구정에 차례를 지낼 때 한꺼번에 제사도 드리고 있지만, 그런 한편으로 양력기일에는 둘이서만 산소에 가서 얼굴을 비추고 오는 게 남매의 매년 행사다. 올해 양력기일은 사흘 전인데, 민호가 너무 바빠서 당일에는 미처 가지 못했다.
“얼굴만 비추고 술이나 좀 부어드리고 오자. 참, 성은이랑 성원이도 같이 가.”
“성은 언니는 그렇다 치고 성원 오빤 왜?”
“용인 갔다가 대부도 갈 거니까.”
“대부도?”
“그래, 대부도. 거기 성은이네 별장 있거든. 나도 그렇고, 성원이 놈도 그렇고 간만에 주말에 시간이 비는 거니까 모여서 쉬자고 얘기 끝냈어.”
“아니, 난 빠질까 봐. 오빠랑 성은 언니 가는데 왜 내가 끼어.”
강인과 헤어지고 며칠간 집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지금도 놀 기분은 아니다.
“성원이도 간다니까 그러네. 어차피 불청객 끼는 건 하나나 둘이나 마찬가지야. 너 용인 갔다 혼자 와서 뭐해먹으려고? 거기 관리인 아주머니 음식 정말 잘하신다. 가서 몸 보양 좀 해. 올케가 니 생각 끔찍이 하더라.”
민하는 고개를 숙였다. 성은의 호의라면 아무래도 거절하기가 어렵다. Yes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금방 준비할게.”
그 말에 안심한 표정으로 방을 나가는 오빠를 보다가 민하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생각해냈다. 맞다 참. 오빠가 시킨 게 있었는데.
ㅡ전하면 알아. 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오빠에게서 받은 청첩장이 보이지를 않는다. 민하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언제부터인지 떠올려보려 애썼다. 사흘 전, 강인이 이 집에 들른 날까지는 분명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데…….
휴대폰을 들었다. 귀신처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남자가 오해하기 전에 미리 손을 써둬야 한다.
오빠랑새언니랑그사촌오빠되는분이랑대부도가요 이상한생각금지! ^-_-^
전송버튼을 누르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몇 줄의 문자를 다시 한 번 보낸 후에야 엷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며칠 전 엿봤던 어둠과는 전혀 반대의 눈부신 아름다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걸까.
나를 둘러싼 세상이 일시에 바뀌어버렸다.
*
휴대폰이 진동한다. 침대에 누워있던 강인은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진연이 한 발짝 빨랐다. 그녀는 문자를 확인해보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대체 어떻게 괴롭혔기에 이런 문자를 남겨?”
강인은 말없이 진연에게서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들여다봤다. 화면을 보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뜬다.
참혹시내책상위에있던청첩장가져갔어요? @@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둔탱이로군.
“찢은데 또 찢어놓고 웃음이 나오냐? 엉?”
병실 입구 쪽에서 타박의 소리가 들린다. 강인의 주치의(?)라 할 수 있는 운이 소독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중키에, 눈은 날카롭지만 입술이 불그레해서 어딘가 신경질적이면서도 귀여운 인상을 주는 남자다. 나이는 진연보다도 많지만 날씬한 체구라 그런지 진연과 마찬가지로 2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
강인은 치료를 위해 상반신을 벗은 채 누워 있었다. 늑골 8번이 골절이었지만 위치상 깁스를 할 수가 없어 압박대만 감아둔 상태다. 뼈에 금이 간 어깨 쇄골 근처는 어제 새벽에 서둘러 깁스를 했고, 오른팔 상단의 두 번째 찢어진 상처도 다시 정성들여 꿰맸다. 만 하루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가 퇴원 전에 마지막으로 소독을 받으려는 참이었다. 원래는 족히 한 달은 입원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새끼, 말 안 들을 텐데 뭐.
“신경 줄도 없으니까 편하게 죽을 수 있잖아? 어디 길바닥에서 뒈지든 말든 이젠 관심 끄고 싶으니까 이깟 기스 따윈 혼자 처리하셔.”
“아휴, 정말이지 끼리끼리 논다니까? 잔소리 말고 어서 해.”
“나 아침 잠 많은 거 몰라? 왜 사람을 새벽부터 깨우고 지랄이냐고.”
“당신이 젤 믿을 만하니까 그러지. 그런 솜씰 갖고 맨날 띵가띵가 놀면서 치료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거 참말 인력자원 낭비라고 생각돼.”
“아침부터 단잠 깨우는 웬수들만으로도 충분히 지겹거든? 씹탱, 왜 두 번씩 손쓰게 만들어. 그건 낭비 아니냐? 그냥 깨진 채로 살아, 이 민폐쟁이들아.”
“어깨뼈에 금 가고 늑골까지 골절됐는데 그게 말이 되니? 피도 너무 흘려서 수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며.”
“됐어. 저 새끼 뼈야 냅둬도 알아서 붙을 걸? 그리고 냉혈로 태어난 놈이 피 몇 방울 흘려봤자 앞으로 족히 백 년은 더 칼지랄하다 자빠질 텐데 뭐."
운과 진연의 입씨름이 귀에 들리지 않는 듯 드러누운 채 강인은 왼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런 강인의 오른쪽에 서서 운이 붕대를 풀더니 팔 상단의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진연은 얼굴을 찌푸렸다. 창상이 깊은 데다 두 번이나 같은 자리가 찢어져서 꽤 아플 텐데도 상처를 꿰맬 때 강인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정말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 없는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그 얼굴은 아직까지도 창백하기 짝이 없다. 아마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몸 하나는 예술품인데 이렇게 기스가 많아서 어쩔 거야.”
“얼굴도 예술이잖아.”
“아, 네에, 그렇죠. 속이 썩어서 문제죠.”
입은 잘도 살아계시네요. 창백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뱉어내는 말은 너무나 태평스러운 상대에게 진연은 눈을 흘겼다.
“그래도 용케 얼굴은 괜찮네?”
“신도 손대긴 아깝다 싶으셨던 모양이지.”
“지강인이 신을 운운해? 너 무신론자 아니었니?”
그 말에, 소독을 끝내고 붕대를 감고 있던 운이 쿡 웃었다.
“명진연 씨, 이 잘난 면상 엉망이 된 것도 구경 못했다니 세상 헛살았네.”
“어머, 봤단 말이야?”
요란을 떠는 진연을 보며 강인은 ‘귀찮군.’ 하고 다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사실은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퇴원한댔지? 빨리 돈 내놔.”
운이 큰 소리로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강인의 인생관이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라면, 그의 좌우명은 ‘현금 외엔 안 믿는다.’다.
“어휴, 어련히 알아서 줄라구 밝히긴.”
“이 새끼가 평생 가도 나 같은 의사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야, 같은 일로 또 쳐들어오면 메스 집어던진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기어이 그 자리에서 돈을 받아갔다.
운의 개인병원은 작은 빌딩 5층이었다. 돈 받은 뒤로는 쳐다도 보지 않는 의사 놈을 뒤로 하고 유리문을 나선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진연이 물었다.
“너, 저 인간한테는 유난히 약하더라? 원래 입이 제법 거칠다지만 저렇게 막 지껄이도록 내버려둬도 돼? 왜 그런 거야?”
“목숨을 빚졌거든.”
“언제?”
“오래 전 일이야. 몰라도 돼.”
“뭔 놈의 비밀이 그렇게 많아?”
진연이 툴툴거리자 강인이 훗, 하고 바람 새는 웃음을 내보낸다.
“강아지가 캥캥 짖는 거에 일일이 반응해 봤자잖아.”
“그 아가씨한테도 좀 그렇게 너그러워봐라. 아니, 그게 아니라……."
클럽 Chilly의 마담은 무심코 목울대를 울렸다.
“이제 그만둬. 그 아가씨,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어. 너랑은 정말 안 어울려.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거 알잖아. 게임도 지나치면 몸을 망친다구.”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발을 디딘 강인은 먼저 들어간 진연이 버튼을 누르는 것을 느긋하지만 서늘하게 응시했다.
“그쪽 입장에서 충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명진연 씨. 당신 애인, 아니, 잠자리 상대라고 하나? 내 형 지승인이 손에 넣으라고 했었는데 몰랐어?”
“전혀 몰랐어. 형이 그러라고 덥석 받아들였단 거야? 천하의 지강인이?”
상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진연은 고개를 저었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런 이유로 손을 뻗었을 리 없지. 내가 지금의 말을 믿을 바보가 아니듯이 너도 지시를 순순히 따를 바보가 아니니까. 근데 말이지, 이젠 이유를 알 것 같은데?”
그녀는 살짝 어깨를 들어올렸다.
“닮았어.”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를 진연은 탐색하듯 지켜보았다.
“솔직히 생김새는 별로 안 닮았는데, 잘 모르겠어. 뭔가가…… 자꾸 연상시켜. 굳이 말 안 해도 이미 알고 있겠지? 내 말 잘 들어. 충고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 그만둬, 너한테도 좋지 않을 거야. 내 예감이 그래.”
강인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은 채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액정에 시선을 박았다.
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문득 파악할 수 없는 부류의 섬광이 스쳐간다.
“대부도라…….”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뱉어내는 그를 진연은 못내 불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58
용인의 공동분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휑한 바람만이 맴돌 뿐이다.
간소하게 차린 과일과 술을 무덤 앞에 두고 민호와 민하는 나란히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렸다. 성은과 성원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아빠, 늦어서 죄송해요.
아빠, 나 요즘 너무 혼란스러워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하나도 판단이 서질 않아요. 알려주세요. 내가 그 남자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만족하고 물러설지.
근데요, 엄마. 문제는 나예요. 소름끼치게 싫었는데, 자꾸 알고 싶어져요. 자꾸 생각이 나요. 정말 이상한 애죠? 엄마, 나 어떡해야 해요?’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죠?
지금도 가끔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덕택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것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부디, 민하를 지켜주세요. 일 때문에 제가 눈을 떼고 있는 중에도 이 녀석이 바보짓을 하지 않도록.’
남매는 동시에 눈을 떴다. 약간 불그스름하게 변한 민호의 눈을 보고 성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원은 그런 민호와 성은을 보다가 민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술병을 집어 들고 동그란 무덤 앞으로 가는 중이었다. 긴 머리카락에 가려서 하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민호가 여동생의 뒤를 따라 무덤 옆으로 가서 술병을 받아들고 고루 술을 뿌렸다.
성원은 그 광경을 맑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혹은 생각을 지운 것처럼도 보였다.
고즈넉할 정도로 조용한 2월의 아침이었다.
*
담백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일까.
정원이 널따랗게 펼쳐져있는 별장을 둘러보면서 민하는 생각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곳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에는 이파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인공폭포도 지금은 정지 중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별장에는 무언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다. 따라오길 정말 잘했어.
“벌써 2시를 한참 넘겼어. 점심이 많이 늦었네. 영계백숙 했는데 어때요? 우리 성은 씨가 그거 좋아해서 했는데.”
“아주머니 음식 중에 맛없는 게 어디 있어요? 전 진짜 다 좋아요.”
머리에 면 스카프를 두른 키 큰 아주머니는 별장관리인치고는 세련된 인상의 소유자였다. 성은 말로는 한때는 작은 식당을 운영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만큼 밑반찬 하나도 솜씨가 정갈하고 감칠맛이 느껴진다. 공기가 좋으니 음식도 한층 맛있다.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민하를 보며 성은이 흐뭇하게 웃었다.
“민하가 잘 먹으니까 좋으네. 약간은 춥겠지만 저녁 늦게라도 마당에서 바비큐 해먹자. 불 근처에서 먹으면 그렇게 몸이 시리진 않을 거야.”
“여기 자주 오세요?”
“음, 어렸을 적엔 많이 왔었는데 요즘은 바빠서 자주는 못 오지. 이렇게 시간 날 때마다 오려고 애쓰고 있어. 왔다 가면 피로가 쫙 풀리니까. 옛날에는 성원 오빠도 낑겨서 와서 영 귀찮았었는데 요즘은 귀찮을 일도 별로 없어.”
“시끄러. 넌 내가 키웨스트 갈 때마다 쫓아와서 이거 가르쳐달라 저거 사달라 난리난리치고 그랬잖아.”
“오빠네 플로리다 갈 때마다 쫓아와도 좋다고 하신 건 큰아버지다 뭐. 그리고 사촌오빠가 그것도 못해줘? 하여튼 은근 쪼잔하시다니까.”
식탁을 둘러싸고 사촌끼리 입씨름을 벌이는 걸 민하는 눈을 껌벅거리며 보고 있었다. 성은 옆에 앉아있는 민호는 먹는 데만 열중하느라 입도 뻥긋 않는다.
“오빠 좀 천천히 먹어라. 걸신들린 사람 같어.”
“말 시키지 마. 어제 내리 굶었어. 게다가 오늘 아침도 거르고 왔잖아.”
“진짜야? 말하지. 빵이라도 좀 사서 올 걸.”
“민호 씨, 눈이 풀렸어. 식사하고 좀 자요.”
“그래, 딱 봐도 폐인이다. 누가 보면 저기 서울역에서 노숙하다 온 줄 알겠어.”
마찬가지로 격무에 시달리는 입장이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품위를 잃지 않을 성원이다. 그가 저렇게 미소를 지을 때면, 게다가 오늘처럼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 있으면 가지런한 치아 때문인지 나이보다 훨씬 동안으로 보인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다들 믿을 거라고 민하는 생각했다.
게걸스럽게 음식만 먹어대는 민호를 옆에 두고 주로 대화를 리드해가는 사람은 성은이었고 그 말에 주로 맞장구치는 사람은 성원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민하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여긴 공기도 좋지만 근처 클럽 가서 요트 타는 게 또 재미야. 아아, 성원 오빠가 요트경기 나갔을 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모르지? 우리 단정차분하신 사촌 오라버니께서 요트경기만 나가면 사람이 달라지는 거. 완전 포악 그 자체란다. 후후후.”
“말 참 이쁘게도 한다. 단어표현에 사감이 너무 심하게 섞인 거 아니냐?”
“아니, 포악이 뭐 어때서. 사실이잖아. 오빠, 경기 전 자리 선점할 때 장난 아닌 거 본인은 모르시나요. 꼭 사람 죽일 것 같은 눈을 하고 ‘스타보!’ 외치는데 열나 살벌합디다. 기냥 쫄았잖아.”
‘사람 죽일 것 같은 눈’이란 표현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ㅡ죽여 버렸어야 했어.
생각하고 싶지 않아. 지금만은 제발 떠오르지 말아줘.
“성원 오빠 요트시합 나갔었어요?”
“응. 예전에 대학 1학년 때 레이저급으로. 그거 국가대표선수들도 나오는 건데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근데 쟁쟁한 선수들 다 제치고 5등이나 했다? 그 때 다들 경악했잖아.”
“우와, 진짜요?”
“운이 좋았어. 요트는 첫째도 바람, 둘째도 바람인데 그날따라 바람 발이 장난 아니었거든.”
“뭐 그 말도 사실.”
“전반적으로 운은 다 좋으신데 연애 운만 안 따라주시지, 저 놈은.”
쿡쿡 웃는 성은 옆에서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민호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너 운 좋다고 자랑하는 거냐?”
눈썹을 찌푸리는 성원 보란 듯이 민호가,
“당연하지.”
하고 성은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민하가 눈을 깜박거렸다.
“성원 오빠가 왜요? 오빠 애인 있잖아요.”
“음…….”
분위기가 살짝 썰렁해졌다. 말을 질러놓은 민호도 성은도 슬쩍 당황한 눈치다. 하지만 당사자인 성원은 미소를 잃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헤어졌어.”
“아…….”
민하는 어색해져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민호도 성은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실수라 싶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더니 성원이 어깨를 으쓱한다.
“진짜 못 봐주겠네. 야, 민하야. 우리 저 닭들 두고 나갔다 오자.”
“그래, 그래. 여기 온 김에 오빠, 우리 아가씨 요트 좀 태워줘.”
“예? 어어, 괜찮은데…….”
“어머, 타 봐. 진짜 재밌어.”
“나랑 나가는 거 싫긴 싫구나, 민하. 매번 그렇게 거부하는 거 보니.”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면 좀 가줘요, 아가씨. 실연당한 우리 오빠 불쌍하지도 않아요?”
순간적으로 강인을 떠올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민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딴 사람도 아닌 새언니 사촌오빠고, 여긴 서울도 아니니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하고.
*
그래서 결국 따라와 버렸다.
미리 전화해두었기 때문인지 요트는 깔끔하게 범장을 끝내고 이미 마리나에 대어져 있었다. 세일링 슈트에 점퍼에 구명재킷, 장갑에 슈즈. 완벽하게 장비를 갖췄지만 죄다 성은에게 빌린 물건들이다. 전혀 경험이 없는 민하인지라 도리어 어설퍼 보일 따름이었다. 대조적으로 가벼운 복장의 성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요트를 점검하는 중이다.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물었다.
“나 요트 탈 줄 모르는데……. 물에 빠지면 어떡해요?”
“이건 딩기가 아니라 크루저라 괜찮을 거야.”
어안이 벙벙한 민하를 보고 성원은 가볍게 웃더니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배 종류를 말하는 거야. 딩기는 아주 작고 가벼운 배라 하이크 아웃, 그러니까 이렇게 다리를 뻗고 뱃전에 걸터앉아서 상체를 비스듬하게 배 밖으로 기울여야 하거든. 초보자들은 그러다 여차하면 배가 전복되는 일이 많은데 이 배는 여행용이라 보다시피 크고 묵직하잖아. 걱정할 것 없어.”
“수영도 잘 못하는데…….”
“정 겁나면 선실에 들어가 꽁꽁 숨어있던가.”
“그렇게까지 무섭진 않아요!”
성원이 웃음을 참는 걸 알아차리고 민하가 약간 발끈해서 대꾸했다.
“근데 운 좋게 우리 탈 요트가 있었네요? 겨울이라 한가해서 그런가?”
“운이 좋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내 건데.”
“예?”
“이거 요트클럽 물건인 줄 알았어? 이 클럽에선 관리만 해주는 거야. 회원이 두 종류거든. 자기 요트가 있는 회원이랑 아닌 회원.”
민하는 입을 딱 벌렸다. 자기 요트가 다 있다니 과연 재벌은 재벌이다. 게다가 이 요트 별로 작지도 않은데. 좁은 내부에 화장실이며 부엌, 침대까지 있는 걸 보니 무척 신기했다. 감명을 받은 그녀는 계속 촌스러운 소리만 해댔다.
“이거 무지 비싸죠? 관리비도 장난 아니겠다.”
“중고로 산거라 그렇게 세진 않고, 관리비는 안 받아. 나한테 미리 연락한다는 전제하에 몇몇 다른 클럽회원들에게도 빌려주고 있거든. 공짜로 요트를 내주는데 관리비까지 받으면 안 되지.”
성원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미 세일링을 마친 다른 요트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요트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남자 둘은 건장한 체구의 떡대들이었다. 꼭 강인 아래에 있는 건달들 비슷한 분위기다.
혹시 날 감시하러 보낸 사람들? 하고 순간적으로 바짝 긴장했지만 이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걸 보니 다행히 오해인 모양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내려앉은 민하는 후, 하고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또 한 명의 남자와 홍일점인 여자는 커플인 것 같았는데 한눈에 봐도 부유층 한량 같아 보인다. 몸가짐이 흐트러진 채 눈이 풀린 모습으로 서로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킨 꼬락서니가 꼭 요트에서 한 바탕 뒹굴고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저절로 얼굴이 빨개졌다. 상상도 참……. 나도 저질이구나.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돌리다가 멈칫했다.
동행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요트에 탄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빠 왜 그래요?”
그제야 성원은 정신이 들었는지 요트에서 내려 선착장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어 민하 쪽을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근데 그쪽은 날 못 알아보더라. 착각했나 봐.”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서 처음의 심각한 낯빛은 어느 새 사라지고 흥미로운 걸 발견했을 때의 묘한 즐거움이랄까 호기심 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다. 항상 쓰고 있는 안경을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내서 그런지 여느 때의 미소가 한층 여유롭게 비쳐진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천천히 줄을 당겨 돛을 올렸다.
“근데 오빠, 겨울에 요트타도 되는 거예요?”
“요트는 원래 겨울 스포츠야. 겨울이야말로 제대로 된 바람이 불거든.”
돛을 세운 성원은 엔진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닻줄을 풀어야 해.”
“제가 할게요. 이거죠? 이걸 풀면 되는 거죠?”
“눈치 밥 하난 끝내주는구나. 잘했어, 서민하!”
해풍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성원은 시동을 끄고 밧줄을 당겼다. 멋지게 펼쳐진 돛을 바람이 밀어내기 시작하자, 시동을 끈 상태인데도 요트는 미끄러지듯 바다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바람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바람을 뚫고 마스트에 돛 줄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찌른다. 배가 파도를 가르자 돛이 아름다운 형태로 팽팽하게 부풀고, 발밑으로 푸른 물결이 부서지는 감각이 흐른다.
소금냄새, 날이 미처 풀리지 않은 겨울 한풍이 오히려 상쾌하다.
“아, 기분 좋아.”
“뭐라고?”
“기분이 너어무 좋다구요!”
데크 앞에 서서 민하가 소리치자 성원이 웃었다. 여느 때의 차분하고 어른스런 미소와는 다른 좀 더 화사한 느낌의 미소다. 강인처럼 압도적인 인상의 미남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섬세한 분위기가 있는 남자였다. 몇 달 전이라면 그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련만, 지금 민하의 가슴에는 한층 복잡한 상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우고만 싶은 상념.
“오빠, 성은 언니네 별장 자주 오나 봐요?”
“응. 작은아버지가 자주 불러주신 덕택에. 내가 처음 왔을 때 명절모임서 보고 형들한테서 겉도는 꼴이 좀 딱해 보이셨는지 많이 신경써주셨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눈을 껌벅이는 민하를 본 성원은 그제야 깨달았는지 덧붙였다.
“아, 형들과 난 어머니가 달라. 민호가 얘기 안 하든?”
“울 오빠가 그런 얘길 왜 저한테 하겠어요…….”
“아, 딱히 숨길 것도 아니라서 그래. 근데 짜식 딴엔 신경 쓴 것 같은데?”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성원의 어머니는 성원의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성원을 낳았고 성원은 가문에서 인정받기 위해 수치스런 친자확인검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그까짓 검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사실 어릴 적에는 좀 친척들이랑 나랑 좀 성격이 안 맞았거든. 성은이 빼고는 딱히 친한 사람이 없었어. 하긴 저 녀석도 집안의 별종이지. 신부수업하거나 회사 이어받아 하면 될 걸 자기천직은 디자인이라고 박박 우겨서 파슨스 가버리고…….”
“오빠도 특이하긴 마찬가지에요. 그냥 사업 이어받아도 될 걸 왜 사시 쳤어요? 울 오빠 준비할 때 기억나거든요. 사람이 막장수준으로 피폐해지던데. 스트레스도 장난 아닌 것 같구요.”
“사업은 형이나 누나가 하면 되고 난 내 길 찾고 싶어서. 내가 좀 단순하거든. 민하 넌 모르겠지만 고시는 단순한 머리여야 가능해. 복잡한 생각 안하고 지저분한 거 깔끔하게 잘라낼 줄 알면 성공하는 장사야. 운도 좀 있어야 하지만, 주변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러더라고. 저 자식 운도 드럽게 좋은 놈이라고. 그래서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어. 꼴찌로라도 붙겠지 첫 타로 떨어지진 않을 거라고.”
“기분 나빴어요? 친척들이 그러는 거…….”
“바보가 아니라면 그 속은 다 짐작할 수 있으니까. 운? 확실히 좋았지. 하지만 그걸로 내 인생이 다 풀렸다고 하는 건 오산이지. 그깟 운발 아니었어도 어머니와 내가 죽었을 리 없어.”
성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가끔 여기 오면 좀 숨통이 트였어. 아니면 일산 쪽에 가서 말 타거나. 머릿속을 깡그리 비워버릴 수 있었거든. 그런 의미에선 고맙지.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좋은 사람이랑 요트도 타러올 수 있잖아.”
그러라고 한 말은 아닐 텐데 몸이 훈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고마워요.”
“뭐가?”
“나한테 오빠 얘기 해줘서요. 오빠 자기 얘기 딴 사람한테 잘 하는 성격 아니라고 울 오빠가 그랬거든요.”
“너, 이성은 시누이잖냐. 나 대신에 저 웬수 좀 괴롭혀달라고 미리 친한 척, 수 쓰는 거야.”
성원은 본인이 웃음으로써 다른 사람이 따라 웃게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앞에만 있어도 어쩔 줄 몰라서 목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안절부절 못하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인데, 지금은 한 배에 같이 타고 있어도 편안하다. 딱히 가슴을 저미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그 동안 별별 일을 다 겪어서일까.
그녀를 그저 친구의 여동생이자 사촌동생의 시누이로만 생각할 저 남자에게 전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닫고 민하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감정에 둔감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오빠는 어른이라 항상 여유 있어 보여요. 전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세상이 참 복잡하단 생각만 들어요. 너무 넓고…….”
“나이는 헛먹는 게 아니니까. 편하게 생각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냥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사실, 그것만 명심해 둬. 그러면 놀랄 일은 없어져.”
말하면서 성원은 잡고 있던 줄을 재차 팽팽하게 당겼다.
“널 보면 네 나이 때 내가 생각이 나.”
“오빤 어땠는데요?”
성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하도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성원은 확실히 완전한 성인남자 모습이었다. 검은 털모자를 쓴 아래, 남자치고는 흰 얼굴과 오뚝한 콧날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나이에 비해서 동안이지만 다른 남자들보다도 여유로운 분위기가 연륜(?)마저 느끼게 만든다.
민하는 얼굴로 쏟아지는 바람을 손으로 막았다. 말하려고 딱히 생각했던 것은 아닌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마 이제는 그 말이 예전처럼 언제 꺼낼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일까.
“……오빠, 나 오빠 좋아했었어요.”
“과거형이야?”
“아녜요, 지금도 좋아하죠. 오빠 좋은 사람이잖아요.”
성원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넘겼기 때문에 민하도 농담처럼 넘겼다. 그 때 마침 점퍼에 붙어있던 모자가 뒤로 젖혀졌고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이기 시작했다. 모자를 다시 쓰려고 했지만 세찬 바람 때문에 뜻대로 잘 되지 않았고, 오히려 목에 동여매고 있던 머플러까지 반쯤 풀려 날아가려 한다. 그걸 본 성원은 줄을 놓고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머플러가 바람을 타고 막 떠나가려던 순간, 그의 손이 간발의 타이밍으로 천 끝을 붙들었다. 민하는 움찔해서 눈을 감았다. 조심스레 떠 보니 성원이 바로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추우면 선실에 들어가 있을래?”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무언가가 어깨에 닿는다. 머플러를 고쳐 감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원의 손이었다. 크고 다정한 손길. 자신이 줄곧 갈망하고 있던 손길. 이 손길을 줄곧 기다려왔어. 하지만 지금은…….
“고마워요, 오빠.”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어깨를 붙잡은 손은 말과 달리 그녀를 그대로 내리누르고 있었다. 민하는 바짝 굳어진 얼굴을 하고 성원을 올려다보았다.
침착해 보이는 눈은, 그러나 언제나와 달리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오빠, 왜……요?”
“뭐가.”
“오빤 나한테 하나도 관심 없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그렇게 보였어?”
약간은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은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기도 한, 짤막한 반문이 상대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너, 정말 어리긴 어리구나.”
성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느 때라면 전혀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소다. 어째서일까,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게, 저 남자의 ‘진짜' 웃음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
앗, 하는 찰나 이번에야말로 머플러는 스륵 벗겨지더니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머플러를 붙잡을 수도, 그렇다고 다른 움직임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금방이라도 닿을 거리에 서있는 남자를 올려다볼 뿐. 아니야. 이건 아니야.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이렇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타이밍에…….
“말했잖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그리고 성원은 조용히 민하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가두었다.
계속.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m(_ _)m
댓글 '38'
Junk
원아/ 넵, 노력하겠슴다. 진짜 올해는...ㅜ_ㅜ
큐리/ 옙, 그런 거예요. 성원이 본색을 드러내는...
마리/ 진짜 올해는 자주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슴다. 제가 손이 느린데다가 한 챕터씩 올리니까 다른 분들처럼 빨리는 안 되겠지만요.
mikkang/ 다른 분들은 저것도 걱정스러워서 전전긍긍하시는데... 미캉님은 배포가 크신;;;
야광우비/ 진짜 올해는 어떻게든 할게요. 2년동안 육아에만 신경 썼더니 이 지경이 됐다는...
재아/ 음... 넘 걱정 마세요. 물 위니까...
하누리/ 여기는 남자들이 다 나쁜 놈들이라니까요;;; <- 사실 제 인생관임다. 남자들은 나쁜 놈들이다;;; [05][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