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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1
밤의 번화가는 낮보다 밝고, 낮보다 화려하다.
클럽「Chilly」는 그런 밤에 가장 사랑받는 곳 중 하나였다.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회원제 클럽인 이곳은, 고급 요정 대신 고위직 관료나 부유층 손님이 보다 비밀스런 대화를 주고받는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곳이었다. 차분하고 이지적인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은은한 음악이 편안하고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독특한 배열로 가게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룸은 손님들끼리 밀담을 나누기에 안성맞춤. 음식 맛도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상류층 손님에게 있어서 최고급 클럽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은 최고급 클럽에 비해 뒤지지 않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철저한 교육을 받은, 수준 높은 호스티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의 높은 경영수완도 장사에 한몫했다.
“마담도 한잔 받지. 꽤 센 걸로 아는데.”
“전 최근에 많이 줄었는걸요. 나이는 못 속이나 봐요. ……후훗, 그래도 모처럼 권해 주시는데 한잔 받아볼까요?”
손님의 말에 「Chilly」의 여사장 명진연은 미소 지었다. 깔끔한 여름 정장을 입고 투명화장을 한 그녀의 모습은 30대 중반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공손한 태도로 눈앞의 손님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녀가 이 가게를 넘겨받은 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가게의 소유주인 언니가 늦은 결혼을 하고 외국에 나가게 되면서, 자기 아래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에게 가게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녀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행운이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환갑이 지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손님의 이름은 지남신. 명목상은 ‘회장’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은 그는 조직 「청현회」의 총 보스였다. 그 나이에는 드물게 180 가까운 장신에 이마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까지 인상적인 남자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이었을 게 분명한 얼굴이 느슨하고, 그러면서도 절도 있는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꽤 마신 것 같았는데, 손끝 하나 흐트러진 구석이 없다.
이 거리의 장사, 그 중에서도 이렇게 ‘물장사’와 연관된 장사일 경우, 조직과 무관할 수 없다. 어디건 어떤 조직에게 자릿세를 지불하고 또 그런 만큼 그쪽의 보호를 받는 것이 이 바닥의 상식인 것이다.
그런데 「Chilly」만은 예외였다. 이곳은 이 거리에서 어떤 조직에게도 커미션을 제공하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대신 이곳에는 사장인 진연이 독자적인 인맥으로 고용한 이른바 ‘경호원’들이 존재했다. 지금도 바깥쪽 바에는 손님을 가장한 채 드문드문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경호원들이 있을 터다. 물론 이제까지 여자 혼자 몸으로 클럽을 운영하면서 적지 않은 위협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진연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줄곧 딴지를 걸어오던 조무래기 조직들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떤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란, 그녀의 배후에 조무래기 정도가 아닌 거대조직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거대조직이란 「청현회」일 것이라는 짐작이 지배적이었는데, 소문의 진위 여부는 파악할 수 없지만 청현회의 보스가 이곳에 자주 들르는 것만은 또한 사실이었다.
“일본에 있었다던데.”
위스키를 들이켜는 진연에게 남자가 물었다. 진연은 톡 쏘는 맛에 약간 미간을 찌푸리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 네.”
“그 때도 이렇게 가게를 갖고 있었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았겠어요.”
진연은 겨우 한잔에 아찔한 머리를 누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 남자는 무서운 사람이야. 이쪽이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이 남자는, 무서울 만큼 자신의 아들과 닮아 있으므로.
“괜찮은가.”
“예. 정말로 나이는 못 속이겠어요. 아, 잔이 비셨네요?”
그녀가 생각을 지우려는 것처럼 청현회 보스의 잔에 조심스레 술을 채워가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역시 장신인 30대 남자.
남자의 이름은 지승인, 지남신의 둘째 아들이었다. 지남신의 외모를 빼다 박은 호남자인 그는 진연을 힐끗 보고, 하지만 별로 흥미 없다는 표정을 한 채 안에 들어왔다. 지남신이 그를 보고 짧게 물었다.
“일은.”
“잘 됐습니다. 그건 있다 말씀드리기로 하고, 좀 문제가 생겼는데요.”
승인은 놀랄 만큼 정돈된 미간에 날카로운 주름을 세웠다. 남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해 보라는 몸짓이었다. 승인은 한숨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투기 말인데, 저희 쪽 선수가 습격당했습니다. 최소 6개월 동안은 병원에서 꼼짝도 못할 거라더군요. 아니, 앞으로도 투기장에 서기는 영영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완전 너덜너덜해져서요.”
“상대 놈들은 파악했나.”
청현회 보스의 둘째 아들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이 갑니다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고 당장 링에 설 사람이 없단 거죠. 이번 판돈은 딴 때의 스무 배가 걸려 있어서 아무나 내보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체 누굴 내보내야 할지…….”
“강인일 불러.”
“……!”
진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지남신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 진연도 놀랐지만, 앞에 선 그의 둘째 아들도 놀란 모양이었다. 지남신이 지명한 이름은 그의 막내아들이자, 지승인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을 투기장에……?
“괜찮을까요?”
“괜찮아.”
슬쩍 미간에 불안한 표정을 띄우는 아들과 다르게 지남신의 얼굴에는 일말의 미동조차, 아니 미동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는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 녀석이라면.”
외견상으로는 평범한 한식집일 따름인 그곳 식당 반대편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물론 지하로 내려가는 버튼은 보이는 위치에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감시 카메라를 통해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한 후, 중앙에서 조종하는 시스템.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거기 존재하는 것은 작은 홀이었다.
홀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른바 ‘귀족’들로, 큰 액수의 돈을 마구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재력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런 부유층 관객들로 둘러싸인 홀 한가운데에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링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로 이 장소에서 하루에 수억에서 수십억에 가까운 돈이 움직이는 것이다.
1주일에 한번 비밀리에 행해지는 지하투기장이었다. 비합법적인 도박장소.
철망 한가운데서 싸우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이었다.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원칙은 없다. 무기는 주어지지 않지만, 그 어떤 행위도 전부 용납된다. 눈을 찔러도 좋고, 어깨뼈를 부숴도 좋고, 이빨로 물어도 상관없었다. 시간제한도 없다. 한쪽이 실신상태에 이를 때까지, 내지는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죽 계속되는 것이다. 물론 기절하기 전에 항복 선언은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기면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 반면, 지면 그대로 인생을 조지기 때문이다. 절박한 만큼 살인행위조차도 용납되는 격투였다.
세 번째 시합이 끝나 흥분이 최고조에 다다르자, 메인 파이트의 차례가 왔다.
링 안에 들어선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체구를 한 외국인이었다. 최고 레벨의 레슬러임이 분명하다. 단련된 몸에는 이제까지 파이트에서 얻은 훈장인 진한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투사’의 몸이었다.
상대적으로 레슬러의 맞은편에 등장한 남자는, 장신이었지만 상대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체구를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딱할 정도다. 파이터라기보다는 모델에 어울리는 잘 빠진 체형. 그 얼굴에는 검은 가면이 씌워져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조용한 동작으로 링 안으로 걸어 들어와 외국인 레슬러와 마주섰다. 내면을 읽을 수 없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와아!”
일순 경기장에 정적이 흘렀다가, 이내 환성이 일었다.
뭐니 뭐니 해도 메인 파이트였다. 가장 큰 돈이 걸려 있다. 오늘의 경기는 그 중에서도 유난히 배당률이 높아 모두의 군침을 돌게 만드는 것이었다. 관중들은 모두 절로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는 눈치였다.
환성이 웅성거림으로 변하고 그 웅성거림조차 잦아들어 마침내 완벽한 정적이 찾아온 순간, 경기는 시작되었다.
시작은 외국인 레슬러가 우세했다. 압도적인 파워로 제압당해, 가면의 남자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아니? 언뜻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기실은 그게 아니었다.
레슬러의 기술은 겉보기와 달리 약간의 손동작 등에 의해서 차단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작은 작지만 그만큼 순발력이 요구되는 기술이었다.
순간, 갑자기 외국인 레슬러의 헤드 락이 걸렸다. 그는 무서운 힘으로 가면 쓴 남자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당히 고통스러워야 정상이련만, 가면 쓴 남자는 별로 괴롭지 않은 듯 얼굴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한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아주 엷어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만약 일단 봤다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 남자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목에 걸린 팔을 끌어당겨 역으로 상대의 팔을 벗어날 수 없도록 붙들어 몸을 끌어안듯이 하고는 자신의 몸을 구부려 상대의 몸을 허공에 내던졌다.
이 레슬러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웬만한 상황이라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자세를 갖춰 충격을 흡수했을 텐데, 이 경우엔 두 손이 완벽히 묶여 있어 지면에 곧바로 떨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콰당!
둔탁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소음을 내며 레슬러의 몸은 그대로 링 바닥에 격돌했다. 다행스럽게도 머리로 곧장 충격이 가는 것만은 어떻게든 피했지만, 그러나 레슬러는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그는 꿈틀거리며, 그럼에도 간신히 다리를 모으고 상체를 끌어올렸다.
수십억의 돈이 걸려 있는 문제다. 쉬이 포기할 수 없는 경기였다. 단순히 지는 것만이 아니라 목숨을 위협받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죽나 시합에서 져서 죽나 개죽음을 당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가면 쓴 남자는 레슬러가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상대가 몸을 곧추세우는 걸 확인한 그는, 기다렸다는 듯 뒷다리에 체중을 실어 얼굴을 향해 힘을 담은 일격을 보냈다. 레슬러의 얼굴에 그 일격이 스쳤다. 가면 쓴 남자가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레슬러 쪽이 가까스로 피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제대로 맞았으면 치명적일 한 방을 벗어난 레슬러는 뱃속에서 끌어낸 것 같은 신음소리를 토하며 이번에는 자신이 공격해갔다.
로프를 사용한 반동기술이었다.
가면의 남자는 공격을 읽기 위해 일단 한발 뒤로 물러서는 동작을 취했지만, 레슬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왼발을 남자의 몸통으로 그대로 찔러갔다. 가면 쓴 남자의 몸이 숨을 삼키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힘겹게 구부러졌다. 그대로 지면에 주저앉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는 역동작을 취해 레슬러의 다리에 태클을 걸었다. 아니. 단지 그것만이 아니고, 태클에 의해 밸런스를 잃은 상대의 복부를 연타로 걷어찼던 것이다. 그 공격은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을 실은 채 정통으로 들어갔다.
“허억!”
그것은 그 때까지의 치열한 격투에 종지부를 찍는 강인한 일격이었다. 레슬러는 입에 거품을 물고 무너져 내려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시합 종료.
“와아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귀족’ 계급의 사람들일지언정 흥분은 가라앉힐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순간 몇 십 억의 돈의 행방이 결정된 것이었다. 온통 열광과 탄식의 도가니 속, 이른바 VIP석에 앉아 있던 30대 남자만이 별다른 동요 없이 그 광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지승인, 지남신의 둘째아들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군. 이건 너무 간단하잖아.
그는 탄식과 같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방금 호출한 젊은 청년에게 말을 던졌다. 어딘가 어색한 금발을 한 청년은 뒤에 꼿꼿이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홍이라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젊은 청년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비장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안 그런 척 하지만, 분명히 승인을 견제하는 듯한 태도였다. 승인은 그런 청년의 태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그의 용건을 말했다.
“니네 보스, 옷 갈아입는 즉시 데려와라.”
“어디로……, 말입니까?”
청년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승인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니놈이 얼마 전까지 경호원으로 일하던 곳.”
2
클럽 「Chilly」 가장 안쪽에 위치한 특실.
지승인은 아까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던 클럽의 룸에 앉아 있었다. 그는 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어보였다. 양옆에는 갖은 교태와 녹을 것 같은 웃음을 팔면서 여자들이 술을 권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다지 관심 없는 듯 시종일관 냉정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 점이 더욱 더 그녀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는 줄곧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한여름 밤. 온통 후덥지근한 공기로 메워져 있는 외부와는 대조적으로, 특실 안은 피부가 시릴 만큼 냉방이 잘되어 있다.
술기운으로 발그레 얼굴이 달아오른 여자들은 모두, 어떡하면 이 남자를 매혹시킬 수 있을까 궁리하는 눈치였다. 마담의 철두철미한 교육 덕분에 함부로 남자에게 교태를 팔지 않는 그녀들이다. 여느 때의 태도는 요조숙녀의 그것처럼 우아했다. 어지간한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 없다. 그 만큼이나 남자는 그녀들에게 있어, 군침이 돌만큼의 파워와 그에 못잖게 정돈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청현회 보스의 아들들은 셋 모두, 보통을 한참 뛰어넘는 미모의 소유자들이란 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막내아들이 가장 잘생겼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둘째아들조차도 보통 남자에게서는 함부로 찾아보기 힘든 매력을 갖고 있다. 저 정도 남자라면 단 하룻밤의 관계라도 좋았다. 아니, 처녀를 버려도 상관없겠다고 그녀들은 모두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호스티스일지언정 자존심을 가지라고 입이 닳도록 설교한 마담의 교육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때, 노크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미끄러지듯 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안으로 몸을 디딘다.
무심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여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커졌다. 마치 붙박힌 듯 고정된 시선을 그쪽으로 돌린 채, 그럼에도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지 못한 눈치들이다. 동작도 한결같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어당긴 것은, 젊은 남자였다.
검은 티셔츠와 진 팬츠뿐인 단순한 차림은 늘씬한 장신에 잘 어울린다. 얼굴에 자주빛 알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남자에게는 20대 초반의 싱싱한 젊음과 그에 걸맞지 않는 건조하고 서늘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있었다.
“모두 나가 줘.”
승인이 짧게 말했다. 여자들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새틴 드레스를 입은 몸을 일으켜, 그럼에도 아쉬운 듯 뒤를 흘끗거리며 방을 나갔다.
청년은 남자로부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앉았다. 여자들의 시선을 일시에 끌어당긴 수려한 얼굴은 별다른 감정을 읽을 수 없다. 목숨을 건 시합을 방금 마치고 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른하고, 동시에 날렵했다.
지강인.
야생동물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남자.
“오늘은 수고했어.”
승인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동생을 바라봤다. 청년은 형을 보지 않은 채 앞에 놓인 크리스털 글라스를 미묘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 귓불에 걸려 있는 얇은 담배모양의 도기 귀걸이가 조명을 반사하며 빛난다. 눈이 슬쩍 한번 깜박이고, 선이 명료한 얇은 입술이 엷게 미소를 흘렸다.
그것은 아까 링에 서 있을 때와 동질의 미소였다.
“한잔 들지.”
승인은 위스키 병을 들어보였다. 강인은 입술을 가볍게 움직여 훗, 하는 웃음을 토하더니, 잔을 들어 그쪽으로 내밀었다. 마시기 전에 그는 영리한 시선으로 형을 봤다. 긴장한 기색은 아니다.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인상이었다.
“독주?”
“아무려면 어때.”
글라스 안에 든 얼음이 달그락, 하고 맑은 소리를 울렸다.
“다 중화시킬 수 있는 위장 아니었던가?”
“사돈 남 말 하시는군.”
강인은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런 그를 보며 승인은 입을 열었다.
“입원까지 하시다니,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지?”
위스키의 마지막 방울까지 흘려 넣은 목젖이 희미하게 울렸다. 강인은 입에서 천천히 잔을 떼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형과 아버지가 기대하는 만큼은 아닐 걸.”
털끝만큼의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모노톤의 음성이다.
“글쎄, 우리가 뭔가를 기대할 정도로 그쪽이 대단한 존재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알아둬. 네가 명심해야 할 건 단 한가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거.”
승인은 날카롭게 동생을 응시했다.
“물론 피도 역류해서 흐른다면 흐름을 바로잡아줘야겠지만 말이야. 뭐, 너도 잘 알고 있을 테지. 건 그렇고……,”
그는 한 호흡 쉰 다음, 자연스럽게 용건을 제시했다.
“게임을 하나 해보지 않겠어?”
“하, 오늘 한 걸로 부족하단 건가……?”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오늘의 게임보다는 좀 더 재미있을 거 같은데? 하긴 아주 간단하게 풀릴 지도 모르지. 네 녀석 정도의 면상이라면.”
“면상을 써야 하는 게임?”
동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대신, 승인은 탁자 위로 두장의 사진을 던졌다. 강인은 무심한 눈으로 슬쩍 손을 뻗어 사진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사진은 스냅이었지만, 고개를 약간 숙인 각도로도 상당한 미인인 걸 알 수 있는 여자였다. 그냥 미인이 아니라 귀티가 느껴지는 것이 귀한 집안 아가씨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인의 눈길이 두 번째 사진 위에 멈췄다.
“서민호. 서울지검 검사. 아직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지만, 앞으로 어디 튈지 모를 놈이야. 첫 번째 사진의 미인은 놈의 애인이다. 대신건설 집 큰 딸이지. 두 번째 사진은 놈의 여동생이고. 듣자하니 너랑 같은 학교 같은 과던데, 복학하면 마주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어때? 맘에 드는 얼굴이 있어?”
툭.
청년의 손에서 벗어난 사진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탁자 위로 떨어졌다.
“요컨대 약점을 잡고 싶은 거로군. 이런 방식을 생각하다니 형다워. 이왕이면 몸소 나서시지 그래. 여자 후리기는 그쪽 전문 아니었던가?”
승인은 깍지 낀 손에 턱을 얹고 흥미로운 시선으로 동생을 봤다.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정명회는 어디까지나 청현회의 하수야. 지금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부술 수 있지.”
강인은 사진에서 눈을 떼어 서늘한 미소를 담은 채 형을 마주 응시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오, 너한테 상관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냐. 그냥 한 말이다. 그런데, 어때. 맘에 드는 여자가 있나? 아무래도 애인 쪽이 더 낫지 않아?”
두형제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승인은 태연하게 자신을 보는 동생의 눈동자에서 불꽃을 발견하고, 내심 즐거운 미소를 흘렸다. 강인은 그런 형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는 시선을 느슨하게 움직여 탁자 위에 놓인 사진으로, 이어 연결동작처럼 벽으로 향한 다음, 조명이 만들어낸 파도무늬 같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손에만 넣으면 되는 거지. 훗, 이왕이면 오래 버팅기면 고맙겠는데.”
“어느 쪽이지?”
승인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동생을 응시했다. 최상급 조각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조각한 것처럼 날렵한 콧날아래 얇은 입술이 시니컬한 일그러짐을 그린다.
“형이 말하지 않았던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1. 얼음과 조우하다, 로 계속.
천천히 가겠습니다. 사실 자신이 영 없어서요;
얼음은 정말, 너무 우여곡절이 많아서 두렵기까지 합니다.
무지 기다렸어요...^^
천천히 올려도 좋으니까.. 이번엔 꼬옥~~완결이요...
고럼...phoebe는 넘넘 감사할꺼예요...
Junk님 홧팅... 건필이요~~ [10][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