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그는 옆으로 뒤쳐 누워 머리를 무성한 히드 속으로 깊이 틀어박고는 그 향기를 맡았다. 그 뿌리의 냄새, 흙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햇빛이 히드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벗은 어깨와 옆구리에 히드 가지가 닿아 간지러웠다. 처녀는 아직도 지긋이 눈을 감은 채 그와 마주 누워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던졌다. 그는 자못 몸이 노곤한 듯이 몹시 서먹서먹하나 친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봐, 토끼."
그러자 그녀는 생글 웃으며 바로 옆에서 대답했다.
"왜요, 나의 영국 양반."
"난 영국 사람이 아냐."
그의 목소리는 퍽 피곤하게 들렸다.
"아, 당신은 정말 그래요, 정말 그래요. 당신은 나의 영국 양반이에요."
그녀는 두 손을 뻗쳐 그의 귀를 붙잡고 이마에 키스를 했다.
"이봐요, 지금 이 키스 어때요? 이젠 잘하죠?"
얼마 후 두 사람은 냇가를 따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마리아,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너무도 귀엽고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당신과 함께 있기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야. 그래서 당신을 껴안고 있을 땐 어쩐지 죽고만 싶은 기분이야."
"오오, 난 그때마다 죽는 걸요. 당신은 안 그러시군요?"
"음, 거의 죽어가는 기분이지. 당신, 땅바닥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은 느끼지 못했어?"
"느꼈어요. 내가 죽은 것처럼 됐을 때 말이에요. 그 팔로 날 껴안아 주세요. 네?"
"됐잖아. 이렇게 당신 손을 잡고 있으니까. 이 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소."
그는 그녀를 보고 나서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매 한 마리가 날고 있고, 산에는 벌써 오후의 커다란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다른 여자들하고 있을 땐 이렇지 않겠죠, 네? 당신?"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걷고 있었다.
"이렇진 않았어, 정말."
"이제까지 당신은 많은 여잘 사랑해 보셨죠?"
"몇 사람. 하지만 당신처럼 이렇게 사랑해 본 적은 없었어."
"그리고 정말 이렇지도 않았죠?"
"즐겁긴 했지만, 이렇진 않았어."
"그럼 역시 땅바닥이 움직였군요. 이제까지 땅바닥이 움직인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없고 말고, 정말 한 번도 없었어."
"그렇지." 하고 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단 하루 사이에 이 모양이 됐군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적어도 금방은 그랬죠, 네?" 하고 마리아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역시 좋아요? 내가 마음에 드셨어요? 조금만 더 있으면 나도 더 예뻐질 거예요."
"지금도 여간 예쁘지 않는데 뭐."
"그렇지 않아요, 머릴 좀 쓰다듬어 주실래요?"
그는 쓰다듬어 주었다. 그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고 납작하게 잠을 잔다고 생각되자, 곧 삐죽삐죽 손가락 사이로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고는 키스를 했다.
"난 키스하는 걸 퍽 좋아해요. 하지만 썩 잘하진 못해요."
"당신은 키스 같은 건 안 해도 좋아."
"천만에요. 좋을 것 없어요. 난 당신의 아내가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어요."
"지금도 당신으 나를 충분히 즐겁게 해주고 있는데 뭘 그래.. 더 이상 해주지 않아도 좋아. 더 이상 날 즐겁게 해준다면 내가 당신에게 해줄 것이 없어지게?"
"하지만 이제 두고 보세요."
그녀는 대단히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이상한 꼴이니까 당신은 내 머리를 재미있어 하고 있죠. 하지만 나날이 자라고 있거든요. 이제 머지않아 길어질 거고 그러면 나도 보기 싫지 않을 테니까, 아마 당신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당신 몸은 참 예뻐.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쁠 거야."
"그저 젊고 빼빼 말랐을 뿐인데요 뭐."
"천만에, 그렇지 않아. 아름다운 몸엔 마법이 있어.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있고 어떤 사람에겐 그게 없어.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당신은 확실히 그 마법을 가지고 있거든."
"당신을 위해서죠."
"천만에."
"맞아요, 당신을 위해서예요. 그리고 늘 당신만을 위해서죠. 하지만 난 당신을 위해서 해드릴 것이 거의 없어요. 당신에게 시중드는 걸 배울래요. 정말 얘길 해봐요. 당신 전에는 땅바닥이 움직이는 일이 한 번도 없었나요?"
"없었고말고."
그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난 행복해요. 정말로 행복해요. 당신, 지금 뭐 다른 생각하고 계세요?"





어렸을 때 읽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그저 그런 명작 - 왠지 반드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다시 읽은 이 소설은, 그리고 마리아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소설 속 주인공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헤밍웨이는 다른 이를 위해 종을 울리고 싶었겠지만, 난 마리아를 위한 종이라고 생각했고. 마리아의 순수한 사랑이 묻어나는 이 장면은 아름다운만큼 언제까지고 가장 가슴 아픈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나저나 저 유치한 번역체란 정말...-_-;)

댓글 '2'

Junk

2005.12.29 11:51:03

굉장히 닭살스럽죠;;;

여니

2005.12.29 19:27:12

어릴 적에 책 먼저 읽고 나중에 명화극장에서 영화를 봤었는데 넘 슬펐다구ㅠ.ㅠ 대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처음 갖게 한 소설과 영화였어. 근데 이거 민음사 판으로 다시 안 나오나? 새로 한 번역들 괜찮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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