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최 선생님은 진영의 눈길을 따라 감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나랑 한 약속은 어찌 되었나?”


“그게요, 할……아니, 선생님이 틀린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진영이 살짝 입을 내밀며 말했다.


“왜, 잘 안되던가요? 그럼 우리 둘째가 있으니 걱정 말아요.”


“닿지 않았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팩 하고 죽어 버렸어요. 마음에 병 생긴 것보다 더 아프고요. 아프면 훌훌 털린다고 하셨는데 계속 아파요. 아무래도 그냥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팔랑. 나뭇잎이 작은 연못 위로 떨어졌다. 동동 떠 있는 나뭇잎 사이로 둥글게 파장이 번져 나갔다.


그 풍경을 바라보던 진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프면 살아 있다는 거지. 그럼, 그 마음이 금세 가실 줄 알았나. 그래, 그래서 그냥 팩 죽여 버렸다고?”


“아니요. 죽어 버렸다고요.”


“아니야. 그건 죽인 거지. 진영 씨가 끝내기로 했으니까.:


순간 정우의 말이 생각났다. 좋아해서 좋아하기로 했다는 선주의 마음. 계속 끈질기게 표현해했다는 그 마음이.


“그럼요, 할아버지. 아니, 선생님.”


“편한대로 불러요. 할아버지나 선생님이나 매 한가지지.”


“네. 그럼 계속계속 아파도 그대로 살려 주면요. 나는 이런 마음이라도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면 그 땐 닿을까요?”


최 선생님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요즘 나온 책 중에 그런 말 있지요?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예.”


진영도 읽은 책 이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온 그 말은 이제 온 국민이 다 알 정도였다.


“간절히 원한다는 게, 정말 간절히 원한다는 게 가만히 있는 마음일까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간절히 원한다는 마음은 진영의 생각엔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비는 것 정도였다.


“정말로 진실하게 간절히 마음이 원하면, 몸이 움직이고, 말이 움직이고 제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데. 간절히 원해서 스스로 구하기 시작하면 말 한마디가 바뀌고, 옆 사람도 바뀌고, 가는 곳도 바뀌고, 그렇게 온 우주가 움직여 도와주는 게 아닐까요?”


진영은 높은 하늘 아래서 물처럼 흐르는 최 선생님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 물이 흐르고 흘러 진영의 마음 깊은 곳에 천천히 고이기 시작했다. 가을 하늘처럼 눈이 시리게 푸른 물이었다.


“그런 것 같아요.”


진영은 천천히 대답했다. ‘간절히 구하라’는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P.222~223 )


 


 


 


"어디가 좋아, 그 분?


“글쎄……찬찬하고 다정한 점? 얘, 잘 모르겠다.”


엄마가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좋아?”


“그런 것 같구나. 우진아.”


엄마가 우진을 불렀다.


“응.”


“엄만 아빠를 못 잊어. 그러니 아빠의 빈자리를 그 분이 채우는 건 아니야.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남아 있고, 아빠랑 엄마가 함께 살면서 만들어 왔던 모든 것들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다만……엄마랑 최 선생님은 서로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친구를 찾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우진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불쑥 물었다.


“그럼, 같이 살지 않을 정도로만 친하게 지내면 안 되고?”


“혼자 있는 것 보다 둘이 있는 게 더 좋은데, 기왕이면 같이 오래 있고 싶어서 그러지.”


엄마가 대답했다. 같이 오래라……. 과연 그 분한테 그 말이 해당이 될까? 우진은 엄마보다 나이가 꽤 많아 보이던 최 선생님을 떠올리며 다시 물었다.


“엄마는 걱정도 안 돼? 왜 하필 나이도 많고 몸도 불편한 사람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힘들어 해 놓고, 또 먼저 보내려고? 내가 그걸 아는대 금방 찬성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게. 그런데 나이가 많고 불편한 사람이라 더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힘들겠다, 아프겠다 그 생각보단 그냥 힘이 되어 주고 싶다……그런 생각이 들어. 그리고 물론 나도 힘을 받고 있고.”


엄마가 차분하게 말했다.


“안 힘들 것 같아? 나중에 말이야.”


우진은 창 밖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안 힘들겠어? 아마 또 힘들겠지.”


“그런데 왜?”


왜 힘든 일을 자처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힘들다는 건 그만큼 좋다는 이야기니까. 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힘들었지만, 내가 그걸 미리 알았다 해도 난 네 아빠랑 만나서 사랑했을 거야. 그만큼 힘든 시간보다 좋은 시간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


간단한 사실을 왜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을까?


우진은 할 말이 없었다. 힘들어서 피했는데, 그게 좋아해서 그런 거였다니. 자신의 감정인데도 누군가 집어 주니 뜨끔 아팠다. 힘든 시간보다 좋은 시간이 많았는데, 힘들 것만 걱정했던 자신이 떠올라 죽고 싶었다. 힘들어지기 싫어서 아무런 말도 못해 주고 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무 말도 못해 준 게 더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감추고, 얼버무리고, 모른 척하고.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우진은 바보 같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엄청난 후회, 그건 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잘해 주지 못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 우진이었다.


“내가 계속 반대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냥 사는 거지, 뭐. 이 나이에 새삼 결혼 같은 형식을 따지겠니? 아침마다 마실 갔다가, 밥 한두 끼 같이 먹고, 저녁때 약수터로 산책가고.”


우진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오히려 용감한 건 엄마였다.


“중요한 건 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거니까.”


우진은 엄마의 말을 들으며 쨍하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같이 살아간다면 그건 반드시 진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P.302~305)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제게 간만의 반성의 시간을 주었지요.^^;
유진님은 정말...
귀엽고 예쁘고 뭉클하고 알싸하고
안 좋아 할 수 없어요~!!
짧은 글 이었던 원래의 음식남녀도 좋았는데
20대 후반의 새 주연들도 참 좋네요.


댓글 '3'

파수꾼

2005.09.22 21:56:18

동감. 안좋아할수 없지요. 안좋아한다면 그건 반인류적인 행위에요.
(써놓고 보니 너무 거창;;;;)

유진

2005.09.23 00:20:01

앗. 감사합니다. >.<
파수꾼님 워~워~릴랙스;; (쫌 거창하셨으요;;;)

둥글레

2005.09.23 09:40:58

이유진님이 유진님이었군요! 추석전에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특히 여주는 가슴에 와 닿는 캐릭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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