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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주요 작품 몇 개의 파드되를 소품으로 발췌해서 공연한대. 어떤 작품 하고 싶어? 마음대로 골라도 된다면 말이야.」
「지젤이요.」
에스메랄다나 흑조가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현진은 놀랐다. 순수하고 여린 마을처녀 지젤, 달빛이 내려앉은 밤의 새하얀 윌리 지젤. 그 어떤 것도 그루와 매치가 되지 않아서 현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지젤은 감정묘사가 중요시되는 작품이라 표현이 어렵잖아.」
「지젤이 좋은걸요. 표면적으로는 연약한 소녀지만, 내면은 깊고 강하잖아요. 자기 의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는 포용적인 인물이니까요. 왕자가 나타나서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전형적인 공주가 아니라서 더 끌려요.」
「난 전형적인 공주라고 해도 오데트가 좋아. 내비쳐지는 모습이 아름답잖아? 마법에 걸려서 백조가 된 상황이면서 공주의 품위를 잊지 않으려고 하고 말이야. 정적이고 애절하며 기품까지도 겸비한 아름다움을 내뿜는 것이 매력이니까. 딱 보기엔 수동적이지만, 은은한 빛과 신비성이 개입되어서 끌리는 존재야.」
순간 그루가 입을 다물었다. 항상 분리되어 있었던 단어의 갑작스러운 결합에 놀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온전한 문장에서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파란 달빛이 내리는 초현실적인 공간 안에서의 Ballet Blanc. 지금까지 은연중에 그것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막 그 남학생이 저보고 비가 거세게 몰아치고 천둥까지 치는 어둑어둑한 날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그런 걸 묻지 뭐예요? 우울하거나 무섭거나 외롭거나 내지는 멋지다거나 등. 그런 것 중에 선택하래요. 난 그래서 솔직하게, 시끄러운데요. 이랬더니 갑자기 실례했다면서 뛰어가는 것 있죠? 살다 보니 별 일 다 겪어요. 빗소리에 천둥까지 무지막지하게 개입하면 당연히 시끄럽잖아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식의 뜨악한 표정으로 말을 줄줄이 잇는 그루를 보고 모두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참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루가 다니는 학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남학교와 바라보는 위치였다. 그랬기에 여학교 쪽과 교류하고 싶은 남학생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그 남학생은 분명히 자기한테 시끄럽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망해서 돌아갔으리라.
그루는 항상 저런 식이었다. 어떤 땐 지극히 감성적이고 동화적인 취향이 있는가 하면 묘한 순간에서 지극히 현실적으로만 생각했다. 성숙하고 생각이 많다 싶으면, 저런 순진하다 못해 둔감한 모습까지 나타나는 것이었다. 머리를 매만지면서 듣던 현진이 말했다.
「그 남자애는 분명 도도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공주님? 말 잘했다. 공연을 하나 할까 하는데 공주님 이야기거든. Sleeping Beauty.」
항상 레슨이 끝나고 옷을 다 갈아입었다거나 하는 느지막한 시간에 나타나서, 본의 아니게 잡담에 매진하고 있을 때 중요한 이야기를 해 버리는 최 선생님이었다. Sleeping Beauty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모두의 반응은 제각기였다. 흥미진진한 표정의 은채, 언제나 그렇듯이 얌전하게 경청할 자세를 취하는 나혜, 그리고 그루와 현진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오로라를 제가 해도 될까요?」
「오로라는 죽어도 안 할래요!」
정반대의 대답 중, 오로라를 하고 싶다고 말한 쪽은 현진이었고, 죽어도 안 한다고 고개를 내저은 쪽은 그루였다. 현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백조 등의 초현실적인 캐릭터나 공주의 전형적인 이미지였기에 오로라라고 하면 정말 선망하는 배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루의 경우는 달랐다. 벌써 1년 가까이 로즈 아다지오 하나로 쭉 나갔기 때문에 오로라라고 하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로 한 달 전만 해도 로즈 아다지오를 했었기에 더더욱. 작품을 바꾸고 싶다고 항의했으나, 최 선생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로즈 아다지오를 거듭할수록 수상 경력도 쌓아졌지만, 그것과는 완전 별개의 문제로 그루는 오로라에서 탈피하고 싶어했다.
「안 그래도 오로라는 현진이 줄 생각이었지만…. 그럼 그루는 라일락 요정이라도 할래?」
라일락 요정은 카라보스의 악독한 저주를 완화해주고 데지레 왕자를 오로라에게로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선한 역할이다. 그렇지만, 다른 요정들의 여왕 정도 되는 역할이었기에 우아함과 동시에 카리스마와 리더십도 돋보여야 한다. 그리고 연극적인 마임이 많고 개성적인 캐릭터였다. 오로라 공주에 버금갈 정도로 매력이 있어서 거의 주역급으로 취급하는 배역이다. 일단 키가 크면 잘 어울리지만, 솔로 부분은 상당히 느릿하고 아늑하며 포근한 느낌으로 연기해야 하므로 로즈 아다지오에 질려 버린 그루가 하고 싶어할 작품은 역시 아니었다.
「악, 안돼요! 차라리 격렬의 요정을 할래요! 아니면, 다이아몬드 요정이라던가 그런 것 안무 저한테 유리하게 수정해 주세요.」
그루가 격렬이라는 단어를 정말 격렬 그 자체로 말하는 바람에 최 선생님은 잠시 피식 웃었다. 잠시 생각 끝에 다이아몬드 요정을 최대한 화려한 기교가 많게 짜 주겠다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로즈 아다지오를 1년이나 하고도 저런 버릇이 고쳐지지 않은 것에 속으로 탄식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루랑 승강이를 벌일 시점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주역인 오로라였기에.
「그럼 은채랑 나혜는 뭘 할래? 선생님이 보기엔, 나혜는 빵가루 요정 어울릴 것 같으니 그거 하고….」
「전 1인 2역 해도 돼요? 프롤로그의 카나리아 요정이랑 3막의 늑대랑 빨간 모자 소녀요!」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은채가 의욕이 가득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빵가루 요정은 오로라 공주에게 달콤한 행복과 안락함을 주는 요정이야. 러시아 전설엔 아기에게 빵가루를 뿌리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거든? 그런 감정을 담아서 최대한 온화하고 상냥하게 나가 보자. 맺고 끊는 걸 조금만 더 확실하게 해주고. 팔다리는 자신있게 펴. 시선은 손끝을 쳐다보면서 최대한 그윽하게. 알았지? 나혜는 다 좋은데 갈수록 흐지부지하게 변하는 게 문제야. 그럼 자신감이 없어 보이고 시선이나 표정이 불안정하게 되거든.」
약간의 실수를 저질러서 스스로 움츠러든 나혜는 선생님의 다정한 말에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낯선 선생님 앞에서 긴장이 너무 과다했으니 몸이 마음대로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나혜는 조금만 실수를 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도 전에 혼자 주눅부터 들어버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타인의 표정이 눈에 보이거나 시선이 느껴지기만 해도 예민하게 의식했다.
「다시 한번만 해 볼래? 선생님이 나혜 처음 봤을 때, 동작이 섬세한 게 매력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 장점 살리자, 알았지? 마음을 담아서 꾸준하게 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거든.」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심어 주기 위한 자그만 칭찬이었지만, 나혜에게는 그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 찬탄의 말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어린 공주님에게 축복을 주는 임무를 수행하는 빵가루 요정의 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동작은 곱게 빻은 빵가루를 실바람에 날려보내는 것이 연상되었고 약간 수줍은 미소가 음악과도 잘 어울렸다. 아직도 시선엔 불안감이 남아 있었고 자신감은 다소 결여되었지만, 동작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실제로 나혜는 새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 그리고 전체적으로 가느다란 몸의 선이 요정이나 가녀린 소녀 역에 안성맞춤일 조건이었다. 특히나 로맨틱 발레에 적역이었다. 투명한 공기의 정령 실피드나 가녀린 비련의 여주인공 지젤 등에 적합할 듯했지만, 정작 나혜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뿐더러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3막 파트에서는 찬연하게 명멸하는 다이아몬드의 빛처럼 여운이 오래 남는 그루의 솔로가 끝났다. 다이아몬드 요정 솔로는 겨우 50초였다. 2분을 약간 넘는 오로라에 비해 반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고, 전체 공연으로 볼 땐 순시에 지나가는 작은 역할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루가 다이아몬드 요정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단역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존재로 변모했다. 눈을 현혹하는 현란함과 당당함, 그리고 정확한 밸런스와 기품을 동시에 갖춘 동작이 실로 괄목할 만한 기교였다.
「투르 앙 레르 때, 공중에서 더 화려하게 교차하면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충분히 괜찮긴 하지만, 조금 뭐랄까…. 단조롭거든. 그리고 에너지 조절이 너무 들쑥날쑥해.」
민국의 데지레 솔로를 본 현진이 거침없이 말했다. 왕자 역에 어울릴 만한 전형적인 당쇠르 노블의 품위는 깃들여 있었지만, 풍성하고 위용 있는 기교 면에서는 약했다. 특히 현진과 함께 있는 것으로 인해 그것은 결정적으로 비교될 치명타였다.
「저기,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느닷없는 현진의 질문에 민국은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식의 대답을 원하는지 알 길이 없는 민국은 말을 더듬어 가며 열심히 고민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난 공주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
「What's your role in Don Quixote?」(돈키호테에서 당신이 맡은 역을 무엇입니까?)
「I'm Kitri. but, I'm still learning the job so please don't expect too much.」(키트리입니다만, 전 아직 배우는 과정이니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현진은 expect에 당돌하게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단어의 어감에 단연함과 패기가 서려 있었다. Ms. Rogers에게 ‘기대’를 반어적으로 심어 놓고, 스페인의 광장으로 꾸며진 무대로 향했다.
막이 오르고, 춤을 추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키트리가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 연습 때만 하더라도 이 부분에서 친근감있는 표정이 되지 않고 영 어색했던 현진이었는데, 지금은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서글서글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부자 가마쉬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 아버지 로렌조 때문에 키트리는 골치가 아프다. 그녀는 돈은 많지만 하는 일마다 바보스럽고 흐리멍덩한 남자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따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가마쉬를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가마쉬 곁으로 간 키트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가마쉬를 뿌리치고 도망친다. 1막 중에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돈키호테가 키트리를 둘시네아 공주로 착각하고 다가와서 마을 사람들에 합류해 춤을 추는 동안, 그 둘은 선술집으로 피신한다. 그들을 쫓아와서 결혼을 무자비하게 진행시키려고 억지를 쓰는 로렌조. 그걸 보다 못한 바질은 자살 소동을 벌인다. 과장되게 땅을 치며 난동을 부리고 통곡하며 바질을 흔드는 키트리의 연기가 압권이다. 관객들의 웃음소리가 며칠간의 피곤함을 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개운해, 현진은 모든 상념을 없애고 연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2막의 꿈 부분을 마친 후, 현진은 다시 키트리로 돌아왔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돈키호테의 이상을 충족하는 존재인 둘시네아 공주 쪽이 훨씬 편했지만, 관객들은 돈키호테의 백일몽 속에서만 존재하는 불투명한 공주보다는 현실적인 키트리를 더 가깝게 여겼다.
가장 큰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키트리와 바질이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3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큐피트들의 앙증스런 군무도 끝나고 판당고 차례도 지나갔다. 피로연에서의 화사한 춤들이 마무리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음악이 서서히 느릿해지면서 시작되는 그랑 파드되.
유연함을 뽐내는 아라베스크 팡쉐와 잠시 멈췄을 때의 견고함과 안정성이 뛰어난 애티튜드, 그리고 파드되 중 최고의 기교 피쉬 다이브를 거쳐, 흐르는 듯한 턴으로 아다지오를 마치고 박수를 음악 반주 삼아 인사했다. 마리 탈리오니도 파니 엘슬러의 영역에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하려는 듯 최대한 요염한 미를 살린 자태로, 관객들의 환호를 즐겼다. 지금 이 순간에 그녀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당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주역 무용수 둘이 숨을 고르는 동안 무대를 대신 메울 키트리 친구, 즉 그루의 솔로가 펼쳐졌다. 설령 군무를 맡더라도 눈에 들어오게 하는 장점이자 단점을 가지고 있는 그루였다. 그 재질은 키트리의 친구 역을 맡고도 여실히 드러났다. 역동적인 네 번의 도약으로 시작해 가벼운 쉐네로 무대를 장식할 때마다, 중간에 박수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아는 관객들마저 자제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고, 일곱 번의 쥬떼가 무대를 가로지른 후엔 함성의 장(場)이 펼쳐졌다.
함성의 장은 바질 솔로가 시작됨에 따라 더 짙어졌다. 호기롭게 거들먹대는 듯한 복잡한 동작에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하이 톤의 함성이 인기 가수의 콘서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 소리만 듣는다면 발레 공연 도중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채로운 회전이 이어짐에 따라 관중석의 분위기가 함성으로 들썩였다. 퇴장하려다가 그 소리에 이끌려 몇 번이나 다시 나와야 할 지경이었다.
부채를 들고 나온 현진은 관객들의 시선이 무대 중앙이 아닌 무대 끝에 쏠려 있는 형상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 현재 객석의 공기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부채를 다잡았다. 부채로 산들산들한 바람을 일으키며 스텝을 밟을 때, 관객들의 시선이 차차 무대로 돌아왔다. 현진의 쥬떼는 살포시 떠오르는 가뿐한 성격의 것이었고, 앙트르샤는 더없이 섬세했다. 한껏 고조된 관객들의 분위기를 완화하는 촉진제가 되기는 했으나, 관객들로 하여금 소리를 내지르게 하지는 못했다.
우아하고 숙련된 동작 중심인 다른 키트리 친구의 솔로 직후, 바질이 등장해 점프력을 과시한다. 그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함성이 이어져서 음악이 뒤덮일 지경이었다. 바질이 동작을 마무리하면 키트리가 등장해서 고난도의 기술인 32번의 훼떼를 선보여야 했고, 그것은 돈키호테 그랑파를 더욱 인기있게 하는 요소였다. 그런데 키트리가 등장해야 할 부분이 음악 대신 박수와 환호성이 차지했고 급기야는 장장 40초 동안 마비될 지경의 함성에 바질 역의 무용수는 몇 번이고 인사를 반복해야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키트리가 훼떼를 끝낸 후의 공백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바질이 등장해서 몇 번의 동작을 구사하자마자 이렇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 예상에 없던 일이라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얼른 훼떼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건히 지배했다. 결국 그녀는 관객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반주 삼아 그 박자에 적당히 맞춰 훼떼를 시작했다.
초반부터 더블이 들어간 훼떼였다. 무대 바닥의 그림자는 원을 그리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관객들이 환호를 멈추고 현진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음악도 그제야 현진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화려한 훼떼로 무대를 석권하는 것에 성공했고, 음악에 맞추느라 두 번의 더블을 첨가한 후 끝맺음했다. 코다의 성공률이 높으면 일단은 환호도 크다. 그걸 증명하듯 큰 함성이 터졌지만, 현진은 완연한 키트리가 된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역시 마리 탈리오니는 파니 엘슬러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커튼 콜이 끝나고 관객들도 빠져나간 직후, Ms. Rogers가 생긋 웃어 보이며 무대로 올라왔다. 대부분 약간의 긴장을 꿀꺽 삼키고 그녀의 발걸음을 살폈다.
「You are a good dancer.」(당신은 훌륭한 무용수입니다.)
「It is kind of you to say so.」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현진에게 격려인지 감탄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말 한마디를 건넨 Ms. Rogers는 옆에 있는 그루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루는 Ms. Rogers를 보고 깜짝 놀라서 뒤로 약간 물러섰고,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그리며 그루를 진정시켰다.
「Oh, Take it easy.」 (당황하지 말아요.)
그녀는 영어로 말하는 그 자체가 그루를 더 당황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으리라. 우선 저 낯선 머리 색깔에 블루 계열의 눈의 외국 여자가 누군지 파악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Ms. Rogers는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Your ballet is amazing I couldn't get my eyes off from you, I would like to invite you to my ballet company if you are ok with it.」(당신의 발레는 굉장해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발레단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습니다만.)
저 중에서 그루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교과목 중에서도 특히 영어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그루인지라 혼란스럽기만 했다. Ms. Rogers는 나름대로 배려하는 입장에서 말을 천천히 끊어서 말했지만, 그루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Ballet가 고작이었다. 다른 단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루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주역인 키트리를 한 현진에게는 그저 Good dancer라는 수식어 정도만 붙인 그녀가, 고작 단역 솔로를 한 그루에게 자신의 발레단으로 초청하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닌가.
정작 당사자인 그루는 초조한 얼굴로 Ms. Rogers를 쳐다보았다. 화색을 가득 띠고 만면에 함박웃음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 표정과 들뜬 듯한 어조를 보아서는 찬사를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발레와 관련된 사람인 건 확실했다. 적당히 Thanks 정도로 일축해서 응수하면 될 일이었지만, 그루는 어설픈 발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루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살짝 숙인 다음, 한 손을 가슴 근처로 들어 서서히 밑을 향해 내렸다. Thanks의 뜻을 담은 발레 마임.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 그루가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최선의 언어였다. 그러나 Ms. Rogers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제스처로 보였다.
Ms. Rogers도 살짝 웃음을 머금고 아까 그루가 알아듣지 못한 말을 마임을 한껏 활용해 뜻을 전했다. 그루는 뒤늦게 아까 한 말이 무엇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마임으로 대답했다. 과찬이세요. 전 괜찮으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 이런 내용의 마임을.
Ms. Rogers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고 항상 기억하고 있겠으니 생각해 보라는 마임을 남기고 걸음을 떼었다. 뒤에 있던 단원 하나가 난색을 보이며 그루를 나무랐다.
「왜 그랬어? 흔한 기회가 아니야. 최소한 여기 있는 것보다 서양 쪽으로 나가는 게 낫잖니?」
「전, 우리 나라가 좋아요. 아직 발레에 대한 인지도도 낮고 환경도 선진국에 비하면 열악하고 발레를 보러 오는 관객도 적은 건 사실이에요. 다른 나라에 비해 발레에 대한 지식이 협소한 사람들 투성이지만, 여기서 그들에게 발레를 알리고 싶어요. 그래도 태어난 나라잖아요. 한국인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가길 원하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어요? 세계로 발돋움해서 한국을 알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외국으로 나가면 금방 클 수 있고 성공의 길도 지금보다 넓어.」
「전 성공에 주안점을 두지 않아요. 미래지향도 아니고. 현재 발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만일 언젠가 발레가 절 원하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접을 수 있는 사람이 될래요. 어중간하게 예전엔 발레를 했었다고 안타깝게 말하는 사람 말고, 그만두더라도 발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꺼낼 수 있는 사람이요. 뭐 그런 각오로 바를 잡고 있거든요. 그런데 외국으로 가 버리면, 본의 아니게 발레가 일이자 의무가 될 것 같아서 싫어요.」
의무가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루를 지켜보던 현진은 그 의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잘못 먹어서 체했을 때처럼 속이 징건하게 쓰라렸다. 공기의 정령이라는 틀에 얽매여서 안무가인 아버지에 의해 끝없이 관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마리 탈리오니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루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휘젓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저 영어 못해요! 아까 그래서 마임으로 말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거기 가서 마임만 하고 살 수도 없잖아요! 발레는커녕 말 배우느라 머리에 쥐가 나고 싶지는 않아요!」
순수하고 사랑스런 그루와 도도하고 품위있는 현진.
명랑하고 귀여운 은채와 수줍고 차분한 나혜.
네 소녀들이 펼치는 진지하고 귀엽고 섬세한 발레 이야기.
정말 간만에 발견한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로맨스는 아닙니다).
노다메 칸타빌레와 유리가면을 좋아하는 저한테는 더더욱 말입니다.
발레에 대한 섬세한 이해와 미려한 문장, 개성있는 인물들의 삼박자를 갖추고 있는 소설.
강추!
그런데 작가인 카링 님께 미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이렇게 스토리를 멋대로 발췌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메일을 보내봐야 할 듯).
청월화는 네이버 카페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음..저는 현진을 좋아한답니다 왠지 공감이 팍팍 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