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내 손은 거의 자동적으로 연필을 향한다.

"이것에 밑줄을 그어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한쪽 귀퉁이에 <아주 훌륭하다>라고 적고 느낌표를 힘주어 찍자. 그리고 앞으로 잊어버리지 않고 그렇게 장엄하게 깨닫게 해 준 저자에게 몇 마디 경의를 표할 겸, 이 글이 내 안에서 불러일으킨 생각의 흐름을 요점만 기록해 두자."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기울이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댓글 '9'

코코

2004.11.10 00:31:53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읽으면 안 되는 겐가;;;
뭐든 반드시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하고 있어야만 해?
흠...
슬프다구ㅠ.ㅠ

리체

2004.11.10 01:06:24

고찰하기 싫어지는 비장한 에세이로군. 으헤헤.^^;;

Jewel

2004.11.10 02:01:44

하암 - ;ㅁ; 난 늘 읽을때 마다 무로 외해되어버리데 orz

여니

2004.11.10 11:34:03

나 역시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대단한 걸 깨닫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책읽기의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해. 읽는 것 자체로도 충분한 즐거움과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데 말이야 ^^

편애

2004.11.10 16:01:41

그게 다 과연 잊혀진 건가요 -_-;
기억나지 않아도 뇌수속이나 혈관속에 두둥 떠다니고 있을거라 믿는 편.....인데;;;;;
쥐스킨트 아저씨의 글들은 정말 독특하기 그지 없는데;;;

코코

2004.11.10 16:26:19

편애/안타깝게도 저 같은 인간에게는 완전무결하게 잊혀진다지요-_-;
안 그럼 머릿속이 터질지도 몰라요T^T

여니

2004.11.10 23:59:37

편애/읽었던 책들... 기억 못합니다. 용량이 딸립니다-_-;
코코/나도 금방금방 잊는 편이야. 그런데 쥐스킨트의 저 글을 읽고는 가슴을 쓸어내렸었다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고 말이야 ^^;;

Agnes

2004.11.13 05:02:24

쥐스킨트 아저씨 ㅠㅠ 제발 오래 오래 책 좀 많이 내주세요, 제발 ㅜㅜ

2월화

2004.11.15 16:34:29

그거 좋은현상같아요. 원상태로 기억하고 있다는건 아직 녹지 않았다는 뜻이던데. 저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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