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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 변두리 썰  2004/10/26 00:59  
http://blog.naver.com/ssoojie/6890936

내게는 오빠가 한 명 있다. 피라곤 단 한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나 친 남매와 다름없는 그런 오래비가 하나 있다. (출생의 비밀, 아니다)

그를 만난 건 동아리에서였다. 구질구질하고 덕지덕지 때 묻은 방, 여러 명이 한꺼번에 피워대던 담배연기로 자욱한 동아리 방에서 그 인간을 처음 보았다. 막 제대하고 돌아온 그는 군대가기 전 여러 가지 특출난(다기보다는 기이한) 행적으로 인해 동아리 인들의 즐거운 얘깃거리가 되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잘 다니던 학교를 나 몰라라 하고 내팽겨쳐두고 주유소에서 숙식하며 지냈다는 둥, 여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등 이른바 ‘방랑자’같은 면모를 지닌 ‘기인’으로 사람들 입에서 읊어지곤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그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몸집이 자그마했으며, 항시 야구 모자를 쓰고 다녔고 은연중에 말을 더듬었으며 그다지 똑똑해 보이거나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괜시리 웃음이 풋-하고 지어지는 구석들이 있어서 타인으로 하여금 쉽게 방어벽을 무너뜨리게 하는 ‘접근 용이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결정적으로 친해진 까닭은 그의 원초적인 ‘선량함’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영화’ 때문이었다. 골방에서 수많은 고전영화들을 섭렵했던 그의 영화에 대한 무한애정과 이제 막 이글이글 타오르던 영화에 대한 내 열정은 곧잘 함께 뭉치곤 했다. 그와 함께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울 수 있었고, 설익은 격정을 토해낼 수 있었다.

거짓으로 범벅된 연애질을 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갉아 먹을 때도, 타인과 경계를 두며 독설을 내뱉곤 할 때도, 수없이 많은 토악질에도 그는 언제나 잠자코 지켜봐 주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찾아보기 힘든 장점을 기어이 끄집어내줬으며 진심어린 긍정의 위로를 해주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이것들은 대체 남녀가 붙어먹는 것밖에 모르냐며 싸울 뻔 했던 나를 오빠는 쓸쓸하게 웃으며 말리곤 했다) 우리의 우정은 변질되지 않았고, 오히려 견고해졌으며 더 많은 상념들과 이런 저런 세상들을 함께 꿈꾸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일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그의 고민들이 쑥쑥 자라나고 있었던 지 그는 불쑥 낯설고도 먼 나라, 폴란드로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더욱 이지러진 시간을 보내면서 한참 후에야 비로소 저질렀던 과오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깊이 베어진 자상들을 하나하나 꼬매어 나갔다. 가끔씩 제대로 잦아들지 못한 혈흔들이 툭툭 터져 나오긴 했지만, 어떻게든 근근히 이어 붙이는 데 성공한 듯 했다.

그 후 몇 번의 이메일교환이 있었고, 그는 독일로 갔다 했다.

그리고 나서 또다시 연락이 끊겼고 드문드문 그를 잊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에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을까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두려움은 오히려 차분한 기다림으로 바뀌었고, 몇 년 후 그가 돌아왔다.

그에겐 착한 아내가 생겼고, 이제 돌이 지난 귀여운 딸도 생겼다. 세월의 흔적인 양, 보기 좋게 몸이 불어 있었고, 그 전과는 또 다른 불안감도 간간히 엿보이기도 했다.

덧없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헤매일 것만 같았던 그는 현실의 고민으로 다소 위축되어 있었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작은 두려움도 지니고 있는 보통의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난 과거를 추억하며(주로 술만 먹으면 3단 변신을 했던 나와 그런 나를 돌보았던 그의 고행에 가까운 에피소드가 대부분이지만)킬킬댔으며 각자의 현실과 미래를 조심스럽게, 서로를 걱정하며 물음을 주고 받았다.

여전히, 정말 다행히도 그를 보면 웃음이 실실 나온다.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아직도 철없는 순수함을 지닌 것에, 그가 돌아와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그는 ‘영화’를 이야기하며 눈을 빛내진 않지만, 비록 매달 내야할 보험금과 아내 눈치를 보는 평범한 아저씨가 되어 버렸지만, 인생 한방이라며 장담하는 대책 없는 남자지만, 아직도 나를 걱정해주는 그 따뜻한 눈빛만은 변하질 않아서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감사했다. 또한 그가 드디어 땅에 두 발을 딛고 안착하고 있음이 나를 안심케 하였다.

대학생활 내내 유일하게 진심으로 긍정하였고 그 기억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다시 되새겨준, 비록 예전같이 많은 걸 나눌 순 없어도 그는 나의 진짜 ‘오래비’다.

그가 오래전부터 약속한 것이 있다.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 가구 일체를 장만해주겠다며 큰소리를 쳤던 것을 기억력 좋은 내가 잊을 리 없다. 그 약속을 넌지시 물었더니 그가 예의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가구 전체는 그렇고..내..냉장고 하나 정도는..’

내가 씨익 웃으며 ‘냉장고도 비쌀걸?’ 했더니 어쩔 줄 몰라한다.  


여전히 그는 날 웃긴다. 그걸로 충분하다.



우연히 방문했던 린님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ssoojie.do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좋아서 일기장에 담았었는데, S&S에 어울릴 것 같다는 코코님의 말씀에 이곳에 올립니다.

아직 사람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런 글이 참 고픈 시대예요.

댓글 '2'

코코

2004.10.29 15:18:50

이런 글 진짜 좋다구T^T

Rain

2004.10.29 22:46:16

부럽다는...이런 오래비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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