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요?"
  "뭔가?"
  "헤어지고 28년동안, 게이코씨하고 재결합할 생각은 한번도 안해봤나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미처 어린 소생이 뭘 알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알코올에 의존했던 한동안은 매일매일 그런 생각을 했었네.  하지만, 그런 꼴로 그녀를 되찾겠다고 나설수는 없었어."
  "무고죄 사건을 맡은 후로는요?"
  "그 무렵에는 벌써 그녀를 포기한 상태였네."
  "왜요?"
  "사실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만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네.  어떻게 해서든 국회의원의 아들하고 재혼을 시켰을거라고 말이야.  그래서 그녀를 잊으려고, 깨끗이 잊으려고 변호에 몰두한 거야."
  "무례한 말이지만, 정말 바보 같네요."
  "그래, 바보 같았지.   자네는 그런 짓 하면 안되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좋아하는 여자는 있나?"
  "없습니다.  전 아무래도 여자 운이 없는것 같아요.  하기야, 운이라기보다, 보는 눈이 없어서겠죠."
  "어떤 식으로?"
  "대학교 1학년때에 좋아한 여자는, 첫 데이트를 하면서 보기좋게 채였어요.  이유는 아주 간단했죠.  첫 데이트날 드라이브를 했는데, 그때 막 면허를 땄거든요.  차를 주차시키는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몇번이나 들락날락했더니, 그 다음날, 전화가 걸려오더니, 주차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생리적으로 안 맞는다고, 섹스가 서툴다고, 그러는 거에요."
  "정말 잔인한 말이로군.  나도 남자니까 그때 자네 기분, 충분히 이해가 가네."
  "고맙습니다.  저는 어찌나 분하던지, 당장에 패밀리 레스토랑 주차장에 가서, 피나는 주차 연습을 했어요.  난 서툴지 않다, 난 서툴지 않다, 그렇게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면서요."
  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쫓으려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르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멋지게 차를 주차시켰을 때, 나와 도리고에씨는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높이 들어올려 하이 터치를 했다.  짝, 하는 소리가 차안에서 짧게 메아리쳤다.  

내려올 때와 거의 비슷한 길을 더듬어 북상하고 있다.
  앞 유리창으로 비치는 햇살이 투명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것이 선열한 빛을 발하면서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진다.
  가을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지금 내게는, 후회할 일이 하나도 없다.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만이 있을뿐.  달리기 시합에서 출발하면서 넘어졌던 일, 밸런타인 데이에 채였던 일, 오키나와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 모두모두 사랑스럽다.  그 모든 기억을 간직하고, 다가올 겨울을 맞으리라.
  차는 상태가 아주 좋다.
  이 세상 끝까지 갈수 있을것 같다.
  그렇다.
  이 세상은 멋지다.
  나는 아무 상처없이 돌아오리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은 노자키.
고액의 아르바이트료를 받고, 역시 암판정을 받은 노변호사 도리고에씨의, 28년전에 이혼한 아내의 유품을 찾으러 가는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그 5박 6일동안, 쉼없이 나눠지는 대화를 통하여 도리고에씨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기억을 완전히 되찾고, 노자키 역시 시한폭탄과도 같은 병에 무릎꿇지 않는 용기를 찾게 된다.

J모 작가님이 선물해 주신 책을 통해 알게된 가네시로 카즈키라는 무국적 작가.  뭔가에 빠지면 관련된 모든것을 갖고야 마는 집착적인 성격탓에 리브로를 뒤져 그의 신작(-_-)을 구입했다.(GO와 함께)
'레볼루션 No.3'와 '플라이 대디 플라이'처럼 날카로운 유머와, 다소 냉소적인 글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나니...  눈물이 났다.

댓글 '1'

so

2004.10.27 17:18:27

[연애소설]은 가네시로의 작품 중 한번 읽고 다시 안 본 유일한 책입니다
그래봤자 일년도 안되긴 했지만;;
재미 없었다 보다 울기가 싫어서지요...
어찌나 추하게 울어대는지 남이 볼까 두려울 정도 였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이토록 눈물짓게 만들줄 몰랐기 때문에 감동(혹은 쇼크)이 더 큰걸지도 모르죠...
아무튼 일년 안에는 안 꺼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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