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762


"유이치,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지? 지금까지의 인생과 깨끗이 결별하고 다시 시작할 생각이지. 거짓말하면 안 돼. 난, 알아."

언어는 절망을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침착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튼 이거 먹어. 자, 먹어."

눈물이 나올 정도로 파란 침묵이 밀려왔다. 눈꺼풀을 내리깐 유이치가 돈까스 덮밥을 받아든다. 생명을 벌레처럼 파먹는 그 공기 속, 예기치 못한 무언가가 우리의 뒤를 밀었다.










식사 장면은 언제나 좋아하지만, '만월'의 돈까스 덮밥 부분은 특히 가슴을 울립니다. 따뜻한 덮밥 한 끼가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지.

키친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에 합격한 그 겨울, 합격증만 받아쥐고 들어간 대학 도서관에서였어요. 정신없이 읽다가 그만 저녁까지 눌러앉아 버리고 말았죠. 그 때 그 책에는 '커틀렛 덮밥'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일본 덮밥집이 한국에도 흔한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돈까스 덮밥보다 그 표현이 더 맘에 듭니다. 그 번역본을 구하고 싶은데, 지금은 당연히 절판되었죠.

김난주 님의 번역은 정말 맘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갖고 있습니다. 자주 눈에 띄는, 너무나 적절하지 않은 단어 선택이라던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문법 차이를 생각지 않고(일본은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컴머를 많이 씁니다) 컴머를 거의 그대로 써서 문장의 맥이 끊기는 느낌이라던가, 불만투성이지만 바나나 특유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정서는 역자가 달라도 여전하더군요.

현대 배경이지만 굉장히 일본적인 정서라서 서양인들에게는 와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만났던 켈리라는 흑인이 저한테 바나나를 읽고 난생 처음 일본에 가고 싶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나서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는 과연 누가 서양인들에게 그런 마음을 들게 해 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댓글 '2'

리체

2004.04.29 13:16:54

아앙! 그렇구나. 띄어쓰기가 없어서 '일본 번역체'라는 게 있는 거로군.

bach101

2004.04.30 00:37:32

아.. 이런 어색한 번역.. 정말 욕을 하고 싶어지는.. 교수님이 제발 국어부터 제대로 배우구 외국어를 배우라고 하신 그 깊은 뜻을 실감합니다.. 간혹 할리퀸도 읽으면서 이거 내용 괜찮은데 정말 어색한 번역땜시 날렸다..라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이런 유명한 작품도 어색한 번역에 당하는 날이 있군요..ㅠ.ㅠ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리뷰방에 관하여 Junk 2011-05-11
182 [로맨스] 전이지님의 "반란을 꿈꾸다" [2] 미루 2004-05-20
181 [만화] 김영희, 마스카 file [5] Junk 2004-05-20
180 [만화] 요시나가 후미, 사랑해야 하는 딸들 file [3] Junk 2004-05-20
179 [만화] 타카하시 츠토무, 지뢰진 file [6] Junk 2004-05-15
178 [로맨스] 로맨스 속의 여신, 남신들 1.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 [6] Junk 2004-05-14
177 [로맨스] 로맨스 속의 여신, 남신들 0. 시작하기 전에 Junk 2004-05-14
176 [로맨스] 모던걸의 귀향 [1] 코코 2004-05-11
175 여니님!축하드려요... [3] 김선하 2004-05-04
174 [연재글] 여니님 완결 축!!! [11] 코코 2004-05-04
» [소설]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중 '만월' [2] Junk 200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