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23





드디어 끝났군.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사회의가 끝나 사무실로 돌아오자, 벌써 퇴근시간이 한참을 지나 있었다. 긴장감이 사라짐과 동시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연달아 질문세례를 받느라 정신이 없던 회의시간동안 잊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어닥친 것이다.

“어떻게 됐습니까.”

비서실에 들어서자, 그 때까지 퇴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강용우가 질문과 함께 그를 맞았다.

“결정한 대로 내일부터는 한가해질 예정이야.”

현호가 가볍게 대답하자, 비서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렇습니까, 하고 말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싶습니다.”

먼저 퇴근하겠다는 말을 한 적 없는 강용우의 갑작스런 한마디에 현호는 놀라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인수인계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강용우는 얼굴에 나름대로 미소를 떠올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가버렸다. 현호는 비서의 생뚱맞은 태도에 의아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비서실 안쪽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제야 비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

문 바로 앞에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그 앞으로 다가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방금 손잡이를 놓아버린 손을 올려 그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잠시나마 너무나 그리워했던 몸이었다.

“돌아와 준 거야?” 

그 말에 수긍하듯 미희의 얼굴은 그의 가슴에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현호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예전 같지는 않겠지. 너는 고등학생이고 나는 당분간 실업자니까.”

“응? 무슨 말이에요? 혹시……, 회사 그만둬요?”

“그래.”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내 탓이죠. 내 탓…….”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아냐.”

현호는 말했다.

“네 탓이 아냐. 나 혼자 결정한 거야.”

“내 탓이에요…….”

미희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울먹이는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자신은 맞은편 소파에 자리 잡은 채 현호는 말했다.

“신도시를 개발한 건 나야. 나한테 일차적인 책임이 있어. 이런 기획일보다 나는 현장에서 뛰는 편이 훨씬 어울린다는 걸 또 한번 깨달았어. 도원시를 제대로 기능하게 만드는 작업을 내가 직접 하고 싶어. 그건 내게 있어서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해.”

“도원시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

“결혼은? 혼담이 오간다고 했었잖아요.”

그 말에 현호는 엷게 웃어버렸다. 당연히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다. 약혼 같은 걸 한 적도 없으니, 게다가 전무직에서 쫓겨난 -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테니 -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 봐도 자명했다. 이왕이면 다른 재벌가문의 후계자를 찾게 하는 쪽이 그쪽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아버지에게는 죄송스런 일이지만 말이다.

미희는 그 말을 듣더니 전면유리의 창가로 걸어가 섰다.

“나, 현호 씨를 갖고 싶다고 한다면 역시 뻔뻔한 게 되겠죠……?”

돌아선 등에서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현호는 조용히 웃으면서 반문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널 갖고 싶다고 한다면 그게 더 뻔뻔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그녀를 갖고 싶다.

기다려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소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당한 성인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미희는 창에 대고 있던 머리를 떼고 그에게 몸을 돌렸다.

“나요……, 자백해야 할 게 있어요…….”

“또? 이제까지도 충분히 많은 걸 속였잖아.”

현호는 쓰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당신을 싫어한다고 했죠. 증오한다고. 내 손으로 파멸시키고 싶었다고. 그래서 접근한 거라고…….”

그녀가 약하게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접근한 게 아니에요.”

약간 내리깐 속눈썹.

“나, 나는…….”

긴장할 때면 버릇처럼 꼭 쥐곤 하는 작은 주먹.

“그저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하얀 볼과 약간 여윈 듯한 목덜미.

“당신이 성당에 온 그 때부터…….”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

“매일 생각하게 돼버려서…….”

그녀의 전부, 전부가 사랑스럽다. 미치도록 사랑스럽다.

현호는 아직도 창가에 뻣뻣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겨우 고백할 수 있었다. 어린애라도 좋아. 정말 사랑하고 있다.

품안의 그녀가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미희는 잠시 동안 말하지 못한 채 침묵했지만, 이내 작게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녀가 그로부터 떨어지더니 목에 손을 대고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거기 걸려 있는 반지를 빼서 남자의 손바닥에 올린다.

“이제부턴 끼고 다닐래요. 목에 거는 거 불편해.”

현호는 말없이 그녀의 오른손을 붙들어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가느다란 실반지가 손가락에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대로 그 손을 들어 가볍게 입을 맞췄다. 손등도, 손바닥도, 그리고 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까지, 하나하나 천천히.

“이걸로 내거란 표시를 한 건가.”

남자가 너무나도 뻔뻔하게 그렇게 중얼거려서 그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고 있는 입술에 키스가 내려온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기 직전, 그가 중얼거리듯 망설이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라도 키스 정돈 괜찮겠지.”

“응, 아마…….”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남자의 목을 끌어당겼다.

한동안 가벼운 입맞춤이 계속된 후, 그녀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억울해.”

“응?”

“난 내거란 표시를 미처 못 했는데. 불공평하잖아요.”

“억울하면 그쪽도 표시하면 되잖아.”

“음, 그래야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남자의 손을 들어올렸다. 손등, 손바닥, 그리고 손가락에 따뜻한 감각이 느껴진다. 간지러운 감각을 참으면서 현호는 소녀가 하는 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미희는 한동안 도장을 찍듯 남자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지만, 이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분명히 내거 맞죠?”

“맞아.”

왠지 믿을 수가 없어져 가만히 있는 그녀를 보고,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전부 네 거야, 라고.

손가락에 깍지가 끼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감각을 조금은 수줍고 조금은 기쁘게 느끼면서 미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대낮처럼 밝았던 늦여름의 오후는 이제 완전히 밤으로 넘어가 까맣게 어둠이 덮여 있었다. 창 아래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더없이 화려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평화로웠다.

현호 역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로 이 풍경을 보는 것도 마지막인가 생각하니 조금은 섭섭해야 하는데 별로 허전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다. 아마도 그녀와 같이 있기 때문이겠지. 또한 그녀와 같이 할 미래가 펼쳐져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그대로 입술을 맞췄다. 그렇게 부드러운 입맞춤이 길게 이어진 다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남자의 귓전에 속살거림 같은 속삭임이 스친다.

“아무래도 나가는 게 좋겠어요.”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가 아니라 반지 사러가요. 아무래도 표시를 해둬야 할 거 같으니까. 네? 내가 살게요. 비싼 건 절대 안 되지만.”

그녀 형편에 살 수 있는 반지가 어떤 걸지 대충 짐작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해서 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문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작은 손길과 더불어 맑은 웃음소리가 고막을 엷게 간질이기 시작했다.



계속.




지겨우셨죠?
이제 2편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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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3'

rain

2004.07.30 00:42:13

갑작스럽네요......느낌이.(몬소린지...)

Junk

2004.07.30 00:47:19

헉, rain님. 그렇죠? 어떻게 해서든 할리퀸 분량으로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무래도 분량을 늘려서 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띠츄

2004.07.30 00:47:28

정크님,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하루에 한 편만 올라오는게 서운할 정도로.. 계속 건필하세요.. (정크님한테 첨으로 글 쓰려니 엄청 쑥쓰럽네요.. ^^;)

Jewel

2004.07.30 00:53:44

헉 너무 쉽게 넘어가요!!! 미희가 유혹할려고 고생한게 어딘데 ㅠ,ㅠ

Junk

2004.07.30 01:03:23

레띠츄님, 반갑습니다^-^ 근데 좀 허접하죠? 저도 안답니다(자진납세...;). 레띠츄님 댓글 뵈서 넘 영광이야요.
Jewel/ 절대동감; 그러잖아도 수정/개작 고려중^-^ 쓸 땐 왜 몰랐죠? 넘 열중해서 써서 그런가? 역시 10일 걸린 글은 어딘가 좀 모자라나 봅니다.

bach101

2004.07.30 01:51:57

예비수녀님에 대한 기억은 다 지운걸까요? 미희를 사랑해주는 현호의 모습이 멋지면서도 마음도 못전하고 너무 허무하게 죽은 수녀님이 가여워서...ㅠ.ㅠ

Miney

2004.07.30 02:10:07

어쨌든, 현호는 넘 좋겠어요. ^.^;; 귀엽고 사랑스런 어린 처녀가 좋다고 말해줘서...; 음, 근데 이걸로 엔딩이 아니라니, 무슨 사건이 더 남아 있는 건지, 혹 복병;이 있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2편... 에필로그 격일까요?

귀연천사

2004.07.30 09:46:21

음..갑작스런. 해피모드라서리.. 그래두.. 좋네요.. ^^

네모

2004.07.30 10:28:33

해피가 좋져~현호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 보여주실거져? 미희는 고등학생이라..머 고등학생도 결혼은 할수 있는거니까 ㅎㅎ 아무래도 원조는 좀 그러니깐..호적부터 정리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현호 성격에 미희가 졸업할때까지 수도승처럼 기다릴것 같지도 않은데요 ㅎㅎ

여름

2004.07.30 10:36:32

지겹다니요....매일 이 소설만 기다리는 걸요. 정크님 너무 기분이 좋아요 두사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두 편 남으셨다구요? 에필을 준비하신 건가요? 아~ 더운 여름 정크님 덕분에 기분 좋게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셔니

2004.07.31 09:48:02

현호는 이제 무엇하나 부러울것이 없을 겁니다... 사랑하는 미희가 사랑한다 말해줬는데 뭣이 부러울까요... 두 사람의 사랑이 예쁘게 그려지겠군요... 부러워라...

Junk

2004.07.31 15:08:01

bach101/ 넵. 사실 그 부분을 좀 다시 넣을까 생각중입니다. 이런 댓글 하나하나가 수정에 포인트가 된답니다. 고맙습니다^-^
마이니/ 에필로그입니다^-^
귀연천사/ 그렇죠...; 역시 수정시에는 뒷부분을 조금 안타깝게 늘고 물어질 예정...
네모/ 허걱. 수도승처럼 기다렸답니다^-^;
여름/ 여름님, 읽어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려야죠. 에필에 가까운 마지막 2회입니다. 곧 끝납니다~
셔니/ 아하하^-^ 셔니님 너무 귀여우세요^-^

누리

2005.10.01 00:09:14

근데, 생뚱맞게도 저는 왜,
이런 속사정을 배제하고 뉴스화된다면(아마 헤드라인은, 재벌 후계자, 여고생과 원조교제;;, 정도가 되겠죠?), 이건 사랑이 아니라 세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범죄가 되겠지, 란 생각이 들까요?-_-
속사정을 알고 모르는 입장차이겠죠. 흐음, 얘들도 사랑일텐데...안타까워요 ㅜ.ㅠ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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