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21





이걸로 전부인가.

현호는 가벼운 한숨을 토해냈다.

맨 위 책상서랍에 들어 있는 물건을 마지막으로 상자에 옮겨놓고 나니 어느 새 이사회의 시간이 되어 있었다. 회의 다음에 원래대로라면 거래처인 은행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가야 할 예정이었지만……, 아마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전무님.”

문 저편에 이미 아침에 사표를 제출한 충직한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비가 올 땐 지났는데…….”

현호는 몸을 돌려 창밖으로 보면서 중얼거렸다. 날씨가 이상하다. 창 너머로 비치는 하늘에는 먹구름이 자욱했다. 어쩐지 오래 전에 끊어버린 담배가 고프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박신호 실장의 발목을 잡을 자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으신 겁니까.”

“그게 아냐.”

현호는 엷은 미소를 올렸다.

“내가 원해서 나가는 거다. 능력에 맞는 일을 새롭게 시작해 볼 거야.”

그 말에 강용우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들고 힘차게 끄덕였다.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닌 그의 입가에 드물게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언젠가 또 같이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도 그럴 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비서는 힘을 주어 대답했다. 현호는 그런 비서의 어깨를 두드린 후,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던 양복 상의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이군.”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회의실에는 이미 사람이 어느 정도 차 있었고, 그 중에는 부사장과 HJ리빙 박신호 실장의 모습도 보였다. 현호를 보자 부사장은 한쪽 눈썹을 희미하게 들어올렸고 그의 사촌은 입가에 희미하게 비웃는 듯한 미소를 떠올렸다.

어제 현호가 사표를 제출한 후, 아버지인 회장은 이번 회의에 결석하기로 돼 있었다. 아들의 사직을 지켜보는 것은 아버지로서도 괴로운 일이겠지. 몇 번이나 생각을 고쳐먹어보라고 만류했지만 현호의 결심은 변함없었다. 물론 자세한 사정은 설명하지 않고 도원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만 했다.

사촌동생이 빙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그를 슬쩍 바라본다. 신호로서는 기회라 싶었을 것이다. 현호가 물러나면 전무직에 공석이 생긴다. 사촌은 그걸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 녀석이 우습게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현호는 입안에 밴 쓴맛을 삼켰다.

뭐,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매스컴에 붙들리긴 하겠지만……, 그 수습만으로도 시간을 꽤 잡아먹을 거 같다.

고개를 돌리며 현호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복도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와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안 된다니까! 어딜 출입금지구역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냐!”

그것은 경비원의 고함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에 응답하는 조금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고 다급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

“이걸 돌려드려야 해요! 꼭 돌려드려야 해서…….”

순간, 귀를 의심했다. 설마…….

“글쎄 여긴 안 된다니까 자꾸 그러네?”

“제발, 잠시만 만나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애원 같은 여자의 음성을 들었을 때, 현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소리 내어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서.

“미희!”

경비원에게 끌려가고 있는 여자는 이제까지 본 중에서 가장 어려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디 하나 몸 둘 곳 없는 것처럼 불안하고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저……!”

방금 뛰어나온 현호를 발견한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거, 이걸 돌려드리려고……!”

눈이 선명하게 마주친다. 어딘가, 호소하는 듯한 시선. 손에 든 봉투에서 간신히 끄집어낸 물건은 엊그제 그가 그녀의 머리에 씌워준 양복 상의였다. 그것을 들어올리면서 현호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은 반쯤 울먹이고 있었다. 현호는 그녀에게 달려가 안아주고픈 마음을 간신히 누르면서 경비원에게 말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놓아주십시오. 이 아이는 저와 할 얘기가 있습니다.”

그 말에 경비원은 의아한 눈을 했지만 순순히 미희를 놓아주었다. 그녀가 희미하니 숨을 헐떡이면서 그를 올려다본다. 그 얼굴은 왠지 안심한 것처럼도 보이고 슬픈 것처럼, 혹은 두려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가 막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을 때, 등 뒤에서 제3자의 기척이 느껴지고 불쾌한 음성이 울렸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것은 신호의 목소리로, 그는 척척 그들 앞으로 다가오더니 경직된 채 서있던 소녀의 팔을 잡아 비틀며 저편으로 험악하게 밀어냈다.

“여긴 너 같은 계집애가 올만한 곳이 아니야.”

“놔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

미희는 붙들린 팔을 어떻게든 뿌리치기 위해 마구 흔들며 소리 질렀다. 소리를 들었는지 회의실에서 다른 임원들이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내밀고 지켜보고 있는 걸 현호는 깨달았다. 그는 사촌의 어깨를 잡고 입을 열었다.

“그 앨 놔 줘.”

신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현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에게만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다.

“이봐, 아가씨. 이런데 오면 박 전무 입장이 곤란해질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 그나저나 정말 주제를 모르는 계집애로군. 고아 주제에…….”

그 때 현호가 신호의 팔을 붙들었다. 놀란 사촌의 얼굴은 무시하고 팔을 강한 힘으로 비틀어 올린다. 신호가 신음을 토하며 여자의 팔을 놓았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형? 이 계집애와의 관계를 다 까발려도.”

분한 듯이 이를 악물며 그가 비웃음을 담은 미소를 보내왔다.

“그러잖아도 뒤에 모두들 보고 계신데, 어쩔 거야.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사내 전체에 스캔들이 돌기 십상일 텐데?”

“나는 상관없어.”

현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머리 한쪽 구석에서는 망설이고 있었다. 정말로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미희는……, 미희는 어떨까. 아직 10대, 평범한 고교생에 지나지 않는 그녀에 대해 나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거짓말 마. 소문이 도는 게 싫으면 잠자코 계시지, 변태 도련님.”

신호가 그를 보며 빈정거렸을 때였다.

짝! 복도에 날카로운 소음이 진동했다. 그것은 미희가 신호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치는 소리였다. 예상 밖의 상황에 놀랐는지 사촌동생은 흠칫거리면서 뒤로 물러서다 벽에 등을 부딪치고는 흐느적거리는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누구더러 변태라는 거야. 변태란 함부로 남의 뒷소문을 만들어서 이용하려는 당신 따위 벌레 같은 인간들을 가리켜 변태라고 하는 거야.”

미희는 강렬한 시선으로 신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 미안해요. 다 내, 내 잘못이에요. 증거 같은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소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약간 흐느낌 같기도 했다. 현호는 말을 멈추고 그녀가 내민 자신의 양복 윗옷을 받아 쥐었다.

“이걸 돌려주러 온 거야?”

“응…….”

미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호를 보지 않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입술이 부들거리며 떨리더니, 이내 유리구슬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목 언저리에 손을 갖다대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버릴 수가 없었어……. 정말로……, 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것만은…….”

그녀가 옷 안에서 끄집어 낸 것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 체인이었다. 거기에는 그가 생각했듯이 십자가가 아니라 그가 마지막 날 사줬던 만 원짜리 반지가 복도의 불빛 아래 희미한 빛을 발하며 매달려 있었다.

“누구한테도 줄 수도, 버릴 수도 없어서…….”

반지를 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건 아는데…….”

볼에 가느다란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서…….”

현호는 팔을 뻗었다. 팔을 그녀 쪽으로 뻗어, 희미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바보, 결국 어린애였잖아…….”

그리고 자신은 어린애에게 반해버린 또 하나의 바보다.

미희가 팔 안에서 무너져 내리듯 기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그의 가슴에 매달리며 이제까지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뒤에서 모두들 지켜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상관없었다. 남의 시선 따위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그녀를 잃어버리는 것. 자신의 마음을 속여 가며 그녀를 놓쳐버리는 것. 너만 내 곁에 남아준다면 나는…….

현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팔에 더욱 힘을 주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군요.”

차분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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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릴리

2004.07.27 09:48:31

신부님 등장인가요? 역시 미희는 너무 여리고 착한것 같아요.ㅡㅡ;
현호가 너무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젠 미희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크흑~

씬~

2004.07.27 10:23:09

두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보고 싶네여...

귀연천사

2004.07.27 10:50:56

하.. 신호녀석 크게 한번 혼내줘야 하는데 말이죠.. 미희가 이렇게라도 현오에게 도움아닌 도움을 줬으니.. 게다가 드뎌 등장한 신부님. .두둥.. 기대됩니다..

Junk

2004.07.27 14:02:11

어떻게 신부님 등장인지 다들 알아차리신 거죠? @..@ 드라마... 아니 로설 9단들이십니다^-^

mirage

2004.07.27 17:33:16

어린애라서 데리고 안논다더니...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제일 먼저 올라간단 명언이 생각납니다.

bach101

2004.07.28 00:30:37

현호~~~ 멋져요 멋져~ 그의 과거의 잘못을 보아도 이렇게 멋지게 느껴지다니 ㅎㅎ 역쉬 저는 정크님 소설속 남주들을 편애한답니다.. 밑글의 미희에 대한 제댓글은 걍 무시해 주셔요!~~~ 요부같은 이미질 바랬지만서두 사실 미희의 정체가 드러난후 안심을 했답니다. 나이는 뭐.. 기다리면 되니깐요~ ^__^
코코님 저와 같은 생각을.. ㅎㅎㅎ 권상우 생각이 나더군요..저두.. ㅋㅋ

Junk

2004.07.28 10:10:58

mirage/ 정말 그렇죠? ^-^;
bach101/ 진짜 요부도 한번 써보고 싶답니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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