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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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호는 눈을 떴다.

고작해야 1시간 정도쯤 잤을까. 어제 내내 맨션의 구조결함에 대해 뒷수습을 하느라 새벽까지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됐지만 대신 다른 할일이 잔뜩 밀려 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얼굴을 씻고 바로 일에 들어가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내일 있을 이사회에서는 신도시에 관해 논의할 것이 확실했다. 아버지로부터 지시받은 이상, 대응방법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현재 기획담당인 그였지만 일단 신도시 프로젝트는 그의 손에서 진행된 것이기도 하고, 또 그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감사역들의 비난의 화살을 막을 방패를 갖춰둬야 하기도 했다. 특히 회장의 아들인 젊은 전무에 대한 부사장의 견제는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에 미희가 오기로 했었지. 서둘러야 한다. 서류와 컴퓨터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동안 벌써 10시를 훨씬 지나 있는 걸 깨달았다. 일할 때만 쓰는 안경을 벗고 피로가 쌓인 미간을 문지르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강용우입니다.”

“들어와.”

피곤한 머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잠을 쫒고 있으려니 강용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서는 여느 때보다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현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집어 들던 현호는 표정이 굳어졌다.

사진속의 여자.
옆에 찍힌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어 보이고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그녀, 이미희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주보며 웃는 상대를 불과 하루 전에 현호는 본 기억이 있었다. 이름이…… 명현이었던가. 거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있던 건달이나 불량배 같은 느낌의 젊은 남자.

“조명현이란 놈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폭력조직에서 꼬리질을 하던 놈이죠. 그 아가씨가 조직에 몸을 두고 있었던 건 어쩌면 맞는 것도 같습니다.”

현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비서를 올려다봤다. 어떤 순간에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것. 아버지인 회장으로부터 배운 첫 번째 경영기술이었다.

“이미희는……, 조직의 멤버…… 정도가 아니라 조직중간보스의 정부였습니다. 조직에서 발을 끊은 지금도 그와는 가끔 만난단 소문이 있습니다.”

그 말에도 현호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스스로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살 집도 버젓이 갖고 있죠. 방배동에 있는 오피스텔입니다. 말이 오피스텔이지 방의 개수만 적을 뿐, 욕실 같은 건 거의 호화 맨션 수준인 뎁니다. 집은 나와 있지만 사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듯합니다. 물주가 있으니까요.”



- 이런 욕조, 첨 써 봐요. 신기해.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알몸의 그녀가 떠오른다.

그건, 거짓말이었던가……?

‘하지만…….’ 하고 잠시 침묵하던 강용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에야 조직중간보스의 정부였다던……, 호화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이미희의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 그 사진 말고 다른 사진을 구해야 확신이 설 것 같아서 어렵사리 구한 건데…….”

비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니었습니다.”

“아니었다니?”

“전무님이 데려온 그 아가씨가 아니었습니다. 완전 다른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강용우는 아직 현호가 쥐고 있던 사진을 뒤져 마지막 한 장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현호는 그것을 보았다. 사진 속에서 조금은 야하지만 꽤 세련된 화장을 하고 화려한 고급정장을 입고 있는 젊은 여자를.

그것은 전혀 본 기억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이 여자가 진짜 이미희입니다. 카드의 진짜 주인인 이희원의 양동생이며 카드를 훔쳐서 집을 나왔다는 그 이미희 말입니다. 전무님이 알고 있는 이미희는 다른 사람입니다. 언니의 카드를 빌려 쓴 정도가 아니라 생판 남인 사람의 카드를 멋대로 사용해서 클럽에 드나들고 있던, 완전 별개의 인물이었던 겁니다.”

현호는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댔다가 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전의 그 사진이나 아까 조직의 꼬리표였단 놈과 찍은 사진은 뭐지?”

“그걸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생각한 이미희는 아니더라도 그 아가씨도 조직의 멤버일 가능성도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드를 입수한 경위도 수상쩍고…….”

손을 깍지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현호에게 강용우가 말을 이었다.

“르 메트로 호텔 부띠끄 한시원 점장이 그 아가씨와 만났던 것 같습니다.”

“뭐?”

현호가 약간 미간에 주름을 그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말씀드리긴 뭣하지만 그 여자가 전무님께 접근한 적이 있죠. 아마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아가씨에게 경고를 하려던 거였겠죠. 그 때 점장한테서부터 전무님의 누나에 대해서 들은 게 아닐까 확신하고 있습니다. 점장은 발이 넓기로 유명하고, 또 전무님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려고 혈안이었단 얘기를 들었어요. 아시다시피 점장의 큰 아버지인 한민권 씨는 회장님과 막역한 사이이기도 하니까요.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알 듯 모를 듯한 느낌이었다. 입안에 쓴물이 도는 걸 느끼며 현호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얽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따져보면 처음부터 도저히 정상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만남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푹 빠져들어 버렸지.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럼 대체 그 애는 누구야. 어떤 사람인 거지?”

“아직 조사 중입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자신은 홀린 것처럼 빠져들어 버렸다.

그녀는 대체……, 뭐지?

현호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비서실로부터였다.

‘미희?’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연결버튼을 눌렀다.

“전무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떡할까요?”

강용우 외에 사무를 처리하는 여자 비서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HJ리빙의 박신호 실장님입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현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 강용우에게 지시했다.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모양이군. 옆방에 대기하고 있어.”

강용우는 침착하게 끄덕이고, 바로 그의 지시에 따랐다.







“부사장과 접촉하고 있다며.”

소파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무는 사촌에게 현호가 차갑게 말했다.

“빠르군. 전직 조폭을 비서로 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보지?”

신호는 입술 끝을 비열하게 비틀어 올리면서 연기를 토해냈다.

“그런 데 신경 쓸 형편이 아니잖아? 지금 네가 담당하고 있는 신도시의 문제는 우리 그룹 위신의 문제이기도 해. 시기도 딱 맞춰 다른 곳의 설계결함이 드러나서 가뜩이나 골치 아픈 지금이란 말이다. 이대로 가다간 비난의 표적이…….”

“비난의 표적이 되기 전에 누군가 책임을 지면 돼.”

“누가 책임을 진다는 거야?”

“그 도시를 만들 당시의 책임자인 형이 말이지. 그 다음에 분양가를 인하하면 될 거야. 기업 후계자가 책임을 진다는데, 주민들의 분노도 어느 정돈 가라앉지 않겠어, 안 그래?”

사촌이 한점 거리낌 없는 투로 하는 말에 현호는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헛소리야. 신도시 관리는 전부 너희 HJ리빙에 넘어가 있잖아.”

“건설책임자였던 사람이 형인데 형이 책임져야지. 그리고…….”

신호는 담배를 손에 쥔 채 느슨하게 소파에 기댔다.

“형이 갖고 있는 우리 그룹 부동산의 주식, 딱 절반만 매각해. 나도 매입하고 싶지만 우리끼리 매매는 안 되니까 그건 할 수 없고, 어쨌건 형은 형의 소유주를 매각하고 우리 그룹 경영에서 물러나는 거야.”

“뭘 믿고 그런 시건방을 떠는 거지?”

현호는 냉랭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분명 뭔가를 뒤에 감추고 있겠지. 자, 카드를 제시해 봐. 신호는 그에 반응해 담배를 눌러 끄더니 킥킥 웃어보였다.

“시건방? 그런 거 아냐. 난 그저 형이 어차피 하게 될 일을 자발적으로 하라고 도와준 것뿐이야. 오해는 마시지. 아하, 지금 우리 대화를 녹음하고 있나? 그딴 수작은 소용없을 텐데? 아, 참. 의외였어,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별 기대는 안했었거든. 겉보기에 순진해 보인다고 너무 쉽게 넘어간 거 아냐? 취향이 조금 특이한 것 같기도 하고, 형답지 않아서 좀 놀랍더군.”

……역시 그랬던가.

짐작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녀와 내부의 적들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뭔가 석연찮다. 현재 자신은 경원그룹이라는 막강한 상대와 혼담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혼담이 확정지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 미혼이며 약혼조차 하지 않은 자신이 수일간의 연애로 위협을 받을 일은 딱히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촌 쪽이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더 심각한 걸로 아는데. 자신만 해도 상당한 약점을 쥐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며칠간의 동거생활에 사촌이 비장의 카드로 내밀만큼의 무게가 있다는 건가.

현호는 침착한 시선으로 신호를 응시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은 대체 뭐지?

“이번 이사회에서 책임지고 사직하도록 준비를 해주면 좋겠어. 그게 형에게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일 테니. 이만 가지. 담에 보자고.”

사촌은 그렇게 말하고 거만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나가버렸다.

“무슨 일입니까.”

녹음기를 갖고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강용우가 나왔다. 깍지 낀 손을 얼굴에 수직으로 갖다댄 자세인 현호는 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도원시의 해인성당에 대해 조사해줘.”

“해인성당…… 말입니까? 그 이영진 신부가 운영하는?”

“그래. 그 성당에 고아들을 위한 양육시설이 있어.”

“거기에 대해서라면 최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 이영진 신부의 건강문제도 있고 사정이 굉장히 어려워져서 폐쇄 위기에 놓여 있다더군요.”

앉아 있는 현호는 고개를 들어 강용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은 그 보육원은 나이가 찬 아이들이 어린애들을 돌보는 식으로 어떻게든 겨우 버티고 있는 것 같더군요. 영 힘들어서 어떻게 해서든 양부모를 구하거나 취업을 해서 독립을 시키려고 아등바등하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

한숨 같은 대답과 함께 현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벌써 12시.

미희가 온다고 한 시간이다.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볼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여비서가 그 옆으로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뭔가를 내민다.

“전무님. 좀 전에 이런 걸 누가 가져왔는데요. 누군지는 안 밝히고 그냥 전무님께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현호는 그녀가 내민 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하늘색의 작은 편지봉투로, 안에는 당연히 편지가 있는 듯 겉은 풀로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뜯었다. 안에 들어 있던 하늘색 편지지를 꺼내 펼친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낯빛이 점점 변해갔다.

“이걸 가져온 사람은 누구지? 젊은 여자였나?”

편지를 다 읽자마자 그는 여느 때 같지 않은 다급한 투로 여비서에게 물었다.

“아뇨. 젊은 남자였습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지? 이 편지를 가져온 게 언제야?”

“지금 방금 받았습니다만……. 이제 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막 내려간 참인데요.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가 내려가서 불러올까요?”

비서가 상냥한 목소리로 묻는 걸 현호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잽싼 동작으로 엘리베이터 반대편의 비상계단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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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리체

2004.07.23 11:28:45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거로구나..감탄감탄.;;;

김숙경

2004.07.23 12:00:56

미희의 진짜 정체가 정말 궁금하군요..
혹시 첫사랑의 동생?....

황금소나무

2004.07.23 12:09:53

알수 없는, 정말 알수가 없군요.. 점점 더 궁금합니다. 빨리 모든 궁금점이 풀렸으면 하는 바램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독촉을 안할 수가 없네요 ^^ 호호 ~~~

앨리스

2004.07.23 13:48:02

오오...드라마 같아요...어쩜 가장 긴장되는 순간...To be continued...인지..T^T

귀연천사

2004.07.23 14:48:43

앗.. 사촌동생녀석 넘 싫어요.. 그런 녀석은 한번 크게 손봐줘야하는데.. 미희는 과연 어떤 여자일런지..이거참 궁금 투성인데요???

릴리

2004.07.24 09:52:04

그 녀석 참.. 이름은 예쁜데 하는 짓거리는 영..
미희라는 이름의 그녀는 어케되는 거여요. 예?

마리

2004.07.24 10:19:42

오늘 첫편부터 다 읽었어요.. 전 확~빠져버렸습니다.
베일에 싸인여주.. 한칼쑤마한지만 상처가 있는 가슴 따뜻한 남주..
제가 좋아하는 스토리입니다.ㅎ..ㅎ
근데 그 사촌동생 진짜 밥맛이네여.
남주 어째서 아버지 한테 꼼짝못하는지..효자는 아닌거 같은디..
암튼 정말 기대 만빵입니다..

Junk

2004.07.24 11:48:11

다음 편에서 그 진실이 거의 다 나옵니다. 사촌이야 원래 밥맛으로 설정한 캐릭터고...
저... 다음 편 읽고 너무 싫어하지 말아주세요...;(막상 올리려니 소심해졌음)

헤라영

2004.08.06 17:44:46

저 정떨어지는 사촌 완죤 짜증이에여!!!
미희는 아무래두 그 고아원 아이인듯한데.. 나뿐 사촌x.
군데 마지막에 젊은 남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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