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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밤의 거리는 대낮보다 더 밝았다.
명동을 걸어서 지나가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란 생각이 든다.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생소하고 신기할 정도로. 진을 걸치고 얇은 여름 니트를 입은 가벼운 차림새의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잘 어울리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단 하나, 여자가 조금 앞서 걷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미희는 일부러 명랑하게 앞서 걷고 있었다. 가끔씩 남자를 돌아보며 웃는다. 하지만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그 얼굴에 반짝 하고 슬픈 기색이 스쳐갔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옆에 서지 않았고, 손의 떨림을 들킬까 봐 남자의 손을 잡지 않았던 그녀였다.
현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 미희?”
갑자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 걷고 있던 여자의 등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현호는 그 목소리가 젊은 남자의 것이란 사실을 알고 얼굴이 슬며시 굳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해 돌아보며 지은 미희의 표정을 보고 더욱.
“왓! 명현이 오빠! 오랜만!”
“우와. 뭐야, 너. 되게 예뻐졌다? 여기 와 있었냐?”
“으응…….”
미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호를 슬쩍 돌아보았다. 현호는 말없이, 별로 놀라지는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그리고 젊은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장사한다고 들었다 참.”
“쩝. 그래봐야 좌판인데 뭐.”
명현이라는 남자가 대꾸하면서 가리킨 방향을 보니 다른 청년 하나가 이쪽을 보면서 빙글빙글 웃는 앞에 액세서리를 파는 리어카가 놓여 있었다.
“어, 손님 많네? 장사가 제법 되나 봐. 소식 듣고 얼마나 기특했다고.”
“그러냐? 여기 좌판 하나 차리는데 얼마나 주먹이 오갔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걸. 아, 시바. 사람이 정신 차리고 뭣 좀 해볼라치면 꼭 태클이 들어오네? 덕분에 여기 오고 일주일은 매일 주먹다짐의 날들이었다.”
“응? 무슨 말이야?”
“뭐, 말 그대로. 자릿세랍시고 한몫 챙겨보려는 같잖은 새끼들이 어찌나 달라붙던지. 거의 반죽음으로 만들어줬더니 이젠 알아서 자동으로 기고 있다만.”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그래도 요번 건 이해할게. 살아보자고 그런 거니까.”
현호는 미희와 청년의 대화를 잠자코 옆에서 듣고 있었다. 명현이 그제야 그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누구냐?”
“응, 하루 애인. 멋지지?”
미희가 현호의 팔짱을 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명현은 눈을 들어 현호를 죽 훑어 내리듯이 살폈다. 어딘가 불쾌한 기색이었다. 대충 걸치고 나와도 저절로 흘러나오는 귀티 같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점이 명현의 반감을 산 모양인지 그는 입가를 비죽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전혀 매치가 안 되는 현란한 줄무늬 셔츠에 똥색 반바지, 그리고 싸구려 스포츠 샌들을 구겨 신은 청년은 참으로 촌스러웠다. 흐린 감색 여름 니트에 브랜드 청바지를 멋스럽게 입은 현호와는 사뭇 대조되는 인상이다. 꼭 조직에서 갓 나온 듯한…….
……조직?
- 1년 전에 조직을 나온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냥 나올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세계의 룰이니까요.
혹시 이 남자……, 거기서 알고 지낸 사람인가?
아니. 그렇지만 뭔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든다.
-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얼굴로만 판단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현호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미희가 팔을 잡아끌며 명랑하게 말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요? 내 말 못 들었어요?”
“응? 뭐라고 했어……?”
“액세서리 구경하려고요. 같이 가요.”
굳어 있는 남자를 붙잡고서 미희는 명현이 물건을 팔고 있는 리어카 앞으로 향했다. 그 앞으로 돌아가 있던 명현은 현호가 다가오자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미희 앞이라서 티를 안 내려고 나름 자제하는 눈치였다.
“와, 이거 예쁘다! 이 머리핀, 나한테 딱 어울릴 거 같지 않아?”
“너 매상도 안 올려줄 거면서 자꾸 그러지 마라?”
“아니야! 애인이 사줄 거라니까?”
“쳇. 놀고 있네.”
명현의 비아냥거림에 미희가 쿡쿡 웃으면서 집어든 것은 작은 반지였다.
“이거 예쁘다. 아! 사이즈도 꼭 맞아.”
미희는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어보면서 기쁜 듯이 웃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로 현호 앞에 자랑하듯 흔들어보였다.
“이거 사줘요!”
명랑한 말에 미묘한 기분에 빠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연하게 잡힌다. 고급보석상에서 주문한 다이아몬드 반지와 지금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와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이거, 반지잖아.”
“네, 반지. 뭐가 잘못됐어요?”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 만족한 듯 손가락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사줄 거죠?”
현호가 마지못해 긍정하자 미희는 활짝 웃으면서 명현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오빠, 이거 줘요. 얼마예요?”
“만원.”
“에, 뭐가 그렇게 비싸? 좀 깎아주라.”
“됐어.”
현호는 씁쓸한 기분을 누르면서 미희를 만류하고 지갑을 꺼내 돈을 지불했다. 명현이 돈을 받고 포장을 하는 동안, 그녀는 액세서리를 더 둘러보고 있었지만, 이내 그를 돌아보면서 잔잔하게 미소 지어보였다.
“나한테는 이게……, 어울려요.”
현호가 그 말에 뭔가 대꾸하려고 했을 때,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미안. 오늘은 들어갈 수 없을 거 같아.”
현호는 와이셔츠에 팔을 꿰면서 그렇게 말했다.
전화는 강용우에게서 온 것이었다. 현재 건축 중인 고급 맨션의 구조 부분에 설계 미스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전화를 길게 할 수 없었기에 자세한 속사정은 미처 듣지 못했지만 매스컴이며 입주예정자의 클레임에 대비할 일이 산더미다.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다고, 넥타이를 고르면서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말해 줘.”
“뭘요?”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여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너에게 약속한 보수……라고 해야 하나…….”
미희는 눈을 들어 현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속눈썹에 왠지 모르게 젖은 듯 안타까운 애절함이 떠올라 있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한, 호소하는 듯한 표정. 무방비하도록 천진한, 그러나 약간은 경계를 감추려는 듯 미묘한 이중성을 담고 있는 표정. 그녀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처음 저 표정을 보았을 때, 이미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금세 덧없이 흩어지는 눈동자가 보인다.
그녀가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나……, 현호 씨가 일하는 곳에 가 봐도 돼요?”
현호가 의아한 듯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작게 입 꼬리를 들어올리면서 덧붙였다.
“이거 거래잖아요. 상품 거래. 직장에서 얘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금방 끝낼 테니까.”
“왜 하필이면 직장에서 얘기하고 싶은 거지.”
“일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오늘 산 싸구려 반지를 어루만지면서 미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꿈을 꾸고 싶어서 그런가 봐.”
“꿈?”
“당신이 일하는 걸 바로 옆에서 보고 있고, 내가 중간에 끓어준 커피를 맛있게 먹는 당신을 보죠. 가끔은 귀찮게도 굴고……. 그러다가 당신이 내 응석을 받아들여서 귀찮은 척하면서도 상대해주는, 그런 꿈이요.”
말 그대로 꿈이다.
순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자가 어린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불쾌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어딘가 애틋한 생각뿐이다. 한숨과 같은 숨소리가 조용히 떠올라 공기 속에 묻혔다.
“점심을 같이 하는 게 좋겠어. 12시쯤. 차를 보내줄까?”
그렇게 말하고 현호는 감정을 감추려는 것처럼 양복 상의를 팔에 걸쳤다.
“아뇨, 내가 알아서 갈게요.”
“도착 전에 전화를 걸어줘.”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던 현호 앞으로, 멀리 떨어져서 얘기하고 있던 그녀가 다가왔다. 팔을 붙들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어딘가 굉장히 외로워 보였다. 아니, 자신은 그녀의 눈 속에서 나의 외로움을 보고 있는 걸까.
왠지 아주 덧없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녀와 지냈던 짧은 기억이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전부이고, 그 외의 자신은 그저 단순한, 바람불면 금세 꺼져버릴 허상에 지나지 않는 듯한…… 그런 기분.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입술을 떼려고 했지만, 이미 미희는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깊이 들어온 참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거부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받아들여버렸다.
어느 새 그가 더 적극적으로 그녀를 헤집고 있었다. 잡아 올리고 휘감아 파고들고 삼킬 듯이 움직이는 동안, 숨쉴 틈조차 없는 긴 키스에 미처 넘기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흐른다. 점점 더 깊어지는 키스, 또 키스.
이성을 바로잡아 간신히 떨어졌을 때 둘 다 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하면 여기서 멈출 수 없게 될 거 같다.’
현호는 직감했다. 짧은 동안 이 여자에게 익숙해져버린 몸이 또 다시 갈구하며 그녀를 파고들고 싶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먼저 깊은 키스를 요구한 당사자인 미희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용한 눈.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표정.
- 나는 수녀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안돼요.
이 순간, 왠지 분위기가 흡사한 기분이 든다.
‘……설마.’
현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 여자는 그 사람과는 전혀 닮지 않았어.
상념을 뒤로 한 채 너무도 차분한 표정으로 미희가 그를 올려다봤다. 부신 것처럼 가늘게 눈을 뜨며 희미한 미소를 떠올린다. 그 모습은 이제까지 본 그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어려보이고, 또한 가장 여자로 보였다.
부서질 것처럼 고요한 표정, 고요하게 한 자리에 정지해 있는 몸.
손을 대서 확인해 보고 싶어진다.
‘안돼.’
저도 모르게 뻗어나가려던 팔에 의지로 힘을 주어 멈췄다.
“더는 키스해달란 얘기 안 해요. 마지막이니까…….”
현호는 소녀와 여자가 뒤섞인 듯한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고, 그녀의 등에 팔을 돌려 깊이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마지막 입맞춤을.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1)
제가 일착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