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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13
하얗다.
그리고 파랗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고, 그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하얗고 푸르게 실내를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에 커튼이 날리는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온다.
이것은 꿈일까.
지독히 행복한 꿈인 걸까.
만일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아.
“이사회? 상관없긴 한데……. 알았어. 그럼 그대로 하지. ……걱정 마.”
머리카락에 남자의 손가락이 닿는 걸 느낀다. 핸드폰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머리카락에 닿은 손가락이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긴 손가락이 전해주는 감각이 너무나 온화해서 미희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다정한 남자였던가. 이렇게 맞댄 몸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남자였던가.
- 섹스가 육체적인 관계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몸을 연결한다는 건 마음을 연결한다는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거다. 설사 그런 생각 없이 시작한 관계라 해도 일단 몸이 연결되면 마음도 어딘가 이어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연결한 마음을 의지로만 끊는다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실감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은 남자에게 마음의 일부를 보내고 또 그의 마음의 일부를 떼어 받은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남자가 몸을 내려 그녀를 끌어안는 감촉을 느낀다. 넓고 건장한 가슴에 얼굴이 닿고, 그 아래 배 부위에 가슴이 닿아 편평하게 눌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서로를 안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던가. 그 기분을 입 밖에 내면 왠지 지금 곁에 있는 모든 게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그저 가만히 남자의 가슴에 입을 맞추며 등에 팔을 돌렸다. 남자가 움찔하는 걸 느낀다.
“깼어?”
온화한 음성.
그에 반응해 남자의 가슴에 응석부리는 강아지처럼 코를 비벼댔다. 그가 쿡쿡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몸을 조금 떨어뜨리더니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튕긴다. 그 얼굴이 한없이 다정해 보였다. 정말 아름다워. 미희는 손을 뻗어 남자의 이마와 콧날과 입술, 그리고 튀어나온 목젖까지 훑어 내리듯 건드렸다.
“진짜다.”
“응?”
“진짜 현호 씨다. 꿈이 아니었네.”
그러자 강한 힘으로 어깨가 끌어 안겨졌다.
“꿈이 아니야.”
그가 속삭였다.
“응.”
가슴에 흘러넘치는 감정으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고개를 든다. 이마가 남자의 턱에 부딪치자 다시금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봤다. 맑은 눈동자에서 보내는 빛이 한없이 부셔 눈을 감자, 그대로 입술이 겹쳐진다.
행복해…….
어젯밤, 몇 번이나 몸을 겹쳤다. 격렬하게, 부드럽게, 포르테시모와 피아노시모를 오가며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서로를 탐한 후 잠에 빠져들었다. 미희는 그 결과물인 욱신거리는 몸을 남자의 팔 안에 맡기면서 귀엽게 웅얼거렸다.
“현호 씨가……, 계속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
“미안, 회의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가 어둡게 흐트러진다. 바쁜 남자인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헤어진다는 건 슬프다. 바보, 언젠가는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데. 이 남자 옆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는데. 게임처럼 남자에게 접근했던 건데.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가지려는 자신이 넘어야 할 관문 같은 게임.
-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 고백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상냥한 남자인 줄 알았다면 접근하지 않았을 거다. 이런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은 이 남자에게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이 남자는 너무나 상냥한 남자였다. 냉정한 겨울바람 같은 시선 속에 따스한 봄의 온기와 여름의 태풍 같은 격렬함을 지닌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이 남자의 온기를 알아버렸다. 격렬함을 알아버렸다.
그 온기와 격렬함을 잃고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버텨낼 수 있을까.
“괜찮은 건가…….”
남자가 중얼거렸다.
“뭐가요?”
“너를 안은 거.”
“신경 쓰여요?”
“아니.”
남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너만 괜찮다면, 나는.”
“응…….”
미희는 희미하게, 쓸쓸하게 웃었다.
“사실은, 망설였어요.”
“……?”
“당신이 날 애인으로 받아들여 나를 안아준다면……, 우리가 관계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그걸 바라면서도 또 그러지 않는 게 나을 것도 같아서. 여자 마음이란 참 복잡해요, 그죠?”
“내 혼담 때문에?”
“거기까진 생각도 안했어요. 그냥…….”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낮은 음성이 들린다.
“여름이 끝나면 돌아간다고 했지. 그 여름이란 언제까지야?”
“일주일 뒤.”
“일주일? 왜 그렇게 빨리…….”
“8월이 끝나니까.”
8월도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8월의 마지막 날, 그녀가 생각하는 여름의 끝.
“만일에 내가 좀 더 있으라고, 앞으로 여기 남아 있으라고 한다면……?”
“돈 더 줄 거예요?”
그렇게 반문했지만 남자가 말하는 의미가 그런 것보다 좀 더 순수한 의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아닐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착각하고 싶다. 그런 착각을 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싶어.
“바보. 여름이 끝나면 헤어지는 게 당신한테, 그리고 나한테도 좋아요.”
“…….”
“반해버린 건 나니까……, 당신은 원래대로 돌아가면 돼.”
그렇게 말하면서 미희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 자세 그대로 남자를 내려다봤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쓸데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대로 남자를 내버려두고 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누나 말이에요.”
“……?”
“당신 누나, 당신이 죽인 거 아니에요.”
그녀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차갑게 굳어졌다.
“무슨……, 말이지?”
“누나는 수면제를 마신 거예요. 치사량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아마 현호 씨와 나눠 마셨겠죠. 그러니까 그 때 몸이 움직이지 않았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가 우울증이었다고 그랬죠? 아마 자살할 생각이었을 거예요.”
남자는 머릿속의 혼란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누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자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사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게 겨우 한 달 전의 일이건만, 막상 같이 지내게 되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남자를 보면서 내내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괴로워할 이유가 없어요.”
이런 식으로.
“너는……, 어떻게 그런 걸…….”
대체 너는 누구지? 남자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미희는 다시 몸을 내려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갖다댔다. 남자 특유의 냄새를 맡는다. 그 어떤 꽃향기보다 근사해. 심장이 공허하게 아려왔다.
“누구한테 들은 거냐.”
남자가 쉰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답해.”
“음……, 그냥 소문을 들었을 뿐이에요.”
갑자기 수마(睡魔)가 덮쳐온다. 나른한 눈꺼풀을 들었다 올리면서 대답했다.
“소문?”
“음독자살이 아닐까 하는 소문을 들어서…….”
“누구한테?”
“그 사람한테 따지러가려는 건가요? 미안, 알려 줄 수 없어요.”
나른한 중얼거림에 남자가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지금 아니었으면 널 한대 후려쳤을지도 몰라.”
“응. 맞아도 싸다고 생각해…….”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자신의 의식이 흐트러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제 너무 무리한 게 아닐까? 좋아서, 좋아서, 그에게 안기는 게 너무 좋아 힘든 것도 잊고 있었어. 미희는 몸에서 힘을 빼고 사르르 눈을 감았다. 당신이 궁금해 하는 걸 알지만 말해줄 수 없어요. 그저, 지금은 잠시만 자고 싶어. 당신의 품안에서.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1)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