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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9
“아무도 없네요.”
“둘이서만, 이라고 했잖아.”
그 말에 미희는 놀란 얼굴을 하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한군데 정도 말을 해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수족관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남자는 그날 저녁으로 그녀를 여기 데려와 주었다. 아주 깊은 바다 속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 천장과 벽, 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푸른빛이 남자의 조용한 얼굴과 눈에 비쳐 맑은 그림자를 만든다. 그 눈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끔씩 그녀는 숨을 죽였다.
“너무 예뻐.”
사실 예쁘다고 생각한 건 따로 있는데 어색해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된다. 내부는 너무나 조용하고 그런 속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리고, 온통 푸른빛의 세계 속에 그 발소리는 하나의 리듬처럼 두 사람 주위를 맴돌고 있다. 두 사람의 주변을 물고기의 무리들이 합창하듯이 맴돌았다가 이윽고 어둠 속에 사라져간다. 정말로 바다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아……, 꿈꾸듯 중얼거렸다.
“우리 처음 만난 거 맞나?”
정신없이 이세계(異世界)에 빠져들어 있는데, 생각에 잠긴 듯한 음성이 귓전을 스쳤다. 무슨 말일까 하고 남자를 올려다보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입가에 어딘가 자조적인 미소가 스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왠지 슬프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그런 이중적인 기분이 들어 미희는 몸을 움츠리며 눈을 돌렸다. 말없는 시선은 물고기가 아니라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뻐.’
말없이 앞을 바라보는 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걱정 말아요.”
그녀는 그런 남자의 손에 살며시 자신의 것을 올렸다.
“어린애는 여름이 지나면 집에 돌아갈 거니까.”
남자의 눈이 이쪽을 향해서 조금 의아한 빛을 담은 채 자신을 보고 있다. 그 아름다운 검푸른 빛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미희는 희미하게 웃었다.
“돈, 지위, 명예……. 잃을 게 너무 많은 남자에게는 위험한 게임이란 거, 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거리를 둘 필요까진 없어요. 당신에게 혼담이 오간단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러니까……, 이건 게임, 그것도 어디까지나 기한부인 게임이니까 적어도 상처 따윈 안 입고 안 입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렇게 반응하는 남자의 눈은 엷고도 깊은 예기를 띠고 있었다.
“어색하게 거리를 두지 말란 말이에요. 어차피 내가 어린애로 보인다면, 어린애한테 맞춰서 웃고 떠들어도 좋잖아. 손도 안 잡아주는 주제에.”
“내 쪽에서 맞추라고?”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미희는 눈을 내리깔면서 될 수 있는 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최소한 그렇게 시시한 얼굴은 하지 말아요. 그런 당신이 더 시시해 보여.”
“웃기지 마.”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은 여느 때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여길 전세 낸 건 나야. 네 게임에 동참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런 짓 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즐기고 있어. 너에게 어떻게 보이든 지금의 난.”
미희는 그제야 생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응시하는 것 같은 눈은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 옆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분도 드는 것이다. 차갑더라도 땅에 발을 디디고 자신을 보고 있는 지금이 차라리 낫다. 조금 마음은 아프지만……. 아무리 기한부라고 해도 지금은 옆에 있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름대로 즐거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비웃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촌스러움의 상징 같았던 여자가 이 만큼 변신하는 걸 보는 건 색다른 기쁨이란 사실을 알았으니까.”
“촌스러움의 상징?”
눈썹을 찌푸렸지만 남자와 같이 지낸 이후로 자신이 변했단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요정을 만난 신데렐라가 이랬을까. 남자가 데려간 일류 헤어 숍의 디자이너에게 긴 머리를 목이 드러날 정도로 자르고 컬러코팅을 했다. 그 결과, 처음으로 긴 생머리인 자신보다 목이 드러나는 짧은 머리인 자신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많이 받은 건 아니지만 몇 벌의 옷. 전부 일류 브랜드나 디자이너의 상품으로,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남자는 그녀에게 어울릴 듯한 의상들만 골라서 주문하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즐기는 듯한 남자의 웃음에 미희의 장난기도 슬슬 고개를 들었다. 혼자만 재미 보는 것 같아서 얄미운 점도 있다. 외모를 공격하며 놀리다니. 흥, 자기는 날 때부터 세련되게 태어났다 이거지.
“나 현호 씨 일하는 곳에 가 봐도 돼요?”
“안돼.”
가차 없이 자른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무정하다.
“그럼 현호 씨 침대에서 같이 자도 돼?”
“너…….”
남자가 약간의 경고성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말했지, 기어오르지 말라고.”
“농담 좀 해 본 건데, 쳇. 재미없어. 좀 노는 줄 알았더니 완전 고지식이잖아?”
미희는 어깨를 들어올리면서 혀를 내밀어보였다. 현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얼굴이 만 스무 살이 넘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뭔가를 납득한 것처럼도 보이고 소리죽여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유유한 태도지만 그러면서도 제법 진지한 표정.
“남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요?”
미희는 약간 귀찮은 듯이 내뱉었다. 그래서 어쩌란 건데. 그러자 남자는 흐음, 하고 팔짱을 끼면서 가벼운 톤으로 물어왔다.
“무섭지 않아?”
“뭐가요?”
“나랑 한 침대에서 잔다니,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섹스.”
미희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잖아요. 손만 잡고 나란히 누워 자겠단 뜻인 거 같아요?”
“기한부 관계라고 한 사람은 그쪽 아니었어?”
“그래요, 여름동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건방진 투로 말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갑자기 팔이 잡히고, 이어 끌리듯 몸이 다가서는 것과 동시에 기습적인 키스가 내려왔다. 살짝 입술이 닿은 것만으로도 이제까지의 담담한 대화와는 너무 달라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드는데, 당황해서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바로 온기가 들어온다. 혀에 혀를 대고 핥고 아플 정도로 빨아들이는 길고 격한 키스, 키스. 가슴이 쿵쿵 울리기 시작하고 눈에 비치는 수족관의 푸른빛이 시야 전체를 메우며 흐트러지는데, 한숨조차 흘릴 수가 없는 집요하고도 뜨거운 입맞춤은 몸을 미치게 만든다. 미희는 정신없이 매달렸다.
정말 능숙하구나…….
흐릿하게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도 어렴풋이 생각했다. 정신없이 남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으려니 마치 연결동작처럼 남자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이어 허리에서 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 거리낌 없는 동작이 본능적으로 당혹스러웠기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밀치려 들었을 때, 남자는 입술은 떨어뜨렸지만 몸은 오히려 바짝 갖다대어 마치 그녀의 곤란함을 조롱하고 자극하려는 것 같은 투로 귀에 입술을 가져갔다. 마치 그 자체가 따로 살아있는 생물 같은 더운 혀의 능숙한 움직임에 내부에서 기묘한 감각이 살아나는 걸 느낀다.
나는 바라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바라지 않고 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었던 걸까, 아니, 지금은 어느 쪽일까.
남자의 손길이 얇은 옷 위로, 혹은 아래로 더듬을 때마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양미간이 당겨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밤을 기해 전세를 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공장소인 수족관이고 여기서 그런 류의 일을 벌인다는 건 상식에서 빗나가는 행위란 걸 알고 있음에도 남자가 제발 어떻게든 해주기만을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하아…….”
미희가 애원 같은 한숨을 길게 몰아쉰 순간, 얄궂게도 남자의 손길은 이제까지의 일조차 없었다는 듯 깨끗하게 그녀의 몸을 벗어나버렸다. 뜨겁게 귓불과 귓속을 샅샅이 농락하던 혀도 약간 젖은 입술 외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
갑작스럽게 밀쳐진 탓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만두는 게 좋아, 어린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그저 건조할 따름이었다.
“섹스가 육체적인 관계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몸을 연결한다는 건 마음을 연결한다는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거다. 설사 그런 생각 없이 시작한 관계라 해도 일단 몸이 연결되면 마음도 어딘가 이어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연결한 마음을 의지로만 끊는다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너무나 무덤덤해서 외려 아프게 누르는 말투였다.
“네 말대로 지금 내겐 혼담이 오가고 있다. 네 생각하곤 달라서 죄책감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아. 문제는 바로 너지. 남자랑 제대로 사귀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의지만으로 모든 걸 컨트롤할 만큼 성숙한 여자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거란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질줄 알아? 내가 그런 말에 질줄 알아?
굉장히 분했다. 그리고 어른에게 조롱당한 아이처럼 서글펐다. 미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자신을 누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러면서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천진하게 미소 지으면서 명랑하게 반문했다.
“그러니까, 내가 현호 씨한테 맛이 가서 바지자락 붙들까 봐 걱정하는 거죠?”
“하아…….”
남자는 지금까지 이 여잔 대체 뭘 들은 건가, 하는 표정이었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린 것 같은 그에게 다가서며 미희는 아래로부터 눈을 크게 치켜뜨고 그를 보며 궁금하다는 얼굴을 지어보였다.
“솔직히 말해 봐요.”
“……?”
“지금까지 한 얘기, 현호 씨 경험담이죠?”
현호의 표정은 많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입술은 꾹 다물린 채였다. 이제까지의 그는 싸늘했지만 자기 페이스에서 조금도 빗나간 기억은 없었는데, 방금 한 말은 제대로 찌른 것 같았다. 그것이 둘 사이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만들고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장난기, 복수심, 그리고 진짜로 궁금하기도 했다.
“그 사람이 끝난 뒤에도 현호 씨 바지자락을 붙들었나요? 아니면 현호 씨가 폐인이 될 만큼 괴로웠어요? 앗, 그렇다. 나한테 너무 푹 빠져서 폐인 될까 봐 걱정되는 거구나! 그렇죠? 그걸 괜히 돌려 말하는 거잖아.”
“전문가 났군.”
남자는 짧은 말로 그녀의 집요한 질문을 일축해버렸다. 하지만 눈썹을 가늘게 찌푸리며 휙 등을 돌려 앞서나가는 넓은 등을 보면서 미희는 직감했다. 저 남자는……, 그래, 저 남자는 지금 분명히 당황했다고.
그 점이 지독히 기뻤다.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로 찌르는 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남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현재 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자신으로서도.
그 점이 지독히 슬펐다.
계속.
음, 너무 짧다고 리체 님이 말씀하시길래 한 편 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