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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시계는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로감을 느끼면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요 며칠 일이 지나치게 쌓인 탓에 제대로 수면을 취한 기억이 없을 정도. 웬만하면 회사에서 철야를 했겠지만 그러나 집에 누구 한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게 신경 쓰여서다……. 그런데?
“아…….”
현호는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내렸다.
- 그 정도인 줄 몰랐어, 그 정도로까지 곤란해 하고 싫어할 줄은…….
“미희!”
처음으로 그는 여자의 이름을 입 밖에 냈다.
- 이 집에서 나갈게요. 일주일동안 실례했어요.
‘말도 안돼. 밤중에 설마?’ 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나 극심한 불안감이 가슴을 메워 와 문을 열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아무도 없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사람이 있었던 흔적조차 지워진 것처럼 조용하다. 미희가 사용하는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다. 정신없이 문을 열자, 역시 사용한 흔적이 없이 깨끗이 정리된 침대만이 보일 뿐이었다. 답답한 가슴을 누르면서 초조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구두가 없다.
일주일 전에 사준 에나멜 구두. 그 외에 미희가 신을 신발은 달리 없었다.
역시 나간 건가. 한밤중에, 대체 어디로? 무슨 방법으로?
“제길!”
현관 벽을 주먹으로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일은 집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면서까지 맨션에 매일같이 돌아온 건 대체 무엇 때문이었던가! 어린애처럼 순수하고 무방비한…… 여자를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진실은 그런 것이었다. 그 진실을 깨달은 순간,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한 이 상실감, 후회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 자신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당돌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그 순간부터……,
반해 버렸던 게 아니었던가.
그렇기 때문에 혼담이 오가는 형편인 주제에 여자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었던 주제에…….
그렇다.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뿐.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 뿐.
현호는 입술을 깨물면서 몸을 돌려 집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목이 미치도록 말라와 얼음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을 때.
일순, 발이 멈췄다.
달짝지근한 향기. 그것은 아까 여자가 방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향기와 같은 것이었다. 달콤하고 사랑스런 향기, 베이킹파우더의 냄새. 부엌은 온통 그런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생크림 케이크의 향기로.
부엌 싱크대와 테이블은 온통 엉망이었다.
계량용 컵과 계란 흰자의 거품을 내기 위한 투명한 볼, 마루에 흩날린 소맥분, 한쪽에 놓여있는 설탕, 그리고 생크림……. 그리고 완성품인 작은 케이크.
“저건…….”
분명 마지막으로 미희가 가져온 쟁반 위에 놓여 있었던 거다. 어젯밤에 직접 만들었던 건가? 회사에서 막 돌아왔을 때의 부엌은 깨끗했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3시간여 동안 그녀는 저 케이크를 만들었던 건가. 그리고 완성품인 케이크를 자신과 나눠먹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왔던 거겠지.
케이크를 들여다보았다. 순백의 크림 위에 소박하게 올려진 딸기, 그리고…….
케이크 위에 작게 흘림체로 써놓은, 약간 삐뚤어진 진홍색 글씨.
그것을 발견한 순간, 그의 몸은 정신없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바보라고 생각했다.
바보 아가씨, 멀리 가지도 못할 거면서 무슨 오기를 부린 거냐.
지하주차장에 놓여 있는 자신의 벤츠 뒷좌석에서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입 언저리에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칠칠맞게 문을 열어두었던가, 이 경우엔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생각하면서 오토 키로 락을 해제했다.
여름이지만 새벽의 지하주차장은 온통 서늘한 기운뿐이다. 반바지에 티셔츠뿐인 복장으로는 몸이 식기 딱 적합할 정도. 과연 여자의 하얀 얼굴과 작은 입술은 이 새벽의 기온에 노출되어 창백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몸에 손을 대자 예상대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어이, 스팀 정도는 틀고 자도 되잖아, 바보 아가씨. 몸도 머리카락도 숨결도 전부 창백하게 식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창백한 몸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색을 머금고 있는 부분은 눈두덩이. 희미한 붉은 색을 띤 채 부어오른 눈언저리가 왠지 가슴 깊은 곳을 한껏 죄어들게 만든다. 목과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약간 말랐다 싶은 몸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여자가 뭔가를 느꼈는지 몸을 가볍게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낸다.
“으응……?”
“괜찮아?”
그는 중얼거리듯이 물었다. 그 말에 반응하듯 눈을 희미하게 연 상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
“나……, 지하철이 끊겨서……, 새벽에 나가려고…….”
“나가지 마.”
“……?”
“여기 있어. 가지 마라.”
여린 몸이 굳어지나 했더니 이내 팔이 천천히 올라와 그의 목을 감았다. 그 팔도 한없이 차가워서 마음이 따끔하게 저리고 동시에 한껏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저 안 깊숙한 곳부터 올라오는 걸 강하게 느낀다. 그 충동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가볍게 이마에 입술을 대는 걸로 만족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같이 생일을 축하하러 가자.”
“어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듯한 소리가 가냘프게 흘러나온다.
“어딘가……, 어디라도 좋으니까 네가 가보고 싶은 곳.”
“가보고 싶은 곳?”
“그래.”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반응한 것처럼 여자의 입술에도 엷은 웃음기가 스치더니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린다.
“어디라도 좋아요……, 여기 말고도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표정은 정말이지 사랑스럽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속.
남주가 너무 빨리 넘어간 듯한 느낌이 들죠?
아무래도 중편이라서 말입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21)
근데 오늘도 짧다고 느꼈음. 저놈의 계속이란 단어가 너무 섭섭했고만..;
머..잼나게 읽고 있단 야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