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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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합주택과 호별주택의 반수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즉 2년여에 걸쳐 이것들은 무인 건축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갖가지 트러블의 요인도 여기서 기인한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하나의 도시로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야만 하는데 일단 인구가 최초 예상인원의 반수도 안 된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라고 봅니다. 그 원인을 생각해 보면 일단은…….



한때 자신의 부하였으며 지금은 HJ리빙의 총무과장으로 일하는 담당자의 메일내용이었다. 메일에 첨부된 보고서를 읽으면서 현호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졌다.

“역시 인구문제였나.”

중얼거리면서 그는 안경을 벗고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눌렀다. 과연 사촌동생인 신호는 이에 대해 인지하고는 있는 걸까. 아니, 이걸 인지할 정도의 센스를 갖고 있었다면 주민을 철저히 무시한 기획을 시도하지는 않았겠지. 철저한 상류층 지향의 대형 마켓, 은행, 스포츠 센터 등이 세워져 있는 상업지구. 화려하지만 실용적인 측면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 같은 기획.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않은 사촌동생의 기획은 물론 행정적인 문제도 컸지만, 어찌되었건 일단은 HJ리빙과 한진건설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이상 브랜드 네임에 타격을 줄 우려가 큰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소송이 걸릴 가능성까지 있다. 그 전에 나머지 주택을 매각하고 인구를 불릴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람 누구예요? 첫사랑?”

갑자기 등 뒤에서 달콤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향기도.

현호는 말없이 돌아보았다. 누구인지는 안 봐도 자명하다.

등 뒤의 여자는 감색 면 반바지에 브이넥의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캐주얼한 차림. 심플하고 색스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복장이다. 저런 옷을 입고 남자를 유혹하려고 하다니 정말 생각이 없군. 하지만 그가 이맛살을 찌푸린 건, 그렇게 생각 없는 그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욕구를 느끼는 자신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욕구.

“이 남자, 어릴 적 당신 아니에요? 옆의 여자는 누구죠? 정말 예쁘다. 첫사랑이 이런 사람이라면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겠어.”

미희는 쟁반을 손에 든 채 한구석의 책장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 시선이 꽂혀 있는 것은 딱 보통 크기의 사진을 넣을 수 있는 크기의 나무 액자였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은 건조하게 굳어졌다. 저 액자는 구석에 치워져 있었는데……,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치워놨는데.

“언제 저걸 꺼냈지? 낮에 이 방에 들어오는 건가?”

“청소, 해야 하잖아요. 나 때문에 파출부도 끊었다고…….”

그녀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지만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하지만 좋은 사진이잖아요. 제대로 세워두면 보기 좋으니까…….”

“언니 카드를 훔쳤듯이 딴사람 물건도 함부로 손대도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 정도로 손버릇이 저질인 줄은 몰랐는데.”

“미안해요. 다신 그러지 않을게요. 난 그저…….”

“나가.”

일순 여자의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었다. 미희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순간적으로 자극받은 불쾌함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 구석진 곳에 숨겨진 미묘한 부분을 찔러온다.

이래서 이 여자가 싫은 거다.

도대체 왜일까,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만 골라서 건드리는 것은.

“앞으로 이 방에서 들어온다면 용서치 않겠어. 어린애 주제에 내 사적인 영역에 일일이 간섭하지 마. 꼴불견이다. 너처럼 촌스러운 어린애는 원래 내 타입이 아니고, 장난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불쾌해져. 착각 마라. 주제를 모르고 덤비는 무모함이 불쌍해서 상대해 줬을 뿐이야. 기어오르지 마.”

투명한, 혹은 불투명한 침묵.

“알아들었으면 나가.”

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더 머리꼭지에 화가 치솟는다. 결국 숨을 고르던 그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어린애’에게 고함치고 말았다.

“못 들었어? 나가라고 했잖아!”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한순간의 정적, 그리고……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알았어요.”

조금 놀라 앞을 고쳐보았다.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나갈게요.”

그 입에서 메인 듯한 차분한 목소리가, 그러나 약간 끊기듯 흘러나온다.

“그 정도인 줄 몰랐어, 그 정도로까지 곤란해 하고 싫어할 줄은…….”

조그맣고 붉은 그녀의 입술에 자조적인 미소가 스치는 걸 언뜻 발견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 나갈게요. 일주일동안 실례했어요.”

그런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미소를 본 순간, 다시 퉁명스러워져 버렸다.

“맘대로 해.”

왜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런 식으로밖에 대응이 안 되는 거지?

마음에서는 그녀를 붙들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온다. 왜 이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건지,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는 건지……. 제길, 어린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아닌가!

자조적인 상념을 씹어 물면서도 문이 조용히 닫히고 그녀가 사라지는 풍경을 그저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유를 줄줄이 댈 수 있을 지도 모를 그런 분노. 그저 이유를 대지 않은 건 스스로가 용납지 않아서일 뿐.

줄곧 실수를 하게 된다.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워서……. 그런데 지금 문을 닫고 나간 저 소녀 같은 여자가 자신의 아픈 자리를 문득 문득 건드릴 때마다 어쩌면 새로운 사랑, 적어도 그 비슷한 감정에 젖어들 가능성을 발견하고 두려워지는 것이다.

두려움, 그것이 분노의 이유인가. 겨우 일주일, 고작해야 일주일 동안 그것도 밤에만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데. 한데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불안하고 불길한 감정을 느꼈던, 그 때문에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실수하게 될까 봐.

그 때처럼, 그리고 또 다른 그 때처럼.

현호는 컴퓨터를 끈 뒤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지듯 누였다. 물론 잠은 쉬이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몸에 쌓인 피로감은 과거로 돌아가는 작은 자극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눈을 감고 어두운 심연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 당신이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그 때를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그렇지만 그건 도피에요. 당신 스스로에게 진실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 진실?

- 당신이 자기 누나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이유,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자신을 찔러온 여자가 또 한사람 있었다. 더럽혀지지 않은 맑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면서, 내부의 감정……, 그 투명한 진실을 똑바로 찔러온 여자가. 그런 여자는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진실을 알려준 그녀에게 나는,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했던가.

되돌리고 싶지 않은 과거 속에서 나는……, 대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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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mirage

2004.07.12 09:27:13

덩치만크고 빛좋은 개살구....
어린 여주에게 사정없이 휘둘리는것이 인생이 까칠하겠어요

리체

2004.07.12 14:01:53

사랑에 휘둘리는 부분이야 말로 로맨스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위험한 부분이죠. 보는 사람이야 안타깝겠지만서도 사랑에 빠지고 나면 남주 인생이 윤활유를 바른 듯 잘만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얼렁 휘둘리거라~ㅋㅋㅋ

Junk

2004.07.12 23:55:18

mirage/ 아하하. 벌써 휘둘리는 걸로 보이나요? 실은 여주도 휘두르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답니다. 티가 나지 않을 뿐.
리체/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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