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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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했지만, 수화기를 쥐고 있는 손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 건에 대해서라면 이미 넘겼는데요. 더 이상 제 소관이 아닙니다. ……아뇨, 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저는 기획담당입니다. 컴플레인(complain) 관련 일이라면 총무 팀이나 영업팀 쪽으로 돌려주시는 것이…….”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신호……, 때문입니까.”

어딘가 납득한 것 같은 질문이자 대답이 껄끄럽게 흘러나왔다.

박신호.
그것은 한 살 연하인 사촌동생의 이름이었다.

“예. 신호가 주주들을 상대하기 힘들 거란 건 압니다만, 녀석은 제가 참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손을 빌리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의 목소리는 강경했다. 사촌동생의 경력에 누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친아들인 자신보다 사촌인 신호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현호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이번에야말로 진저리가 났다. 끊으려는데 때마침 수화기 저편에서 마지막 한 마디가 들려온다.

- 집에 가끔 들러. 이제 어머니한텐 너밖에 없단 사실을 명심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아버지는 맡긴다며 전화를 끊었다. 겨우 한숨 돌렸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뜨는 이름을 보고 현호는 귀찮아져서 휴대폰을 저쪽 소파에 던져 넣고 끊어지기를 무작정 기다렸다. 이럴 때 사적인 전화에까지 굳이 상대하는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다.

휴대폰 음이 계속되는데도 무시하고 그는 수화기를 다시 들어 비서에게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노크소리와 함께 비서이자 기사인 강용우가 큰 몸집을 이끌고 방에 들어왔다. 과묵한 그는 소파 위에 내던진, 계속 울려대고 있는 휴대폰을 힐끗 봤지만 집어서 건네주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무슨 일이냐는 식으로 상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때, 겨우 음이 끊어졌다.

“강 비서.”

“말씀하십시오.”

“신도시 건은 결국 예상대로 됐어. 클레임 처리는 내 책임이다.”

그 말에 강용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쓴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십니까.”

“뭐, 이건 결국엔 내 문제이기도 하니까…….”

“무능한 사촌의 뒤처리 전문이 되신 겁니까.”

“…….”

“죄송합니다. 주제넘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현호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왠지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

강용우는 현호가 직접 고용한 비서로 조직폭력배 출신이었다. 지금은 그쪽과는 완전히 손을 떼고 현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어쨌든 과거가 험한 남자를 고용한 일로 인해 한동안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호로서는 격렬한 물밑 파벌싸움으로 적이 바글거리는 회사에서 붙여준 어떤 비서보다도 훨씬 신용하고 있는 진짜 심복이었다. 그 어떤 잡무이든 불평 없이 한다. 어둠의 세계 쪽으로 인맥도 넓기 때문에 신원조사나 골치 아픈 사건 처리에도 능하다. 그녀, 이미희의 신상에 대해 조사해 준 것도 강용우였다.

의외로 미희는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준 것 같았다. 양아버지의 후처로 들어온 어머니가 전남편에게서 낳은 딸인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2년 전에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갈 곳 없는 몸을 의탁한 곳은 다름 아닌 신흥 폭력조직이었다. 폭력조직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녀가 몸담았던 조직은 유난히 평판이 좋지 않았던 곳이라며 강용우가 건넨 사진에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여자아이들이 찍혀 있었다. 금발에 가까운 갈색으로 염색하고 굵직한 웨이브를 넣은 헤어를 한 여자들의 사진. 작게 구석에 찍혀있는 미희는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1년 전에 조직을 나온 것 같더군요. 하지만 그냥 나올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그 세계의 룰이니까요.”

스스로도 어두운 과거를 지닌 비서의 목소리는 어딘가 참담했다.

“나오기 위해 지불한 대가는 아마 최소한 포르노 비디오나……, 아니면 매춘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얼굴로만 판단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는 많으니까요.”

그런가. 그렇게 더럽혀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비서는 계속해서 약간은 설교조로 말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가. 그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의 직감을 믿고 싶었다. 자신이 눈을 가렸을 때 터뜨린 울음, 그 투명한 눈물은 정말로 어린애 같은 순진함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고…….

순진한 건 자신인가.

하지만 분명히 현호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맨션에 그녀를 둘 리가 없다. 아니, 맨션에 데려왔다고 해도 현재처럼 동거에 가까운 형태로 지내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녀, 이미희에게 살 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한지 벌써 일주일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살고 있던 맨션의 방과 그리고 식비. 다른 곳에 살 자리를 마련해줄까도 고심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은 건, 분명 그녀를 걱정해서다. 전에 머물던 조직이 그녀를 납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최소한 밤에만은 반드시 그녀가 기다리는 맨션에 돌아가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라고 해도 현재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던 걸 잊으셨습니까. 주주총회에서 무슨 딴지를 걸지…….”

“됐어.”

거기서 현호는 강용우의 말을 끊었다.

“문제가 생기면 집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

“죄송합니다.”

강용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지만 그래도 할 말은 끝까지 하기로 결심한 모양인지 말을 이었다.

“적들이 많습니다. 경원그룹과 혼담이 오가는 중이란 걸 명심해 주십시오.”

현호는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오늘의 강용우는 드물게 말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의하도록 하지.”

그는 엷게,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아닌 미소를 올렸다.

“이만 퇴근하도록 해.”

“예?”

“오늘은 직접 운전해서 돌아갈 거니까.”

“제가 드린 말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야.”

현호는 또렷하게 말했다.

“늦어도 1시간 뒤면 나도 떠날 거다. 혼자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비서에게, 현호는 저녁에 전용 프레젠테이션 룸에서 갈아입었던 파티용 슈트를 건넸다. 리셉션 파티에서 입었던 슈트였다.

“클리닝 맡기고, 가기 전에 녹차 한잔만 부탁해도 될까.”

“물론입니다.”

비서는 우직하고 무뚝뚝한 얼굴에 안심한 표정을 올리면서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어, 현호는 한진건설 본사빌딩 16층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현란한 밤풍경을 지친 눈으로 가만히 응시했다.

“피곤하군…….”

한숨 같은 소리가 입술에서 샜다.



계속.




한 편이 좀 짧죠.
그 대신 절대 매일 올립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잘 따라 오십시오.
완결되는 대로 비밀글로 바꿀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출판과는 전혀 관련 없습니다)

7월 3일에 시작했는데 지금 현재 70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뭘 먹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글만 쓰고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정말.

생활에 부지런해지면 글도 써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서 엄청 건전한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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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리체

2004.07.10 01:11:18

정말 짧군요.
.
.
.
먄..^^;;;;

Junk

2004.07.10 01:20:28

여기 오시는 분들은 이거 말고도 읽을 거 많으실 겁니다. 정파 말고 다른 사이트의 글도 보실 거고요. 길게 올리면 외려 부담스러우실 거란 말이죠(초 뻔뻔;).

Miney

2004.07.10 02:06:25

이 여주는 정말 사랑받게 될 거란 정크님의 한 마디(...가 넘지만^^;)에 즐겁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절대 이름 탓이 아니에요. 남주가 여주의 이름을 거론할 때면 좀 떨리긴 하지만, >_<;;)

2004.07.10 02:22:38

정크님 대단. 70페이지. 저도 어서 써야 겠어요.
그나 저나 정크님 댓글에 한참 웃었음...^^

mirage

2004.07.10 11:28:14

정크님...연참을 읽으니 정말 기쁩니다

Junk

2004.07.11 01:23:09

아하하, 조금만 기다리시면 사랑받는 여주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꿀물보스

2004.08.30 16:53:33

우째 나머지 글들은 잠궈놓으신 거지요?
읽고 시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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