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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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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했는데도 현호는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미희는 어쩌면 희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담은 채 호텔 최상층 로열 스위트룸에 들어갔을 때는 거의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몸은 무척 피곤했다. 늦은 시간도 그렇지만, 줄곧 긴장하고 있었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은은한 조명아래 남자가 이제까지 줄곧 몸에 붙이고 있던 양복 상의를 벗는 모습이 보인다. 상의를 벗자 늘씬하면서도 근육질인 몸이 좀 더 그 라인을 드러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언뜻 살이 좀처럼 찌지 않는 마른 체구인 듯한 몸은 그러나 운동으로 다져진 극상의 선을 이루고 있다.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넥타이를 가볍게 풀어 내렸다.
‘나, 나도 지금 옷을 벗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건방지게 굴었지만 실은 미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옷에 손을 가져갔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와.”
허둥거리며 그쪽을 바라보니 방금 넥타이를 풀어 내린 긴 손가락이 까닥까닥 움직이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다. 그 표정을 보자 부르고 있는 걸 아는데도 더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그녀를 본 현호의 입가에 그제야 유유자적한 미소가 걸렸다.
“겁이 난 건가.”
훗, 하고 비웃음을 담은 소리가 얇고 미려한 입술로부터 샜다.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미희는 난감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 천천히 남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호는 비웃음을 입가에서 지우지 않은 채,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동요 없는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훑어 내리고 있는 걸 깨닫자 감정이 자꾸만 흐트러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자신은 옷을 제대로 걸치고 있는데, 마치 남자 앞에 나체를 드러낸 듯 수치스런 기분을 억제할 수 없다. 괜찮을까. 이렇게 떨어서 괜찮은 걸까. 어떻게…….
바로 앞에 다가선 그녀의 입술에 남자의 손가락이 올라왔다.
갖다댄다는 느낌이라기보다 스치는 듯한 감촉…….
차가운 느낌이었다. 눈동자도, 태도도, 목소리도, 그리고 손가락까지 차다. 눈동자가 저절로 젖어 들어가는 느낌은 아마 저 냉정함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일까.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뭐지?”
“무슨…….”
“내가 너의 ‘이상형’이 될 만한 이유, 말이다. 속으로 계산을 숨기려면 제대로 해. 그 따위로 태연을 가장하고 정말 반한 것처럼 행동하면 우스워 보여.”
입술이 차갑게 움직였다. 자신의 젖은 눈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건조하다.
“말해.”
“당신을 본 적 있어요. 꽤……, 오래전에.”
“어디서?”
“그 언젠가 당신이 공사현장에서 뭔가 지시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 때 한눈에 반해버렸어. 이건 진짜예요.”
“흐응.”
‘믿어주지.’라고 말하는 듯, 그러나 못 미더운 태도로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희가 안도의 숨을 쉰 것과 동시, 방금 그녀의 입술을 스친 손가락이 연결동작처럼 그녀의 턱을 강하게 움켜쥐더니, 이윽고 다른 팔을 뻗어 몸을 끌어당겼다. 너무 순간적인 동작이라 놀란 미희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향기가 난다. 넓은 가슴에서 풍겨 나오는 스킨 향…….
지나치게 강하지 않은 만큼 그것이 지닌 페로몬은 다른 남자들의 그것보다 몇 배나 강하다. 순간적으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미희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그대로 그는 그녀의 목에 손을 돌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가는 줄의 목걸이를 풀어냈다. 목걸이가 미끄러지듯 아래로 흐르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손가락은 그녀의 블라우스 버튼으로 옮아간다.
“키가 작은 편이군.”
“당신이 큰 거야.”
블라우스 버튼이 차례로 벗겨지고, 이윽고 남자의 손에 의해 가녀린 어깨선만 드러내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미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에어컨 온도가 조금만 낮았으면 좋겠는데……, 라고 웃긴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해버렸다. 반만 벗겨진 옷이 어딘가 걸리적거린다. 차라리 얼른 다 벗겨버리던지, 아니면 도로 입히던지 하나만 선택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남자는 거기서 일단 멈췄다.
“어깨선은 괜찮군. 목도 가늘고……. 가슴은 빈말로도 제대로 발육된 상태라고 하기 힘들지만, 허리가 워낙 가느니 그럭저럭 봐줄만 해.”
“품평회라도 하는 거예요?”
“물론. 넌 상품이잖아.”
남자의 목소리는 영하의 온도였다. 미희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쩔 작정……!”
그 때 갑자기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넥타이가 불쑥 위로 올라와 그녀의 목을 감았다.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는데 오히려 다리를 잘못 디딘 탓에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깨닫고 보니 쓰러진 곳은 침대였다. 파랗게 질려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의 차가운 얼굴, 그리고 몸이 그녀의 몸 바로 위로 덮쳐왔다.
“조여 보고 싶을 정도로 가는 목이군.”
그 말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까지 이성의 힘으로 억제해온 떨림을 지금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남자의 미소는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그리고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로 SM플레이를 즐기는 인간은 아니니 걱정 마라. 하지만 네 반응을 보니 한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충동도 생기는걸.”
냉랭한 비웃음과 더불어 남자는 목에 걸린 넥타이를 위로 치켜 올려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녀가 미처 뭐라 항의를 하기도 전에 시야는 검은 어둠으로 가려지고, 남은 감각은 그것만으로도 몸을 떨리게 만드는 희미한 스킨 향 뿐. 불안은 자꾸만 커져갔지만, 그와 동시에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충동도 커져간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희미하게 떨었을 때 양팔이 뒤로 모였다. 양손목이 한데 묶인다.
두렵다.
“왜……?”
대답은 없다.
대답 대신, 남자의 중량감이 사라졌다.
넥타이 천을 뚫고 약간씩 들어오던 빛의 느낌이 완전히 가셔, 남자가 불을 끈 사실을 알았다. 두려움이 점점 그 부피를 증폭시켜간다. 초조해진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두렵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 나는 지금 어떻게 된 거지?
“이제부터 널 안을 거다.”
약간 떨어진 곳이라 추정되는 위치에서 낮고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단,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
“나는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주겠어.”
“무슨 뜻이에요, 지금? 지켜보다니? 무슨?”
“말 그대로야. 딴 남자가 너를 범하는 광경을 보겠다는 거다. 여기 이 의자에 꼼짝도 않고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음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봐주겠어.”
“싫어!”
미희는 외쳤다. 농담하는 거죠? 싫어! 나는 그런 건 절대!
“아까 그 운전수가 널 상대해 줄 거다. 내 보디가드이기도 하지. 귀찮은 일은 죄다 도맡아 해주는 사람이다. 거부해 봐야 소용없을 걸. 조폭 출신이니까.”
그 말에 숨을 삼켰다. 두려움을 참고 몸을 굴려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손이 묶인 상태로 제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건 무리였다. 허둥대며 미희는 침대 위로 그대로 다시 무너져버렸다.
“물론 보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비디오도 처음부터 끝까지 널 봐줄 테니 안심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마지막까지 고스란히 기록해 줄 거다.”
“그런 건 왜…….”
“신원도 모르는 계집애를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 것 같았나? 최소한 입막음을 위한 대비책 정도는 마련해 둬야하지 않겠어.”
“제발! 잠깐만! 잠깐만요! 제발!”
미희는 필사적으로 애원을 담아 외쳤다. 그 소리에 전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울먹거림이 배어 있었지만,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계속.
당분간은 매일 연재가 가능할 듯도 하군요.
이왕이면 끝까지 이 페이스가 유지되었으면 좋겠는데.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