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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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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메트로 호텔.”
“알겠습니다.”
클럽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준 기사는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예의바르지만 왠지 모르게 무뚝뚝한 태도로 남자의 말에 대답하더니 운전석으로 돌아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수의 딱딱한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부에 TV 정도가 아니라 전용 전화와 컴퓨터까지 설치된 메르세데스 벤츠였다. 미끄러지듯 거리에 나온 고급차는 여름밤의 장막을 뚫고 차분히 목적지를 향해 움직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 박현호를 알고 있는 직원들이 고개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정중하게 그들을 맞았다. 현호는 긴 다리를 움직여 그녀 앞으로 가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고개를 반쯤 돌렸다.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희원 말고.”
“무슨 말…….”
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알잖아?’ 하는 식으로 눈썹을 들어올렸다.
“가급적이면 본명이 좋겠는데.”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서 있는 다리가 살며시 떨렸다. 냉방이 잘돼 있는 실내 탓은 아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의 비슷해요, 이미희. 진짜야.”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에게 그녀, 미희는 이번엔 자신 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뭐 하러 가는 거죠?”
“옷 사러.”
“옷? 지금? 문을 다 닫았을 걸요.”
남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고 이번에야말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걸어갔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따라가자, 고급잡지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디자이너 부티크며 해외 브랜드점이 늘어선 쇼핑 스페이스가 나타났다. 이미 영업시간이 끝나 모두 문이 닫힌 게 보인다. 하지만 단 한 곳만은 달랐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이 분입니까? 예쁜 아가씨군요.”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서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늘씬한 여성이 미희를 보며 말했다. 여성적이고 고급스런 베이지색 치마정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려 있는 품위. 목소리는 그야말로 상냥함의 극치였지만, 그 눈동자에 부드러운 빛이란 전혀 깃들어 있지 않고 실제로 들어있는 것은 악의의 파편이란 사실을 깨닫고 미희는 여자를 그대로 일별했다.
대신 그녀는 현호를 올려다보면서 도전적인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 촌스런 원피스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군. 아, 오해는 마라. 꾸미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일단 시도만 해 보는 거니까. 물건 하나를 사도 샘플이나 시험사용 정도를 하는 세상 아닌가. 내가 너의 고객이란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은 무미하면서도 영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입가에 스민 냉소를 보고 있으려니 잡아 비틀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왔다.
할 수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이런 식이라도 좋아. 반드시 저 남자를 내 안에 넣고야 말겠어. 그것이 잠시 동안의 유희라 할지라도. 착각하지 말아요.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냐. 당신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나한테도 이건 오락이야.
미희는 불안감을 미소로 애써 감춘 채 점원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그냥 겉옷만 바꿔 입은 정도가 아니었다. 브래지어나 팬티 같은 속옷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외국의 고급 브랜드 제품이 건네지고, 그녀가 원래 입고 있던 것들은……, 부끄럽게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미희는 수치심을 비릿하게 입술로 베어 물며 겉옷을 입었다. 실크 계열의 소매 없는 흐린 녹색 블라우스에 희고 심플한 디자인의 샤넬라인 스커트, 발가락 근처와 발목을 가늘게 연결한 에나멜 샌들, 그리고 촘촘하게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와 흐린 녹색 선글라스까지. 거울에 비친 자신은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완벽했다.
“새 장난감인가 봐?”
“그래 봐야 한 달이나 가겠어? 그나저나 사장님 열 받으시겠다. 아무리 몸뿐인 관계래도 일단은 애인인데 딴 여잘 여기 버젓이 데려오다니.”
“쉿, 조용히 해!”
한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이란 아마 처음 그녀를 맞이한 키 큰 여자일 것이다. 미희는 두 귀를 막고픈 충동을 애써 누르면서 잠자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구석에 붙어있는 별실로 따라갔다.
그곳은 휴게실 같은 작은 방으로 거기에는 아까 처음 본 여자, 가게의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메이크업 도구가 담긴 커다란 상자를 옆에 둔 채, 주춤거리며 들어오는 미희를 우아한 미소로 맞이했다. 그리고는 화장을 시작했다.
“봐요, 속눈썹을 이렇게 집어서 살며시 위로 올려주면 부드럽게 컬이 생기죠. 마스카라만 발라줘도 훨씬 얼굴 윤곽이 살아나니까. 눈썹은 원래 예쁜 것 같으니 끝만 살짝 그리도록 하죠. 아이라인은 아예 그리지 않는 게 나을 듯하네요.”
여자는 자신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아가씨를 보고 미소했다.
“내 본업은 원래 메이크업 아티스트에요. 이 가게는 최근 인수한 거고. 이렇게 투명한 피부를 하고 이런 진한 컬러를 바를 필요가 없어요. 자, 이렇게 누드컬러를 골라 입술 윤곽만 살려서 발라주는 게 훨씬 인상적이 되죠. 품위도 있고. 한 듯 만 듯 투명한 화장이 아가씨처럼 어린 여자한테는 훨씬 어울려요. 부럽군요.”
잠자코 브러시에 입술을 내맡기고 있는 미희에게, 이제까지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여왔다.
“하지만 그 어린 피부로 저 남자를 유혹할 생각은 말아요. 저 남자는 누구한테도 넘어가지 않으니까. 적당히 즐긴 후면 당신은 그대로 버려질 걸.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알아듣겠어요?”
“신경 끄세요.”
미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여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로 돌아가자 남자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모습이었다. 놀랍도록 변모한 그녀를 발견했을 터였지만, 그의 표정은 티끌하나 변하지 않았다. 현실에 저런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도 하기 힘들 정도의 수려한 외모가 미동도 없이 그녀를 보더니 침묵한 채 차분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따라오라고도 하지 않았지만,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가게를 나가는 남자의 뒤를 미희는 꽤 높은데도 묘하게 편한 느낌인 샌들을 신은 발을 움직여 따라가기 시작했다.
현호가 두 번째로 향한 곳은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바였다. 이미 새벽에 근접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인데도 그곳 역시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유일한 손님은 남자와 그녀 두 사람 뿐이었다.
남자는 당연한 것처럼 야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가장 좋은 창가자리 쪽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의 눈이 반짝이는 야경 속,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다……, 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투명하고, 차갑고, 그렇지만 아름답다.
“이 옷 좀 재미없는 디자인이긴 해도 입은 느낌이 좋네요.”
보이가 의자를 당기는데도 그대로 선 채, 미희는 도발적인 포즈를 취해보였다. 실은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게 보였겠지만, 그러나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절대 읽을 수 없는 무미한 표정. 입술이 움직여, ‘앉아.’ 라고 말했을 뿐이다. 풀이 죽어 말대로 자리에 앉은 미희를 무시하고, 그는 보이에게 술을 주문했다.
“아까 클럽에서도 마시지 않았어요? 뭐 하러 돌고 돌아 여기서 마시는 거죠?”
“거기는 혼자 가는 곳이야. 여자는 옆에 앉히지 않아.”
담담하고 무정한 톤으로 현호가 대답했다. 미희가 또 말을 잃고 입을 다물자, 이윽고 구세주처럼 와인을 가지고 웨이터가 다가왔다. 구원을 찾은 것처럼 자주색을 띈 물이 담긴 유리 글라스에 입술을 갖다댔다. 씁쓸하고도 아주 약간 달콤한 기분이 혀에 느껴지고 이윽고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 열기를 온몸에 느끼면서 그녀는 약간 젖은 눈으로 현호를 보았다.
웬만해서는 함부로 웃음을 흘리지 않는 남자.
어떤 일에도 절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는 남자.
그런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지금을 믿을 수가 없어.
“그 클럽엔 어떻게 들어왔지? 거긴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인데.”
긴 손가락으로 글라스를 가볍게 쥔 채 현호가 물었다. 미희는 입으로 대답하지 않은 대신, 지갑에서 카드를 빼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여다보더니,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훔쳤나?”
“글쎄요, 그럴지도.”
미희는 짧게 대답했다. 남자의 눈썹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이건 범죄야.”
“잠깐 빌린 거라고도 할 수 있죠.”
“빌려? 누구한테?”
“언니한테.”
“언니?”
“그래요. 이 카드의 진짜 주인인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같죠. 아니, 물론 생물학적으로는 아버지도 다르지만. 언니 아버지의 후처가 우리 엄마거든요.”
“법적인 아버지와 언니가 이 정도로 부자라면 어째서 나한테 기대려 하지?”
그 말에 처음으로 미희는 고개를 숙였다.
“나, 가출했어요.”
‘……흠.’ 하고, 현호가 짧게 신음소리를 냈다.
“어차피 오늘까지가 마지막이에요. 이 카드, 그 동안은 쓸 일도 없었고.”
“카드를 이용해서 남자를 낚으려하다니 비겁하군.”
“가진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냉담한 반응에 절대지지 않는다. 미희는 얼굴을 들고 빙긋 웃어보였다.
“자, 어떻게 할 거죠? 상품이 맘에 안 드나요?”
“필요한 걸 말해 봐.”
“따뜻한 집과 그리고 편히 매일을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돈……. 평생을 먹여 살려달라는 게 아니에요. 때가 되면 돌아갈 거니까.”
단호하고 건방진 말에 남자는 희미한 한숨을 토해냈다.
계속.
계속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정크표 할리퀸을 써보고 싶은 욕구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감동 같은 건 물론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읽는 분들께서 할리퀸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대만족이랍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5-10-06 17:11)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
정크님,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