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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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파트너로 받아주시겠어요? 여름동안의 기한부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직 ‘여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녀에 가까운 외모의 젊은 여자였다. 나름대로는 멋을 낸답시고 걸친 빨간 원피스는 도리어 빈약한 체형을 강조해 어딘가 ‘빈티’가 느껴진다. 어린 피부에 하얗게 바른 분이나, 도톰한 입술만을 도드라지게 강조한 붉은 립스틱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꾸미면 나름대로 예뻐질 얼굴임을 알 수 있었지만, 첫 인상은 어디까지나 촌스러웠다. 대관절 어떻게 이 고급클럽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부터가 의심이 갈 정도로. 대담한 말을 내뱉은 입과는 달리 여자의 손은 긴장을 감추지 못해 조금 떨고 있었다.

그녀의 상대는 장신의 젊은 남자였다. 글라스를 쥔 손은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정지해 있었고, 샤프한 윤곽에 한몫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상대의 속셈이 뭔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늘씬하면서도 근육질인 체형에 잘 어울리는 블랙슈트는 한눈에도 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 그 고전적인 블랙슈트에 적절하게 포인트를 주는 청회색 타이는 가장 스탠더드 한 스타일로 매여져 있지만, 촌스러운 인상은 눈곱만큼도 주지 않고 오히려 품위가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콧날은 지나치리만큼 단정하게 뻗어 있었지만, 이마 위로 슬쩍 흘러내린 앞머리가 그 경직된 인상을 조금이나마 완화해주고 있다. 길게 찢어진 눈매 안 색소가 엷은 눈동자는 어디까지나 싸늘했고, 입술은 얇았지만 선이 뚜렷했다.

“…….”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흔들렸단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명 자신은 저 차가운 남자의 깊은 내면을 흔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무려 일주일 동안을 매일 이 클럽에 들르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더 이상 들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해야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뼈가 시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왼손으로 꾹 누른다.

“이름은?”

그 때 남자가 물었다.

“이희원.”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이름, ‘이희원’이 새겨진 클럽회원카드를 소중하게 넣어둔 낡은 지갑이 그녀의 짝퉁 루이비통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내일로 기간이 다하는 그 카드 덕택에 이 클럽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어때. 거짓말이란 걸 간파해도 상관없다. 남자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되도록 매력적으로 비치려 애쓰면서 최대한 도발적인 시선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 코, 입술, 그리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치 등급을 매기려는 것처럼. 색소가 엷은 눈동자는 흡사 얼어붙을 것처럼 차디찬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눈에 욕망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 차고, 차고, 차고, 그저 차디찰 따름이었다.

“이희원인가…….”

남자가 한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비웃는 것처럼 복합적인 느낌의 중얼거림을 흘렸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기가 막힌 것 같기도 했다.

“그쪽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한순간 그녀는 망설였지만, 이윽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알아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실은 원래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것이다. 이름을 비롯해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준비해 둔 거짓말들은 어떻게 해서든 남자를 낚기 위한 억지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한진건설 전무님이시죠. 박 현자 호자, 박현호 전무님.”

남자는 얇은 입술에 미려한 미소를 지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이거 재미있군, 하고 읊조리는 듯한 태도였다.

“한 가지 더 묻지. 나를 택한 이유는?”

“당신은 많은 걸 가졌거든요. 내가 갖고 싶은……, 많은 것을.”

“갖고 싶은 것들이란 뭐지?”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집, 그리고 그걸 살 수 있는 돈, 그리고 그 돈을 가진 남자. 그렇지만 그 남자는 절대 당신이 아니면 안돼요.”

“어째서?”

“내 이상형이거든요.”

“훗.”

남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비웃음의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네 이상형이란 이유만으로 나더러 너와 원조교제를 하라는 건가? 응?”

“원조교제? 누가 원조교제를 한다는 거예요. 그건 여자 쪽이 미성년일 경우에만 붙이는 말 아닌가요?”

“그럼 미성년이 아니란 거야? 그 빈약한 가슴이 성인 여자라고?”

그녀는 발끈해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를 높였다.

“스물 둘. 만으로 스무 살 넘었어요. 성년식까지 올렸단 말이에요. 이 클럽에 들어온 거 보면 몰라요? 말해두지만 당신에게 곤란한 일은 만들지 않아.”

“그래?”

남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그럭저럭 수평으로 맞추고 있던 시야가 우지끈 흔들리고 남자의 얼굴은 위쪽으로 쑥 올라가버리고 말았다. 긴 하체,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힌 길고 늘씬한 몸. 어깨는 비교적 넓은 편이고, 그것은 아름다운 각선을 그리며 죄여져 있는 허리 덕문에 도드라졌다. 단단한 상반신, 탄력 있는 하체. 그 모든 것이 클래식한 슈트 밑에 감춰져 있다.

“만약에 내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건데.”

“거절해선 안돼!”

그녀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남자는 그 건방진 말에 웃지도 않았다. 그저 무미한 시선으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안 된단 거지?”

“내가 선택했으니까. 당신은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날 거부하면 안돼요.”

실로 말이 안 되는 답이었지만, 남자는 그걸로 납득한 것 같았다. 그는 팔짱을 풀더니 그녀 가까이로 한 발짝 다가섰다. 깜짝 놀라 그녀가 몸을 움츠릴 사이도 없이 위에서부터 그의 그림자가 강하게 덮쳐 왔다.

“아……!”

턱에 손가락이 닿는 것, 그리고 그게 묘하게 차갑다고 인식한 순간, 바로 상대의 입술이 다소 사납다 싶을 정도의 거친 키스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숨조차 일순 멎게 만들 정도의 갑작스럽고도 격한 키스였다. 눈조차 감지 못하고 거리상 상대의 얼굴조차 살피지 못한 채 그저 받아들이고 있으려니 남자의 입술은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고, 그리고 이내 미끈한 설육이 난폭한 움직임으로 입안에 파고들어왔다.

뜨겁다.

눈동자도, 입술도, 전부 차갑고 메마른 속에 그의 혀는 뜨겁게 그녀의 혀를 휘감아 들였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구석구석을 핥고 헤집으며 그대로 무너뜨릴 것처럼, 신음조차 흘릴 수 없도록 그녀를 점령하려 했다. 입술을 열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그녀 자신은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흐트러진 채 몸을 내맡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다른 사람들도 있는 클럽이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을 것임에 분명한데도, 그런데도 정신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피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렇게 고스란히 남자의 농락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칠 것 같아…….

그렇게 느꼈을 때, 겨우.

“따라와.”

남자의 입술이 떨어져나가자마자 붉게 젖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달콤한 속삭임이 들렸다. 하지만 속삭이는 눈동자는 아직도 싸늘한 기운을 지녔을 따름이었다. 그 눈을 마주 보는 것이 고작인 그녀에게 남자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과연 날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여자인지 확인해 보지.”



계속.



갑자기 생각나서 덧붙이는데, 이 제목에 아주 큰 의미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는 황녀 같은 건 나오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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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리체

2004.07.06 02:15:53

아, 나 그걸 물어볼라고 했었지. 황녀가 누구인지..ㅋㅋ
나 그래서 이거 역사물인 줄 알았다구.
새로운 소설 연재를 축하해요.
SM이 나오는기야?@@;

셔니

2004.07.06 05:43:54

저도 그것이 궁금했다는거지요... 기다릴수 있답니다.. 글을 읽을수 있다는건 참 행복한 일이니까요...

릴리

2004.07.06 10:51:34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힘이 드는군요.
걍 꿈을 꾸고 있는거려니 생각하렵니다.ㅡㅡ;;;
후후후... 담편이 너무나 기다려지는구만요.

mirage

2004.07.06 12:58:30

정크님. 재미나게 읽고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차칸여우

2004.07.06 15:05:06

앗!! 새글이네요. 잘 읽겠습니다. (__)
두눈은 초롱초롱 기대는 만빵!! +_+

Junk

2004.07.07 00:15:10

리체/ 나처럼 순수한 사람이 어떻게 SM을 쓰겠냐.
릴리/ 원래 릴리님의 캐릭터가 더 좋다고 생각해요(진심임).

마리

2004.07.24 09:11:48

흠..저두 제목만 보구 역사물인줄 알았어요..
현재와과거를 넘나드는..
암튼 재밌게 읽기 시작하구 있습니다..

지니

2004.08.05 10:59:56

황녀 없어요?....
저두 옛날 비단옷 입고 나오는 쥔공들 인줄 알았는데...( '')?

헤라영

2004.08.06 16:12:20

정크님이 정말 좋아여~~ ㅋㅋㅋ
님이 어떤글을 보여주실지 넘 기대되여~~
님 넘 좋아여!!!!!

미망

2006.06.29 21:39:03

저도 제목 보고 다른소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좋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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