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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15
세월은 빠르다.
눈 깜박할 사이에 4년이 지나버렸다.
가끔은 그 때, 그 봄 3주 동안의 일이 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하룻저녁의 짧은 정사도.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여동생이 대학에 합격했다.
세희만은 변함없이 회사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하나뿐인 여동생이 기숙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녀는 작은 방을 얻어 혼자 생활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벌써 고참인 사원이 되었다.
화장실 거울을 들여다본다.
4년 전보다는 좀 더 젖살이 빠졌고, 좀 더 어른스럽고 차분한 얼굴이 되었다. 변한 자신을 이렇게 느낄 때마다 생소하고 슬픈 기분이 든다. 다시 만나면 알아보지 못하겠지. 나도, 그쪽도 변해 있어서 알아보지 못할 거야…….
“어머, 벌써 나왔네? 잠깐만 기다려? 나 립스틱 좀 고쳐 바르고.”
“천천히 해. 아직 점심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입사동기인 친구 수현에게 세희는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두 사람은 늘 먹는 사원식당 음식에 질려서 모처럼 밖에 나와 식사를 한 참이었다. 수현이 화장을 다 고친 후 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을 나섰다.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지름길.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정장, 누가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의 모습. 그 언젠가와 같은 모습이다. 지금의 자신은 그 때처럼 마냥 순진하지는 않지만.
타앙!
그 지점을 지나가면 항상 귀에서 총성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환청, 그리고…….
날카롭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눈. 마치 심연 그 자체 같은 깊은 눈. 총성을 지나 코에 불길하게 스미는 화약 냄새.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환각에 지나지 않아.
빵빵!
어디선가 클랙션 소리가 들려온다. 세희는 발을 멈췄다. 왠지 예감이 느껴진다.
“응? 왜 그래, 갑자기?”
옆에서 걸어가던 수현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고 이어 그녀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꼼짝 않고 서 있는 세희를 다시 돌아다봤다.
환각도 아니고 잘못된 예감도 아니다.
그것은 검은 차, 그리고 차의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한 남자였다.
검은 정장……………………………… 지운 씨?
세희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 아니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운이라고 생각했을 때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격은 그에 못지않다. 청년은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여전히 젊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풋내기라는 느낌 정도까지는 아니다. 세희가 전처럼 마냥 천진난만한 소녀 느낌은 더 이상 아닌 것처럼. 그는 차 뒤로 돌아가서 오른쪽 문을 열기 전에 세희 쪽을 힐끗 살폈다. 굳어진 듯 선 채 보고 있던 그녀와 그대론 눈이 마주친다.
아……? 청년의 눈 꼬리가 약간 가늘어졌다고 생각했다. 웃은 걸까?
세희가 보는 앞에서 영철은 검은 차의 오른쪽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숨이 멎을 듯한 기분이 되었다. 화려하다 싶은 컬러의 스커트 정장을 차려입은 늘씬한 여자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윤정이었다.
“오랜만이야.”
그녀는 핑크색으로 칠한 입술과 눈두덩에 바른 금색 섀도를 반짝이며 웃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세희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동료를 돌아다보았다.
“미안. 먼저 들어갈래? 금방 갈 테니까.”
“예뻐졌네? 용 됐다, 너. 영 촌스럽던 애가.”
윤정의 말에 세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전하시네요.”
겨우 그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어머, 내 나이엔 그게 최대의 찬사인 거 알지? 어, 커피요. 이 아가씨도 커피로 주세요. 달리 마실만한 것도 없잖아요?”
윤정은 여전했다. 여전히 천연덕스럽고 여전히 제멋대로고 여전히 명랑했다. 세희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저……, 그 사람……, 어떻게 지내요?”
“그 사람……?”
윤정은 담배를 빨더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반문했다. 세희가 반쯤은 애원하는 투로 바라보자,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연기를 뱉어내며 고개를 숙인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한참을 그렇게 말이 없더니, 거의 필터까지 타들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너한테 연락 안한 건 맞구나. 너한테 마음 있는 건 나, 진작 알아서 말은 안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한 게 진짜였네. 놀랐다. 그 사람, 진짜 널 좋아했나 보구나?”
세희는 불안한 눈을 하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담배를 눌러 끄더니 침을 한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지운 씨, 죽었어. 얼마 전에.”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거……짓말.”
겨우 그 말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을 뿐이다. 윤정은 고개를 숙였다.
“너도 겪어봤으니, 게다가 영철이한테 듣기까지 했으니 우리 세계가 어떤지는 잘 알 거 아니니. 이 바닥, 인간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세계야. 오늘은 멀쩡해도 바로 담날이면 죽어. 어제 날던 사람이 오늘 널브러져 있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세계라고. 지운 씨라고 별 수 있을 줄 아니?”
“…….”
“그런 거야.”
윤정은 한숨을 쉬듯이 말하더니 옆에 있던 백을 열었다.
“……자.”
그녀는 백에서 뭔가를 꺼내 세희 앞으로 밀어놓았다.
“죽기 전에 너한테 이걸 전해주라고 하더라. 그래서 온 거야.”
그것은 노란색의 비닐로 된 서류봉투였다. 움직일 수조차 없이 경직되어 있던 세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거기에 떨리는 손을 갖다대는 걸 보고서야 안심한 모양이다. 윤정은 그녀답지 않게 엷은 미소를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가봐야겠어. 사실은 울 그이 만나러 가는데 잠깐 들른 거거든. 울 그이가 어떤 사람인진 너도 잘 알 테고. 나랑 얘기 길게 하다가 너한테까지 피해가 가면 큰일이니까 여기서 인사하자. 잘 지내라.”
“자, 잠깐만요!”
걸음을 옮기려는 윤정을 세희가 다급하게 붙들었다.
“그 사람은요! 그 사람 어디에 묻었어요? 그 사람 어디 있어요?”
“뿌렸어. 바다에.”
“어, 어느 바다요?”
세희가 더듬거리면서 묻자 윤정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알아서 뭐하니. 죽은 사람한테 미련 두지 말고, 잘 살아. 이런 말 하려니 닭살 돋는다만, 남겨진 사람은 보란 듯이 잘 사는 게 죽은 사람을 위한 길이야. 그러니 너도 우리 같은 쌍것들은 싹 잊고 미련 싹 지우고 잘 살아. 알았지?”
윤정은 세희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녀의 볼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시 볼 일은……, 영원히 없길 바래.”
그리고 그녀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면서 커피숍을 나갔다. 커피숍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영철이 세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따라 나갔다.
남은 세희는 곧 회사에 돌아가 봐야한다는 사실도 잊고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들자 볼에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급하게 훔쳐내면서 앞에 있는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끈으로 엮인 서류봉투를 열고 떨리는 손으로 그 안을 엿본다. 안에는 작은 사이즈의 흰 우편봉투가 들어 있었다. 꽤나 두툼한 그것을 집어 들어 다시 속을 본 세희는 기겁했다.
천만 원짜리 수표가 있었다. 그것도 몇 장이나.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꺼내 세어보았다.
하나……, 둘…………………… 열여덟……, 열아홉……, 스물.
전부 스무 장이다.
수표는 무려 스무 장이었다.
2억…….
세희는 생각보다도 지나치게 큰 액수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황급히 돈을 봉투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그 안에 다른 종이가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포스트잇에 적은 윤정의 짤막한 메모와 함께.
‘아…….’
이번에야말로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세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숨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금 울지 않고는 도저히 회사에 멀쩡한 얼굴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도저히……, 지금 울지 않고는.
얼굴을 가린 손이 입술과 마찬가지로 안타깝게 흐느낀다.
그런 말을 왜 했는데, 그런 얘기를 뭐 하러 했는데요.
마치 놀리는 것 같잖아요. 안 그래요? 놀리는 거야, 그렇죠?
이런 게 무슨 필요가 있어. 도대체 지금서 이런 게 무슨 필요가 있어.
혼자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혼자서 이런 걸 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바보…….”
그것은 8월 예정인 제주도행 비행기표였다.
마지막 회로 이어집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2-20 11:54)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
주, 죽다니...;
이럴 수는!!!ㅠㅠ
살려내!!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