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unk paradise
- 소설
- 완결소설
글 수 198
“할아버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퇴근하고 막 들어온 세희는 깜짝 놀라 할아버지 앞에 놓여 있던 막걸리 병을 잽싸게 집어 들어 치웠다. 고개를 드는 할아버지 얼굴이 이미 빨갛다.
“술 좀 작작 자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어요? 코빼기로도 안 들으시니 원.”
“아이야, 잔소리가 너무 심한 거 아이가. 허? 지금 니 뭐하는 기가.”
“버릴 거예요.”
“그걸 와 버리노. 피 같은 술을 어데다 버릴라카노. 당장 이리 내라!”
“안돼요. 정 드시고 싶으심 제가 저녁 차릴 테니까 반주 삼아 하세요.”
냉정하게 자르고 앞치마를 걸치며 부엌으로 들어간다.
“이노무 가스나가 할배를 물로 아는 기가! 아이야! 아이야! 어차피 다 산 인생에 좋아하는 것도 못 처묵고 살면 이 야박한 세상 뭔 낙으로 사노?”
할아버지의 푸념 섞인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 귀로 흘리고 야채 썰기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찌개가 끓고 있을 즈음, 중학생인 여동생이 돌아왔다.
“어, 왔구나. 밥 먹어.”
“음, 배가 별로 안 고픈데…….”
“또 바깥에서 사먹었구나? 군것질음식은 미원 들어가서 몸에 안 좋다고 몇 번을 말했니?”
“와, 저 잔소리꾼.”
“저노무 가시나 잔소리 땜에 내가 몬 산다.”
동생과 할아버지의 공격에 세희는 한숨을 쉬면서 앞치마를 벗고는 밥상을 안으로 들였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된장찌개가 뚝배기 안에서 맛깔스럽게 끓고 있다. 그다지 입맛이 없는 것 같았던 할아버지와 동생도 정성스레 끓인 찌개와 지난 주말에 하루 종일 걸려 버무린 깍두기, 조물조물 무친 가지나물을 보더니 조금은 식욕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별로 먹을 게 없죠. 내일은 고기나 사와야겠어요. 할아버지 좋아하시는 돼지불고기 해드릴게요.”
“와 수저가 두 쌍 뿐이고. 니는 안 묵나?”
“밖에서 먹고 왔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냥 식욕이 없을 뿐이다.
거기, 갇혀 있던 아파트에서 먹었던 된장찌개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욕구 때문일까 맛있든 없든 정신없이 먹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매일이 가고 있는데, 절대 식욕이 늘어나지 않는 것은.
정말 이상해. 나는……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치, 누구더러는 먹고 오지 말라더니만?”
동생의 삐죽거림에, 세희는 지갑을 집어 들면서 대꾸했다.
“너랑 나랑 같니? 다 먹고 나면 치우고 설거지 좀 해. 수박도 좀 썰어드리고.”
“니 지금 어데 가려 그러노? 이 야심한 밤에?”
“아직 저녁이에요. 잠깐 다녀올게요.”
“또 무선 꼴 당하려고 작정했나? 아이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내를 시켜라. 잡혀도 늙은 놈이 잡혀야지 창창한 니한테 뭔 일이라도 생기면 내, 죽은 니 아비 어미한테 저 세상 가서 고갤 몬 든다.”
“바로 요 앞에 나가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 일이 있고난 후로, 할아버지는 그녀가 회사 갈 때 외에 집밖에 나갈라치면 항상 얼굴이 벌개져서 우려의 말을 늘어놓곤 하신다. 약간은 노이로제가 되신 것 같기도 하다. 세희는 피식 웃으면서 너덜거리는 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낮이 긴 여름날의 저녁. 이 동네는 유난히 모기가 많다.
이제 막 색이 조금 붉어질까 말까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세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살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혼자서 잠시라도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은 너무나 지겨울 정도로 한결같아서, 혼자 걸으면서 나른한 꿈을 꾸고 싶었다.
산중턱의 높은 자리에 위치한 집에서 골목길을 굽이굽이 타고 내려오면 낡은 벤치가 있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회사를 갈 때 언제나 거기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서 또 갈아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정류장.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지금 같은 저녁에는.
세희는 벤치에 앉아 이제 막 노을이 서서히 퍼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을까.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 그 사람, 지금 뭐하고 있을까.
멍하니 다리를 뻗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을 때, 갑자기 뭔가, 느낌이 왔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느낌.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언제 돌아보나 시간을 재고 있었어.”
낮은 웃음소리가 쿡쿡 울린다. 세희는 눈을 감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그제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검고 깊은 눈동자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검은 슈트가 역시 잘 어울린다.
“앉아요.”
“여기?”
“내 전용 카페니까, 자요.”
세희는 골목길을 내려오다 구멍가게에 들러 산 캔 커피를 비닐봉지에서 꺼내, 방금 벤치에 앉은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그걸 받더니 그래도 순순히 따서 입에 갖다댔다. 그녀도 자기 몫의 커피를 입에 가져갔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해가 지는 광경을 보면서 잠자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나…….”
그녀는 멍하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뭘.”
남자가 특유의 무뚝뚝한 톤으로 대꾸했다.
“왜 그 때 사람을 죽인 거예요?”
“…….”
“그 정도면 직접 나설 필요 없는 위치인 거 같은데……, 왜 그랬어요?”
“…….”
“그렇게 괴로운 눈을 하고,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
“필요가 있었어.”
세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다음 연기를 한번 길게 뿜어냈다.
“진철 형님한테 약조를 받았으니까.”
“약조?”
“이번 일을 해내면 날 놓아주겠다는.”
“아…….”
한낮에 제법 큰 조직의 중간보스가 부하 하나 없이 혼자서 사람을 살해하는 임무를 떠맡은 건 그런 이유였던가. 이유 없이 누군가를 죽일 사람은 아니었어. 역시 그랬어. 세희는 크고 깊숙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하나 더, 그 분이 그걸 원했어.”
“그 분……이라뇨?”
“그 분. 진철 형님의 삼촌, 전 보스 말이야. 원래 모셨던 건 그 분이었으니까.”
“왜, 왜요?”
“도박이었어. 자신이 죽어서 진철 형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낫다며. 어차피 몇 달 남지 않은 시한부였거든. 물론 내부 대립이 심해질 건 일찌감치 예상했던 거고. 두 사람 각자 아마 나한테는 하지 않은 얘기가 오갔던 건지도 모르지.”
“무슨……?”
지운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세희는 눈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랬군요. 역시 그랬어…….”
“이유는 중요치 않아.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것만은 변함없으니.”
담배연기가 하늘로 천천히 올라간다. 세희는 식어버린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진철 형님이란 분, 알고 있었던 건가요? 자기 삼촌이 죽고 싶어 했다는 걸.”
“아마. 아마 알고 있었을 거다. 전부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지. 지금 그 사람은 필사적이야. 내가 두 사람끼리 대화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해.”
“왜 거기서 나오지 않나요?”
담담하게 말하는 남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끝내면 보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그쪽에 있는 건가요? 설마 영영 못 나오는 건가요?”
“내부 싸움이 정리될 때까지는 무리야. 지금 혼자가 되어봤자, 그쪽의 표적이 되서 개죽음을 당할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지운은 소리 내지 않고 쓰게 웃었다.
“남 죽인 놈이 자기 목숨 아까운 건 더 잘 알기 마련이거든.”
가슴에 숨겨져 있던 감정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가만히 숨을 들이킨다.
“자수할 생각인가요?”
“자수?”
이번에야말로 지운이 자조적인 웃음을 쿡, 하고 흘렸다.
“죄목이 한두 개여야지. 경찰에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은 걸.”
“…….”
“뭐, 그런 거야. 아가씨. 너랑 내가 있는 세계는 본질적으로 틀려. 그 때 약에 취한 너를 그렇게 한 건…….”
지운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까지나 무미한 표정이었다.
“사과해봐야 소용없겠지. 그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거기서 있었던 일은 잊고 좋은 인생을 살라는 거다. 다 잊어버려.”
“잊을 수…….”
세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목이 꽉 막혀 있는 것처럼 쥐어짜내는 듯한 감각에 괴로웠지만 어떻게든 소리는 나왔다. 그렇게 힘을 다해 물음을 던졌다.
“잊을 수 없으면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높은 소리였다. 지운은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희 역시 똑바로 그를 마주 응시하며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이어갔다. 아니, 이미 눈물이 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내가,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지운의 표정이 아주 조그맣게 흐트러지는 것이 흐려진 시야를 통해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 어, 어떻게……!”
제대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계속해서 토해내고 있을 때였다.
의외로 따스한 손이 세희의 어깨로 뻗어왔다. 그리고 지운은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살며시 그녀를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계속.
몰라요. 퀘세라세랍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12-20 11:54)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