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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깨어난 곳은 침대 위였다. 다행스럽게도 몸은 그럭저럭 편안한 편이었고, 한껏 달아올랐던 체온도 적당히 식어내린 것 같았다. 눈을 떠서 앞을 바라보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지 위에 셔츠를 걸치기만 한 모습이었다. 벌어진 셔츠 앞섶으로 가슴에 감긴 붕대가 젖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걸 보고서야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실감이 나서…….
“사, 상처에 물이 들어갔으면……, 어떡해요?”
세희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어 그렇게 물었다.
“글쎄, 오늘 중으로 병원 가서 다시 소독할까 하는데.”
지운은 그렇게 말하고 희미하게 입 꼬리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몸은 어때? 괜찮아?”
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평온했다.
“이제, 나…… 죽여도 괜찮으니까…….”
그 말을 듣고 지운은 어이없는 표정을 미간 사이에 떠올렸다.
“마음이 약해졌군 그래, 어린 아가씨. 약이 덜 깼나? 자고 나서 얘기해.”
“나……, 지운 씨한테 죽어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
“…….”
“그냥……, 그냥……, 계속 마음이 아파서…….”
“…….”
“그냥……, 그냥…….”
“쉿.”
따스한 촉감. 입술에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세희가 놀라서 지운을 보자,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가 눈을 감자 손가락과는 다른, 조금 더 촉촉하고 더 따스한 감각이 느껴진다. 닿을 따름인 입맞춤.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입술을 쫓아, 이번에는 그녀가 따라가 자신의 입술을 갖다댔다. 입술이 닿자 파르르 불꽃이 일고, 촉촉하게 젖은 혀가 서로 얽힌다. 지운의 혀가 그녀의 혀에 강하게 휘감겼다가 이내 떨어졌다. 무심코 따라가면 그대로 떠나가고, 이쪽에서 도망치면 쫓아온다. 능숙하게 움직이는 그에게 완전히 휘둘리면서, 세희는 정신없이 키스에 열중했다. 지금의 몽롱한 감각은 절대 약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키스를 하면서, 원래의 지운은 의외로 다정하고 장난기가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알면 알게 될수록 점점 좋아지는 남자.
정말 좋아한다. 자신을 언제 죽일지 모를 살인마인데도, 조직에 몸담고 있는데도 어느 새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얼굴이 보고 싶고, 그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에서부터 안심이 된다.
좀 더 알고 싶고, 좀 더 닿고 싶은.
남자의 눈은 어두운 심연을 닮아 있었다. 그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는 그 심연의 본질이 냉혹함이 아니라 고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녀 멋대로의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런 고요한 눈을 하고 있으면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지금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묘하게 가슴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면죄부를 주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언젠가 이 남자에게 살해당하게 될까.
세희는 울 것 같은 자신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침부터 뭔가가 이상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폭풍우 직전의 고요함, 이랄까.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영철은 왠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윤정도 그녀답지 않게 시종일관 입을 여는 일 없이 옆방에서 TV만 줄기차게 보고 있었다. 가끔씩 영철 외에도 녹용파의 일원인 듯한 몇몇 청년이 왔다가고는 한다. 세희는 불안한 가슴을 꾹 누르며 지운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날 저녁식사를 가져온 윤정은, 원래는 팽팽했지만 며칠 새 부쩍 주름이 생긴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세희는 물어보았다.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윤정은 쿡 하고 웃으며 연기를 내뿜었다.
“별로. 그냥 날파리들끼리 모여서 좀 시끄런 것뿐이야.”
“날파리들?”
“하동파랑 그이 삼촌네 잔당이랑 손을 잡았대.”
“그럼 지운 씨는…….”
“그걸 내가 아니. 다 먹었음 치운다?”
윤정은 싸늘하게 말하더니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방을 나가기 직전에 생각난 것처럼 세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참, 너. 지운 씨랑은 어땠어? 좋았니?”
“……코, 콜록! 콜록콜록!”
세희는 놀라 마시던 물을 잘못 넘기고 말았다. 사레들린 것처럼 정신없이 기침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윤정이 쿡쿡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부럽다 얘. 나도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남자였는데.”
그렇게 말하며 지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다.
세희는 눈을 떴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사방은 온통 조용하고 사람 기척조차 없었다. 윤정이 내내 켜두고 있었던 TV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혹시……, 나간 걸까.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문은 여전히 잠겨 있는 채였다. 세희는 방구석에 움츠린 채, 가만히 두려움을 눌러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방은 온통 고요할 뿐.
그 때 현관에서 누군가가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이어 발소리가 방을 향해 가까워져 온다.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이 천천히 열리자 보인 건……,
지운이었다.
“지…….”
무심코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 눈…….
처음 만났을 때 본 그 눈이다.
날카롭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눈. 심연 그 자체 같은 깊은 눈.
그 눈은 불을 끈 방안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두운 예기를 띤 채 세희를 동공에 담고 있었다. 지운이 한걸음 다가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사실은 반가워야 할 텐데, 물어볼 것도 있는데, 지운의 무표정한 얼굴과 동공에 서린 어둡게 나는 예기가 입을 열도록 만들지를 않는다.
“안녕……, 아가씨.”
낮은 음성.
그 목소리에 세희가 뭔가 반응하려고 했을 때, 느닷없이 지운이 그녀의 가슴께를 잡아 일으키더니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아악!”
지운으로서야 별로 심하게 때린 것도 아니었겠지만, 세희의 충격은 컸다. 그녀는 고통스런 기침을 토해내면서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또 한대. 다시 또 한대. 그것만으로도 이미 반쯤 의식을 잃은 그녀의 시야에 밧줄이 들어왔다. 지운은 무릎을 굽힌 채 그녀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거지? 이제 와서…… 왜?
생각을 말로 토해낼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는 것까지 흐릿한 의식 속에 그저 관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맞아서라기보다 충격의 탓이 더 컸다. 자신을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주었던 지운이 맨 처음의 냉혈한으로 돌아갔단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세희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시야가 점차 희미해져 간다. 그런 중에도 왠지 모르게 선명하게 보이는, 어둠을 담은 눈동자.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거죠? 왜?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점점 앞이 부옇게 변해간다. 바닥에 머리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야가 서서히 닫히는 걸로 모든 기억은 끝이 났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경찰이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운 나쁘게 전 녹용파 보스의 살해현장을 목격한 그녀가 폭력조직 간의 항쟁에 말려들어 녹용파 보스를 살해한 범인에게 유괴돼 수 주간에 걸쳐 구속, 감금되었던 걸 우연히 각성제 불법소지 혐의로 아파트에 발을 디딘 경찰이 발견한 것이라고.
경찰은 불쌍한 아가씨에게 최대한의 대우를 해 주었다. 물론 사정청취는 했고, 세희는 3주 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했다. 다만 지운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굳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위험해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버거웠다.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그 어두운 눈동자가 버거웠다.
지운에게 맞은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후유증이 남을 것 같은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신경 써서 때린 게 분명하다고, 꼭 면죄부를 주려던 건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폭력조직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걸 표시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경찰에 통보한 것도 지운 본인이 분명하다고 세희는 확신했다. 그들끼리의 위험한 싸움에서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서.
적어도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여동생은 그녀를 보더니 안도감에서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세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안심이 되어선지 아니면 정체모를 허전함 때문인지, 눈물의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일주일 정도의 짧은 병원생활을 끝내고 그녀는 집으로, 또 회사로 돌아왔다. 아무리 무단결근이라지만, 폭력조직에 납치된 가엾은 여자를 내쫓을 정도로 박한 회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상사들도, 동료들도, 그녀가 무언가 할라치면 달려들어 말리느라 안달들이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모두의 동정을 받았을 뿐.
한동안은 어딜 가든 납치사건 때문에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괴로웠지만, 한 한달 정도의 기간이 지나자 평온한 시간이 돌아왔다. 형사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납치사건에 대해 묻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졌다.
세희는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그 3주간의 일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제껏 살아온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박하고 강렬한 기억들뿐인데도, 내부의 무언가가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를 깊이 거부했다.
수다스런 윤정도, 그녀의 애인인 조직보스 변진철도, 젊은 건달 영철도.
그리고 살해당한 남자와, 살해한 남자도.
언젠가 다시 끄집어낼 순간이 올 거라고……, 그런 예감이 있었다.
언젠가 그를…… 처음으로 몸과 마음을 준 남자를 만날 날이 올 거라고, 그것이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거라고 예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락한 일상 속에서 그저 기다렸다.
계속.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 지 고심 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12-20 11:53)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