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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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은 윤정의 아파트에서 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개인 병원 안에 있었다. 변두리에 있는 작고 허름한 이 병원의 의사는 나이든 할아버지로, 손녀딸 같은 간호원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밖에서 볼 때보단 그래도 안이 더 깨끗하네.’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병원에 들어서서 세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운은 병원 한편에 위치한 침대에 앉아 등을 꿰매고 있었다. 옆에는 피로 범벅이 된 흰 셔츠가 올려져 있다. 그 선명한 피 빛을 보고 세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걱정한 것과 달리, 달려 들어온 영철과 세희를 본 지운은 담담한 무표정이었다. 오히려 약간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여하간 여유로운 인상이었다.

“저…….”

“됐어. 들었어. 형수님이 전화하셨다.”

영철이 뭔가 말하려 하자 그는 짧게 대꾸하고는 세희에게 눈을 돌렸다.

“가끔은 바깥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겠지.”

세희는 젊은 간호원이 지운의 상처에 가제를 누르고 붕대를 감는 걸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깨, 팔, 그리고 가슴까지. 지운의 건장하고 군살 없는 몸이 새하얀 붕대에 싸여갔다. 칼에 찔린 상처는 한두 곳이 아닌 모양이었다.

“담배 있나?”

지운은 그런 그녀를 흘낏 보고는 영철에게 그렇게 물었다. 영철은 양복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공손히 바친 후 라이터까지 켜서 지운의 입에 물린 담배에 갖다댔다. 지운은 담배를 맛있게 한 모금 빨고는 뭔가 아득한 눈을 하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잠시 동안 그러던 그는 세희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가족이 어떻게 되지?”

갑작스런 말에 세희는 놀라 지운의 얼굴을 고쳐봤다. 심연처럼 깊은 바다의 색을 띈 검푸른 눈동자가 어둡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할아버지하고……, 여동생하고……, 그렇게 세 식구예요.”

“역시 그랬나.”

지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담배연기를 천천히 토해냈다. 세희는 무슨 말인지 몰라 그런 그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은 아마……, 별일 없……을 거다.”

세희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뱃속에 뭉쳐 있던 뭔가가 터져 나오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지운을 노려보며 반문했다.

“어떻게 알죠?”

“그냥 알아.”

피범벅이 된 셔츠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지운은 붕대를 감은 맨 피부 위에 양복 웃옷을 걸치면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능력이 있어서 말이지.”

그는 뭐라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건조한 동작으로 세희로부터 등을 돌리더니, 금세 짧아진 담배를 은색 접시 위에 눌러 껐다.

“형님, 입원 안하셔도 되겠습니까?”

영철이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지만,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차로 가자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의 말에 영철은 더 뭐라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잠자코 영철이 운전하는 차로 향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역시 하동파입니까?”

“그래.”

운전하는 영철의 질문에, 지운은 새 담배를 입에 물면서 가볍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죠?”

“보스가 이미 손을 쓰고 있다. 지시내리기 전부터 우리가 움직일 필요 없어.”

“형님이 당했다고 사방팔방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텐데요.”

“멋대로 떠들라 그래. 입밖에 쓸 줄 모르는 놈들까지 상대할 여유는 없다.”

지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윈도우를 약간 아래로 내렸다. 조금은 따뜻해진 날씨를 그대로 반영하는 봄바람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희롱하기 시작했다. 몸을 살짝 움츠리면서 그녀는 가족을, 그리고 지운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 두 사람은 아마……, 별일 없……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알죠? 어떻게……?







다시 윤정의 아파트로 돌아와 갇혀 지내기 시작한 세희였지만, 예전과는 달리 그녀의 손발이 묶이는 일은 없었다. 바깥에서 특수 자물쇠로 잠가놓긴 했지만, 윤정과 영철이 자주 말을 걸어주므로 마냥 외로운 건 아니다. 의외인 건, 병원에 다녀온 그 날 이후로 영철이 그녀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하나 같이 세희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이야기들뿐이었지만 말이다.

지운의 보스이자 윤정의 애인이기도한 변진철이 이끄는 녹용파와 지운을 습격한 하동파는 이른바 상극이라고 한다. 덧붙여 변진철은 자신의 삼촌과 항상 조직경영문제에 대해 대립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즉 변진철은 그래 뵈도 대학까지 졸업한, 조직에서는 엘리트형 리더로 주식이나 부동산, 골프장, 호텔 등을 뒤에서 관리하면서 자금력을 키우고 세력을 확장해왔다고 한다. 반면 변진철의 삼촌은 그런 변진철의 사업방식에 반대하는 일이 많아서 그들 사이에는 어느 사이엔가 깊은 골이 파여 버렸던 것 같다. 결국 삼촌과 조카간의 깊은 골은 변진철이 지운을 시켜서 자신의 삼촌을 죽이게 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고, 변진철은 자기 삼촌의 죽음으로 이제 명실상부한 녹용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지만 보스 교체에 따른 일련의 혼란 속에 같은 조직내부에서도 구파와 신파간의 대립으로 인한 분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는 중이었지만 문제는 그런 틈을 타고 하동파에서 기습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중에도 변진철의 삼촌을 죽인 당사자인 지운은 당연히 여기저기로부터 총알의 타깃이 되어 있다고 한다.

듣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을 얘기라고 세희는 생각했다.

한편으로, 가끔 밤이 되면 변진철이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그런 날이면 예외 없이 세희는 고막을 울리는 윤정의 교성과 싸워야 했다. 되도록 그 소리로부터 신경을 돌리려 애쓰면서 세희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벽을 보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런 자세로 있으면 언제고 지운이 떠올랐다.

상처는 이제 다 나은 것일까.

붕대를 둘둘 감은 몸과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내다보던 아득한 눈동자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지운은 왜 변진철의 삼촌을 죽이는 임무를 맡은 것일까. 느낌으로 미뤄볼 때 그는 변진철 바로 아래 있는 중간보스의 위치에 있는 듯했다. 그런 무리한 짓을 떠맡을 필요가 없는 입장일 가능성이 높을 터였다. 자신이 타깃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살인을 해야만 했을까.

살인.

그렇다, 그는 살인자다.

세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두워진 시야 속으로 남자의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점점 선명해지는 그 모습은 세희의 눈과 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강렬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무표정……,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감춰진 예기. 무표정 속엔 결코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 같은 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사람을 죽인데 대한 죄의식 같은 것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저 어렴풋이나마 감지해낸 한 가지는……,

위화감.

뭔가 지독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깊은 심연 속 바다의 색조를 띈 남자의 눈동자에서 느껴진 기묘한 위화감에서, 세희는 문득 일종의 동정 같은 감정마저 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

‘설마…….’

갑자기 심장박동이 그 속도를 빨리하기 시작했다.

“싫어!”

세희는 고개를 저으며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옆방에서는 끈질기다 싶을 만치 윤정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느 때와 비교해도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아아아아아앙…….”

끊이지 않는 신음소리에, 세희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왠지 저 신음소리야말로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는 중단되지 않고 이어질 뿐더러 점점 커지고 있었다. 초기에는 신음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거의 비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아아아아아악!”

혹시 무슨 일이 난 걸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세희는 잠시 망설였지만,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달려갔다.

“저, 괜찮아요? 괜찮아요?”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며 물어봤지만, 여전히 비명소리는 계속되었다. 세희는 점점 두려워져서 세게 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대답해요! 괜찮아요?”

‘혹시 저 보스란 남자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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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수룡

2004.06.26 00:24:06

제가 첫타인 것 같네요. 8번째 묶음 다시 읽고 클릭하니까 업이 되어 있다는! 흐흐.. 근데요; 녹용파라니.. 혹시 주로 하는 장사가 녹용을 밀수입하는 건가요...?

리체

2004.06.26 00:44:27

큭큭. 수룡님은 딴지 대마왕. ㅋㅋ 녹용파라니..
그러고보니 진짜 묻고 싶어지자나.ㅋㅋ 감초파는 없을라나?

여니

2004.06.26 01:04:15

국제우편봉투, 실론티에 이어 녹용까지...
도대체 수룡님의 딴지는 어디까지일까~~~

Junk

2004.06.26 06:08:04

뭐, 그런 뜻이야요(-_-+). 원래 조폭들 이름 웃긴 거 진짜 많답니다. 그래고 개똥파, 말오줌파 그런 걸로 안 쓴 게 다행... 아닙니까? -0-;

Junk

2004.06.26 16:03:48

10편 써두긴 했는데, 올릴까 말까 하다가 그냥 갑니다. 갔다오자마자 바로 올리겠습니다. 11편이 저로서는 번뇌의 1편이라 그 전에 뜸을 좀 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_-

수룡

2004.06.26 23:00:48

딴지 대마왕.. 으아아앙~ ㅠㅁㅠ (울면서 석양을 향해 달려가,..야 되는 건지;)

정이

2004.07.16 11:55:00

저도 많이 웃었는데.. 녹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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