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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희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절반의(?) 경험을 한 뒤 일주일이 지났다. 탈출을 시도하려 했으니, 게다가 그런 일까지 있었으니, 뭔가 달라져야할 것 같았지만 전혀……라기 보다 그다지 변화는 없었다.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건, 윤정이 정말이지 변덕스런 여자란 사실이었다. 자신을 덮치라고 한 입으로 ‘내일은 뭘 사다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호호호호.’ 그딴 말을 한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런 변덕스런 태도가 그리 밉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세희는 윤정이 싫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시원스런 말투를 심지어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운은 그 때 이후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라리 그쪽이 세희로서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 남자를 보게 된다면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맞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운과의 일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몸 안이 뜨거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때때로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남자의 탄탄한 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지운의 총에 맞은 중년남자의 머리가 박살이 나는 광경을 떠올리면, 달아올랐던 몸이 이내 차가워지곤 했다. 그렇다, 저 남자는 사람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면 달아올랐던 온몸이 금세 싸늘하게 식어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세희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지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호기심? 공포? 그게 아니면…….
아무리 윤정이 말렸다고 해도 그의 보스는 분명히 그녀를 처리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운은 그녀를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다. 왜? 어째서? 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어쩌면 지명수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남자가 보스의 애인 집을 오간다는 자체가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처리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분명히.
“저기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세희는, 심심한지 막 일어난 점심부터 그녀를 붙들고 의미 없는 수다 꽃을 피우고 있던 윤정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운 씨……,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니? 뭐가? 안 괜찮을 게 뭐 있는데?”
“사람을 죽였는데…….”
“근데?”
“저기……, 위험하지 않나요. 지명수배 됐다거나…….”
“괜찮아.”
윤정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시큰둥하게 말했다.
“문제가 생기면 대타로 쫄따구 아무나 자수시키면 되니까. 이제 본인 몸으로 직접 때울 짬밥은 지났거든.”
“그래도 혹시 저 말고 다른 목격자가 있으면 어떡해요……?”
그렇게 묻자 윤정은 담배연기를 내뿜다 말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너 진짜 착한 거니, 아님 맹한 거니? 원 살다 살다 이런 애도 다 보네? 지금 니가 어떤 입장인지 생각하고 말하는 거니? 당근 목격자가 있음 골 아프지. 아님 지운 씨가 왜 널 여기로 데려왔겠니. 안 그래?”
확실히 그 말대로다. 확실히 범인의 얼굴조차 봤을 정도의 목격자는 세희 한 사람 뿐일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목격자가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고, 설혹 있다고 해도 비슷한 인상에 몸집을 한 다른 사람을 대신 자수시키면 속일 수 있을 것이다. 경찰이 제 발로 자수한 범인을 의심하고 재수사에 들어갈 확률은 극히 낮을 테니까. 게다가 이건 조직 간의 다툼 속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다. 경찰도 모두 전후사정을 감안하고 대충 넘어가버릴 가능성이 높다. 세희는 묶인 양다리가 저리는 걸 느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당최 니가 남 걱정을 할 게재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애가.”
윤정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세희는 ‘네…….’ 하고 웅얼거리고는 양 발목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엄청 단단히 묶였던 발목에는 아직 울혈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다소 느슨해져서 버틸 만 했다.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세희는 도망칠 용기도 의욕도 사라져 있었다. 여전히 죽음은 두렵고 자신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자세를 고치고 고개를 들다가 세희는 문득 문 너머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지난번에 도망치던 세희를 붙잡았던 몸집 큰 남자로 지운의 부하이기도 한 그의 이름은 장영철이라고 했다. 우직하고 어딘가 어설픈 느낌의 이 남자는 그 뒤로 줄곧 세희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 날 그녀에게 험한 짓을 하려던 사람치고는 그다지 그녀를 나쁘게 대우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본이 못된 놈은 아니다……라고 생각한 건, 분명히 세희의 착한 성격 탓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도 그리 틀린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 입을 열려고 하다가 그만 두고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마치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건장한 체구에 무뚝뚝한 성격인 젊은 남자의 핸드폰 멜로디는 우습게도 만화영화주제가였다.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흘리면서 영철이 핸드폰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운 형님이십니까.”
갑자기 세희의 심장이 맥박 쳤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억누르며 그녀는 영철을 뚫어지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영철의 표정이 심상찮다는 걸 깨달았다. 언뜻 봐도 티가 날 정도로 굳어져 가는 얼굴.
……불안해졌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겠습니다!”
영철은 그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고 경직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야, 영철 씨?”
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운 형님이 칼에 찔리셨답니다!”
세희의 눈동자가 더 그럴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윤정도 눈썹을 찌푸렸다.
“상태는 어떻대요?”
“직접 전화할 정도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영철이 몸을 돌리려 했을 때, 세희는 그렇게 외쳤다. 스스로도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맡겼을 뿐.
“저, 저도 가고 싶어요!”
“너 미쳤니? 또 토끼려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하는 영철 옆에서 윤정이 팔짱을 끼고 흘겨보았다. 세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니에요. 저, 전 그저……, 지운 씨가 그랬어요. 절 죽일 권한이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다른 누구 손에도 죽게 놔두지 않겠다고. 절 죽일 사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요?”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희는 열심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곰곰이 되짚어 보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운이 죽는 게 낫다. 그가 죽으면 살인자, 즉 범인이 사라지는 거니까 현장의 목격자라는 이유로 여기 이렇게 붙들려 있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풀려나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런데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운이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절대, 절대 안 된다고.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죽고 싶니?”
정신이 들자, 윤정의 시선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즐기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시선이었다. 세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말없이 윤정의 눈을 마주 보았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 처녀를 바친 남자에 대한 순정이란 거니? 웃겨.”
윤정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뭔가 생각을 더듬는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잠시 담배를 물고 있다가 이윽고 결정했다는 식으로 손뼉을 딱 치며 시원스레 영철에게 지시했다.
“데려가요.”
영철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진심이십니까?”
“설마 이런 쪼그맣고 야리한 계집애 하나 놓치진 않겠죠. 만일 그렇다면 당신 이 바닥에서 잽싸게 발 떼는 게 나은 거고. 책임지고 잘 감시해서 다녀와요. 곧 죽을 앤데 뭐 어때. 이 정도 소원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만…….”
“괜찮아요. 지운 씨한텐 내가 시켰다고 해.”
“알겠습니다.”
영철은 길게 한숨을 토하면서 그렇게 대답하고는, 몸을 굽혀 세희의 몸을 어깨에 가볍게 짊어지더니 방을 벗어나 현관을 나섰다. 그 뒤에서 윤정이 소리쳤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윤정의 활기찬 외침을 뒤로 한 채, 영철과 세희는 밖에 나왔다. 건장한 남자의 어깨에 얹힌 형태로 복도에 나온 세희는 바깥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복도 난간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았다.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관찰해 보았지만, 도대체 이 아파트가 어디 위치한 건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세희가 갇혀 있던 집이 적어도 10층 이상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단 사실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어차피 창문을 깨고 나간다 해도 즉사할 만한 위치였다.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휴.”
영철은 짧고 깊은 한숨을 쉬고 세희를 어깨에서 내리더니 그녀의 팔목을 꽉 움켜쥔 채 무섭게 다짐했다.
“도망치면 형님 대신 내가 죽일 거다. 알겠어?”
“도망 안 쳐요. 약속해.”
세희는 야무지게 대답했다. 영철은 그런 그녀를 잠시 의심스런 눈으로 봤지만 순순히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그녀의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런 후,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계속.
절반 정도는 나간 것 같습니다.
계속 쾌속 질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 개과천선했죠?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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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