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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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개죽음 당하기는 싫었다. 세희는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생각했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이대로라면 죽게 될 거야.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대로 내가 죽으면 할아버지와 정희는 어떻게 되는 건데! 안돼. 도망쳐야 해.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윤정이 아침식사인 샌드위치를 가져왔을 때, 세희는 마루에 쟁반을 두기 위해 몸을 구부린 그녀에게 힘껏 몸을 부딪쳤다.

양손과 양다리를 묶인 상태였지만,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창문에는 쇠로 된 창살이 있어 도저히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고, 설혹 빠져나갈 수 있다 해도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는 지금 빠져나가봤자 자살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문은 항상 잠겨 있었기 때문에, 찬스는 윤정이 식사를 날라 오는 그 순간뿐이었다. 세희는 이를 악물고 윤정을 밀친 다음, 그녀가 넘어지는 장면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묶인 두 다리를 스킵(skip)하듯 움직여 현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방을 나와 보니 현관은 바로 저편에 있었다. 세희는 필사적으로 움직여 현관으로 향했다.

나갈 수 있다! 나갈 수 있어!
나가기만 하면 큰 소리로 SOS를 청하는 거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토해내려 숨을 모으면서 현관문을 열려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후려쳤다. 문을 열기에만 열중한 나머지 누가 있던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엄청난 충격에 세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애벌레처럼 몸을 묶인 채 보기 흉하게 무너져 내린 그녀가 막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자, 몸집이 큰 젊은 남자가 거기 서 있었다.

검은 양복 안에 흰색 라운드 쫄티를 받쳐 입은 게 영락없는 건달이다. 게다가 이 남자는 머리까지 바짝 깎아서 더욱 무서워 보였다. 남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세희를 내려다봤다. 그 뒤로 두 명의 남자가 더 고개를 내밀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 씹. 진짜 용쓰게 만드네. 니년이 도망쳐 봐야 벼룩이지, 어딜 가려고?”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얼굴이 파랗게 질려 필사적으로 빌고 있는 세희 앞에 윤정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픈 듯 뒷벽에 부딪쳤던 머리를 문지르며 나오는 그녀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어 있었다. 윤정은 평소의 콧소리와는 달리 얼음처럼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애구나. 너 나 땜에 여태껏 버틴 거야. 잊었니?”

“자, 잘못했어요…….”

“어머, 울긴 왜 우니? 누가 죽이겠대?”

“어떡할까요? 누님. 맛 좀 보여줄까요?”

“그래야겠지?”

윤정은 팔짱을 끼며 입술 끄트머리를 비틀어 올렸다. 세희의 등에서 땀이 주륵 줄기를 타고 흘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근데, 얜 여자애잖니. 여잘 때리는 건 야만인이나 하는 짓이거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젊은 건달이 지극히 공손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물었다. 윤정은 껌을 씹으면서 세희를 똑바로 노려보더니, 이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방 하나 내 줄 테니까, 니들이 맘대로 갖고 놀렴. 어린애도 아니고 스무 살이나 된 애니까 뭐 별 문제없겠지? 손은 그대로 묶어두고 다리만 풀어놓으면 되잖아, 안 그래? 그 와중에 말을 안 들으면 한두 대 정돈 내 이해할게.”



최고의 악마는 이 여자였다. 처음으로 이 여자가 조직 보스의 부인이란 사실이 납득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앗!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제발요!”

“기집애, 되게 쨍알대네. 야, 입 막는 거 가져와.”

“악! 싫어! 아악!”

세희는 비명을 질렀다. 사실 여기 온 첫날, 혹시라도 옆집에라도 들릴까 크게 고함을 질렀는데 그 때 두들겨 맞고 목젖에 칼이 대어진 후로는 차마 무서움에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젠 정말 할 수 없었다. 도움 요청이고 뭐고 그냥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아악!”

순간 눈앞에 불꽃이 번쩍였다. 그리고 또 한번.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고개가 절로 돌아가고 반동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단지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체력을 너무 잃어버린 탓인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세희는 축 늘어진 상태로 남자들이 그녀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단 세 대에 모든 저항의 의욕이 사라져버렸다.

‘하느님,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네?’

연 사흘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블라우스의 단추가 반강제로 뜯겨져 나갔다. 묶인 발목의 밧줄이 풀어지는 것도 그녀는 희미하게 밖에 느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눈물이 아니더라도 이미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희는 다리를 어떻게든 모으고 남자들이 옷을 벗기려는 걸 방어하려고 힘을 다해보았지만 주먹으로 복부를 한방 얻어맞고 또 다시 무너졌다. 이미 충격으로 힘이 풀린 다리가 바로 힘없이 벌어지자, 눈앞의 남자가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끝……인가? 나?’

그 때였다.

“뭐하는 거지?”

아……, 이 소린?

갑자기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남자의 육중한 중압감이 사라졌다.

‘……?’

“커억!”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괴로운 신음소리, 그리고 우당당탕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 뭔가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늘어진 상태로 세희는 어느 새 부어오른 눈을 뜨려 노력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희미한 시야에 비친 건, 자신을 덮치려던 남자가 누군가의 강력한 주먹에 맞고 뒤로 나동그라지는 장면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두 명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는 신음을 토하며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배를 강타한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그들을 후려갈긴 장본인은, 다름 아닌 지운이었다. 언제 돌아온 걸까. 세희가 미처 궁금증을 머리에 올리기도 전에 지운은 복부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부하들에게 싸늘한 소리로 말을 뱉었다.

“누가 니들더러 여기서 소란피우라고 했지?”

똘마니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형님……, 저흰…….”

“내가 그러라고 했어요.”

문가에서 만만찮게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윤정이 팔짱을 낀 채 지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희는 욱신거리는 배를 묶인 손으로 누르며 숨을 삼켰다. 지운이 천천히 상대에게 시선을 돌리는 게 보였다.

“날 밀치고 도망치려 했지 뭐야. 말론 안 될 것 같아서 맛 좀 보여주라 했어요. 여자애니까 이런 방법이 더 낫지 않겠어요? 지금 당장 죽이기는 싫고.”

“……그렇습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애들 놔둬요. 명령이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응?”

세희는 무슨 말인지 몰라, 쓰러진 몸을 비틀비틀 반쯤 일으킨 모습으로 간신히 남자를 올려다봤다. 지운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정을 보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전혀 톤의 높낮이가 없어, 세희는 이제까지 그를 접했던 어느 순간보다도 몸이 오싹하게 식어 내리는 걸 강하게 느꼈다. 지운은 천천히 눌러 박듯, 그러나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하지요.”



계속.




말해두지만, 윤정의 모델은 결코 A양이 아닙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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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9'

수룡

2004.03.31 22:06:03

헛;;;

yoony

2004.03.31 22:24:53

으~ 저 말, 정말 여자로선 그게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그 영화가 생각나네요. 임창정과 그 백조 여자가 나오는 위대한 유산인가? 하는 영화에도 따른 남자들이 겁탈하려 했을 때 임창정이 차라리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더군요. 거기서 여배우는 정말로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하더라구요.
근데요, 여기 글씨가 와 이래 커졌댑니까? 갑자기 돋보기를 쓰고 보는 기분이...;;
글씨체가 이러니 읽어도 분위기가 안 납네다...ㅡ ㅡ;;

릴리

2004.03.31 22:36:41

만약 세희가 지운에게 당, 당하는게 더 낫다고 느낀다면 그에게 어떤 감정이 생기고 있는 중이 아닐까요?(애써 합리화시키고 있는중) 건 그렇고 가슴 큰 여자 거 못됐네...

Jewel

2004.03.31 22:41:47

헉 .. 헉 .. 허거거거거거거 ......

Junk

2004.03.31 22:43:24

yoony님/ 잘 안 보인다는 분들이 계셔서 font를 설정했는데ㅡ 하지만 크기는 커지지 않았는데요. 글자 간격이 좀 넓어졌을 뿐... 만약 게시판 설정 그대로가 더 낫다고 말씀들을 하시면 설정하지 않겠습니다. 저로서도 그게 편하다는;

코코

2004.03.31 23:08:40

호오~
다음!

리체

2004.04.01 00:14:17

이렇게 다음번에 계속이라니.
안 야하기만 해보셩!!ㅠㅠ

석류

2004.04.01 05:37:16

.... 담편..담편.....

Lian

2004.04.01 12:00:51

제가 하겠습니다, 이거 왜 이렇게 도발적이죠? 막 좋아요. ;;;;
세희가 불쌍해야 하는데, 이럼 안 되는데. -_-/~~~~
지운이 그 말을 했을 때, 은근히 그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멋대로; 상상) 윤정의 헉, 하는 표정과 질투와 욕망이 뒤 섞인 복잡한 시선까지 막 생각이 나요. 책책책 책임져~. (언타이틀 버젼)

꼬맹이

2004.04.01 12:56:07

헉..여기서 자르시면 어떻게 합니까~~ (읽는 주제에 큰소리 치는 꼬맹쓰 -.,-)
담편...담편..

앨리스

2004.04.01 14:16:10

불가항력의 결말...

알렉시스

2004.04.01 19:32:01

헉~ 불가항력의 결말이라.근데..여기서 자르면 보면서 침삼키는 우리들은 어찌라고요..빨랑..담편을 주세요 네~~

릴리

2004.04.02 11:37:59

리앙님!! 저도 언타이틀 좋아했어요.!!!(너무 반가운 나머지 다시 뛰어들었슴)

Lian

2004.04.02 12:31:45

릴리 님/ 저는 1집 때까지만 좋아했어요. 사실 책임져란 노래만... (반가운 거 무효되려나요?;;)

릴리

2004.04.03 00:21:20

아뇨. 저도 그노래밖에 기억이 안나요. 그왜 작곡하는애가 홍경인하고 비슷했잖아요. 전 걔말고 갸랑갸랑하게 생긴 애를 더 좋아했어요.(애라고 표현해서 미안하군. 전 원래 마른스타일을 좋아해서요) 무효 아녀요..^^

꽃분홍립스틱

2004.07.09 21:57:12

남주인것 같은데... 무섭네요... 진짜...
설마 끝까지 무서운건 아니겠죠?

정이

2004.07.16 11:31:57

헤헤..
쭈욱~~

에머랄드

2004.07.30 16:57:55

처음과 달리 남주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보이네요....

나여

2005.07.19 13:39:53

지운이 남주가 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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