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2






“살려 주세요.”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한심할 정도로 비굴한 목소리다.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아까 머리가 산산조각 나 죽은 중년남자의 시체가 환영처럼 공중에 떠올랐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세희는 있는 힘을 다해 남자를 향해 도움을 애걸했다. 자신은 죽으면 안 된다. 다리를 다치셔서 집밖으로는 못 나오게 된 할아버지와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는 여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떻게?’

세희는 필사적으로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원룸. 사람의 주거공간이라기보다는 창고 같은 느낌의 방은, 이런저런 물건이나 종이박스들이 난잡하게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아파트의 방이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높직한 위치에 있는 창문이 유일한 탈출구로 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바깥에는 철책이 쳐져 있었다. 세희는 남자의 조준거리에서 피하려고 결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남자는 무표정하게 말하더니 일단 권총을 내려놓고 검은 슈트 상의를 벗었다.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간단히 풀어 방바닥에 내버리더니, 이번에는 와이셔츠의 소매를 두 단 정도 걷어 올린다. 드러난 팔목 위로 힘줄이 푸르게 솟아 있는 것이, 애벌레처럼 밧줄에 묶여 있는 세희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와이셔츠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도 확연할 만큼의 군살 없이 날렵한 근육질 체구는 남자가 얼마만큼 강한 인물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이는 아마도 삼십 안팎 정도일까.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킬러?

“직업이 뭐죠?”

세희는 그 힘줄에 묘한 감동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물었다. 오른쪽 소매 단을 접고 있던 남자가 약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호기심이 많은 아가씨군. 자기 처지도 모르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 끝을 슬쩍 들어올렸다. 분명히 웃는다고 웃는 건데, 그런 웃음이 어째서 남자의 살벌한 분위기를 더욱 돋우는 건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희가 얼굴을 굳히고 있는데, 이번에야말로 남자가 벨트에 꽂아뒀던 권총을 뽑아 그녀를 향해 겨눴다. 이번엔 확실히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자, 잠깐! 잠깐! 잠깐만요! 제발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살려만 주시면 절대 경찰에 말 안 해요! 네? 말 같은 거 안 해요! 그러니까, 제발…….”

목소리에 저절로 울음기가 서렸다. 한심하리만큼 애걸복걸하는 자신의 태도가 비참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살아야만 했다. 자신이 죽으면 이 땅에 발을 디디는 게 힘들어질 사람이 이 세상에는 둘이나 있다. 눈물이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 세희는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애원하듯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침묵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그 눈에 동정의 기색이라곤 들어있지 않았다.

“절 꼭 죽여야 하는 건가요?”

세희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한 줄기 흘렀다. 그 눈물이 입가에 스며들어 찝찔한 맛을 느꼈을 때, 세희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름.”

“뭐?”

남자가 되물었다.

“이름을 알려줘요. 날 죽이는 사람의 이름이 뭔지 정도는 알고 죽고 싶어.”

“정말이지 별난 아가씨로군.”

남자는 겨눴던 총을 이마에 누르며 희미하게 기가 막힌 얼굴을 했지만, 이내 입술을 기묘한 모양으로 일그러뜨리더니 - 이 역시 그 나름의 미소였을 것이다 - 순순히 입을 열었다.

“성지운이다.”

“성지운…….”

세희는 중얼거렸다.

“꼭 기억해 두겠어요. 저 세상에 가서도 잊지 않을 거야.”

남자는 쿡, 하고 이번에야말로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그런 식으로 날 기억할 망자(亡子)는 이제까지도 너무 많았어. 아가씨가 굳이 기억해서 빌지 않아도 내가 지옥에 떨어질 건 자명한 일이거든. 그러니 굳이 무리해서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남자는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좋은 눈이야. 다른 방식으로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세희는 남자에게서 칭찬받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방법이 없다. 보다 편안히 죽을 수 있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남자의 솜씨를 믿을 수밖에.

하느님, 마지막 소원입니다. 할아버지와 정희를 돌봐주세요. 그리고도 저한테 신경써주실 여력이 있다면 부디 즉사하게 해 주시고, 이왕이면 양지바른 자리에 묻혔으면 합니다. 짧은 생이었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죽음을 당하지만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어요. 대신 남은 가족을 꼭 보호해 주세요.

세희는 감은 눈꺼풀에 힘을 꾹 실었다.

아아, 이제 정말 끝인가! 내 머리도 아까 그 중년남자처럼 산산조각이 될까?

그러나 그 생각이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다. 남자, 성지운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쾅!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세희가 미처 눈을 뜨기도 전에, 그 누군가는 쇳소리로 소리질렀다.

“지운 씨! 이 방에서 사람을 죽이는 짜증스런 짓거린 하지 마! 하려면 딴 데 가서 하라고! 난 핏자국 지우는 건 딱 질색이야! 알아?”

세희는 눈을 천천히 뜨고 방금 소리 난 방향을 올려다봤다. 쇳소리의 주인공은 젊은 여자였다. 긴 생머리에 짙은 눈 화장이나 코코아 색 립스틱이 어딘가 퇴폐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다. 아마 이 방의 주인인 것 같았다.

“저는 이 여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누구한테서?”

담배를 꺼내든 여자에게 남자는 당연하잖습니까, 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보스의 명령입니다.”

“아, 그래? 내가 말할게. 그럼 된 거지?”

“…….”

“피를 보는 건 정말 지겹다고! 게다가…….”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는 갑자기 세희에게 눈을 돌렸다.

“이렇게 어리고 귀여운 아가씨를 죽여? 그럼 벌 받지, 지운 씨.”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꽁꽁 묶인 채 미동도 못하고 있는 세희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생긋 웃었다.

“정말로 벌 받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희의 코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담배향기가 희미하게 났다. 세희가 그런 상대의 행동에 놀라 바짝 몸을 움츠렸을 때, 여자는 이미 일어서서 한번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나가버렸다. 물론 마지막 쐐기를 박는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절대 죽이지 마?”

여자가 잽싸게 방을 나가자, 지운은 힘이 풀린 듯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가만히 중얼 거렸다.

“운이 좋은 아가씨로군.”

그리고 그는 천천히 총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세희는 빳빳하게 쳐들고 있던 고개를 무너지듯이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온몸의 힘이 몽땅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지운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몸을 돌려 나가려했을 때.

“저기……, 잠깐만요…….”

세희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런 그를 불렀다.

“뭐야.”

남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세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져서 눈을 질끈 감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화, 화장실요……. 화장실이 가, 가고 싶어요…….”

보지 않아도 남자가 한숨을 내쉰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계속.



한 10편 정도면 가뿐히 끝날 짧은 중단편입니다.
이게 끝나면 본격적으로 변태 플레이를 펼칠 예정입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12)

댓글 '14'

Lian

2004.03.27 08:45:53

우하하. 이거 왜 일케 귀엽죠? 화장실...T^T 진짜 절실한 문제죠. 급하면, 급할수록 더욱. --;;
본격적인 변태 플레이~! (반짝반짝)

리체

2004.03.27 09:39:56

기대하것소!

릴리

2004.03.27 10:55:25

오오.. 마치 물만난 고기같사옵니다.
그렇죠. 이런 표현의 자유를 억눌렸으니 그간 얼마나 심적 고통이 크셨겠어요.
몸(?)과 마음이 모두 준비되어 있는 침실에서 마음껏 펼쳐보이세요.
목을 빼고 채찍을 정돈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호호홋~

신혜원

2004.03.27 11:40:02

변태 플레이! (꿀꺽)

Agnes

2004.03.27 23:08:14

이히히...(...)

석류

2004.03.31 03:44:43

기도하는 장면 특히 '즉사'라는 말에 웃음이.. ㅋㅋ 기대만땅입니다!!!!

도로시

2004.04.07 18:17:09

본격적인 변태 플레이;; =_=)b 왕 기대!!!

미야

2004.05.02 16:59:50

변태!!!
ㅋㅋㅋ 이 말이 와이리 좋을까요

소야

2004.07.11 17:05:25

저는 하나님을 찾길래 아~죽어서 남주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는건가보다...했더니 아니군요..

정이

2004.07.16 11:23:15

기대.. 부끄~*

에머랄드

2004.07.30 16:51:17

여주맞죠? 꽤 당당하면서도..약간의 엽기..

직녀

2005.07.07 20:19:03

등업돼자마자 이방으로 왔습죠.....그동안 얼매나 궁굼했는지...쿄쿄쿄
좋아요 좋아요 하드코어 .....뵨태두.....기대기대

나여

2005.07.19 13:32:40

흥미롭군요,,,,,

미망

2006.06.28 23:02:44

다음글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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