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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4. 엇나가는 연인들
“피해자 성유리가 최근까지 사귀던 남자를 알아냈습니다.”
“흐음.”
보고하는 김 형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정 반장은 조금쯤 부러워졌다. 자기도 얼마 전까지는 저렇게 뛰어다니면서 일했는데, 지금은 중심을 잡고 있어야만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수사하는 일이 드물다. 김 형사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
“이름은 오준호. 겨우 서른일곱입니다만 E대 조교수로 있습니다. 덧붙여,”
하고 김 형사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묘합니다. 오준호와 살해된 남안진은 서로 꽤 친한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래?”
정 반장이 반응했을 때, 마침 치현이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다.
“죽은 남안진의 집에서 이런 게 발견됐습니다!”
치현이 들어 보인 것은 한통의 편지였다. 정 반장은 편지를 받아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놀란 눈을 부릅떴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다윗의 별이 피로 그려져 있었다. 피는 바싹 말라붙었지만, 그래서 더 섬뜩한 그림.
“오늘 아침 남안진의 집에 도착했다고 하는데요?”
“지문이랑 혈액검사는?”
“방금 넣었습니다. 반장님, 이건…….”
“명백하게 연쇄살인이야.”
정 반장은 이마에 깊게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지시했다.
“표 형사랑 김 형사는 오준호를 감시하게. 나머지는 피해자들에 관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잡아내도록 해. 학생이나 선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분명 알아낼 수 있을 거네.”
“알겠습니다!”
뛰어나간 형사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정 반장은 피곤기가 서린 얼굴을 세게 몇 번이고 문질렀다.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민형은 자신의 자취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아, 그냥…….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잘됐다! 간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장민형 군이 끓인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어서 왔지. 앗, 그게 안 되면 스파게티도 좋고, 음, 동그랑땡도…….”
“논다.”
민형은 윤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튕기더니 문을 땄다.
“으악, 총각 냄새! 환기 좀 시켜야겠다.”
들어서자마자 윤희가 소리쳤다.
“그냥 인내와 사랑으로 승화시켜. 님의 향기잖냐.”
라고 말하면서도 민형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었다.
일요일 저녁이었다. 민형이 워낙 바쁜 탓에 두 사람은 같은 과이면서도 수업 외에는 좀처럼 얼굴 맞대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과 CC다. 쉽게 불타오를 것만 같지만 주변 시선이 무서워서 스킨십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
그것이 장민형과 최윤희였다.
최근 살인사건을 포함한 이런저런 일들로, 그리고 어제 민형이 한 말 때문에 괜히 신경 쓰이던 윤희였다. 그래서 민형의 아르바이트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고.
민형은 자취경력이 꽤 되어선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따끈한 밥을 먹고 사는 윤희보다 요리를 훨씬 잘했다. 특히 오므라이스는 그의 특기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씻더니, 윤희가 사온 재료들로 간단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민형이 만든 오므라이스와 계란국에, 윤희가 만든 샐러드. 윤희는 완성된 오므라이스를 보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 위에 토끼 그림을 그렸다.
민형이 오므라이스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니가 그린 토끼는 항상 왜 그렇게 빈약하냐?”
“엇, 그런가?”
“빈사상태의 토끼, 라고 부르고 싶다. 게다가 귀가 짝짝이잖아.”
“쳇, 남의 예술작품을.”
윤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접시를 상위로 날랐다.
“이런 걸 화룡점정이라고 하는 거라고.”
“자, 화룡점정!”
말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콜라 캔이 날라 왔다. 자신도 놀랄 반사 신경으로 캔을 받아 쥔 윤희는 민형의 방에 있는 CD 보관함을 열었다.
“앗, 멜리사 에더리지다!”
“좋아하냐? 의외다, 최윤희. 별로 아는 사람 없던데.”
“나 이거 틀어도 돼?”
민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희는 CD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이내 방안을 가득 메운 멜리사 에더러지의 허스키 보이스를 들으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밥을 먹었다. 민형이 생각난 듯 입을 연 건 오므라이스 접시가 어느 정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E대 살인사건 피해자가 가르치는 수업, 니 친구가 듣는다고 하지 않았냐?”
“아, 한경이? 응.”
윤희는 대답했다. 민형은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죽은 물리학 강사분이 잘 다니던 술집이 있단 얘기를 들었어. 우리 대학 피해자도 거기 다녔다던데?”
“그래?”
“아무래도 두 사건은 관련이 확실히 있는 거 같아.”
밥을 다 먹어서 다행이었다. 윤희의 가슴이 다시금 막혀왔다. 그 때 CD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Come to my window로 넘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그 증상은 꽤 오래 지속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자, 분위기는 다시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Come to my window
Crawl inside, wait by the light of the moon
Come to my window
I'll be home soon…….
“역시 이 곡이 제일 좋아.”
민형이 말하면서 벽에 기대 고개를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I would dial the numbers
Just to listen to your breath
I would stand inside my hell
And hold the hand of death
어느 새 윤희도 따라서 까닥이고 있었다.
You don't know how far I'd go
To ease this precious ache
You don't know how much I'd give
Or how much I can take
“우리, 춤출래?”
낮게 속삭이는 음성.
Just to reach you
Just to reach you
Just to reach you
그리고 민형은 윤희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Come to my window
Crawl inside, wait by the light of the moon
Come to my window
I'll be home soon
춤추기에 그리 적합한 곡은 아닌데……,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민형이 팔을 등에 돌려 그녀를 가슴 안으로 끌어들이자 금세 분위기에 젖어든 윤희였다.
Keeping my eyes open
I cannot afford to sleep
Giving away promises
I know that I can't keep
민형의 자취방안은 좁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느 새 등이 벽에 닿는다.
Nothing fills the blackness
That has seeped into my chest
I need you in my blood
I am forsaking all the rest
그래도 좋았다. 민형과 함께 있으니까.
Just to reach you
Just to reach you
Oh to reach you
발에 방금 한구석에 밀어둔 밥상이 치이고, 뒤로 물러설 때마다 벽이나 책상이 등에 닿아 웃음이 나왔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서 윤희가 손을 들어 한쪽 얼굴을 가리자, 민형도 마주 웃으며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Come to my window
Crawl inside, wait by the light of the moon
Come to my window
I'll be home soon
민형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일지라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 있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민형은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이니까. 이런 모습을 사랑하는 거니까.
이 모습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지금 전부를 보여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보게 되리라 생각해. 그러니까 너 역시 너를 좋아하는 내 감정까지 의심하지는 마. 응? 민형아.
I don't care what they think
I don't care what they say
What do they know about this love anyway
민형의 입술이 윤희의 입술 위로 내려온다. 그에 반응해 그녀도 고개를 들고 그에게 몸을 맡기려고 했을 때, 갑자기 민형의 핸드폰이 울렸다. 느닷없이 깨져버린 분위기에 두 사람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면서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여보세요?”
포즈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귀에 갖다댄 민형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아뇨, ……예. 제가 왜요? 글쎄……, 전 그렇게 한가치 않아서요. 방치했다고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감정 따윈 없으니 내버려두시라고 하면 안 됩니까? 모르겠습니다, 갈 수 있을지. 방학은 아직도 멀었고, 방학이라 해서 맘 편히 놀러 다닐 수 있을 형편도 못 되거든요. 죄송합니다. 네, 생각은 해보죠.”
민형은 ‘은’을 유난히 강조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잘 사니까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예, 들어가십시오.”
그는 전화를 끊었다. 정중한 동시에, 굉장히 차가운 태도였다. 윤희는 멍하니 그런 민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형은 핸드폰을 책상위에 내려놓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런 그와 그녀의 눈이 당연한 것처럼 마주쳤다.
“너, 이제 가봐야 하지 않냐?”
민형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이 상황에선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치만 설거지…….”
“나중에 내가 하면 돼. 데려다줄게. 일단 나가자.”
윤희는 불안한 눈으로 민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다가 눈을 돌렸다. 침착해 보였지만 약간 피하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이었다.
“민형아…….”
윤희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나한테 말했던 거 있잖아, 니가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라도 계속 널 좋아할 자신 있냐던 거……. 그 말, 왜 물어본 거야?”
민형은 반짝 하고 그녀를 보더니 가볍게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아, 그거? 개 폼 잡았던 거라니까.”
“거짓말.”
윤희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난 너랑 사귄 후로 네 얘기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어. 너, 너희 가족, 네 옛날얘기. 나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으면 딱 거기서 끝이고 네 쪽에 전혀 화제가 옮아가는 일도 없고. 방금 전화한 분 누구셔? 가족 아니야? 뭔가, 뭔가 어색하잖아. 항상 그래. 항상 그래서, 나는…….”
더듬거리면서 열심히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민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응? 놀라서 윤희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민형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너, 오버가 심각하다? 혹시 칼슘부족?”
“뭐?”
“지방은 많은데 칼슘이 모자란 거 같다. 하여튼 애 앞에선 농담을 못한다니까. 혹시 그런 걸 기대했냐? 겉보기엔 평범한 남자였던 그가 알고 보니 불행한 과거를 숨기고 있는 비운의……, 그런 거 말이야. 훗! 하여튼 여자들이란.”
“너……, 그런…….”
윤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이죽거렸다.
“틀렸냐? 상상력 자랑하려고 그런 말 한 거냐?”
“야!”
머리에 불꽃이 팍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힘을 다해 민형의 가슴팍을 밀치고는 가방을 집어 든 채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뛰고, 뛰고, 또 뛰고, 또 뛰어,
정신없이 민형의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리고 언덕길을 뛰어내려 한길에 닿았을 때가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숨을 헐떡거리며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뒤를 가만히 기대가 맞기를 바라는 것처럼 천천히 돌아본다. 그러나,
기대는 무참히 빗나갔다.
망연히 서 있는 윤희의 입술을 비집고 울음 섞인 원망이 새어나온다.
“너무하잖아, 장민형……, 못된 자식……, 못된…….”
뭔가를 말해주길 바랬는데. 적어도 잡아주길 바랬는데.
그는 그녀를 쫓아오지 않았다.
5. 사건과 사건의 연관성, 으로 계속
Melissa Etheridge, Come To My Window
용량을 줄여서 음질이 상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 꺼지는 것보다는 낫겠죠.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9)
민형의 과거...꽤나 흥미진진할 거 같단 생각이 드는군요. 노래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