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꽤나 진부한 살인사건,

엄청 진부한 연애사건








1. 여름 MT





'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한 거야.'

기차역 앞에 서 있던 키 큰 청년을 보았을 때, 윤희는 방학을 맞이한 후 줄곧 잊고 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려버렸다.

"앗! 민형아! 일찍 왔네?"

윤희 옆에서 걷고 있던 세아가 생긋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입 끝만 슬쩍 들어올려 인사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방지단 반응을 충분히 자아낼 만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조차 이 청년에게는 매력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희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또 이번 학기 수석이란다. 저 인간이 도서관에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시험기간 내, 아니 평소에도 가장 일찍 도서관에 와서 가장 늦게 철수하는 그녀로서는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뼈 빠지도록 노력해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1등이란 자리를 어찌 저 인간은 저리도 쉽게 거머쥐는 것일까. 공부 따윈 관심 밖이란 표정을 한 주제에.

분했다, 같은 동아리 멤버라는 사실까지도.

법대와 의대 몇 명이 모여서 만든 작은 동아리 '퍼즐'. 표면상으로는 법의학을 연구한다는 게 표면상의 목적이지만, 실제 모여서 하는 일이라고는  추리소설을 돌려 읽는 게 전부였다. 그게……, 어쩌다보니 이 작은 동아리의 멤버 전원이 추리소설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작은 동아리 방에는 전공서적이나 법의학 관련서적대신 추리나 미스터리 소설들만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실정이었고, 만나서 그에 관한 수다를 떠는 게 그들 소일거리다.

윤희는 그다지 추리물이나 미스터리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선배에게 이끌려 얼떨결에 들어오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동아리 서기까지 맡게 돼 버렸던 것이다.

"오! 세아, 윤희. 왔구나."

법대 조교이자 윤희를 이 동아리에 끌어들인 애증의 인물인 경원이 민형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사법시험은 재학 중에 일찍이 패스했지만 연수원에 들어가는 걸 잠시 미루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그는 민형과 마찬가지로 똑똑한 남자의 전형이다.
훤칠한 키에 앞으로가 촉망되는 그는 유감스럽게도 유부남이었다. 부인은 엄청난 가문의 딸이란다. 남 잘 되는 게 싫은 윤희의 평소 마인드로는 미워야 할 텐데도 언제나 웃는 인상인 이 남자는 도무지 그럴 마음이 들게 만들지를 않았다. 으음, 그것도 재능이겠지.

상쾌하게 웃는 얼굴 옆에서 낮고 싸늘한 뉘앙스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집합시간은 웬만하면 지켜주면 좋겠는데."

짤막하고 건조한 톤. 약점을 잡힌 게 자신이니 달리 할 말은 없었지만, 윤희는 괜스레 분했다. 이상하게 윤희한테만은 가차 없는 민형이었다. 사실 세아가 화장에 두 시간을 소요하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은 좀 더 일찍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윤희가 찌릿 노려보자 세아는 애교 있게 어깨를 움츠려 보이다가, 민형 뒤에서 다가오는 뭔가를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상우도 늦었잖아!"

"화장실 갔다 온 거라구, 난."

뒤에서 걸어오던 상우가 손을 들어 보이면서 항의했다.

"자, 자. 그만. 가자!"

경원이 웃으면서 나머지 네 사람을 이끈다. '퍼즐'을 만든 장본인인 그는 다름 아닌 이번 여행에서 묵을 장소를 제공할 중요물주였다. 동아리 내에 법대 쪽 대표인 민형과 윤희, 그리고 의대 쪽 대표인 상우와 세아, 그리고 서클의 창립자(?)인 경원. 이렇게 다섯 사람은 이번 여름을 기해 대표MT를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숙박 장소는 다름 아닌 경원의 별장이었다.

별장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있다고 들었다. 기차를 타고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바다까지 가자, 거기엔 아담한 크기의 선착장이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묶여 있는 배를 가리키며 경원이 말했다.

"저 배를 타고 가는 거야."

"저거요?"

윤희는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저걸 타고 가라고? 너무 작잖아.

"배가 가라앉으면 어떡해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아무래도 걱정이 되시겠지."

얄미운 소리가 들린다. 윤희는 민형을 찌릿 노려봤다. 경원이 변명하듯 어깨를 움츠리며 윤희를 응시한다.

"무인도라서……. 배편이 따로 없거든."

"무인도요?"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 전혀 안 했잖아요, 선배! 이거 반칙이야!"

그러자 '몰랐어?' 하고 상우가 반문했다.

"뭐야, 상우 넌 알고 있었어?"

"우리 모두 알았는데? 그 때 얘기했잖아. 추리 마니아들한테는 안성맞춤이라고.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니냐고 다들 웃었잖아."

"어, 그랬어?"

"하여간에 집중력 부족은 알아줘야 해."

민형이 입 끝을 들어올리며 팔짱을 꼈다.

"그게 맨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4.0을 못 넘는 이유냐?"

"뭐야? 너 되게 잘났다?"

"아유, 왜들 이러셔. 즐겁게 놀러 가는 마당에."

뾰족해지려는 법대생들간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세아가 애교 있게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어가듯 경원에게 묻는다.

"운전도 선배가 해요?"

"아니, 저 분이……."

경원이 뒤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자가 눈앞에 보인다. 남자는 말없이 고갯짓으로만 윤희들을 배로 이끌었다. 전원이 배에 오른 걸 확인한 그는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는 아무래도 낡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럭저럭 무리 없이 섬을 향해 나아갔다.

"형. 왜 하필 이런데 별장을 지었어요?"

멀어지는 선착장을 바라보다 상우가 물었다.

"아니, 섬 전체가 처가 거야. 이젠 우리 게 됐지만."

"우와! 섬 하나를 갖고 있다고요?"

상우가 혀를 내둘렀다. 일행 다른 사람들도 무언으로 그의 반응에 동조한다. 세아가 배 멀미를 하는지 괴로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이면 배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저기, 형수님은 어디 계세요?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요?"

상우가 또 물었다. 경원은 머쓱하게 웃었다.

"실은……, 먼저 가 있어."

"오옷!"

남자들이 모두 눈을 번뜩였다. 혹시나 했는데 말로만 듣던 경원의 부인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잣집 딸인데다 굉장한 미인이란 소문이었다.

물론 미인이라면……, 세아도 만만치는 않다. 희고 작달만한 얼굴에 동자가 큰 눈, 코는 우뚝하고 목이 길다. 의대에 다닐 정도로 머리도 좋은 그녀는 재색겸비, 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윤희는 파리한 얼굴의 세아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별 볼일 없는 여자는 나뿐이야? 윤희는 평범한 자신이 이럴 때면 영 한스러웠다.

세아와 민형이 사귄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 같은 선남선녀 커플일 것이다. 윤희의 사적인 견해로는 명랑하고 성격 좋은 세아 쪽이 많이 아까웠지만, 외모 만이라면 민형도 그리 뒤지지 않는 것이다. 영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섬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선착장에 그들을 내려놓자마자,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하고는 바로 떠나 버렸다.

"가자."

경원의 말에 따라 다섯 사람은 별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모래가 푹푹 밟혔다. 신발 바닥에 껄끄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모래사장을 지나자 작은 숲이 있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고유의 소금기 어린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은 짐승이 나무에서 나무로 움직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얼마나 남았어요?"

윤희는 모래가 들어간 신발 때문에 발바닥이 무척 아팠지만, 투덜대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그렇게만 물었다.

"거의 다 왔어."

경원이 말하자마자, 갑자기 확 앞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윤희는 눈을 크게 떴다. 앞에는 마치 외국에서 고스란히 가져온 것 같은 별장이 있었다. 크고 호화로운 느낌은 아니지만, 흰 벽이 화사하고 품위 있다.

별장 앞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서혜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일순 모두 말을 잃었다.

정말 미인이었다. 섹시한 세아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소매 없는 셔츠를 입은 팔은 인형처럼 가느다랗고 무릎길이의 스커트 아래로 뻗어 나온 다리도 미끈하다. 키는 크지 않지만 날씬하고 균형 잡힌 체구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별 동요 없는 소리로 민형이 말하자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아, 저기……, 형수님? 바, 반갑습니다!"

상우 놈은 말까지 더듬는다. 서혜 씨가 웃었다.

"우선 방에 가서 짐을 푸세요. 다들 수영복은 가져오셨죠?"

"무, 물론입니다!"

상우가 헤벌쭉 웃었다.

윤희는 민형을 힐끗 봤다. 기분 탓일까 그의 표정이 부드럽다.

별장에 들어서자 복도 양 사이드로 문이 연달아 보였다.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자, 2층에도 방이 늘어서 있다.

"방은 네 개예요. 각자 원하는 방을 쓰세요. 더블베드니까 둘이서 한방을 써도 되지만, 방은 넉넉하니까 혼자 쓰는 게 편하겠죠?"

서혜 씨는 생긋 웃고는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각자 방 하나씩을 잡았다. 방방마다 욕실까지 붙어 있는데다가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경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멋스러워, 윤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윤희는 자신이 살집이 있는 편이라 생각하고 있어, 가급적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감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다. 사실 이런 류의 수영복은 약간 통통하면서 볼륨 있는 그녀의 매력을 반감시키는 디자인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그런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 입었니?"

밖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대답했다.

"응, 들어 와."

세아는 정말 예뻤다. 가운데가 뚫린 섹시한 디자인의 원피스 수영복이다. 비키니보다 더 야시시한 느낌이었다. 윤희는 위에 티셔츠를 걸쳤다. 세아를 보고 있으려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재촉하는 세아에게 팔을 잡혀 윤희는 복도로 나왔다. 밖에 나와 있던 두 남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아를 응시한다. 입밖에 내서 말은 안 했지만, 수영복의 대담함과 세아의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몸매의 화려함에 눈이 부신 모양이다. 윤희는 완전 세아의 들러리, 아니 찬밥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1층에 내려가자 경원이 있었다. 와이프는 나중에 올 거라며 앞장을 선다.

별장을 나가, 아까 지나온 숲을 걸었다. 위에 티셔츠는 걸쳤지만, 몸매에 왠지 자신이 없는 윤희는 드러난 다리가 무척 신경이 쓰였다. 밑에 긴치마라도 두를 걸 그랬나 봐. 다리 휜 게 다 보일 텐데.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아랑곳없는 듯 나머지 사람들은 즐겁게 웃으며 가고 있었다. 세아는 양쪽에 상우와 민형, 두 남자를 거느린 채,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다. 윤희는 한숨을 참으며 계속 걸었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린 걸까? 경원이 윤희의 오른편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피곤하니?"

"아뇨, 선배."

윤희의 딱딱한 대답에 경원이 피식 웃었다.

"민형이 말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신경 곤두세우지 마. 저 자식은 원래 저렇게 시니컬하잖냐. 나도 가끔 패 주고 싶을 때가 있거든."

"선배도요?"

윤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헤, 믿을 수 없어."

"난 뭐 성인군잔 줄 아냐? 저 놈, 원래 선후배 같은 거 모르잖아. 게다가 좀 잘났냐? 보고 있으면 참 세상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어서 원."

"재학 중에 고시 패스한 선배가 그런 말 하니까 넘 안 어울려요."

"쑥스럽다 임마. 그건 순전 운이었다니까 그러네?"

"몰라욧. 선배가 더 미워."

해변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까 배를 타고 온 쪽과는 반대편이다. 모두들 물고기 마냥 바다로 뛰어 들어갔다. 바다에 잠기자, 줄곧 신경 쓰이던 다리도 물에 감춰졌고 윤희는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걸 느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이어져 있다. 눈에 마치 프리즘을 투영한 듯한 햇빛이 색을 흩뿌리며 비쳐 들어왔다. 윤희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저쪽에서 민형이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헤엄치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미끈하게 균형 잡힌 갈색 몸. 강인해 보이는 한편으로 부드럽게 뻗어 있는 등 근육을 보고, 윤희는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너, 정말 지치지도 않는구나."

상우가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윤희는 웃었다.

"이 정도야 보통이지."

"우리도 슬슬 저쪽으로 가는 게 어때? 눈꼴시어 못 봐주겠다, 정말."

상우가 가리킨 쪽에는 세아와 민형이 파라솔 아래 누워 있었다. 어쩐지 연인들의 투 쇼트를 보는 것 같다. 세아가 뭔가 얘기를 하자, 민형은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그림 좋다?"

상우가 손을 흔들었다. 세아가 당연하지~ 하며 마주 손을 흔들어 보인다. 민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힐끗 보고 윤희는 시선을 뗐다. 말없이 상우를 따라 두 사람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뭐 마시고 싶은 분?"

"……."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서혜 씨가 서 있었다.

섹시한 느낌은 아니지만, 청순한 분위기의 수영복을 입은 그녀는 그러나, 그래서 더욱 눈부신 인상이다. 다른 데는 전부 날씬한데 가슴은 풍만해서, 그 언밸런스함이 묘한 색기를 자아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서혜 씨가 물었다.

"경원 씨, 어디 있죠?"

상우도 서혜 씨를 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형요? 저쪽에 있었는데……, 아! 오네요!"

파도 저편에 경원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2. 무서운 이야기





어느 새 점심시간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배가 꼬르륵 비명을 질러댄다.

"배 많이 고프죠? 햄에그 샌드위치를 만들었어요. 좋은 걸 준비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저녁에는 맛있는 걸 준비할 테니까 양해해 주세요."

서혜 씨는 내내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늦은 모양이었다. 윤희는 재빨리 그녀에게 말했다. 많이 미안하다.

"앞으론 혼자 고생하지 마시고, 저를 불러주세요."

"고마워요."

서혜 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샌드위치는 정말 맛있었다. 모두들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경원이 말했다.

"다 먹었으면 따라 와. 보여줄 게 있어."

다들 경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윤희는 식당에 남아 있었다.

"안 가요?"

서혜 씨가 물었다. 윤희는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설거지할게요. 혼자 다 하시려면 힘들잖아요."

"괜찮아요. 내일부터 부탁할 테니까 얼른 가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대충 짐작은 가는데, 저한테는 영 관심 밖의 얘기라서요."

서혜 씨가 문을 응시하며 웃는다. 윤희는 그녀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을 따라갔다.

경원을 따라 들어간 방은 멋졌다. 천장이 높은 방은 다크 브라운의 책장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들 입을 딱 벌렸다.

"선배, 이거……."

"서재야. 멋지지? 추리소설도 많아."

경원은 싱긋 웃었다. 이 동아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으로 꼭 추리소설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윤희는 로맨스 마니아였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한테 말한 적은 전혀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웃음을 살 게 눈에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형은 이미 책 한 권을 꺼내들고 있었다. 이미 절판된 E.S 가드너의 소설인 듯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책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윤희도 책장을 둘러보다 눈에 띄는 소설을 발견했다. '월장석'의 1페이지를 펼친 그녀는 이내 빠져 들어갔다.







저녁은 연어 샐러드와 크로켓이었다. 어느 쪽이나 입안에서 살살 녹아  내릴 정도의 맛이어서 윤희는 기분이 좋아졌다.

"대단한 서재던데요, 형. 희귀본이 너무 많아서 놀랬어요."

"손님들이 오셨을 때 비라도 내리면 곤란하니까."

경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근데 눈치챘냐? 저 서재의 잠금장치."

"잠금 장치가 있어요?"

"몰랐구나. 나중에 다시 가게 되거든 잘 봐. 반회전 타입인데, 전문가도 열기 힘들 정도래. 안에서 잠그면 거의 완전 밀실이 될 걸?"

"책을 훔쳐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빤 이런 섬에……."

서혜 씨가 한숨을 쉬었다.

"아빠?"

"아, 저 서재는 우리 아버지가 이이한테 선물한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추리소설광이시거든요?"

과연.

"그치만 전 추리소설은 싫어요."

서혜 씨가 말했다. 상우가 물었다.

"왜요. 재밌잖아요?"

"사람 죽는 얘기가 태반인데 뭐가 재밌어요? 범인은 보나마나 제일 아닐 것 같은 사람이겠죠. 안 봐도 뻔해요."

반론 못할 사실이다. 서혜 씨는 상냥하게 눈을 누그러뜨렸다.

"전 로맨스가 좋아요."

"연애소설요?"

"네. 그 비슷한 거."

뻔한 얘기라는 점에서는 어차피 마찬가지일 텐데. 윤희는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반가웠다.

"서혜 언니는 경원 선배 어디가 좋으세요? 언니가 아까워요."

여지껏 침묵을 지키던 세아가 붙임성 있게 물었다.

"아하하."

경원과 서혜 씨는 얼굴을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서혜 씨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고, 경원은 괜스레 와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이, 무서운 얘기 어때? 돌아가면서."

식사가 끝나 모인 응접실에서 경원이 말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취미들이 모였으니 당연한 건지 모른다.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얘기도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윤희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눈을 빛냈다. 사실 윤희 자신도 겁쟁이이면서도 무서운 얘기를 정말 좋아했다. 또 시작인가. 밤에 화장실도 혼자 못 가게 되는 거 아냐? 그렇지만 듣고 싶었다.

다들 경쟁이라도 하듯 무서운 얘기를 시작했다. 달그락 소리만 들려도 비명이 입에서 터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을 때, 계속 조용히 있던 서혜 씨가 입을 열었다.

"저도 하나 할게요."

"와!"

전혀 그런 얘기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서혜 씨의 말에 모두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봤다.

"이 섬에 대한 얘기예요."

"이 섬요?"

"네. 무인도잖아요? 이런데서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무서운 이야기에는 가장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곳이잖아요?"

다들 숨을 삼켰다. 추리소설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가장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의심스런 눈길에는 아랑곳 않고 서혜 씨는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섬도 무인도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 거 모르셨죠?"

"아, 그래요?"

"네. 꽤 오래 전에 이 섬에 한 남자와 그 가족이 살았대요. 남자는 아마 예술가였다는 거 같아요. 부인하고 딸, 세 식구였다는데……."

서혜 씨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어느 날 이 섬에서 연기가 나는 걸 발견한 어선이 섬에 닻을 내렸지요. 그리고 그들의 집을 발견했어요. 집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전소된 잔재 속에서 발견한 건 불에 탄 부인과 딸의 시체,"

서혜 씨는 한 호흡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해안에는 칼을 목에 꽂은 채 죽은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어서 더욱 소름끼쳤다.

"남자의 목에 꽂힌 칼에서는 가족 세 사람의 혈흔이 검출되었어요. 경찰은 남자가 나머지 둘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이 섬에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은……."

그리고 서혜 씨는 생긋 웃었다.

"덕분에 이 섬의 가격은 폭락했고, 저희는 거의 헐값으로 이 섬을 살 수 있었답니다. 저희로선 운이 좋았단 이야기죠, 뭐."

"아하하, 넘 재밌네요, 아하하!"

상우가 오버하며 웃어댔다. 하지만 그 얼굴이 몹시 굳어져 있는 걸 보고 윤희는 고소했다. 그녀 역시 파랗게 질려 있으리라. 다른 곳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그리 무섭지 않았으련만, 바로 그들이 묵고 있는 섬에 나온단 유령 얘기는 아무래도 달갑지 않다. 민형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도 모두 굳어 있다. 그만은 언제나처럼 별로 변화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형은 그런 무표정 그대로 입을 열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서혜 씨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화가였을 겁니다. 작품도 본 적이 있어요."

"야아, 나 농담인 줄 알았단 말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아의 얼굴은 울상이 돼 있었다.

상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책을 읽다 말았거든요, 선배? 저 책 좀 봐도 될까요?"

"아, 그래 그래."

경원이 찔린 듯 대꾸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혼자서 무섭지도 않은 걸까? 상우는 가버렸다.

더 이상 무서운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경원과 서혜 씨에게로 옮아갔다. 훤칠한 경원과 청순한 서혜 씨의 두 사람은 정말이지 최고의 커플처럼 보였다.

"어머!"

웬일인지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세아가 와인 잔을 떨어뜨렸다. 흐린 살구색 원피스가 자주빛으로 물들어간다.

"괜찮아?"

옆에 앉아 있던 민형이 드물게 상냥한 태도로 세아에게 냅킨을 건넨다. 세아는 그것을 받아 옷에 얼룩진 와인 즙을 닦아냈다.

"어떡하죠? 카펫이 젖었어요."

"같은 자주색 카펫이니까 상관없어요. 그건 그렇고 원피스, 어쩌죠? 갈아입을 옷 가져 오셨어요?"

"예. 빨면 지는 소재니까 괜찮을 거예요. 저, 이것 좀 버릴게요."

세아는 와인 즙이 묻은 냅킨을 들어 보였다.

"여긴 휴지통이 없어요. 부엌에 있는데……."

"다녀올게요."

세아는 황급히 일어서서 응접실을 나갔다.

"휴지통이 말이죠. 원래는 이 방에도 있었는데,"

그러더니 서혜 씨는 킥킥 웃었다.

"작년에 경원 씨가 곤드레가 되서요, 부쉈……."

"앗!"

경원이 다급하게 그녀를 가로막았다.

"정말 사람을 망신시켜도 유분수지."

서혜 씨는 입을 막은 채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세아가 돌아오자, 경원은 이제 얘기를 끝내자고 말했다.

"아침은 8시 반에 차릴 거야. 늦는 사람한테는 아침 없다."

"선배 방은 어디예요?"

"아까 서재 바로 옆방이 울 와이프 방이고, 그 옆이 내방이야."

"어, 같이 안 자요?"

"부부의 프라이버시다?"

경원은 다소 귀찮은 듯 대꾸했다.

정리해 보니 방은 이런 순서였다. 현관에서 바로 오른쪽에 경원의 방, 그 옆이 서혜 씨 방, 그리고 서재가 있다. 현관 왼쪽에는 식당, 그리고 응접실. 식당과 응접실은 이어져 있는 구도지만, 복도 쪽에도 문은 있다. 서재 앞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민형과 세아는 올라갔다.  두 사람을 따라가려 하다가 윤희는 갑자기 생각해냈다.

아직도 상우가 서재에 있었다.







3. 불면증





상우는 서재에 있었다. 책에 빠진 나머지, 윤희가 들어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입에는 풍선껌이 들어 있었다. 담배를 끊은 후로, 껌을 입에 달고 사는 그다.

"상우야, 이제 그만 자."

"어? 벌써……."

상우는 시계를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간다?"

"엇, 잠깐. 윤희야."

"응?"

"이거 진짜 잠금 장치더라?"

상우가 가리킨 문에는 정말로 튼튼해 보이는 금속판이 붙어 있었다. 문을 닫고 잠금 장치를 작동시키자, 금속판이 반원을 그리며 움직여 문과 벽이 일체화됐다. 잠금장치 외에 다른 자물쇠도 있었다. 즉, 이중이다.

"근데 말야, 좀 이상해."

상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엔 아무 것도 안 달았어."

"어? 정말?"

창문은 아주 흔한 반월형의 잠금 장치였다.

"게다가……."

상우는 천장을 가리켰다. 환기용 창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그 창을 본 윤희는 거기에는 심지어 반월형 자물쇠조차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기사 10cm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 창에 자물쇠를 단다는 것도 좀 우습기는 하다.

"이래서야 밀실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상우의 입에서 풍선이 크게 부풀어 나온다.

"뭘 그런데 신경 쓰고 그래."

"추리 마니아가 만드신 거라니까 그러지."

상우는 아직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윤희는 웃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상우야. 너, 세아 좋아하니?"

상우는 몸을 움찔 떨더니 고개를 천천히 내려 윤희를 쳐다봤다.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시선을 돌린다.

"어떻게 알았어?"

"당연히 알지. 항상 세아만 보고 있잖아, 너."

"……."

"내가 대신 떠봐 줄까?"

"됐다."

모처럼 친절을 베풀까 했는데 깨끗이 거절당했다.

"그런 건 직접 말하는 거야."

"제법인데?"

"쳇."

상우는 껌을 종이에 싸서 서재 입구에 있는 휴지통에 버렸다.

"졸려 죽겠다."

"아까부터 가재니깐."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올라가며 윤희가 물었다.

"서혜 씨가 한 얘기 진짤까?"

"글세, 꾸며낸 얘기는 아닌 것 같던데? 옷, 진짜 유령이 나타난다면 재미있겠다! 아, 잘 자라? 유령 보면 꼬옥 연락하고?"

상우가 눈을 번뜩인다. 정말 이상한 성격이야. 윤희는 한숨을 쉬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왜 이러지?'

무지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윤희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였다. 무서워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윤희는 침대 위에서 몇 번을 구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왔다. 아마 저기가 세아 방이었던 것 같은데……. 윤희는 똑똑 문을 두들겼다. 응답이 없다. 다시 똑똑 노크소리를 내보았다.

"세아야……."

갑자기 문이 열렸다.

"헉!"

윤희는 낮게 비명을 질렀다.

"뭐야, 오밤중에."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음성이 한참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민……형아……."

세아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건 민형의 방이었던 모양이다.

"미, 미안. 세아 방인 줄 알았어."

윤희가 당혹감에 말까지 더듬거리면서 몸을 돌렸을 때.

"왜 그래?"

민형에게 어깨를 붙들렸다. 윤희는 울상이 되어 몸을 돌렸다.

"아니……. 아무, 것도……."

"그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표정이냐?"

퉁명스런 말투는 과연 민형다웠다. 하지만 여느 때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표정을 풀면서 그는 윤희를 보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좀……."

민형 앞에서 무섭단 말을 하는 건 죽어도 싫다.

"잠이 안 오나 보다?"

"으응."

"니 방 어디냐?"

"……응?"

"혼자 뒀다간 울 것 같은 표정이라 그래. 방 어디야?"

"저……기……."

윤희가 가리킨 방에 민형은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잠이 올 때까지 같이 있어주면 되는 거냐?"

"……어? 으응."

윤희는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완전 애구나, 너."

고개를 들자 민형이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 말 할 거면 가!"

"호오, 정말?"

"그래."

"알았어. 후회하지 마라."

민형은 가차없이 방에서 나가버렸다. 윤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방안에 서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봤다.

"……헉!"

문 바로 앞에 민형이 서 있었다. 윤희를 보더니 슬며시 웃는다.

"솔직히 말해 봐. 너 무서워서 그런 거지?"

"응."

윤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긍정의 대답을 했다. 민형이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으면서 윤희를 보고 있다.

"같이 잘래?"

"뭐어?"

"무섭다며. 같이 자주겠단 소린데?"

"미쳤니? 뭘 믿고!"

"헤이, 혹시라도 내가 널 덮칠까 봐 그러냐?"

"……."

"안심하셔. 반항하는 여자를 덮치는 건 취미가 아닌데다, 한번 안 꼴리는 여자는 다 벗겨 안고 자도 끝까지 안 꼴리니까."

이를 악무는 윤희를 보고 민형이 키득키득 웃었다. 윤희는 민형을 노려보다가 결국 순순히 힘을 빼고 말했다.

"좋아. 여기 있어 줘. 부탁할게."

"오케이."

민형은 쌈박하게 대답하고 바닥에 누웠다. 윤희도 침대에 몸을 눕혔다.

불을 껐지만 창 밖에서 들어온 달빛이 방안을 비쳐 나름대로 환했다.

윤희는 자신이 제정신인가 곱씹어보았다.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밤중에 외간 남자를 방에 들이다니. 그것도 뻔돌이에 왕싸가지, 날라리로 유명한 장민형을 말이다. 반항하는 여자를 덮치는 건 취미가 아니라고 했지만, 늑대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법.

"거짓말이야."

민형이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뭐?"

윤희가 꿈틀했다.

"서혜 씨 얘기. 이 섬은 전에 사람이 살았던 적도 없는 걸. 하물며 유령이라니……. 아까 둘이 말을 맞춰뒀을 뿐이야. 너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 거 아니냐? 이 말 저 말 다 믿고, 이 험한 세상 어찌 살겠어?"

"뭐어?"

윤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베개를 집어 민형에게 던진다. 그가 가볍게 몸을 피하자, 베개는 뒤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윤희는 또 하나의 베개를 집어 민형에게 돌진했다.

"너 죽었어?"

분노가 가열되어 끓어 넘쳤다. 내가, 내가 얼마나 쫄았는데!

팍!
팍!
파박!

"야, 야! 옆방 사람 다 깨겠다……!"

민형은 손으로 윤희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다급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에 윤희가 멈칫 동작을 멈춘 사이, 민형은 그녀의 손에서 베개를 빼앗아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어?"

윤희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민형에게 팔을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

"아……."

민형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근.
심장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두근.
침이 목에 말라붙어 있는 기분이다.

두근.
등 근육이 빳빳한데,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어.

"……."

순간, 민형의 입술이 다가온다는 착각이 들었다.

10cm, 5cm, 3cm…….

위잉~

바로 그 때였다. 그들 사이로 불청객이 '한 마리' 날아들어 온 것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린 윤희와 순간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민형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불청객, 모기는 더할 나위 없이 가증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들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후."

입술을 한번 지긋이 깨문 민형이 손을 휙 휘두르자, 거짓말처럼 소리가 멎는다. 윤희는 입을 딱 벌렸다. 천천히 민형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는 꽃다운 인생, 씨도 제대로 뿌리지 못하고 즉사한 모기의 가련한 시체가 들어 있었다. 민형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티슈로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툭, 말을 뱉었다.

"자자."

"어? ……응."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밖에서 부슬부슬 빗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윤희는 주섬주섬 자리에 누웠다. 민형도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베고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는 듯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좀 전과는 다른 이유로.

"저, 민형아……."

한참을 침대에서 뒤척거리던 윤희는 결국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

대꾸가 없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민형을 들여다봤다.

규칙적인 숨소리. 어느 새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Z부호를 위에 몇 개나 그려 넣고 싶을 만큼 평온히 잠든 얼굴이 얄미울 정도다.

윤희는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4. 서재의 그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샤워를 하며 몸에 쌓인 피로를 지워내자, 아무래도 좋단 기분이 들었다.

새벽까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잠든 윤희가 눈을 떴을 때, 민형은 어제와 같은 자세로 바닥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눈을 뜬 그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섭섭한 기분과 다행스런 기분이 교차되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윤희는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안녕하세요?"

식당에 들어선 윤희는 웃으면서 서혜 씨에게 말을 걸었다. 식사 준비에 한창이던 서혜 씨가 여느 때의 웃는 얼굴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머, 잘 잔 모양이네. 그 방엔 유령 안 나왔나 보죠?"

"너무해요!"

윤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내밀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거짓말을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하시면 어떡해요?"

"믿은 사람 잘못이지. 내가 첨에 그 얘길 해 줬더니 민형 씨는 눈 하나 까딱 안하고 거짓말이라고 했는데."

"그 인간은 원래 그래요. 뭣하나 곧이곧대로 믿는 적이 없다구요."

퉁명스런 말에, 서혜 씨가 빙그레 웃었다.

"민형 씨한테 관심 있어요?"

"네?"

윤희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저 걔 싫어해요."

서혜 씨는 고개를 기울이며 계란 스크램블을 접시로 옮겼다.

"미움도 관심의 표현이잖아."

"그런가요?"

"경험담이니까 맞아요. 나도 처음에 경원 씨 무지 싫어했었는걸?"

"정말요?"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당사자인 민형과 상우가 나타나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팔을 쭉 펴면서 들어오는 품이 어제 일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다. 윤희는 다시금 민형이 얄미워졌다.

이윽고 경원도 식당에 들어왔다. 눈곱이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세아는?"

"방에 없던데?"

상우가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같이 내려가려고 노크해 보니까 너도 세아도 둘 다 방에 없길래 같이 내려온 줄 알았는데? 뭐야, 밖에 나갔나?"

"방금 봤는데 현관문은 잠겨져 있었는데?"

경원이 말했다.

"서재에 갔나 봐요. 제가 다녀오죠."

상우가 일어난다. 경원이 같이 가겠다고 했고, 두 사람은 식당을 나갔다.

윤희가 서혜 씨를 도와 음식을 나르고 있을 때.

"세아야!"

"이세아!"

"안에 있니? 세아야! 문 열어!"

복도에서 두 남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형이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다. 윤희도 그 뒤를 따랐다.

"왜요! 왜 그래요!"

"서재 문이 안 열려. 안에서 잠궜나 본데?"

"세아, 거기 있는 거 아니에요?"

"대답이 없어."

윤희의 질문에 경원이 고개를 저었다. 민형이 물었다.

"형, 방 열쇠 안 갖고 계세요?"

"특수한 잠금장치잖아. 그게 작동하면 안에서밖에 못 연다구."

"세아야! 이세아!"

상우가 쾅쾅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윤희는 불안의 그림자가 지배하는 걸 느끼며 양손을 꼭 모아 쥐었다.

"문을 부수는 게 어때요?"

어느 새 따라온 서혜 씨가 말했다.

"아뇨. 일단 밖에 나가서 창 쪽을 보고 오겠습니다."

민형이 침착하게 말했다.

"어차피 부수려면 유리창이 편하니까요."

"나도 같이 가!"

윤희가 말했다. 손바닥에 땀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민형을 따라 윤희는 달렸다. 현관문은 확실히 꽉 잠겨져 있었다. 안에서 여는데 열쇠는 따로 필요 없어서 버튼을 누르니 문이 바로 열린다. 밖으로 나가 모서리를 돌았을 때, 민형이 갑자기 멈췄다.

"잠깐."

"응?"

비에 젖은 흙 위로 뚜렷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선을 그리며 이어진 발자국은 서재의 창문에서부터 시작되어 경원의 방까지 이어져 있었다.

"세아 건가?"

"세아가 서재 창문으로 나와서 경원 형 방에 들어갔다는 거야? 앗, 잠깐! 밟지 마!"

"어?"

윤희는 무심코 발자국을 밟으려던 몸을 뒤로 물러 세웠다. 민형을 따라 서재를 걸어가는 동안에 경원과 서혜 씨의 방을 창문을 통해 들여다봤지만 거기에는 당연히 세아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서재뿐인가.

가슴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불길하다.

윤희는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을 움켜쥐고 무작정 걸었다. 서재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 불길한 감각이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민형은 멈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윤희도 몸을 경직시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에서 내려온 끈에 대롱대롱 매달린 여자의 몸…….

세아였다.

목을 꽉 조인 끈 위로 격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천으로 만든 마리오네트처럼 슬프고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안타깝게 부릅뜨고 있는 그녀의 눈…….

"아……."

윤희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민형이 뒤를 돌아보고 윤희에게 다가왔다.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은 채 파랗게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부축해준다.

"괜찮아?"

"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세아……, 세……, 어떻……."

말이 이어지지를 않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민형의 옷자락을 간신히 붙들었다. 더 이상은 움직일 수도 없다. 민형이 팔을 뻗어 윤희를 안았다. 힘을 주어 끌어안지 않고 가볍게 기대게만 하고는 진정시키려는 듯 손끝으로 등을 어루만져 준다. 윤희는 눈을 꾹 감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미……, 미안."

윤희는 몸을 일으켰다.

"먼저 돌아갈래?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민형은 서재 쪽을 보고 있다. 윤희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가."

"무섭잖아."

"나랑 같이 가야 나중에 네가 의심을 안 받을 거야."

민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렇군. 미안하지만 좀 부탁할게."

발자국은 경원의 방과 인접한 창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그걸 보면서 두 사람은 창으로 다가갔다. 침착한 민형과는 달리 윤희는 발을 떼는 것조차 버겁고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도통 억제할 수가 없었다.

민형은 창으로 손을 뻗었다.

"잠겨 있는데? 창을 깨야겠어."

그는 꽤 묵직한 돌을 집어 들고는 유리창에 힘껏 부딪쳤다. 세 번 정도 반복하자 유리가 갈라지며 깨져나갔다. 날카롭게 갈라진 틈으로 손을 넣은 민형은 반달형 자물쇠를 비틀어 겨우 창을 열었다.

"가자."

민형은 가뿐하게 점프하더니 창으로 올라섰다. 민형처럼 쉽게 움직이는 건 도무지 불가능해 윤희는 끙끙거리며 그의 손을 잡고 겨우 서재에 몸을 들였다. 서재에 몸을 들이고 나서도 그녀는 바닥만 응시했다. 고개를 들면 끔찍한 뭔가가 눈에 비칠 것만 같아서.

"창은 죄다 잠겨 있는데."

민형의 말대로 방에 세 개 있는 창의 잠금쇠는 모두 꽉 잠겨 있었다. 문은 특수 잠금장치가 강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잠겨 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밀실.

"세아야! 민형아! 안에 있어?"

쾅쾅 소리와 함께 밖에서 상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문 열게. 기다려."

"세아는!"

"세아도 여기 있어."

세아.

그 말에 이끌린 것처럼 윤희는 뒤를 돌아보았다. 목을 감싼 비닐 끈……, 검붉게 피가 몰린 얼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뜬 눈…….

세아가 보였다.

예쁘고, 애교 있고, 항상 웃고 있던 그녀.

그런데, 지금은.

죽었어.

시체가 돼서 여기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문이 열리는 소리, 그와 더불어 누군가의 외침을 희미하게 느끼며 윤희는 바닥으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5. 증언







윤희는 눈을 떴다.

"괜찮아요?"

가장 먼저 보인 건 서혜 씨의 얼굴이었다.

"세아……."

입술을 깨물었다. 꿈이 아니다. 분명히 눈으로 보았다.

세아는 죽었어.

"괜찮, 아요?"

서혜 씨도 더듬거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딴 사람들은요?"

"아래층에 있어요. 좀 더 누워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윤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내려갈게요."







식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침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입맛이 있을 리가 없다. 눈앞에서 사체를 목격한 지금.

민형은 손을 깍지 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윤희를 힐끗 보는 듯했지만 이내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생각 속으로 돌아간다. 그 표정은 지나칠 만큼 침착했다. 조금 얄미울 법도 하련만, 윤희는 이제 그럴 기운조차 없었다.

빈 의자 하나.
세아가 앉았던 자리다.

"경찰을 불렀어."

경원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이미 죽어 있어서……. 아마 죽은 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자살……한 건가요?"

민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윤희를 보았다. 맑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동자.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옆에서는 상우가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고 있다. 대답한 건 역시 경원이었다.

"안쪽에서 모두 잠겨 있었어. 자살……이 아닐까."

"자살이라고요?"

상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콰당 소리를 냈다.

"세아가 자살할 이유가 어딨어! 이번 학기 시험 잘 쳤다고 걔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 이런데 와서 자살할 이유가 걔한텐 없다고요! 세아는, 씨발, 세아는……!"

상우는 울음 섞인 외침을 토해냈다.

"살해당한 거라구요!"

그는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경원이 상우 옆으로 달려가 어깨를 붙들었다.

아니야.

윤희도 알고 있었다.

자살이, 아니야.
자살일 리가 없어.
발자국이 있었던 걸.
누군가, 누군가, 아마도 세아를 죽인 사람의 발자국.

자살일 리가 없어.

"자살일 리가 없어요."

그 때, 민형의 목소리가 식당 안을 나직이 울렸다.

"무슨 소리야?"

경원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피가 몰려 있었어요.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구요."

"응?"

윤희는 민형을 보았다. 민형은 이마를 가볍게 문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세아 자신이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면 아마도 경동맥과 척추골 동맥이 압박돼서 뇌로 혈액이 도달하는 걸 막아버렸을 겁니다. 당연히 머리로 피가 몰릴 일이 없는 거죠. 한데 세아의 얼굴은 검붉게 울혈 되어 있었어요. 세아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였을 뿐이죠."

식당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식당 밖에서 중년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입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경찰수첩을 품에서 끄집어 내보였다.

"정이원이라고 하오. 신고 받고 왔소만."







한 떼의 형사들에 의해서 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짐은 샅샅이 검사 받았고, 구석구석 그들의 손이 닫지 않은 곳이 없다.

"얘기를 듣고 싶은데."

멍하니 앉아 있는 윤희들에게 정 형사가 껄렁한 투로 말을 꺼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하지. 우선 유경원 씨부터 나오시오."

"예."

경원이 힘없이 일어섰다.

경원과 정 형사가 나간 자리에는 두 사람의 다른 형사가 날카로운 눈을 돌린 채 나머지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아저씨, 맘에 안 들어."

민형이 불쾌한 소리를 냈다.

"말투가 너무 싸가지 없잖아?"

"너도 만만치 않아."

윤희는 도저히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형은 그녀를 노려보더니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경원이 돌아오자, 서혜 씨가 불려나갔다. 서혜 씨도 금세 돌아왔고, 이어서 민형의 차례였다.

민형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물어볼 내용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윤희와 함께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가 불려가 있는 동안, 윤희는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발자국.

발자국이 있었다.

그 발자국은 서재의 창에서 경원 선배 방의 창문까지 이어져 있었어.

……경원 선배 방 창문까지.

세아가 살해당한 것이 맞다면 범인은 혹시,
경원 선배……?

윤희는 입술을 깨물며 경원을 힐끗 보았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 저 남자가 세아를 죽였다고? 말도 안돼. 하지만, 아무래도…….

그 때 민형이 돌아왔다. 윤희를 보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부른다.

"최윤희, 너 차례란다."

"아, 응."

윤희는 끄덕이고 복도로 나왔다.







"최윤희 씨?"

"예."

"거기 앉아요."

정 형사는 침대를 가리켰다. 이 방은 다름 아닌 경원의 방이었다. 2층 방과 마찬가지 형태로, 창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책상을 앞에 둔 채 정 형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 아침에 뭘 했죠? 자세히 말해 주쇼."

윤희는 처음부터 전부 이야기했다.

발자국. 창의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는 것. 문의 특수 잠금장치. 그리고 세아의 시체를 보고 정신을 잃었던 것까지.

"서재 창은 확실히 잠겨져 있었단 말이죠?"

"예."

"음, 좋아요. 장민형 씨가 깨뜨린 창문이 어떤 거였는지 기억합니까?"

"예. 맨 오른쪽의, 가장 서재 쪽에 가까운 창문이었어요."

"흐음. 확실히 그 오른쪽 창도 잠겨져 있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깼겠죠."

"당신이 잠겨져 있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느냐는 말이오. 창을 확인한 것도, 부순 것도 장민형 씨 아닙니까. 아가씨 앞에서 수작을 부린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요……."

"장담할 수 있소?"

정 형사는 쿡쿡 웃었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오, 그건?"

"……네."

형사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발자국을 본 건 언제가 처음이오?"

"오늘 아침요. 근데 정말로 민형이……."

"벌써부터 의심하는 건 아니오. 다만 우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하니까……. 그리고 아가씨 반응도 보고 싶었고."

"네?"

"별 거 아니오. 이걸로 끝냅시다. 김상우 씨를 불러 주시오."

윤희는 그 말대로 순순히 문을 향하다가 갑자기 돌아섰다.

"형사 님. 저, 자살일 가능성은 없나요?"

"없소."

정 형사는 잘라 말했다.

"교살의 흔적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네……."

윤희는 맥이 풀려 방을 나왔다.

세아는 살해당했다.

그것은 그들 중에 범인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방에 돌아간 윤희는 상우에게 가라고 말하고는 민형 옆에 주저앉았다. 민형이 던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형사 아저씨가 뭐라든?"

"그냥 아침에 뭘 했나……. 아!"

윤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가 창이 잠겨져 있는 것처럼 연기한 게 아니냐는데?"

"바보 자식 같으니."

민형은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창이 열려 있어도 어차피 마찬가지야. 발자국이 내려온 건 왼쪽 창이었는걸. 오른쪽 창에서 나갔다면 그쪽에 발자국이 남았겠지."

"발자국?"

경원이 물었을 때, 문이 열리고 마지막으로 조사를 받으러 갔던 상우와 정 형사가 함께 돌아왔다. 정 형사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대강 사정을 알았소. 아! 유경원 씨. 잠깐 이쪽으로 와 주시죠. 좀 더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예."

"경원 씨."

경원이 일어서자, 서혜 씨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괜찮을 거야."

그는 아내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6. 발자국





문득 시계를 보니 낮 12시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다. 당연히 고플 리가 없을 테지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정 형사였다.

"경원 씨는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서혜 씨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볼일이 남아 있습니다."

정 형사는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형사님은 혹시, 경원 형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민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사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민형 씨, 이쪽에서는 그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왜 그런 생각을 할 거라 단언하는 거요?"

"발자국을 보고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서재 창에서부터 시작된 발자국이 경원 형의 방까지 이어져 있었으니까. 안 그런 가요?"

"네?"

서혜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발자국이란 게 뭔 소리야?"

상우가 서슬이 퍼래져서 몸을 일으켰다. 민형이 상우를 돌아보더니 쓴 것을 입에 물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 말하면 흥분할까 봐 입 다물고 있었어. ……죄송합니다만 사실입니다, 형수님. 윤희도 같이 봤습니다."

서혜 씨가 눈을 돌리자, 윤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혜 씨는 울상이 되어 말하기 시작했다.

"창도 잠겨 있었다면서요! 발자국하곤 상관없는 거 아닐까요?"

민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창의 잠금쇠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겁니다. 천장에는 전혀 키가 걸려 있지 않았고요. 경원 형은 추리소설을 좋아합니다. 간단한 트릭 정도는 생각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서혜 씨가 파랗게 질려 민형을 노려봤다.

"그건 그렇다 치고,"

정 형사가 입을 열었다.

"부엌 휴지통에서 진흙이 잔뜩 묻은 슬리퍼하고 한쪽 끝이 갈고리로 된 낚싯줄이 나왔소.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는데, 짚이는 곳 없습니까?"

모두 침묵했다.

"이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로 보입니다. 계획범죄는 아닌 것 같소."

형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을 매단 비닐 끈은 서재 구석에 널려 있던 물건이죠. 책 정리를 하는 데 흔히 쓰이는 것 아니오?"

윤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화를 못 이겨 이세아 양을 죽인 범인은 흉기인 비닐 끈으로 그녀의 몸을 천장에 매달았소. 그리고 나서는 방을 밀실로 만들고 자살로 위장하려 했지. 안에서 문의 특수 잠금 장치를 내리고 창문 잠금쇠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걸어 뒀소. 열린 마지막 창에는 잠금쇠에 낚싯줄 고리를 걸어두고, 줄의 다른 한끝은 천장의 10cm 정도밖에 안 되는 비좁은 틈을 통해 밖으로 내어둔다. 그리고 범인은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 천장 쪽으로 가서 위로부터 드리워진 낚싯줄을 천천히 끌어당겼소. 그 힘으로 창의 단 하나 열려져 있던 잠금쇠도 반회전을 하면서 잠겨버렸지. 위에서 그대로 끌어당기면 낚싯줄도 회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금쇠도 없는 유일한 곳인 천장까지 닫으면 밀실이 완성되는 것이오. 범인은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소. 발자국이 남아 있단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 사람은 바로, 그 방의 주인인 유경원 씨인 것이지."

"아주 진부한 트릭이군요."

윤희는 화들짝 놀라서 민형을 바라봤다.
민형의 입 꼬리가 살짝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똑똑한 경원 형이 이렇게 눈에 훤히 보이는 짓을 했으리라곤 믿어지지 않는데요. 형사님. 그렇다면 형은 왜 하필 낚싯줄을 부엌 휴지통에 버렸을까요? 발자국이야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쳐도 말입니다."

"장민형 씨, 이건 현실이니까. 게다가 순간적인 범행이라 이성을 잃었던 게지, 유경원 씨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발자국부터 설명해 보시오."

"그 발자국은, 진범이 경원 형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일부러 찍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놀라 민형을 쳐다봤다.

"진범이 발자국을 일부러 유경원 씨 방으로 가게 찍은 거란 말이오?"

"예. 슬리퍼는 현관 신발장에 있는, 모두 다 같이 쓰는 물건입니다. 낚싯줄도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비닐 줄은 서재에 처음부터 있었던 물건이구요. 우리 중 누구나, 충분히 범행이 가능했습니다."

"말이 안 되지."

형사가 고개를 저었다.

"발자국이 나 있었던 땅은 죄다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걸으면 반드시 발자국이 남게 되어 있는 곳이오. 저 위치에서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유경원 방외에는 현관 앞의 콘크리트 부분뿐이지. 현관까지는 무려 1.5미터 정도 된단 말입니다. 도저히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오."

"그럼 현관으로 가면 되잖아요? 콘크리트니까, 흙 묻은 슬리퍼만 벗으면 발자국도 안 남을 테구요."

윤희가 말했다. 민형이 혀를 찼다.

"현관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그리고 현관 앞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건 거리상 불가능이야."

"아, 맞다."

윤희는 머리를 치면서, 순간적으로 민형이 아침에 현관문을 열었단 사실을 떠올렸다.

"현관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사실 한 명 있소."

"네?"

"열쇠를 가진 유일한 사람인 유경원 씨죠."

형사가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어, 어젯밤엔 비가 내렸으니까 혹시 발자국이 없어진 건 아닐까요?"

서혜 씨가 말했다.

"어젯밤 비는 오후 11시에 내리기 시작해서 오전 12시에 그쳤소. 이세아 양의 사망추정시각은 오전 12시 반에서 3시 사이. 범행 때에는 이미 비가 그쳐 있었죠. 그래서 발자국이 저렇게 또렷이 남았던 겁니다."

모두들 침묵했다.

"결론은, 범행이 가능했던 사람은 유경원 씨 하나란 얘기요."

윤희의 머릿속에 갑자기 퍼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저, 형사님! 하지만 범인이 경원 선배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경원 선배 방문으로 나왔을 수도 있잖아요?"

"경원 형이 깨면 어떻게 하려고."

민형이 고개를 저었다.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푹 자고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그렇죠?"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어. 들키면 끝장인데. 다음 날 시체가 발견되면 뻔히 범인으로 지목될 짓을, 너라면 하겠냐?"

"……."

윤희는 입을 다물었다. 다름 아니라 민형의 저런 점이 미운 것이다.

"들키면 형도 죽이려던 거 아니었을까?"

상우가 멍하게 말했다.

"뭐라구요?"

서혜 씨가 화들짝 놀라서 상우를 봤다.

"범인이 이런 식의 장치를 한 건, 형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자기 방문도 잠갔다고 했잖습니까."

"그렇소. 게다가 창문도 잠궜다고 했지."

"형이 범인이라면 오히려 창이 열려 있었을 거라고 했을 겁니다. 의심을 덜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형은 창이 잠겨 있었다고 솔직히 말했는데, 그런 사람을 살인범이라고 단언하셔도 되는 겁니까?"

민형은 정 형사를 노려봤다. 형사는 여유 있게 웃었다.

"정 그렇게 유경원 씨의 무죄를 증명하고 싶으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 보시오. 단, 물증이어야겠지."

민형은 입을 다물었다. 고소미다! 윤희는 혀를 내밀고 싶은 걸 참았다.

"근데 장민형 씨, 당신이 왜 그렇게 유경원 씨 결백을 증명하려는지 참 이유를 알 수 없는데 말이오. 만에 하나, 유경원 씨가 범인이 아니라고 쳐  봅시다. 그럼 누가 범인이라는 뜻인지 알고나 있소?"

"누가 바깥에서 들어와서……."

서혜 씨가 말끝을 흐렸다.

"달리 의심스런 인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소. 낚싯줄과 슬리퍼는 이 별장의 물건이지. 거기다 외부인이 뭐 하러 이런 트릭을 꾸미려 하겠소? 도망치기 바쁠 텐데. 범인이 유경원 씨가 아니라면,"

형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진범은 당신들 네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침묵이 흘렀다. 형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어젯밤 오전 12시 반에서 3시까지, 당신들 모두의 알리바이를 알아둬야겠는데."

"당연히, 자고 있었습니다."

상우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혜 씨도 덧붙였다.

"저도 자고 있었어요. 혼자서요."

"부부가 보통 다른 방을 씁니까?"

형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요. 경원 씨는 코골이가 심해서……."

"으음, 지독하지."

민형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상우가 무언으로 동조했다.

"장민형 씨는?"

"제 방에서 잤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민형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쟁이. 뻔뻔하기도 하여라.

"최윤희 씨는?"

"자고 있었어요."

윤희도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새벽이 되도록 뜬눈으로 지새웠던 것이다. 에효…….

"그럼 전원이 알리바이가 없다는 거로군요. 유경원 씨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사람도 달리 없고."

"경원 씨가 뭐 하러 세아 씨를 죽였겠어요?"

서혜 씨가 낮게 항의했다.

"당신들한테도 동기가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니오?"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그렇다, 누구에게도 세아를 죽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윤희 자신은? 세아를 조금은 질투했었다.

세아를 기억한다. 예쁘고, 섹시하고, 머리도 좋을 뿐 아니라 운동까지 잘했었지. 수영도 잘하고, 요트도 탈 줄 안다고 했었다. 이 섬에 와서는 별로 재미가 없는지 내내 비치파라솔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눈부신 햇살 아래, 민형과 뭔가 얘기를 주고받던 그녀.
나는……, 질투했던 걸까?

형사는 일어섰다.

"이만 실례하겠소."







7. 가능성



침묵.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 채, 그렇다고 완전히 자신의 세계에 빠지지도 못하고.

"윤희야, 잠깐 올라가지 않을래? 할 얘기가 있어."

민형의 담담한 목소리가 의식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에게 고개를 돌리자 민형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일어나서 먼저 나가버린다. 윤희는 별 수 없이 그를 쫓아가면서 무심코 방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즐거워야 할 여름 MT가 어쩌다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건지…….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세아…….

2시간에 걸쳐 화장을 하느라 자신까지 지각하게 만든 세아.
기차 안에서 웃고 떠들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모으던 세아.
배 안에서 멀미를 하느라 얼굴이 창백하던 세아.
섹시하게 수영복 자태를 한껏 뽐내던 세아.
민형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세아.
책에 열중하던 세아. 무서운 얘기를 들으며 울상을 짓던 세아.
와인글라스를 떨어뜨리고 당황하던 세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너, 얼굴이 이상해."

자신의 방에 들어간 민형이 윤희를 돌아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무슨 소리야?"

"무지 못생겨 보여."

"너어?"

다시 화가 났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갈구는 소릴 하다니! 윤희는 민형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물론 제대로 맞지는 못했지만.

하지만 덕분에 눈물은 쏙 들어가 버렸다. 윤희가 민형을 꼬집어 주고픈 걸 겨우 참고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자, 민형이 물어왔다.

"넌 경원 형이 범인이라고 생각해?"

"아니."

윤희는 고개를 저었다.

"경원 선배, 머리가 좋은 걸. 저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어."

"그럼 우리 넷 중에 범인이 있단 뜻?"

"음……."

윤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범인은 서재에서 어떻게 도망친 걸까."

"저, 민형아."

"응?"

"넌 내가 범인일 수도 있단 생각은 안 드니?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건데……."

"얌마, 어젯밤에 우리, 뭘 하고 있었냐?"

"……무슨 소리야."

뭐, 뭘 하다니…….

"같이 있었잖아. 같은 방에서."

"넌 바로 잠들었잖아. 너 자고나서 내가 방을 빠져나갔을 수도 있잖아?"

"자는 척 했어."

"뭐?"

"바보야, 자는 척 했다구.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할까 봐, 니가 영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그냥 자는 척 한 거야. 너 새벽까지 내내 일어나 있었잖아. 실제 잔 건 6시가 다 돼설 걸?"

"너도 그 때까지 안 잔 거야?"

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민형이 어이없단 듯 보더니 투덜거린다.

"너 진짜 둔녀였구나."

"근데 왜 형사한테 거짓말했니?"

"뭐어, 그냥. 너랑 나랑 한방에 있었다고 얘기했다 치자. 나야 상관없지, 하지만 너는 정말 괜찮겠어? 다 큰 남녀가 한방에서 있었는데도, 털끝하나 서로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어주겠어?"

"……."

"하기야……, 믿을 지도 모르겠다."

윤희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뚫어지게 보자, 민형은 싱긋 웃었다.

"최윤희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야. 네가 좀 둔하냐."

베개가 민형의 얼굴로 날아갔다. 민형은 얼굴 바로 앞에서 베개를 잡아 쥐고는 창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얼굴은 진지하게 바뀌어 있었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왜 거기에 그렇게 집착해?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잖아. 낚싯줄하고 슬리퍼는? 왜 하필 쓰레기통에 버린 거지?"

"발견되길 바랬으니까 그렇겠지."

민형은 창가에 몸을 기댔다. 윤희는 침대에 앉은 채 민형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잘생긴 놈 같으니라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어쩜 저렇게 그림이 되냐. 입만 다물면 딱인데 딱! 윤희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민형이 말했다.

"발자국은 경원 형 방 앞에서 끊어져 있어. 형이 범인이 아니고 형의 방으로 범인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별장에 들어온 거지?"

윤희는 손을 세로로 모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의견을 말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질퍽해져 있었잖아. 그렇지 않은 자리는 콘크리트로 만든 현관 앞뿐이라며. 거기까지의 거리는 1.5m. 생각해 봄 말이야, 점프 불가능한 거리는 아닐지도……."

범인은 서재의 창문으로 나온다. 땅을 밟고 경원 형의 방 창문 앞까지 걸어와서 멈춘 다음, 한쪽 슬리퍼를 벗고 점프! 슬리퍼를 신지 않은 쪽 발로 착지한 후 나머지 한쪽 발의 슬리퍼를 마저 벗는다.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 윤희는 의기양양하게 민형을 올려다봤다. 민형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현관에는 키가 걸려 있어.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건 경원 형뿐이야."

"비……."

"응?"

"비가 내려서 지워진 거 아닐까?"

"아까 형사 아저씨 말 못 들었냐? 자정에 비가 그쳤댔잖아. 세아의 사망추정시각이 12시 반에서 3시사이니까. 그 땐 이미 비가 그쳤다구."

잘난 척 하긴! 윤희는 뾰루뚱해져서 말했다.

"아직 해부까지는 안 했잖아! 언젠가 책에서 본 적 있잖아? 시체를 식혀두면 사망추정시각이 실제보다 느리게 나온다구. 그런 거 아닐까?"

"어디서 식히는데."

민형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음……, 냉장고!"

"부엌 냉장고, 아무리 생각해도 세아가 들어갈 크기는 아니던데."

말문이 막혔다. 민형이 말을 이었다.

"만일에 범인이 거대 냉장고를 들여와서 시체를 식혀뒀다고 치자. 경찰도 멍청해서 그 냉장고를 발견 못하고 사망추정시각을 늦게 판정했다 쳐. 자정보다 전에 범인은 세아를 죽이고 창에서 도망쳤다. 당연히 발자국은 지워질 수 있었겠지. 그래, 맞다."

"응, 응!"

윤희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마자 민형이 물었다.

"그럼 오늘 아침에 우리가 본 발자국은 뭐지?"

"아……."

그렇다. 발자국은 분명히 남아 있었어. 윤희는 다시 미궁에 빠졌다.

"발자국이 남은 건, 비가 그친 후의 일이거든."

"열쇠를 카피해 둔 거 아닐까? 열쇠만 있으면 되잖아. 아. 역시 무린가……. 만들 시간도 없었겠지. 모두 계속 같이 있었는걸."

"원래 별장 주인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응?"

서혜 씨?

윤희가 얼굴을 찌푸리자, 민형이 눈을 깜박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일단은 모두 의심이 갈 수밖에 없어."

"저어, 정 형사 님은 충동적인 살인이라고 하셨잖아. 미리 열쇠를 카피해 뒀다면……, 그건 계획범죄가 되는 거……아냐?"

"하긴. 계획범죄를 저지른다면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는 안 했겠지. 서혜 씨가 계획범죄를 위해 열쇠를 카피했다면, 알리바이도 미리 만들어 뒀을 거야. 혼자 방에서 자고 있었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분명히 열쇠는 하나뿐이었지?"

"그래. 몰래 카피해 둔 게 없다면 우리가 알기론 분명히 하나 뿐이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우발적인 살인이었단 생각이 들어. 계획적으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뭐 하러 필연적으로 용의자가 좁혀지는 이런 섬을 택했겠어?"

옳은 말이다.
역시 열쇠가 없으면 현관에 들어올 수 없었어.
들어올 수 없다는 건…….

바보!

"바보바보!"

윤희는 소리쳤다.

"뭐, 뭐야."

민형이 깜짝 놀라 그녀를 응시했다.

"우린 바보였어! 생각해 봐! 범인이 움직일 수 있는 건 현관뿐이었지? 범인은 현관을 통해 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구."

"응. 그런데?"

"현관문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만 열쇠가 필요하잖아. 안에서 여는데 열쇠 따윈 전혀 필요 없는 거지?"

"범인은 문 밖에……, 앗!"

민형의 얼굴 근육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듯 했다.

"응, 현관문을 열어 둔 건 서재 창문으로 나가기 전 일이었던 거야. 범인은 서재를 밀실로 만들기 전에 현관에 가서 문을 열어둔 거지.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생각지 못했어."

그 말에, 민형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뭔가……, 이상해."

"뭐가?"

"뭔가……, 딱히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넌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야! 간단하게 생각하면 될 일을 빙 돌려 헤매는 거라고! 그게 아니면……, 너 혹시 날 무시하는 거니?"

일부러 시비를 걸었는데, 의외로 민형은 반응이 없다. 그는 미간에 세로금을 살짝 그은 상태로 뭔가에 신경 쓰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보였다. 그래, 니가 무시하던 최윤희가 너보다 먼저 중요한 걸 깨달았다 이거지? 윤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님께 물어 보자! 경원 선배가 무고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거잖아!"

"그럴 필요 없어."

민형이 고개를 저었다. 윤희는 그런 그를 강하게 노려봤다.

"넌 경원 선배가 불쌍하지도 않니? 얘기해야 돼! 응?"

"얘기할 필요도 없을 거야."

"왜? 왜!"

민형은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척척 문으로 걸어가 휙, 빠른 동작으로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자리에, 정 형사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8. 원점





"차라리 들어와서 들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민형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 호의적인 웃음이 아니었단 건 말할 나위도 없다. 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이런 방식의 수사도 필요하니까."

민형은 팔짱을 끼었다.

"저희 얘기를 다 들었겠죠. 납득하십니까."

"그렇소. 용의자의 범위가 넓혀진 셈이지. 다른 두 사람들에게도 말해둘 필요가 있을 듯한데, 내려갑시다."

윤희들은 어쩌면 제 무덤을 판 것일 지도 몰랐다. 민형이 한숨을 쉬며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형사님. 처음부터 형사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지요?"

형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서재 바로 앞에서 민형이 걸음을 멈춰 섰다.

"이거……,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뭔가 보니 계단 옆 서재 앞에 있던 쓰레기통이었다.

"응? 그거? 어제 상우도 껌을 버렸던 건데?"

윤희의 대답에, 민형은 코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상우와 서혜 씨는 아직껏 1층 응접실에 남아 있었다. 윤희들이 들어가자 불안한 시선을 들어 무언의 질문을 보내온다. 그 시선은 어두웠다.

형사는 짤막하게 설명했다. 용의자의 범위가 전원으로 넓혀졌다는 사실.

"물론 유경원 씨 역시 용의선 상을 벗어난 건 아니오."

형사가 그렇게 덧붙이자마자, 문이 열리고 경원이 돌아왔다. 서혜 씨의 만면에 눈물 섞인 웃음이 퍼졌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에게 뛰어가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경원은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때, 상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뚜벅뚜벅 걸어 응접실을 나간다.

"상우야!"

윤희가 불렀다.

"어디 가는 거야?"

"혼자 있겠어."

상우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범인이 이 안에 있단 거잖아! 여기 더는 못 있어. 누가 범인이든 경찰이 못 찾아도 내가 찾을 거야. 찾아서……."

윤희는 숨을 멈췄다.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야."

응접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윤희는 잠시 동안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굳어졌던 그녀는 이내 자신도 문을 열고 상우를 뒤따라갔다. 뒤에서 '윤희야!' 하고 민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들리지 않은 것처럼 움직였다.

2층.
상우의 방 앞에서 윤희는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문을 두드렸다.

"상우야, 잠깐 들어가게 해 줘."

"……."

"열어 줘."

"……들어 와."

문 너머로 잠긴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상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상우는 그녀를 응시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 없으면 나가 줘."

"상우야."

윤희는 한 호흡 쉬고 말을 이었다.

"세아를 죽인 범인을 잡고 싶으면 내려가는 게 좋아. 다같이 모인 장소에서 수사에 협조하는 편이……."

"……."

"우리 모두 괴로운 건 마찬가지야."

"괴롭다? 과연?"

상우가 킥킥 웃었다.

"무슨 말이야?"

"웃기네."

"세아를 좋아한 너랑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나도 친구였어."

"친구……? 너하고 민형인 즐기고 있지 않냐?"

"무슨 소리야."

"실은 흥미진진이겠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범인은 이 안에 있다지. 마치 추리소설 읽는 기분일 거야. 현실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걸? 그거 알아? 그런 니들 앞에서 세아는 또 한번 죽은 거라구!"

"……."

"……나가."

눌러 죽인 듯한 목소리로 상우가 말했다. 그 말에 마치 이끌린 듯, 윤희는 방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문에 서 있는 서혜 씨를 발견하고 조금 당혹했다. 서혜 씨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미안하지만 가 주세요."

상우가 차갑게 말했지만, 서혜 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도 즐기거나 하지 않아요. 그저 억누르고 있을 뿐이죠. 범인을 잡아야하잖아요. 이럴 때 무작정 슬퍼만 하는 건, 세아 씨를 위해서도 옳지 않아요. 응접실로 돌아오세요. 다 같이 생각해요."

"싫습니다. 거기 범인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저……."

말문이 막힌 듯한 서혜 씨를 상우가 찬찬히 바라봤다.

"제 생각을 말할까요? 전 당신이 가장 의심이 갑니다."

"네?"

서혜 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윤희의 몸도 단단히 굳어졌다.

"이 집 원래 주인에다, 당신은 세아가 죽어도 별로 아쉬울 일 없는 사람이죠. 어제 만난 게 전부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서혜 씨의 얼굴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난, 아직도 범인이 외부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당신들이 친구를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서혜 씨는 입을 꾹 다물고는 상우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저녁 시간에는 내려오세요."

상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우야."

방에서 나가는 서혜 씨를 보며, 윤희는 상우를 한 번 더 불러보았다.

"먼저 내려가."

돌아온 것은 어딘가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상우는 어때? 괜찮아?"

응접실에 돌아온 윤희에게 경원이 걱정스런 듯 물었다.

"예. 생각보다는요. 곧 내려올 거예요."

윤희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어느 새 다가온 건지 민형이 툭툭 두드렸다.

"잠깐 걷지 않을래?"

"응?"

윤희는 민형을 보다가, 정 형사에게 시선을 옮겼다.

"괜찮을까요? 가도 돼요?"

"그 정도야 상관없소. 아직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민형이 윤희의 팔을 잡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제 헤엄치며 놀았던 바다는 조용하다.

어쩐지 그 바다가 빛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밑의 모래알이 까끌까끌한 소리를 내며 흩어져나간다.

"여기 좀 앉을까?"

"응."

민형을 따라서 윤희도 모래 위에 주저앉았다.

"세아……."

"응?"

"수영 거의 안 하고 우리처럼 이렇게 앉아 있었지."

"음."

민형은 짧게 대답했다. 윤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제 너랑 얘기하고 있던 사람은 세아였는데……."

"……."

"무슨 얘길 했어?"

"별로……."

민형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수영복에 잔뜩 힘 줬으면서 왜 바다엔 안 들어가냐고 물었었거든. 피곤하다더라고. 낮에 배타고 오면서 걔 멀미를 좀 했었잖아. 기억 나?"

"응."

배가 별로 좋지 않아서일까. 요트도 탈 줄 안다던 세아는 멀미를 심하게 했었다. 그 때문인지 점심에 나온 샌드위치도 그다지 많이 손대지 않았고, 저녁도 다른 사람에 비해 그리 많이 먹는 것 같지 않았다. 와인 잔도 거의 들고만 있었던 기억이 난다.

"들고만 있으니까 쏟았지."

"응?"

갑자기 튀어나온 윤희의 말에 민형이 고개를 돌렸다.

"걔, 와인 쏟았잖아. 그 원피스, 새로 산거라고 들은 거 같은데."

"응."

민형은 조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건 누구에게나 괴로운 일일 것이다. 윤희는 화제를 돌렸다.

"일단 경원 선배는 다행이야. 그 형사 아저씨,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해 봐야 별 소용없지 않을까……."



- 너하고 민형인 즐기고 있지 않냐?



아니야, 상우야. 그런 게 아냐. 우리는…….

"난 생각할 거야."

민형이 잘라 말했다.

"내내 생각하고 있었어. 여기라면 그 형사 아저씨의 엿듣기 취미도 걱정 없을 테니까 나오자고 한 것 뿐이야. 방보단 덜 답답할 거고."

윤희는 민형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윤곽이 선명한 얼굴이 햇빛을 받아 뚜렷하게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민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계속했다.

"틀렸어."

"응?"

"처음부터 다 틀렸던 거야. 나도, 너도. 네가 말한 현관을 미리 열어둔다는 것도 전부 다 틀렸어."

"무슨 말이야? 이제 와서……."

답답했다. 알아듣기 쉽게 좀 말해 줘.

"범인은 밖에서 낛싯줄을 사용해서 창문을 잠궜다. 형사님도 그렇게 말했고, 우리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

"응. 낚싯줄도 쓰레기통에 있었고, 발자국은 우리 둘이 먼저 봤잖아."

"바로 그 발자국이야."

민형이 또박또박 말했다.

"응?"

바다를 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윤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발자국이, 이상해."



(하)로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댓글 '6'

리체

2004.08.11 12:39:43

음, 있을만한 가능성을 전부 내어놓고 서로 제기하다가 반론하고, 또 반론하고....;;
우후후, 잼난다.+_+//
제목에서 오라가 느껴지는군.
진부하지만 전혀 진부하지가 않잖여~

Junk

2004.08.11 23:53:50

이 소설은 가능성제기-반론-또 반론-또 뒤집기 그걸로 100페이지를 끌고 가는...-0-

리체

2004.08.12 00:26:46

아, 그런 게 원래 추리소설의 묘미지..; 하튼 멋쪄..@@;;

세이더

2005.01.01 22:11:19

와아..멋져요.   [12][08][10]

은기

2005.01.19 01:01:07

와 ~ 이것도 정크님의 글??
어찌되었든 나는 알죠 범인을 .. 흐흐흐   [01][01][01]

sunny

2005.07.30 11:30:26

나도 알고 싶어요......^^;;   [1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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