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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에필로그
햇살이 너무도 눈부신 한여름의 오후였다.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남매는 꽤나 눈에 띠었다. 집에서 싸왔는지 꽤나 정성들여 만든 김밥을 집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는 누나는 대학생 정도로 보였다. 긴 생머리가 여자다우면서도 묘하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자다. 남동생은 그런 누나와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어딘가 닮은 데가 있어서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남매다웠다.
김밥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동생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어, 누나 나 가봐야겠어.”
“학원? 토요일엔 없다며.”
쓰레기를 봉투에 모으고 있던 누나가 고개를 들며 반문했다.
“오늘 보강이야.”
“열심이네? 쳇, 모처럼 김밥까지 싸다줬는데.”
“미안. 누난? 오늘 약속 없어?”
“나도 가봐야 해.”
“그럴 줄 알았어.”
남동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만나는 거야? 데리러오는 거 아냐?”
“아, 오늘 일이 있다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가기로 했어.”
“누나.”
“응?”
“차라리 같이 살지 그래?”
누나가 ‘뭐?’하고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자 동생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잖아. 거의 부분데 뭐. 내가 있어서 불편해서 그래? 그럼 내가 나가주지 뭐.”
“장난하니?”
누나는 동생을 흘겨보면서 비닐봉투 입구를 묶더니 갑자기 말했다.
“그러잖아도 그럴까 해.”
“응?”
“이번에 뉴욕 가잖아. 그때 같이 생각해 보려고.”
“좋은 생각이야.”
누나는 커다란 숄더백과 비닐봉지를, 동생은 배낭을 집으며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헤어지기 전에 동생이 결연히 말했다.
“한 번만 더 꼬마라고 부르면 결투라고 전해.”
“꼭 전해줄게.”
누나는 눈매를 상냥하게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각자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누나가 입고 있는 스커트와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도 모자라, 방금까지 남매가 앉아 있던 벤치 위에 깔려 있던 신문지를 허공으로 날려 떨어뜨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신문이 바스락 소리를 낸다. 누군가 행인이 그 신문에 구두자국을 새기며 밟고 지나갔다. 떨어진 신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바람만이 몇 번이나 그 조각을 희롱하고 있었다. 어쩌면 구석진 곳에 실린 기사를 읽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붉은 다이아몬드 진홍루(Scarlet Tears)가 경매에 부쳐진다.
국내 보석 컬렉터에게는 물론, 해외에도 ‘붉은 다이아몬드’로 잘 알려진 보석 진홍루가 작년 이 보석의 소유주가 된 박지해 씨의 의사에 따라 뉴욕 소더비경매장의 경매대에 오를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이 희귀보석이 최소 3백만 달러(국내가 약 35억원) 이상에 낙찰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
“……넵. 콜록콜록, 그 계좌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하하, 별 말씀을. 아, 예. 감기기운이 좀 있어서요. 콜록. ……예, 감사합니다. 들어가십시오.”
남자는 전화를 끊고 앞에 앉은 여자를 보았다.
“아, 미안. 기다리게 해서……, 콜록.”
“일을 의뢰하고 싶어요.”
흰 얼굴. 윤기가 흐르는 긴 생머리. 약간 날카롭고 어딘가 도도해 보이는 눈. 여자는 남자의 사과를 간단히 자르고 자신의 용건을 갖다댔다. 남자의 얼굴에 희미한 당혹감이 스쳤지만, 그는 이내 평소 일할 때의 침착한 태도로 돌아가 정중하게 물었다.
“음료는 콜록, 뭘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녹차? 홍차?”
“취향 아시잖아요?”
그녀는 약간 도전적으로 반문했다. 그는 싱긋 웃고, 냉장고로 걸어가서 캔 콜라를 꺼냈다. 스트로와 얼음을 넣은 유리컵을 쟁반에 담아 가져온다. 여자는 당연한 듯이 콜라를 받았다.
“레몬 맛 가미한 것도 괜찮은데.”
“참고하겠습니다.”
남자는 간신히 웃음을 참는 눈치였다. 여자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긴 달리 직원이 없나 봐요? 탐정님 혼자 힘들지도 않으시나요?”
“힘듭. 콜록, 니다.”
남자는 당연한 것처럼 기침 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도와줄 직원 하나 채용하지 그러세요?”
“콜록콜록, 여기 일은 상당히 험해서 말입니다. 그나저나 일을 의뢰하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손님의 이름과 나이를 좀 말씀……, 콜록.”
“박지해예요. 나이는 스물 셋, 대학교 4학년이에요.”
“‘혀이’가 아니고 ‘하이’겠죠?”
“알아들었으면 됐어요.”
그녀의 눈썹 위에 희미한 힘줄이 섰다.
“좋습니다, 박지해 씨. 콜록콜록,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그녀는 숨을 가볍게 들이키더니, 도전적인 눈을 그에게 돌렸다.
“제 애인, 손 좀 봐주셨으면 해요.”
“풋!”
남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세요? 저한텐 심각한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콜록콜록콜록…….”
남자가 주먹을 입가에 갖다대고 웃음을 누르려다 기침을 했다. 간신히 기침+웃음을 진정시킨 그는 다시 사무적인 자세로 돌아왔다.
“애인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콜록, 바람이라도 피나요?”
“제 말을 잘 심각하게 안 들어요.”
“그것 참 큰 문제로군요, 콜록. 어떤 식으로 안 듣습니까?”
“병원에 절대 안 가요. 아무리 가라고 입이 닳도록 말해도요.”
“저런. 그런 놈이 있습니……, 콜록.”
“그렇죠? 정말 못된 놈이죠?”
“음, 제가 아는 녀석 중에도 그런, 콜록, 놈이 있죠. 아무리, 콜록, 병원을, 콜록, 가래도 말을 안 듣습니다.”
“어머나, 그런 놈을 아시다니 정말 안 되셨네요.”
“그런데, 콜록, 그 놈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말이죠, 콜록. 작년에 심하게 다쳐서 몇 달을 질기게 병원 생활을 했었던 놈이란, 콜록, 말입니다. 병원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콜록, 경기를 일으킬 것 같다나요.”
“그건 변명이 안 되죠!”
콜라가 담긴 크리스털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여자가 테이블을 꽝 내리치며 소리쳤다. 박력에 그의 몸이 움찔했다.
“내가 어제 분명히 병원 가랬죠!”
“음, 그랬죠.”
그는 기침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비굴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근데 안 갔죠!”
“죽을죄를……, 콜록.”
“이렇게 기침이 오래가서 대체 뉴욕은 어떻게 가려고요?”
“음, 콜록, 그러게 말이야.”
그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웅얼거렸다.
“그리고 그 넥타이! 어떻게 그렇게 매번 고쳐주는데도 여전한 거죠?”
“고질병인가 봐…….”
그는 기침을 참으며 조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의 모습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답답하지 않을 수 없겠지.
“역시 넥타이를 안 매는 게 나을까? 그러잖아도 목이 답답한데.”
남자가 고개를 왼쪽으로 슬쩍 기울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리 잠깐 와 봐요.”
여자가 그에게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그가 그녀 말대로 앞에 다가서자, 여자는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어차피 벗길 거니까?”
잠깐의 여백 후, 사무실 안을 커다란 웃음소리가 메웠다. 그리고 넥타이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책상 아래 바닥으로 흐르고, 다른 달콤한 키득거림이 그 소리를 연결하듯 이어졌다.
“잠깐.”
그가 그녀의 머리 뒤를 손으로 받치고 막 입술을 가져다댔을 때, 그녀가 생각난 것처럼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넥타이를 풀어 한층 편한 느낌이 된 그가 ‘뭐?’ 하고 말하는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댄 채 그녀를 바라봤다. 여자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조그맣게 난처한 웅얼거림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그를 똑바로 보고 말을 토해냈다. ‘우리, 같이 살아요!’ 라고. 그 말에 기침하는 것도 잊고 망연히 그녀를 응시하는 그에게, 그녀는 더듬거리며 설명조의 말을 이었다.
“저, 그러니까, 음, 어차피 난 지금처럼 가끔씩 음식을 해주고 싶고, 근데 여기까지 매번 오는 건 좀 귀찮기도 하고, 아니 꼭 귀찮은 건 아니지만, 음, 아무튼 규해랑 나랑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갈 거니까요. 그 집, 사무실 바로 근처에 있기도 하고…….”
‘풋.’ 하고 그가 이번에야말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그녀가 흘겨보자 그는 변명하듯이, 하지만 사랑스럽게 보며 대꾸했다.
“아냐. 좋은 제안이지만, 결정하기까지 좀 더 생각해 보자. 시간은 넉넉하니까. 생각을 마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 눈빛 속에 담긴 긍정의 사인을 보며 그녀는 쑥스런 미소를 보냈다.
“그 생각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할 걸요? 우리 생각보다 시간은 훨씬 빨리 흐르는 법이란 거 알잖아요?”
그렇다, 시간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빨리 흐르는 법.
어느 새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1년이, 10년이,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흘러가겠지. 그들 연인들에게는 앞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가득 두터운 층을 이루어 남아 있을 터였다.
물론, 키스할 수 있는 시간도.
그들은 달콤한 웃음을 서로의 입술로 막으며 하던 일을 재개했다.
붉은 다이아몬드/Fin
그 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정크님 수고하셨어요. 힘내시고 어여 다른 작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