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18. 퍼즐 완성




 
그곳은 큰 창고였다.

우신은 눈가리개를 벗겼는데도 왜 눈이 부시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입구의 셔터가 완전히 내려져 있어,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반용수를 시켜서 박경철을 죽이게 한 건 역시 당신이었군.”

휠체어에 앉아 있는 구한열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호, 짐작하고 있었나. 물론이지. 하연에게 부탁받았어. 그 여자, 진홍루에 맛이 가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결혼했지.”

“진홍루에 맛이 간 사람은 그 여자만이 아니잖아? 그쪽도 충분히 미친놈이야, 내가 보기엔.”

“진홍루를 내놓으면 그 입을 쏘고 싶은 걸 참아주지.”

구한열은 총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 기본적으로 총을 쏠 줄 아는 종자야.



치현의 말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전에 먼저 알아야겠어. 지해는 어디 있지? 규해는? 무사한가?”

우신의 질문에, 구한열은 창고 저편을 가리켰다. 어둠 속을 더듬어 살펴보니 몇 사람이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모두 네 명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해였다. 우신처럼 양손을 뒤로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우신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이윽고 현실을 파악했는지 울상이 되어갔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할 수가 없다는 안색을 하고 자신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그 얼굴을 보고나자 조금이나마 다리의 통증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적어도 나는 여기 있잖아. 그것도 버젓이 살아서.
적어도 네가 거기에 있어서 다행이야. 살아 있어줘서 다행이야.
두고 봐, 그녀처럼 맥없이 보내지는 않을 테니.

“뒷주머니에 있어.”

우신은 지해에게서 눈을 떼고 말했다. 구한열이 그의 머리에 총을 댄 채 몸을 굽히더니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갔다. 마지막 보루까지 넘긴 셈이다. 구한열은 보석에 아이스 팩을 대서 색이 변하는지 확인했다.

“확실한 진짜군. 이제 제대로 손에 들어왔어. 규해 녀석이 날 배반하고 이미테이션을 넘겼을 줄이야…….”

“배신? 그게 뭐야. 어째서 규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지?”

“녀석은 내가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뭐……?”

우신의 머릿속이 다시금 흐려졌다.

“규해는 박경철의 아들이 아니었던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다만 저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 뜻이야. 나와 하연은 박경철이 그녀를 알기 전부터 죽 관계를 가져왔으니까. 그 사실을 넌지시 찔러주었더니 혼자 넘겨짚어 생각해버리더군.”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상관없어. 내 아들이든 아니든.”

구한열이 악의 그 자체 같은 얼굴로 웃었다. 우신은 묶인 손의 주먹을 피가 돌지 않을 때까지 움켜쥐었다.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지해 쪽으로 눈을 돌리자, 그녀 역시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구한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누군가가 힘이 빠졌는지 지해에게 기대다시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릿한 표정을 한 규해는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약 복용후의 금단작용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우신은 눈을 감고 분노를 진정시킨 다음, 차갑게 식은 눈길을 구한열에게 돌렸다.

“김성민을 죽이라고 지시한 건 네놈인가?”

“아, 그건 비혈파 쪽에서 한 일이야. 그 땐 용수가 놈의 부하였거든.”

“진홍루를 훔쳐서 유하연을 협박한 것도?”

“그건 누가 시킨 게 아냐. 순전히 김성민 그 새파란 새끼랑 규해 둘이서만 벌인 일이지. 난 그 건엔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

“네놈이 시킨 게 아니란 말인가?”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구한열이 계획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한열은 비웃듯이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가 시켰으면 그렇게 허술하겐 안했어. 물론 나도 생각은 하고 있었지. 규해를 시켜 진홍루를 이미테이션과 바꿔치기 하게 한 다음, 녀석을 증발하게 만들어서 범인으로 몰아세울까 하고. 설마 이미테이션을 녀석이 하나 더 갖고 있으리란 건 또 몰랐거든.”

“그 별장에서 규해를 약에 취하게 만든 것도 네놈이었나?”

“아아. 너무 싸돌아다녀서 골치 아팠으니까.”

우신은 입술 안쪽을 꽉 깨물어 놈을 한대 치고픈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당신 말을 그렇게 순순히 듣다니 믿을 수가 없군.”

“의외로 아비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더라고. 왜 진홍루를 빼낸 건지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로선 놓칠 수 없는 기회였거든.”

구한열은 빙그레 입가에 곡선을 그렸다.

“실패한 이유는?”

“이후준 그 개새끼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야. 설마 오두막집에 김성민 그 놈이 있으리라곤 생각 못했어. 하물며 비혈파에서 킬러를 보낼 거라곤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 김성민도 킬러 놈도 나에 대해 몰랐을 터였기에 그쪽에서 권총을 들이댔을 땐 좀 어이가 없었고.”

“당신과 이후준의 계획이 하필 그 오두막집에서 충돌한 거군.”

구한열은 권총을 들어 쏘는 시늉을 해보였다.

“BINGO.”

“네놈의 정체는 대체 뭐지?”

우신은 점점 타오르는 다리의 통증을 잊으려 애를 썼다.

“마약중개인. 남미나 중국에서 들여온 약을 비혈파 같은 조직에 넘기는 중간다리를 맡고 있지. 그쪽 세계에선 일을 깔끔하게 하는 걸로 제법 알아주는 편이야. 거래부터 자금세탁까지 전 과정을 완벽하게 처리하거든. 하, 이런이런. 자기 자랑이 너무 심했나?”

구한열은 권총을 자기 이마에 들이대며 쿡쿡 웃었다.

“김성민이 죽어 경찰이 개입한단 걸 알고 이후준은 나한테 일을 의뢰해 왔다. 유하연한테 받은 수표는 이미 경찰이 넘버를 적어갔을지 모르는데다,  진홍루 정도의 보석을 거래할만한 외부루트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거든. 하! 이 나한테 자금세정을 부탁하더라고. 좀, 아니 꽤 꼭지에 열이 받았지. 그래서 난 박경철을 처치했을 때 안면을 익힌 용수와 다시 손을 잡았다. 둘이서 사이좋게 이후준을 제거해버리기로 한 거지. 그 때 마침 용수도 이후준한테 배알이 틀어진 상태여서 이해관계가 딱딱 맞았거든.”

마지막 조각이 들어갔다. End of the game.

멋들어진 퍼즐의 완성이었다.

우신은 아까부터 물고 있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네놈이 무사할 거라 생각해? 분명 경찰이 꼬리를 잡을 거다! 그쪽에도 어느 정도 의심이 가고 있는 눈치였어.”

“후후, 진홍루를 손에 넣었으니 이 나라에 더 있을 이유가 없지. 사람은 넓은 물에서 놀아야 하거든. 유감이지만 용수와 난 오늘 비행기로 한국을 뜰 생각이다.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어!”

구한열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흔들어보였다. 시력이 좋은 우신의 눈에 그것이 뭔지 정확히 들어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비행기 티켓이었다. 얄밉게도 퍼스트 클래스다.

“그쪽한테 더는 볼일이 없지만, 우리 쇼에 참가해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군. 용수가 취미생활을 즐기고 싶대서 말이지.”

구한열이 어둠에 묻히듯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천장에 붙어 있던 모든 전등이 일시에 켜졌다. 순간적으론 눈이 부셔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우신은 익숙해질 만할 때까지 기다려 겨우 눈을 떴다.

생각보다는 훨씬 널찍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장식한 세팅도 제법 훌륭했다. 테이블에 의자 몇 세트. 마치 레스토랑 같군…….

그 순간 머릿속에 번쩍임이 스쳤다.

제기랄!
‘쇼’란 그런 것이었던가!

구한열의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선 반용수는 악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행복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앓던 이를 뺀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아니면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처리한 느낌?

아까 보이지 않던 네 사람이 전등불 아래 노출되어 있었다. 우신을 여전히 뚫어지게 보고 있는 지해. 멍하니 자포자기한 태도로 앉아 있는 규해.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도 낯익은 인물이었다. 지해와 규해 남매 옆으로 이진호, 진희 남매가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들 전원이 양다리를 결박당하고 양팔을 뒤로 묶여 옴짝달싹못하는 상태였다.

아니, 한사람은 예외였다. 원래부터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이진희만은 팔만 묶인 모습으로 오빠 옆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남매애란 게 이렇게 대단한 건지 몰랐군. 하나만 부르면 다른 한쪽은 저절로 오게 마련이라니.”

구한열의 말에 반용수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진호의 왼쪽 허벅지는 우신과 마찬가지로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그걸 보고나니 구한열이 변태 내지 미친놈이라는 확신이 섰다. 아니, 단순히 악취미인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 자신이 총에 맞은 것과 같은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는 것임에 분명했다.

“용수가 이 창고에 폭탄을 장치해뒀다더군. 우리가 가고 정확히 40분 후면 깨끗이 전부를 날려 보낼 거다.”

“내 동생은 풀어줘!”

그 때 이진호가 외쳤다.

“내 동생은 풀어줘! 그걸 조건으로 이후준까지 제거해줬잖아! 난 어찌 되어도 좋으니 동생은 구해줘! 부탁한다!”

“훗. 그 말을 믿은 니놈 잘못이지.”

구한열이 잔인하게 웃었다.

“하지만 오빠가 그렇게 애원하니 구해줘 볼까. 저 몸으로 무려 40분을 떨면서 기다리는 건 좀 불쌍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총을 들어 망설임 없이 소녀를 쏘았다!

그러나…….

“악!”

지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우신은 눈을 부릅뜬 채, 등에서 철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젊은 남자를 응시했다. 특유의 반사 신경으로 몸을 던져 여동생을 총알의 위협에서 막아낸 젊은 몸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가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시킨 여동생의 몸 위로.

“아아……, 으으…….”

신음소리를 흘린 건 죽어가는 오빠가 아니라 여동생이었다. 그녀의 여린 어깨에 오빠의 턱이 힘없이 얹혀져 있다. 이진호는 동생에게 기댄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여동생에게만은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우신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도 잠시 후 끊어지고, 오빠의 머리는 완전히 자기중심을 상실한 채 동생의 어깨 위로 내려오고 말았다.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감은 눈 아래 얇은 입술이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읍…….”

바로 코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지해는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자포자기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규해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울면서도 살인자를 원망에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냐…….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냐…….”

“네 말이 맞다, 꼬마. 나한테 아들 따윈 없어.”

살인자는 유들유들, 그러나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진희는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신음 비슷한 소리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연할 정도로 애처로웠다. 우신은 고개를 돌렸다.

“갈까예.”

반용수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사투리로 싱글싱글 말했다. 구한열은 부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그러지.’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작 반용수가 그를 따라 움직이려 한 순간, 그는 다시 권총을 들어 부하를 쏘았다.

“으흐아악!”

방금까지 죽어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던 알량한 입이 이번엔 허스키한 쉰 소리를 내뿜었다. 그리고 정확히 심장부근에 상처를 입은 반용수는 입가에서 피거품을 뿜어내며 가슴을 끌어안고 바닥에 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구한열이 입을 열었다.

“라스트를 직접 만든 세트 속에서 맞이하는 것도 즐거운 저 세상가기의 한 방법이지. 마지막까지 네놈다운 끝이 될 거야. 안 그런가?”

반용수는 이미 대답할 수 없었다. 크게 부릅뜨여진 눈을 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의 몸은 이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희비극의 한 장면 같은 최후였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명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고 있던 지해와 규해는 오히려 울음을 그쳤고, 신음소리를 내던 이진희는 오빠의 몸을 받친 채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여러분. 이만 퇴장할까 하오.”

마지막 순간, 구한열은 가면을 쓰고 있을 때의 말투로 돌아갔다. 그는 잘생긴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띠우더니, 마치 옛 연극의 막이 오르기 직전에 무대에 올라와 인사하는 변사나 광대가 그러는 듯한 정중한 말투로 스스로가 관객인 배우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무쪼록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그는 휠체어로부터 창고 안에 세워져 있던 코란도로 몸을 옮겼다.

잡아야 해! 저 놈을 잡아야 한다! 우신은 피를 줄줄 흘리는 왼쪽다리를 어떻게든 곧추세우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반 경직상태가 되어 있어, 왼쪽 다리를 깁스했지만 오른발을 써서 운전을 할 수 있는 구한열이 차를 몰고 창고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장면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셔터 문이 닫히고 밖에서 잠기는 음이 허무하게, 잔혹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콰쾅! 밖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지해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며 우신은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저건, 뭔가를 폭파하는 소리? 혹시…….

“끝이야…….”

규해가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동생의 중얼거림에 긍정하는 것처럼 생기 잃은 눈을 한 지해가 애처로운 낯빛으로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신은 그런 그녀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을 올렸을 뿐.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댓글 '3'

리체

2004.07.03 01:44:58

헉, 이건...???

릴리

2004.07.03 09:31:57

오오오오.. 담편, 담편을 주세욧!!

Junk

2004.07.04 00:34:50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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