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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17. 그녀, 행방불명되다
문 앞에서 열쇠를 꺼냈다.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배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치현의 호출이었다. 물론 ‘정보를 달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방식이 거의 심문에 가까웠기에 3시간여에 걸쳐 혹사당한 우신은 거의 반은 넉 다운 된 상태였다. 강철체력도 바닥날 대로 바닥난 모양이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집안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지해는 자신의 집으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권한 사람이 자신임에도 우신은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있던 그 며칠이 완전히 몸에 익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문이 열렸을 때, 감상은 일시에 사라져버렸다.
일순간, 우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말이 입에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펼쳐진 그의 집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돼 있었다. 한차례 해일이 휩쓸고 간 것 같은 모습에 저절로 입을 벌렸다.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섬세한 솜씨였다. 사무실의 거의 모든 물건이 부서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술 수 있는 건 전부 부서져 있었다. 하다못해 책상 위의 작은 메모판까지 두 동강 나 있는 걸 보자, 입에서 헛웃음 비슷한 것이 흘러 나왔다.
개인 공간 쪽으로 들어가자 그쪽도 만만치는 않았다. 옷장에서 끄집어 낸 옷 몇 벌이 갈기갈기 조각으로 변해 있었고, 벽에 걸려 있던 벽시계도 산산조각 난 상태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갑자기 지독하게 목이 말랐다.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우신은 냉장고 쪽으로 가서 문을 열어보았다. 물론 예상대로 두 개인가 남아 있던 캔 맥주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없었다. 한숨을 토해내며 냉장고 문에 힘없이 기댔을 때, 싱크대가 눈에 들어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마가 있었다.
그 도마 위로 야채 조각들이 고운 솜씨로 썰린 채 놓여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식칼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우신은 도마 위에 얌전히 놓인 야채조각과 바닥에 떨어진 식칼, 그리고 오늘 장을 봐온 듯 2인용 식탁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는 비닐봉투를 차례로 들여다보았다. 들어 있던 건…….
카레다.
카레를 하려던 모양이었다.
우신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겨 부엌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시트도 칼로 찢었는지 갈기갈기 조각난 천 쪼가리를 간신히 매달고 있었다.
지해.
어쩌다가, 이런?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따르르릉…….
머릿속을 스친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 민우신?
“반용수!”
우신은 외쳤다.
- 내를 아나?
“이진호 집 근처 가게에 들어왔었지. 그 때 들은 목소리다.”
- 그기 퍼져 있던 시퍼렇고 뺀질한 넘이 니였나.
“지해를 데려간 놈이 너인가?”
- 아, 그 가스나 말이가. 동생이 보고 싶어 해서 말이제. 고맙대이. 그쪽 인테리어를 손봐주고 나서 찾으러갈 작정이었는데 수고를 덜었능기라.
반용수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신은 이를 악물었다.
“그 애 손가락 하나라도 건들면 가만있지 않을 거다.”
- 흥, 그런 사이였나? 그 가스나 귀엽긴 하더만 색기는 한참 모자라든디. 뭐 그래도 삼삼하긴 했다. 나중에 손 좀 봐줄까도 생각하고 있었제. 그야 그쪽이 어찌 하는가에 달려 있다케도.
“용건을 말해.”
- 말을 꼭 해야 아나. 진홍루제. 당연한 거 아이가.
그 때 뭔가가 우신의 머릿속을 강하게 스쳤다.
“네놈의 계획이었나? 서명의를 습격한 건.”
- 나가 아니라 보스가 생각한 기다.
“네놈 보스는 이후준이 아니었나?”
- 그런 적도 있었제. 유감이지만 지금은 아이다.
“내가 진홍루를 갖고 있단 건 누구한테 들었지? 지해가?”
- 보스가 그렇다카더군.
“이미 경찰에 넘겼다면?”
- 의뢰인 때매라두 그렇겐 못할 거라든데?
반용수는 코웃음을 치더니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 알겠나? 경찰에게 알린다든가 하는 식으로 허튼 수작이라도 부리면 그 가스나의 목숨은 없다. 자, 우짤 작정이고?
우신은 창문너머로 비치는 하늘을 보았다. 별까지 드문드문 보이던 어제의 밤하늘은 어디로 가고, 밝아오는 오늘 새벽의 하늘에는 비구름이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그 구름을 눈으로 쫓으면서 입을 열었다.
“보스에게 전해.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고.”
맞은 편 길에 반용수의 말대로 한대의 코란도가 보였고, 운전석에 마른 체구의 긴 머리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다름 아닌 반용수였다. 그는 눈매를 누그러뜨리면서 우신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야비해 보였다. 우신은 주머니에 든 진홍루를 더듬어봤다.
코란도 뒷자리에 탄 우신은 반용수가 시키는 대로 팔을 뒤로 해서 묶고 눈가리개로 양 눈을 가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빈틈없는 반용수는 이쪽이 절대로 방향감각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구 차를 운전해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야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멀미가 날 정도였다.
“히야,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얼굴 아이가, 탐정양반.”
반용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죽기 전에 마, 한바탕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해 주제.”
“기대하겠어.”
우신은 시간을 재기 위해 수를 세고 있었다. 그는 수를 헤아리는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상대의 이죽거림에 대꾸했다. 47분 13초, 47분 14초, 47분 15초…….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반용수는 이죽이죽 그의 신경을 긁는 소리를 계속했다.
“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조만간 바짓가랑이 붙잡고 악을 쓸 시간이 올 기다. 맘의 준비나 해 둬라.”
이제 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수를 헤아리는 데만 집중했다.
차에 타고난 후, 약 2시간 정도 지났을까?
덜컹덜컹. 다리를 지나가는 느낌이 나고, 드디어 코란도가 정지했다.
반용수가 윈도우를 열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자 이내 주먹이 날아왔다. 코피가 주르륵 흘러 턱을 타고 떨어졌다. 우신은 그걸 닦을 수조차 없었다.
“억수로 볼만한데?”
반용수가 앞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내리라.”
시동소리가 꺼지고, 먼저 차에서 내린 반용수가 차 뒷문을 열었다.
“권총 아가리가 그쪽을 노리고 있단 사실만 명심하고.”
싸늘한 반용수의 경고가 끝나자, 우신은 거의 포대자루 취급을 받으며 질질 끌려 콘크리트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에 팔을 대고 어떻게 해서든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짜내던 그 때.
“으윽!”
갑자기 뭔가가 왼쪽 허벅지를 강타했다. 권총 아가리가 노리고 있다는 반용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총알이 뚫고 지나갔단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무릎은 힘을 잃고 그대로 꺾여 있었다. 우신은 다시 한번 바닥에 굴렀다. 입에서 침인지 핀지 모를 것이 흘러나왔다.
뜨겁다. 타오르는 것 같다.
뜨거워…….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설마 피겠지. 오줌을 저린 건 아닐 거야. 우신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참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오른팔에 왼쪽다리. 몸의 수난시대였다. 우신은 자기 몸이 불쌍해졌다.
바닥에 누워 있는 그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섰다.
“다리를 총격당한 감상은 어때?”
얄미울 정도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그 질문이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물론 이쪽도 잘 알고 있었다.
“뭐, 마냥 좋다고는…….”
억지미소를 짓자, 두 발 째의 총알이 이번엔 왼쪽 종아리를 뚫었다.
“악!”
이번에야말로 우신은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뱃속에서부터 튀어나오는 소리와 함께 데굴데굴 땅바닥을 굴렀다.
“바로 죽이면 재미없으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우신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소리란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는 고통의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고개를 들려 애썼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 때문에 그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결국 그는 먼지가 이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신음소리를 삼키는 데만 주력했다. 이렇게 눈을 가리고 있어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배어나온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을 때 남자의 명령이 들렸다.
“벗겨.”
그 말과 거의 동시에 눈을 가리고 있던 눈가리개가 확 벗겨졌다. 빛이 눈을 찌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통증에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설까 의외로 괴롭지 않았다. 우신은 점점 흐려지려는 눈을 겨우 돌려 방금 다친 다리를 살폈다. 다리를 감싼 바지는 온통 젖어 있었고, 거기 뚫린 구멍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제기랄…….’
지혈해야 하는데. 묶인 손이 원망스러웠다.
“그쪽에 호감이 있었는데, 젊은 양반. 어지간히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
다리에 신경이 팔려 있던 우신의 귀에 다시 한번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차분하게 고개를 들자, 과연 낯익은 얼굴이 그를 웃으면서 응시하고 있었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외모에 건장한 체구. 손엔 권총이 들려 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의 웃음 띤 얼굴을 그는 올려다봤다.
예상대로, 구한열이었다.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댓글 '4'
앗, 그게 아니구요...; 그냥 농담이었어요. ^^;;; 사투리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던데...;; 음... 개인적으로 한 군데만 고쳐드릴 수 있다면, 중간쯤에 반용수가 우신을 내려오라고 할 때, 보통 갱상도 사람들은 '내리라!'라고 하거든요. 보통 모음으로 사용되는 w 발음을 잘 안 해요, 경상도 사람들은. ( ex) 곱다=> 곱+아... 표)고와, 경)고바. 물론 이건 예전 어른들 발음이구요, 요새는 거의 표준어를 쓰긴 하지만 그래도 와, 워, 이런 거는 발음 잘 안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 어려워... 라기 보다는 어려버...란 식으로 발음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