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16. 호화여객선에서 생긴 일





우신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예상을 전혀 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갑판에 규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신은 선장에게 규해의 사진이라도 보여줘야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시기상조다.

우신은 배멀미 체질이었다. 심한 건 아니었지만 그리 좋지는 않은 속을 부여잡고 그는 갑판에 서 있었다. 어둑한 공간에 떠도는 바닷바람이 폐에 들어오자 그나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다.

배 안에는 고급스런 차림을 한 손님들이 가득했다. 물론 배에 탄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대박’을 노리고 배에 탄 사람들이다. 그 중 대부분은 벌써 카지노에 가 있을 게 분명했다. 우신은 무려 네 차례나 소개장을 제시하고 신원확인절차를 거치는 고역 끝에 카지노 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카지노 홀은 배에서 가장 거대한 룸으로, 그 내부는 라스베가스에 못지않았다. 우신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구석에 있는 바로 향했다. 도박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자질이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타는 배의 성격을 알고 있던 지해는 자기를 데려가는 게 나을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 무슨 소리야?

- 아버지 닮았거든요, 나. 도박에는 좀 재주가 있어서요.



긴장을 감추고 명랑하게 말하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는 무심결에 미소 지었다. 김릿(gimlet)을 한 잔 주문한 우신은 그걸 마시면서 홀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관찰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규해의 모습은 어디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미성년이라 들어올 수 없는 게 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밖에도 없었는데.

이 배에 타는 손님은 객실손님과 보통석손님으로 나뉘는데, 우신은 보통석손님이었다. 객실을 하나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우신은 잠시 후회했다.  컵의 필요성이 이렇게 간절해질 줄 생각도 못했다. 여기 타면서 어떤 장비도 가져오지 않았던 이유. 이 여객선은 여러 가지 말썽이 일어날 걸 대비해 보디체크를 아주 세심하게 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신은 종업원을 불렀다.

“물 한잔 좀.”

“넵,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바로 물을 가져왔다. 우신은 김릿이 담긴 글라스를 내려놓고 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물을 마시는 척 하다가 바닥의 단단한 부분을 노려 세차게 떨어뜨렸다. 워낙에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 본 사람은 달리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컵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예전에도 많이 해본 짓이었다. 우신은 제대로 부서졌다고 생각하면서 만족한 미소를 흘렸다. 그는 종업원이 뛰어오기 전에 깨진 컵의 파편 중 가장 크고 날카로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손님.”

종업원이 날아들 듯 다가왔다. 우신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 컵이 깨졌군요. 죄송합니다. 배상하죠.”

“아뇨, 괜찮습니다.”

종업원은 비싼 글라스가 아닌 보통 컵인 걸 알고 안심한 듯했다.

우신은 종업원에게 사과한 후 배춧잎을 팁으로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에서 나간 그는 다시 한번 홀 안을 찬찬히 돌아다녀 봤지만, 역시 규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신은 홀을 빠져나가면서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도록 재킷 주머니에 숨겨둔 유리조각을 만져서 확인했다. 뾰족한 끝이 제법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슬며시 웃었다.

통로를 돌아다녔다. 비혈파, 특히 이후준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후준이 이 배에 탄단 이야기는 들었다. 오늘도 이후준이 타는 날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배에 올랐던 것이다.

규해는 전화에서 말했다.



- 복수하려는 상대는 구한열 씨가 아니야. 성민 형을 배신한 비혈파죠. 이후준인가 하는 놈을 대표로 죽여줄 거야.

- 배에 탈거예요. 알고 있어요? 이후준은 배로 사업을 하는 작자인 거.



규해의 목표는 이후준. 이후준이 어디 있는지 알면 규해를 찾을 가능성도 당연히 커진다. 우신은 복도를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갑판을 돌고, 온 배안을 돌아 다녔다. 홀에서도 그랬듯 몇 명의 여자들이 그에게 유혹의 인사를 건네 왔지만, 그는 지금 그런데 신경 쓸 여유도 관심도 없었다.

“안됩니다.”

갑자기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부턴 관계자 외 출입금지에요.”

우신은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눈앞의 보이를 쳐다보았다.

“사장님은 이쪽에 계십니까?”

“사장님?”

“비혈파 보스 이후준.”

“읍……!”

정확히 간장 부위를 얻어맞은 보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딴 한 방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가격하기에는 간장이 최고다. 보이는 ‘헉’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꺾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입을 벌려봐야 소리가 나지 못하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침이 줄줄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런 상대의 옆구리를 사정보지 않고 연속으로 차주었다. 구두 끝에 맞자 다시 무너진다.

“이후준은 이 안쪽에 있나?”

보이가 컥컥거리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신은 주머니에서 꺼낸 유리조각 끝을 그 목젖에 들이댔다.

“잘 들어. 소리 내면 죽는다.”

보이의 안색이 허옇게 질렸다. 그는 목을 비틀려했지만 헛수고였다.

“오늘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애가 여기 안 왔었나?”

“으, 읍…….”

“대답해.”

“읍…….”

우신은 훗, 하고 웃으면서 목에 댄 파편을 좀 더 세게 눌렀다. 한줄기 피가 길게 배어나왔다. 그 감촉은 보이를 겁먹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눈물이 감은 눈꺼풀을 뚫고 줄줄 배어나와 흘렀다.

“말해.”

“저, 전 방금 교대했어요. 모, 몰라요……, 정말…….”

“좋아. 그럼 이후준이 있는 곳에 안내해라. 딴 짓했다간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 둬. 알았나?”

보이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눈을 하고 끄덕였다.







사방에서 네 개의 눈이 노려보고 있다.

우신은 자신을 둘러싼 네 개의 총구를 느끼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여기까지 그를 안내해 온 보이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우신은 자신 때문에 죽은 젊은이에게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찼다. 거의 즉사에 가까웠다는 것이 한 가닥 위로였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확인해봐야겠는데.”

책상 너머에 앉아 있던 중년남자가 의자를 빙글 돌렸다. 방금까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바다의 야경을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은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했다. ‘바다 위에서의 카지노’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매춘, 약, 밀수’ 같은 음성분야에서만큼은 다른 어떤 조직도 넘볼 수 없을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는 비혈파의 보스는 턱을 약간 처든 자세로 우신을 가만히 보았다. 방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은 가볍게 깍지를 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혀 놀라지 않은 태도였다. 과연 보스.

검은 양복을 걸친 부하들이 좌우로 각각 두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성능 좋아 보이는 권총이 들려 있었고, 그 중 한 권총의 총구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이를 쏜 바로 그 권총이다. 우신은 잠시 그 총구 끝을 노려보았다.

“사립탐정이라……. 흐음, 그 자식의 심복인가?”

이후준은 깍지 낀 손을 들어 입을 약간 가린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이 누군지 모르지만 이 몸은 누구의 심복도 아닙니다.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죠.”

“사람?”

“유하연의 아들.”

“아, 유하연. 그, 보석에 미친 여자 말인가. 헛수고를 했군. 유감이지만 그 여자 아들은 여기 없는데.”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뭐, 정녕 살아 돌아가기 싫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아도 좋네.”

“살아 돌아가고 싶고, 유하연의 아들도 데려갈 겁니다.”

“훗!”

이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든 유리조각 한번 살벌하군, 총각. 그걸로 권총 넷을 이겨보겠단 속셈인가? 애송이?”

우신은 유리조각을 보란 듯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원래 이런 식의 무기는 사용 안합니다.”

“저런, 그것뿐이면 그거라도 써야지.”

“대신 다른 무기를 쓰도록 하죠. 제겐 고객 명부가 있습니다.”

이후준의 한쪽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고객명부? 어떤?”

“설명이 필요합니까? 서명의 선생이 갖고 있던 것 말입니다. 마약 거래명단이 줄줄이 적혀 있는.”

“네놈이었군!”

갑자기 이후준이 책상을 내리쳤다.

“습격한 건 네놈이었군! 역시 그 자식의 심복이었어!”

“습격? 그 자식?”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이진호와 서명의를 습격한 건 네놈이 아닌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쪽이 한 짓 아니었습니까?”

“시치미 떼지 마!”

우신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반용수는 비혈파의 핵심멤버가 아니었던 것인가? ‘그 자식’이란 대체 누구인가? 우신뿐만 아니라 책상 앞에 있는 이후준과 그 부하들도 얼굴을 곤혹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명부는 경찰로 넘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타격을 꽤 입으실 텐데요. 괜찮으십니까?”

“이런 좆같은! 그 새낀 대체 뭘 노리는 거야?”

이후준이 큰 소리로 외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경악한 얼굴로 동작을 크게 멈췄다. 돌아보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 등에 작고 동그란 구멍이 선명하게 뚫려 있었다. 부하들이 놀라 창에 총구를 겨눴을 때는 이미 두 번째 총격이 가해진 상태였다.

“으아아아아아악!”

절규와 함께 이후준의 머리가 박살났다. 터진 머리로 뇌수가 흘러 책상 위로 번졌다. 격심한 경련과 함께 중년남자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커다란 창으로 비치는 밤바다를 뒤로 한 채, 검은 잠수복을 입은 이진호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등에 걸려 있는 산소통을 보아 여기까지 헤엄쳐 온 모양이었다. 손에 들린 것은 언뜻 보기에도 성능이 좋아 보이는 머신 건. 그의 킬러로서의 능력은 가히 최고급이었다. 우신은 감탄했다.

실은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후준을 쓰러뜨린 이진호였지만, 그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총구는 순간적으로 경직되어버린 나머지 부하 네 사람에게도 겨눠져 있었던 것이다. 이진호가 망설임 없이 머신건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 우신은 바닥을 박차고 통로 쪽으로 날아들었다. 그 바로 뒤에서 격한 총격전이 이어졌다!

통로에 머리를 감싸고 엎드려 있는 우신의 귀를 총소리가 파고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부하 한 놈이 비틀거리며 복도에 나타났다. 몸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었고, 남자는 이내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놈이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 질리도록 계속되던 총성이 멎었다.

벽은 거의 벌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우신의 등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는 슬쩍 눈을 들어 앞을 살폈다. 아까 쓰러진 남자의 발아래 총을 쥔 팔이 마네킹 인형의 그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남자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벌려 총을 빼냈다. 확인해 보니 탄환은 두 발이나 남아 있었다. 우신은 권총을 손에 쥔 채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창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고 창 너머에 있었던 이진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구멍 난 창문을 통하여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방안의 참혹한 풍경과 대조적으로 창문 너머로 미치는 야경은 눈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방안은 완전히 피의 홍수였다. 통로에 있는 검은 양복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부하들이 망가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우신은 야경에서 시선을 떼어 책상 앞에 엎어진 중년남자를 감정이 배제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이런 식으로 끝이 날 줄, 남자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가 산산조각 나서 신원을 알아 볼 수 없는 시체는 보기에도 지독했다. 부하들의 시체도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 새 약속했던 1시간 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신은 창쪽으로 다가가 위를 올려다봤다. 검은 로프가 늘어진 채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지만, 바다 어디에도 이진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신은 작게 한숨을 쉬고 눈썹위에 직각으로 손을 짚은 채 해안 저편을 바라봤다.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저게 뭐지? 우신은 이후준의 책상 위에 있는 쌍안경을 집어 들어 눈에 갖다댔다.

뭔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소방차가 모여들어 진화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고, 구경꾼일 것이 분명한 차들이 부두에 가득 모여들어 있었다. 우신은 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관찰했다.

“하아…….”

그것은 다름 아닌 한 척의 배였다. 낯익은 배, 경찰의 순찰정.

우신은 다시 한번 이진호의 용의주도함에 경의를 표했다.



계속.

슬슬 결말로 치닫을 시간이군요.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보시길 바랍니다. 퍼즐을 맞춰보는 거죠.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

댓글 '1'

은기

2005.01.18 23: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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