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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12. 상황정리
정말이지 쉴 여유를 안 주는군, 쉴 여유를.
우신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막으면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이야, 사건도 맡고 여자도 사귀고, 님도 보고 뽕도 따네? 누구 팔자는 참 조오컸다. 꼴은 참 말이 아니지만. 누구한테 맞아 그 지경이 된 거야?”
담배를 든 표치현의 말에는 반감이 통째로 묻어나왔다. 우신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지해를 힐끗 본 다음, 다시 치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꾸 까불지 마.”
“이거 왜 이래? 약점 잡힌 건 그쪽이야. 니가 그 동안 탐정 짓 하면서 저지른 범법행위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다? 그저께는 민간인 주제에 총기소지를 버젓이 하고 있었던가? 경찰을 물로 보나, 씨발.”
분명히 사무실 입구에 「CLOSED」라고 쓰인 플레이트를 떡 걸어놨는데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벨을 눌러 집주인을 심란하게 만든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향해 마구 독침을 날리고 있었다. 우신은 지해를 보고 잠시 고갯짓을 통해 비켜달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서명의를 알아?”
레모네이드 두 잔을 갖다놓은 지해가 방으로 들어간 후, 우신이 물었다.
“그게 누군데.”
“1년 전의 레스토랑 폭발사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를 치료해준 의사다. 이진호, 진희 남매. 신문에서 본 적 있을 거야. 이 사건에 관련이 있다. 오늘, 중앙병원에서 퇴직한 놈의 행방을 알아냈어.”
연기를 토해내던 치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멋져, 민우신. 그리고?”
“그리고 비혈파 킬러가 누군지, 구한열의 다리를 쏜 녀석의 정체까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짐작은 하고 있어. 아마 맞을 거다.”
“이래서 내가 널 내치지 못하겠다니까.”
담배를 입에 문 채, 치현이 손뼉을 짝 하고 때렸다.
“사실은 내치기 위해서 왔던 건데 말이지.”
“그럴 줄 알고 있었어.”
우신은 전혀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치현이 씩 웃었다.
“뭐, 너한테 묻고 싶은 건 산더미지만 우선 이쪽 얘기를 들어야겠어. 내가 널 걱정해서 여기 왔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우신은 쓴 미소를 흘리면서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그 정도로 한가한 놈도, 그 정도로 곰살궂은 놈도 아닌 것이다. 표치현이란 인간은.
“바로 그 이진호 집에서 살인이 났어. 근처 술집 주인이 그러더라, 네가 이진호 뒤를 캐고 다니는 것 같다고. 마침 현장을 조사해보니 이진호 피랑 네 구두자국이 남아 있더라고. 이진호란 인간, 핏자국만 봐도 상처가 장난 아니던데. 누군가 도와주지 않고서야 그렇게 감쪽같이 튈 수 있었을까?”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치현에게, 우신은 잠깐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내고 화장실로 되돌아가 찬장에 넣어두고 온 노트를 꺼내왔다. 치현은 노트를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현이 노트를 팔락팔락 넘기는 걸 보면서 우신은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 오늘 있었던 사건의 거의 전부를.
치현은 잠자코 담배를 피우면서 우신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도 되는 거지?”
“아.”
치현의 말에 우신은 끄덕였다. 노트에 있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중에 필요한 것들은 대충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그런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인 것이다. 갖고 있으면 외려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모른다.
경찰에 복무하고 있는 친구는 우신의 말을 다 듣고 난후부터는 노트를 넘겨보며 긴 침묵에 잠겼다. 이럴 때의 치현은 절대 방해불능이다. 평소 입이 험한 만큼이나 침묵하고 있을 때의 그도 무섭다.
우신은 그런 친구를 슬며시 보고는 커피를 뽑기 위해 키친으로 향했다. 지해가 만든 레모네이드는 맛은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입술 안쪽이 쩍쩍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역시 항상 마시던 게 최고다.
“좋아, 정리해 보자.”
커피를 가지고 오자, 그새 담배를 눌러 끈 치현이 입을 열었다.
“이진호는 비혈파에게 킬러로 고용됐겠지. 레스토랑 폭발사고 후에 비혈파의 보스 이후준은 이진호 형제의 뒤를 봐줬다. 이진호 형제의 담당의사는 서명의. 때마침 그 병원에는 유하연의 아들도 입원해 있었다. 서명의는 병원에 들르는 유하연에게 반해버렸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병원의 약에 손을 대게 됐고, 그로 인해 해고까지 당했다. 쯧, 빙신 같은 놈.”
치현의 무릎 위에 있는 노트에는 유하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신을 격한 배신감에 휩싸이게 했던 그 이름. 조금 의심은 했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던 이름.
“한편 김성민은 비혈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혼자 몰래 유하연에게 돈을 뜯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이 비혈파 쪽에 들통 나 버린 덕에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 명탐정 민우신 씨가 비싼 몸으로 현장에 몸소 입회까지 해주셨던 빅 해프닝이었어.”
“적당히 좀 해라.”
우신은 또 다시 쓴 웃음을 토해냈다.
“어쨌든 그 최후에 한몫한 건 현재 비혈파의 핵심멤버가 된 반용수였다. 그들은 진홍루를 미끼로 구한열을 불러낸 다음, 그 자리에 이진호를 투입했어. 뭐 김성민 정도 꼬붕이 죽는 거야 비혈파나 이후준에게는 좆도 아닌 일이었겠지. 그러나 문제는 아마도 그 다음이었을 거다. 뭔가가 바뀌었다.”
“뭔가라…….”
그 뭔가가 대체 무엇일까. 아직도 퍼즐 조각은 몇 개인가 아주 중요한 부분만 골라 빠져 있다. 그 조각을 찾아야 해.
“뭔가가 뭔지는 지금으로선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암튼 그 일로 인해서 비혈파 측은 이진호를 처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먼저 선수를 쳤지만 당한 건 외려 그쪽이었지. 하지만 전혀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이진호의 여동생을 납치할 수 있었으니까.”
“흠.”
“이진호가 도망친 장소를 아마 비혈파 쪽은 예상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해. 바로 이후준은 비혈파 놈들을 서명의의 은신처로 보냈겠지. 네가 갇혀 있었던 바로 그곳 말이야.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이진호와 서명의는 동작 빠르게 도망쳐 버린 참이었다. 생존본능이란 게 있으니.”
우신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쯤 이 노트를 땀나게 찾고 있을 테지.”
“훗, 이걸로 비혈파 놈들의 마약루트를 잡을 수 있겠어. 사랑한다, 친구!”
치현은 거북스런 동작으로 우신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예뻐 죽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려는 우신의 몸을 한참이 지난 뒤에야 놓아주더니, 커피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입구로 향하는 그의 등에 대고 우신은 소리쳤다.
“말해두겠는데 저 아가씨랑 나, 아무 사이도 아냐!”
비웃는 것처럼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기우뚱하고 강하게 흔들렸다. 우신은 들고 있던 컵을 필살의 인내력으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니, 그 자신은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컵은 그가 노리던 포인트를 빗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난 요란한 소음은 전혀 그의 청각을 건드리지 못했다.
소리를 잃은 채, 그의 얼굴과 지면이 부드럽게 충돌했다. 그것은 네 번째 기절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었지만, 적어도 잠들어 버린 남자는 그 사실을 부정할 만큼의 자기 과시욕과 자존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신은 아득한 어둠의 세계로 단숨에 빠져 들어갔다.
목이 마르다.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으윽……, 누구라도 좋으니 물 좀…….
수면의 세계를 방해받고 싶진 않았지만 수분에 대한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우신이 입술을 들썩거리자, 누군가가 입술 위로 무언가를 갖다대더니 이윽고 시원한 물줄기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우신은 물을 벌컥거리며 정신없이 삼켰다. 음미할 정신도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물을 정신없이 마시면서 어느 새 베개가 머리맡에 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몸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다. 우신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아진 손바닥의 감촉을 기분 좋게 느끼면서 다시금 잠의 물결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몽롱한 파도 속을 헤엄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우신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침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물컹물컹한 정도와 감촉으로 봐서 사무실 소파였다. 그래도 베개는 착실히 베고 누운 상태였고, 위에 얇은 여름이불도 덮여 있었다.
“윽!”
무심코 오른팔을 짚고 일어나려던 우신은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어제 탈구되었다가 끼워 맞춘 오른팔이 장난 아니게 쑤셔왔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도 통증을 없애는데 큰 도움은 안 된 모양이다.
겨우 오른팔의 아픔이 가시자 이번에는 다른 부위들도 차례차례 통증을 호소해왔다. 전신이 삐걱삐걱 흐물거리며 춤을 췄다. 머리 세포가 꾸깃꾸깃 구겨지고 뭉개져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상냥한 소리가 났다. 이것은 환청일까? 그녀와 비슷한…….
우신은 왼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면서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자.”
눈앞에 뭔가가 내밀어졌다. 머그 컵이다. 컵 안을 들여다보니 커피였다. 우신은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체크무늬가 프린트된 여름 원피스를 입은 지해는 시원해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하는 타입이죠?”
“고마워.”
우신은 왼손으로 머그 컵을 받았다. 지해는 생긋 웃더니 개인 공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도 온몸이 삐걱거렸지만, 우신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엉금엉금 따라갔다. 들어가자마자 자리 잡고 있는 키친이 구수한 냄새로 가득 차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냄새에 자극받은 위장이 꼬륵 하고 노골적인 소리를 울리는 걸 들었다.
“어제 뭘 좀 먹었어요?”
그러고 보니 전혀. 하다못해 물조차 마신 기억이 없다.
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해도 대답을 들으려고 던진 질문은 아닌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주방 일에 열중했다. 우신은 커피를 마시면서 키친의 2인용 테이블에 주춤주춤 주저앉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꼴사나웠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더 앉아있을 기운이 없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밑반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우신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으니, 지해가 나가서 장만해 온 것이 분명하다. 우신이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해가 갓 지은 따끈한 쌀밥과 미역국을 쟁반에 얹어가지고 왔다. 우신은 멍한 머리를 한 채로 그것을 들여다봤다. 쌀밥은 고슬고슬 찰기가 어려 있었고, 미역국에는 고기가 들어 있었다.
“냉장고에 먹을 거라곤 냉동고기밖에 없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조금.”
“아……, 집에서 잘 안 먹으니까. 특히 아침은.”
우신은 말하면서 냉장고 위에 얹혀져 있는 시리얼 박스로 눈을 돌렸다. 언제나 아침을 대충 때웠던 건 아니다. 다만 그녀가 죽은 이후로는 그랬다. 예외 없이 그랬다. 그런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어제 거의 굶은 거 같으니까 오늘 아침은 잘 먹는 게 좋아요.”
지해는 조용조용 말하고는 자신도 마주앉아 수저를 들었다. 우신도 수저를 들고 국물을 입에 넣었다. 어, 제법인데?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배가 워낙에 고팠었던 탓일까 음식은 놀랄 만큼 맛이 있었다. 젊은 여자가 한 요리라기보다 베테랑 주부가 만들었대도 믿겠다고 우신은 생각했다.
“요리완 영 안 어울린단 느낌이었는데.”
“그런 거 선입관이에요.”
한참 밥을 먹던 우신이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지해는 새침하게 말하더니 이내 쑥스러운 표정으로 변하며 덧붙였다.
“사실 한식은 잘 못해요. 일식은 좀 하지만…….”
“일식?”
“몰랐어요? 나 야쿠자 딸이잖아요. 어릴 때 내내 일본에서 살았는걸.”
“……아.”
우신은 눈을 깜박거렸다. 몰랐던 건 아니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
“어쨌든 부려먹은 거 같아 미안한데.”
“여기 있게 해준 보답이에요.”
“경찰이라면, 그리 신경 안 써도 될 거 같아. 어제 우리 집에 와서 보고도 아무 말 안했던 거 알지?”
“네…….”
지해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아니, 나가달란 뜻은 아니고…….”
“알아요. 미안해요. 폐를 끼쳐서.”
“당분간은 있어도 돼. 여기 있음 더 위험해질 것 같아서 그렇지.”
그 말에 지해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규해 찾을 때까지만 있으면 안 될까요? 규해는 괜찮을까…….”
“동생은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지해는 가만히 있었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또래에 비해 당돌하고 어른스러운 이 소녀가 그럴 때면 아직 여대생의 티를 벗지 못한 보통 아가씨로 돌아간다. 우신은 그런 그녀를 보고 조용히 물었다.
“왜 그렇게 어머니를 싫어하지? 동생은 어머니가 다른데도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잖아. 동생을 봐서 어머니도 좀 잘 봐드리면 안돼?”
그러나 그가 유하연의 이야기를 꺼내자 소녀는 단숨에 딱딱한 표정으로 변했다. 수저를 국그릇에 내려놓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우신은 예상 이상의 반응에 놀라서 지해를 잠자코 보기만 했다.
“그 여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거예요. 그 여자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그 여자의 전부는 그 보석인 걸.”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엄마잖아.”
“아뇨.”
지해는 야무지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에 규해가 진홍루를 훔친 적이 있었어요. 반은 장난이었죠. 그 여잔 내가 그런 줄 알고 내 따귀를 때렸어요. 규해는 얻어맞는 날 보고 더럭 겁이 났는지 자기가 한 짓이라고 자백했죠. 훔쳤다가 그만 잃어 버렸거든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여자 몰래 제자리에 갖다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잃어버렸다고?”
“네.”
“그 뒤엔 돌아온 거잖아? 그러니까…….”
그 때 잃어버렸다면 이번 의뢰 건이 들어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우신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지해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같은 종류의,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보석, 특이하긴 해요.”
“다이아몬든데 붉은 색이라서?”
우신은 당연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해는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그 보석 가치의 절반밖에 못돼요. 크기도 별로 크지 않은데 그렇게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이유가 단지 그뿐일 것 같아요?”
“그럼 또 뭐가 있어?”
“진홍루는요, 기온에 따라서 색이 변하는 보석이에요.”
지해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색이……, 변해?”
“봄에서 가을정도의 기온에는 보통의 붉은 색이죠. 하지만 겨울엔 달라져요. 아주 추운 날, 그러니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보통의 다이아몬드 색, 투명한 흰색으로 변한다는 말이에요. 굉장히 반짝거리죠. 정말 예쁘긴 해요. 그게 이미테이션과 다른 점이기도 하구요. 이미테이션은 그저 붉은 색이지, 절대 그 색깔이 다르게 변하진 않으니까요.”
그런 보석이 있다고 언뜻 들어본 기억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그런 보석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규해가 훔쳤던 건 이미테이션이었어요. 그 땐 겨울이었고 규해는 그걸 바깥에 갖고 나갔는데도 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훗, 둘이서 죽도록 얻어맞고 나서 그 다음 날 저녁, 파티에 다녀오는 그 여잘 봤어요. 허, 참! 목에 목걸이가 버젓이 걸려있더라고요. 첨에는 보통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길래 진홍루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근데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집에 들어온 그 여자가 소파에 드러눕는데, 점점 색이 변하더군요……, 빨갛게. 그래요, 진짜는 자기가 잘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고작 이미테이션 때문에 우린 그렇게 얻어맞았던 거죠! 고작 이미테이션 때문에! 그 여자의 허영에 위협이 될 뻔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에요! 도대체 믿어져요?”
지해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때의 사건만이 아닐 것이다. 보석에 집착하는 새어머니로 인해 받은 여러 상처들이 결국 그녀의 가슴을 굳게 닫은 모양이라고 우신은 생각했다.
“그 때 보석의 색이 변한다는 걸 알게 된 건가?”
“그래요. 아마 어지간한 보석 애호가가 아닌 한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일 거라 생각해요. 나랑 규해도 보기 전엔 몰랐었으니까.”
지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잠깐.”
말하고 우신은 사무실로 가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사무실 전화를 받을 때의 우신은 언제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돌아간다. 사실 여느 때 같으면 영업을 시작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 …….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십시오.”
전화를 걸어온 상대가 이런 식으로 침묵을 지키는 일은 자주 있다. 아마 망설이고 있는 것이겠지. 우신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한참의 침묵 끝에,
- ……저어, 민우신 씨……, 되세요?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우신은 눈을 한번 깜박였다. 이봐. 양반은 못되겠어. 그는 잠시 호흡을 두고 한 박자 쉬었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규해. 박규해 맞지?”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