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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ing Back
몇 분이나 흘렀을까.
우신은 간신히 눈을 떴다.
꿈도 꾸지 않은 걸로 보아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 같다. 땅에 얼굴을 박고 있는 그의 눈에 흙과 물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무심결에 오른손을 들어 눈가에 붙은 걸 털면서 제대로 뼈가 맞물렸음을 깨달았다. 물론 통증도 있었고 위화감도 있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방해물은 되지 않을 만큼 제 위치에 돌아온 것 같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것이어서, 손바닥을 땅에 짚고 일어나면서 우신은 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토해내야만 했다. 직업을 잘못 택했나 보다. 몸이 아직까지 무사한 게 신기할 정도니.
우신은 절벽에 서 있는 건물을 한바퀴 돌아 내려갔다. 바다와 반대방향인 쪽으로 내려가자 젊은 청년들이 길에 주저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별로 건실해 보이지는 않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이쪽을 알아차렸는지 우신에게 싱글거리는 웃음을 보내왔다. 우신 역시 욱신거리는 몸을 버티고 선 채 그들에게 씩 웃음을 돌려보냈다.
“이야, 아저씨 꼴이 말이 아닌데.”
“누구랑 맞짱 떴어요? 가관이네 그랴.”
“야, 야. 고만해.”
셋 중 둘이 건들거리며 다가오자 나머지 한명이 손을 내저으며 불렀다.
“보아하니 암 것도 없다. 괜히 건드려서 힘 빼지 말고 그냥 둬.”
“이씨, 태클은.”
“건들려던 거 아냐. 심심해서 초삥 좀 뜯을까말까 하던 거지.”
하면서도 앞으로 나오려던 두 명은 발을 멈추고 뒤로 돌아 동료 쪽으로 돌아왔다. 그냥 두라고 말한 녀석이 우신 쪽으로 길게 고개를 빼더니, 그리 악의는 담기지 않은 투로 말을 꺼냈다.
“아저씨, 어데 아파요? 아님 아저씨도 하나 얻으러 온 거야? 거기 그래 뵈도 의사 선생이 사는 건물이에요. 뽕 선생이라고, 알아요?”
우신은 쓴웃음을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헤, 아저씨. 뽕 선생이랑 아는 사이요? 안 그렇게 보였는데.”
“음, 그럭저럭…….”
아, 제길. 누구더러 자꾸 아저씨, 아저씨 그러는 거냐. 니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종자들이니 그냥 넘어가지만 서른 갓 넘은 사람한테 아저씨라 함 듣는 아저씨 열나지. 우신은 속으로만 씨부렁대고 있었다.
“뽕 선생이라면 좀 아까 아침에 누군지 데리고 가던데.”
하고 방금 물어본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신은 눈을 크게 떴다.
“어느 쪽으로 갔지?”
“몰라요. 엄청 허둥대면서 가든데. 꼭 꼬리 말고 내빼는 거 같더라고요.”
우신은 그 말을 듣고서 도로 건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놈들이 가버린 이상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돌아가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죄다 확인해 보는 편이 낫다. 알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건물에 들어가자, 그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옷장의 서랍이란 서랍은 죄다 빠져나와 있고, 옷가지가 어지럽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책상 위에는 책이며 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우신은 바닥에 널려 있는 옷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안으로 걸음으로 옮겼다.
건물 거실에는 제법 괜찮은 벽난로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직도 장작이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었다. 여름에 웬 난로? 우신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이 갇혀 있던 방을 발견했다. 아니, 그 방이라고 생각되는 방문을.
방은 잠겨 있을 터였다. 방문 앞까지 가자 그 앞에 우신 본인의 권총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신은 그것을 집어 들어 살폈다. 운 좋게도 장전된 탄환은 고스란히 안에 들어 있었다. 권총을 안주머니에 넣는 동작으로 인해 오른팔 위쪽에 또 다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우신은 순간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참을만해, 참을만해,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우신은 처음에 본 거실 형 서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짚이는 게 있어서였다. 벽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안쪽을 쇠꼬챙이로 쑤셔보니, 안에서 미처 다 타지 못하고 그슬리기만 한 스프링 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지와 앞쪽 몇 페이지는 죄다 타버렸지만 나머지는 그럭저럭 남아 있었다. 그 노트를 손에 들었을 때 갑자기 밖에서 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
우신은 창쪽으로 가서 조심스레 밖을 엿봤다.
쩝 하는 소리가 절로 입술 밖으로 샜다. 이런, 이런, 쉴 여유를 안 주네. 무려 세대의 차가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튀어요!”
밖에서 아까 부딪친 꼬맹이들의 외침이 들렸다. 우신은 창을 열고 뛰어내렸다. 1층이라 별로 쇼크는 없었다. 땅에 착지한 그에게 꼬맹이들이 흥분한 표정으로 질문을 연거푸 던져왔다.
“아저씨 잡으러 온 거 아니에요? 혹시 비혈파랑 원수 졌어요? 그럼 빨랑 도망가요! 그 꼬봉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
“비혈파……?”
“으아, 이 아저씨 암 것도 모르는 쑥맥이네. 됐어요, 빨랑 가요! 이 근천 꽉 잡고 있는 놈들이라고! 아저씨도 걸리면 골 아파지니까, 빨리!”
우신은 잽싸게 다리를 움직여 세 꼬마 녀석들의 뒤를 따랐다.
정신없이 따라가다가 보니 어느 덧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라있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갑자기 차 생각이 났다.
‘내 재규어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바로 그 순간, 이제까지는 보이지도 않던 것이 갑작스레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세 놈 중 한 놈이 양팔 가득 들고 있는 물건, 그것은 우신에게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이 자식들, 내 카 오디오를!”
어깨뼈의 탈골에도 불구하고 녀석들과 주먹으로 타협한 끝에, 카 오디오를 제외한 차의 전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오른쪽 어깨의 탈골만 아니었다면 전혀 사정 봐주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우신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길을 안내해준 놈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므로.
차를 출발시킨 우신은 왼팔로 운전을 하면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가 간 끝에 누군가가 수화기를 집었고, 이어 이틀 동안 벌써 귀에 익어버린 조심스런 음성이 응답을 보냈다.
- 여……보세요?
“나야.”
- 어? 어젠 왜 안 들어왔어요? 몸은 괜찮은 거예요?
걱정스런 지해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우신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리 괜찮진 않은 것 같군.”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팔을 약간 삐끗했어. 뭐, 그 정도.”
- 거짓말 마요!
수화기 너머로 무시무시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우신은 순간적으로 핸들에서 손을 뗄 뻔했다.
“어이, 왜 그래? 하마터면 핸들 놓칠 뻔했잖아.”
- 핸들이라니, 운전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럭저럭. 삐끗한 정도랬잖아. 지금 가고 있는 중이야.”
- 언제쯤 도착할 거 같아요?
우신은 손목시계를 힐끗 들여다보고 대충 어림잡아 시간을 말해주었다. ‘그럭저럭’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오른팔의 욱신거림은 장난이 아니었다.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 쉬고픈 생각뿐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쉬기’ 전에 딴지가 들어올 것 같았다, 지해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리고 그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우신이 그의 사무실 겸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질 급한 소녀는 건물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와 차를 보더니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온다.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 모습은 묘하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구석이 있어서 우신은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어린 소녀다. 어른스러운 척 해도 어린 소녀.
“어디가 아픈 거예요?”
헐레벌떡 달려온 지해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깨가 조금…….”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우신의 몸을 훑어보더니 소리쳤다.
“그래서 왼손으로 핸들을 쥐고 있는 거예요? 혹시 부러지거나 탈골된 거 아니에요?”
족집게로군. 우신이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는 얼굴에 인상을 팍 쓰더니 명령조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자리 바꿔요.”
“응?”
“자리 바꾸자고요. 내가 운전할게요.”
“할 줄 알고 그러는 거야?”
“누굴 바보로 알아요? 나 미성년 아니에요. 안전운전이니까 걱정 말고. 지금 나한테 그렇게 버팅길 게재가 돼요?”
되게 긁네. 너무 세게 나오는 거 아냐? 이래서 여자는 피곤하다니까.
하지만 우신은 한층 피곤한 상황을 만들 그런 말은 하지 않고, 잠자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려 자리를 바꿨다. ‘주차장까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라고 우신이 투덜거리고 있는데 지해가 갑자기 차의 방향을 확 틀었다. 우신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운전석의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냐뇨. 보면 몰라요? 병원 가려는 거죠.”
“뭐? 살짝 삐끗한 걸 가지고 무슨……. 아니, 아니, 잠깐 탈골되긴 했지만 내가 알아서 잘 맞췄으니까 신경 안 써도…….”
“의사면허 있나보죠? 혼자 진단을 다 내리네.”
지해의 날카로운 한 마디에 우신은 입을 다물었다. 결국 그는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톡톡히 ‘여자의 피곤함’을 맛봐야만 했다. 지해는 보기와 달리 정말 엄청난 잔소리꾼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결혼하면 엄청난 바가지 와이프가 될 거다.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있는 우신이었다.
치료를 끝낸 우신은 지해가 운전하는 차에 태워져 집에 돌아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막 내리려던 지해는, 우신이 뒷좌석에 손을 뻗쳐 뭔가를 집는 걸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그거?”
“자료.”
우신은 ‘뽕 의사’의 아지트에서 발견한 노트를 왼손으로 집으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불에 그슬린 노트는 제법 빳빳했다.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이 여기 담겨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직감이었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우신은, 볼일이 급한 척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위에 앉아서 노트를 펼쳤다. 펼치기 전부터 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노트가 뭔가의 고객명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뭔가가 아마 마약일 거란 사실을. 오늘 만난 어린 양아치 녀석들이 말했었다……, ‘뽕 의사’라고.
밖에서 지해가 다급하게 그를 부를 때까지, 우신은 변기 위에 앉아 찬찬히 노트를 넘겨 갔다. 그 수확은 예상보다도 거한 것이었다. 거기서 아는 이름을 무려 세 개나 발견했으므로. 그 중에 둘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을 보았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벌떡 변기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어째서 짐작하지 못했을까? 결코 믿고 있진 않았으면서.
제기랄!
우신은 저도 모르게 맞은편 욕실 벽을 강하게 걷어차고 말았다. 이런 좆같은! 최초의 최초부터 속고 있었던 거다.
“저기요…….”
지해가 문을 두들겼을 때서야 그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직 멀었어요?”
“지금 나갈 거야. 왜?”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문 너머의 지해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밖에 손님이 와 있어요. 아마……, 경찰인 것 같아.”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