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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7. 판도라의 상자
마구 울어버렸어, 겨우 두 번째 본 남자 앞에서.
나……,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던가?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온 지해의 눈에, 침대 위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에 진한 카키색 티셔츠를 입은 그는 30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젊어 보였다.
확실히 옷이 잘 받는 체형이야. 센스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그녀는 속으로만 나직이 웃었다.
“울다가, 웃다가, 엉덩이에 털 날 짓만 하는군.”
그런 그녀를 보더니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털 같은 거 안나요. 보여드려요?”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우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근데 여자 옷 어디서 났어요? 애인 거?”
지해는 자신이 입고 있는 면 원피스 자락을 들어 보였다. 집에서든 밖에 나가서든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오렌지색 면 원피스였다. 의외인 건 제법 세련된 물건이란 사실이다.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 남자가 챙겨준 옷이었다. 민망하게도 근처 편의점에서 속옷까지 사다준 우신이었다.
“대답을 들으면 별로 입고 싶어지지 않을 걸? 묻지 말아 줘.”
남자가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지해가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침대를 툭툭 두드린다.
“시트, 방금 갈았어. 여기서 자. 난 거실 소파에서 잘 테니.”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성의는 고맙지만 한 침대에서 자자는 건 사양하겠어. 좁은 싱글베드에 둘이 끼어 자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끔찍하다는 표현을 쓸 것까지는 없잖아요.’
지해는 목구멍 끝까지 새어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아니,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자는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아, 어떻게 하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지해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기로 버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린 자신이 바보로 느껴진다. 남자가 준 맥주를 울면서 한 캔 다 마시고 조금 진정한 그녀에게, 씻는 게 어떠냐고 그는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따라 샤워를 하고 있던 그녀에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벽 너머의 남자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음을 알렸던 것이다.
그렇다. 위로의 말 같은 건 한마디도 안 했지만, 우신은 지금 당장 그녀가 필요로 하는 걸 전부 주었다. 겨우 하루 동안에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위로는 충분했다.
저 남자는 확실히 어른이다.
억지로 발돋음하려는 자신보다 훨씬.
지금 내가 느끼는 희미한 감정은……, 동경?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그녀는 이곳에 와 있었다. 달리 갈 데가 없었으니까. 이제껏 헛살았나 보다.
남자는 밖에 있을 것이다. 긴 다리가 밖으로 빠져 나오는 소파에 누워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고 있을 것이다.
지해는 불을 끄고 조심조심 침대에 누워 보았다. 네모난 창문을 통해 달과 아주 흐릿한 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작지만 보일 건 다 보이는 창.
이 건조한 도시에서 저런 창이 있는 곳에 잠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별은 거의 없었지만 달빛만으로 충분히 취해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규해야, 지금 뭘 하고 있니.
몸도 약한 동생이다. 아버지가 폭발사고로 죽었을 무렵, 동생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규해는 신장이 좋지 않았다. 한 달에 한번씩은 병원에 꼭 가야만 했고, 입원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을 정도다. 아버지만 같은 동생이지만, 지해에게 남은 건 규해 뿐이었다.
야쿠자 보스였던 아버지가 모든 영화를 뒤로 한 채 한국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 새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었기 때문이었다. 롯본기의 호스티스였던 새어머니가 동생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줄곧 어머니를 만나오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을 터인데, 막상 동생을 보자 그런 생각은 그대로 사라졌다. 덩달아 새어머니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는 그랬다. 새어머니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 전까지는 말이다.
오래도록 새어머니와 친구였다던 구한열이라는 남자가 지독히 거슬렸다. 그녀까지도 의심이 갈 정도인데 아버지가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다. 모든 걸 그만두고 쉬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그는 통찰력 같은 걸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마지막 기억은 바보처럼 한심하고 덧없이 애틋했을 따름이던 아버지가 죽었다.
어이없이 죽어버렸다.
동생한테까지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하아…….”
잘 수가 없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지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숨죽여 걸어, 문 쪽으로 걸어간다. 밖을 슬며시 내다봤다. 불은 꺼져 있다. 남자는 잠이 든 걸까. 당연한 일이겠지. 많이 불편하게 자고 있을까. 문을 조금 더 열고 긴 소파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없다.
지해는 눈을 한번 깜박이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소파에 남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편, 사무실로 향하는 중간 문틈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 불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우신은 사무실에 있었다.
저도 모르게 거실로 나가 중간 문을 열었다.
“뭐야. 왜 안 자고…….”
그녀를 발견하고,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할 소리예요. 안 자고 뭐해요?”
“조금 찾아봐야 할 게 있어서.”
남자는 인터넷으로 신문기사를 검색하고 있었다. 지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약간 놀라고 당혹한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뭘 그렇게 봐요.”
“아……, 아니. 옷이 맞춘 것처럼 잘 맞아서 좀 놀랐어.”
“이 옷의 원래 주인처럼?”
그녀가 떠본 말에 그는 순간적으로 호흡도 멈춘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숨을 내쉬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애인이죠? 같이 살아요?”
“같이, 살았었어.”
지해는 남자를 고쳐봤다.
“지금은 어디 있어요?”
“죽었어.”
그것은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욱 민망해질 만큼.
“미안해요…….”
“그쪽이 미안할 일이 아냐. 미안한 건 이쪽이지. 죽은 사람의 옷을 입게 해서 미안해. 하룻밤만 참아 줘.”
“…….”
별걸 다 걱정하네요, 란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태연해서 되려 가슴 아팠다. 그의 태도에서 동정을 사려는 기색이나, 자기 과거에 대한 연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미안하고 가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잊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망자(亡者)의 옷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을 만큼.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지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미묘한 것임을 지해는 어렴풋이 느꼈다.
“동생은…….”
자리에서 일어선 우신이 말했다.
“반드시 돌아 와. 별 일 없을 거다. 희망을 가져.”
그는 말하면서,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희망이란 신이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겨 준 가장 잔인한 선물이란 말도 있지만……, 절대 잃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하, 왠지 설교 같은 말투가 되어버렸는데?”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지해가 보기에는 충분히 아파 보이는 웃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신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거의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 옆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입술에 입술을 갖다댔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자문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행동하고 있다.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도장처럼 꾹 눌렀다 뗐다.
“…….”
순간적으로 침묵이 흐른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상대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서서 천천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다. 계속 눈감고 있는 것도 민망해서 천천히 눈꺼풀을 열었다.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도 모른다.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저 감정에 자신을 내맡겨 행동했을 뿐.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충동이라면 행동하기 전에 이미 멈췄을 것이다. 지해는 우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남자는 전부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더니, 이내 싱긋 웃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그녀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기대했지만 예상하지는 않았는데, 상대는 예상을 깨고 다가온다. 큰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이 이번엔 상대 쪽에서부터 포개져 왔다. 먼저 움직인 건 자신인데 저도 모르게 도망치려는 그녀의 입술을 당기듯 베어 문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미끄러져 끼워지고, 혀끝이 입술 라인을 나긋하게 더듬었다.
느껴지는 것은 상대의 숨결.
그리고 온기.
입술 선을 찬찬히 더듬던 혀끝이 안쪽으로 파고 들어왔다. 호흡이 자꾸만 가빠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물러나고 싶었지만, 등을 단단히 감싼 그의 손은 그걸 놔두지 않는다. 치아와 치아가 부딪치고, 설육과 설육이 얽혔다. 마치 몸 전체가 맞닿는 듯 찌릿찌릿한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통째로 그녀를 관통한다. 남자의 몸은 놀랄 만큼 단단하고, 입술과 설육은 상대적으로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공통점은 뜨겁다는 사실. 여름의 더운 공기 속에서 불쾌해야 할 텐데, 놀랍게도 지독하다 싶을 만치 기분이 좋다.
밤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또한 어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몸에 매달릴 것 같은 스스로를 느끼고 지해가 몸을 떨었을 때,
남자가 입술을 뗐다.
“끝.”
방금 전까지 그녀를 탐닉하고 있던 입술 틈을 비집고 새어나온 말.
그 말에 온 몸의 힘이 풀려 그대로 녹아버렸다.
끝? 끝이라니? 그게 무슨…….
“이 정도로 해 두지. 충고하겠는데,”
멍청하게 마주 올려다보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그가 싸늘하게 말을 뱉었다. 하나 흐트러짐 없이 냉정한 목소리다.
“동정은 상대를 봐가면서 해.”
동정?
머릿속으로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해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럴지도 몰라.
자신이 지금 한 행동은 어줍잖은 동정의 표출, 이었는지도.
또 다시 바보처럼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남자 앞을 빳빳한 자세로 스쳐 지나갔다. 발을 멈추고 정신이 들자, 그녀가 선 곳은 남자가 아까 앉아 있던 자리 바로 앞.
컴퓨터 모니터 위를 검게 뒤덮은 화면이 말없이 깜박이고 있었다. 지해는 떨리는 손으로 거의 버릇처럼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폭발사고의 피해자, 기적 같은 치유
화면에 나타난 건 신문 기사. 과장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시키고 기사를 말없이 훑어 내려갔다.
일산 중앙병원 전문의 서명의 씨(40)는 지난 26일 폭발사고로 다친 피해자인 이진희 씨(17)를 수술해서 회생시켰다. 피해자 대부분이 죽은 와중에 거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진희 씨는…….
“이 의사…….”
순간적으로 방금 있었던 부끄러운 일을 잊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튀어나온 기억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응?”
우신이 그녀 쪽으로 다가와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래도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자신까지는 없어서, 그녀는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까지 실려 있다. 약간 퉁퉁한 몸집, 일견 점잖아 보이는 외모. 하지만…….
“이 의사, 기억이 나요. 규해도 이 병원에 입원했었거든요?”
지해는 입술을 깨물며 이마를 찡그렸다.
“새 엄마한테 징그럽게 달라붙었던 남자야. 틀림없어.”
“서명의?”
“그래요. 규해 담당의사도 아니면서 어찌나 자주 얼굴을 비치던지…….”
그제야 지해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턱에 손을 가져가며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의 한쪽 끝을 쥔 듯한 반가움이 우신의 얼굴 위로 강하게 스쳐 지나간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말했다.
“내일 중앙병원에 전화해 봐야겠어.”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