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4. 2년만의 재회





“지해야. 손님.”

“예.”

그녀는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일어섰다. 쟁반에 물 컵을 받쳐들고 방금 손님이 들어와서 앉은자리로 향한다. 카페 창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비쳐 들어왔다. 붉은 기가 강한 걸로 보아 곧 해가 지려는 모양이다.

“커피.”

메뉴 판을 앞에 놓기도 전에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커피, 주문 받았습니다.”

그녀가 별 생각 없이 주문서에 표시를 하고 막 돌아서려 한 순간.

“박지해 씨?”

“……예?”

“아주 바쁘지 않으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남자는 검은 티셔츠에 물이 약간 빠진 진 팬츠를 입고 벙거지 모자를 쓴 차림새였다. 선글라스가 체인형의 줄에 연결되어 목에 걸려 있었고, 뒤꿈치를 드러내는 스타일인 검은 샌들을 신고 있다.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키가 크고 단단한 체형 덕분에 카페에 들어온 순간부터 손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잡아끌었던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일……,”

하고 자신을 올려보는 남자를 마주보다가,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맙소사.
흠, 캐주얼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넥타이를 안 매서 그런가?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됩니다. 손님도 그리 많지 않은데…….”

“커피를 가져와서 얘기하죠.”

지해는 차분하게 말하고는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언니, 저 잠깐만 저기서 얘기 좀 할게요. 손님 오면 바로 일어나서 주문 받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커피를 컵에 담고 쟁반에 올리면서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주인언니에게 말했다. 주인언니가 남자를 넘겨다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누구니? 남자 친구?”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지해는 대답하고 남자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돌아와 보니,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를 보더니 앞의 재떨이에 꽁초를 눌러 끈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

“탐정입니다. 민우신이라고 합니다. 박지해 씨께 좀 여쭤볼게 있어서요.”

남자는 지해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자리에 앉은 그녀를 보고서도 별로 동요가 없다. 하긴 지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2년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머리도 잘랐고 얼굴의 젖살도 빠졌다. 알록달록한 소녀풍 스커트를 입고 갔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교적 어른스런 느낌을 주는 검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그녀다.

무엇보다 그 많은 의뢰인 중, 그것도 의뢰를 거절했던 상대를 기억할 리 만무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지해는 왠지 모르게 섭섭해지려는 자신을 느끼고 당황했다.

“말씀하세요.”

그 섭섭함이 싸늘한 말투에서 묻어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꽤나 당혹해 할 정도의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없어졌단 사실, 아직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네……?”

지해는 순간적으로 남자를 고쳐봤다. 남자는 당연한 반응이란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일단 확인해봤다.

“규해가 없어졌다구요?”

“그렇습니다.”

“가출, 했다는 얘기예요?”

“그럴 수도 있겠죠. 확실치 않습니다만.”

“그래서, 우리 엄마가 동생을 찾아 보라던가요?”

“그렇습니다.”

“어머.”

재미있단 듯 웃는 그녀에게, 남자는 약간 의아한 것 같았다.

“불륜조사는 안 한다면서 실종된 사람은 찾아 주시나 봐요? 두 가지 다 좀스럽긴 마찬가질 텐데.”

“……?”

일순 남자의 몸이 아주 작게 흔들린 것 같았다. 남자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그에 힘을 얻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제야 깨달은 듯 남자의 입가에 천천히, 미약한 웃음기가 번져간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 그대로 오, 하는 감탄의 표정을 떠올려보였다.

“……이런. 2년 만입니까?”

“생각보다 기억력이 별로신가 봐요?”

“그쪽이 기억력이 좋은 거죠.”

“모습은 변했어도 그 건방진 말투만은 여전하군요.”

“아아, 그런가요? 건 그렇고 생각보다 캐주얼이 어울리시는데요? 여전히 벗겨보고 싶게 만들긴 하지만.”

“그 말, 남자가 하면 충분히 성희롱이 될 발언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희롱하는 거 맞아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더니, 그녀를 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약간은 속으로 키득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야 갈굴 맛도 안 난다. 이대로 계속하다간 외려 이쪽이 당하는 기분이 될 것 같아 지해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터 벌써 2년이 지났으니 이제 스물 둘인가요.”

“그래요. 이젠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죠.”

갑자기 그 남자, 우신이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표정이 너무 어리벙벙해 보여서 지해가 ‘뭐예요?’ 하고 퉁명스레 물어보려던 순간, 그는 이마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푹 수그렸다.

“아하하하……!”

허스키한 중저음이 커다랗게 터져 공기의 흐름을 타고 퍼져간다.

카페 안에 앉아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집중됐다. 무슨 일이 있나 캐내려는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역력하다. 그녀는 당혹했다. 뭐니, 이 남자. 닥쳐 좀. 당신 웃기려고 일일이 대꾸한 건 아니라고.

“그만해요.”

하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니, 그만둘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우신은 눈가에 눈물이 슬쩍 맺힐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웃어대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그쳤다. 그 얼굴에 아직도 건드리면 금세라도 터질 것만 같은 폭소의 잔재가 남아 있다. 뭐라 한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 잔재에 불을 붙일까 겁이 나서 그녀는 뚱한 얼굴로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마로부터 손을 떼면서 말했다.

“그래봐야 나보다 열 살도 더 어리니까 맘 편히 말 놔도 되겠죠?”

“맘대로 하세요.”

지해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려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응시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묻지. 조금이라도 짐작 가는 데가 있어?”

“그런 거 없어요.”

지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남자는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동생이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래. 아는 게 있다면 다 말하는 게 좋아.”

“아는 것도 없어요.”

“정말 고집불통이군.”

담배 갑을 톡톡 두드리자 담배가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우신은 담배를  집어 들어 불을 붙였다. 마치 의식처럼 차분한 동작이었다. 후, 하고 연기를 토해내더니 그는 가볍게 덧붙였다.

“이쪽이 아는 걸 전부 말하면, 그쪽도 알려줄 수 있을까?”

지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도 굳이 대답을 끄집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설명을 시작했다.

“실은 지해 양 어머니의 목걸이가 강도를 당했어. 처음 의뢰를 받은 건 동생을 찾아달라는 게 아니라 목걸이를 찾아달라는 거였지.”

우신은 짧게 요점만 얘기했다. 목걸이가 강도를 당했다는 것. 현금과 목걸이를 교환하러 간 자리에서, 집에 혼자 들어간 구한열이 총을 쏘는 바람에 범인은 죽고 구한열도 누군가에게 총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밤을 기해 규해가 실종됐다는 사실까지.

“그래서요?”

지해는 싸늘하게 반문을 던졌다.

“지해 양 어머니는 진홍루를 도난당한 일과 동생의 실종 간에 서로 연관성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렇겠죠.”

우신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지해는 입술 한쪽 가장자리가 저절로 비틀려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엄마나 어머니란 표현은 절대 붙이지 않는다.

“사람보다 보석을 중히 여기거든요. 분명히 나나 규해가 보석강도 뒤에 숨어서 조종했을 거라 의심하고 있을 거예요.”

“설마.”

“설마가 아니에요.”

2년 전 일이다. 장난으로 동생인 규해가 진홍루를 몰래 숨겼다가 진짜로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었다. 언제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던 의붓어머니,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날의 기억을 지해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녀는 지해가 진홍루를 가져간 거라 생각하고는 악귀처럼 의붓딸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걸 보고 겁에 질린 규해가 덜덜 떨면서 자기가 한 짓임을 고백하자, 이번엔 자기 배로 낳은 친아들을 반죽음이 되도록 때렸던 것이다. 실은 그것은 잃어버렸다고도 할 수 없는 경우였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속사정이 있었다. 어쨌거나, 평소에도 별로 의붓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던 지해는 그 일로 인해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김성민을 아나?”

일순, 그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아차, 싶어 표정을 애써 부드럽게 바꾸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 지해는 입술을 깨물며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우신은 이미 감 잡았다는 표정으로 빤히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그 손가락 끝에서 담배가 홀로 외롭게 타 들어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담배를 눌러 끄고, 우신이 입을 열었다.

“목걸이를 가져간 범인. 아는 사람이야?”

지해는 남자를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 달 전인가, 지해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찾아온 동생은 얼굴 가득 장난스런 미소를 띠면서 그녀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 누나만 알아 둬. 나, 엄마 목걸이 뺏어올 거다? 그거, 진홍루 말야. 그 여잔 좀 당해 볼 필요가 있어. 아, 걱정하지 마. 성민 형이 도와줄 거니까.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농담……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시선은 눈앞에 있는 우신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한 말도 상대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고 말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모노로그. 규해야……, 아니지?

2년 전, 진홍루 때문에 당한 일로 의붓어머니에 오만 정이 떨어진 지해는 민우신 탐정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 전부터 의붓어머니와 구한열 사이를 줄곧 의심하고 있었던 그녀였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규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콩깍지가 씐 아버지를 구제하는 길은 이것뿐이다 생각하고 찾아간 탐정사무소였다. 물론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힘이 풀려 포기하고 말았지만. 허나 아버지 귀에도 어떻게 말이 들어간 모양인지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아버지는 갑자기 진홍루를 경매에 붙일 결심을 했다. 물론 경매 직전,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경매 건은 없었던 일로 돌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진홍루는 그들 남매에 있어 결코 아름답게만 비치지는 않는 보석이었다. 지해만큼이나 규해도 진홍루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을 혐오했지만, 동생의 말은 어디까지나 농담이라고 지해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 규해와 아는 사이였어요.”

지해는 조용히, 토해내듯 말했다. 규해는 어쩌다 알게 된 그 남자와 무척이나 맘이 맞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이유 없이 김성민이 싫었다. 아버지가 야쿠자였음에도 유난히 건달이나 깡패를 혐오했던 그녀다. 어머니의 불륜조사를 용역회사에 맡기지 않은 이유도 사실은 거기에 있다. 지저분한 일을 맡아하는 용역회사는 대개 깡패들의 합법적 집합장소이기 마련이니까.

“그럼, 이 일을 동생이 생각했을 수도 있단 얘긴가?”

지해가 노려보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그에게 지해는 물었다.

“그 사람, 죽었다고 했어요?”

“그래.”

짧은 대답에, 손이 절로 천천히 얼굴에 올라간다. 지해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떨리는 손을 멈출 수가 없다. 좋아하지도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은 찌르듯 가슴을 덮쳐왔다.

“훗, 개죽음이네?”

그래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던 눈물이다. 친하지도 않던 남자가 죽었다고 해서 나올 리 없었다. 지해는 우는 대신 자조하듯 웃어 보였다.

남자는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보고 있다.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 응시하며, 지해는 결심한 것처럼 말했다.

“이제 어디 갈 거죠? 나도 데려가요.”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

댓글 '2'

D

2004.06.23 14:36:44

이렇게 지해와 다시 만나는군요.

리체

2004.06.26 20:32:02

아, 굉장히 인상적이예요. 우신 오빠가 점점 멋있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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