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3. 소년, 사라지다





- 미안……. 나 이제……, 앞이 안 보여……. 저……, 우신 씨……, 감색 양복엔, 검은 구두다……? 갈색은 안……돼…….



그렇게 가지 마.
그런 식으로 가지 마.

이건 너무 어이가 없잖아. 먼저 죽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생각을 배신하고 이렇게 먼저 죽어버리면 안되잖아.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때리면 안되잖아. 제기랄! 눈을 떠! 죽지 마! 눈을 뜨라고!

날 혼자 두고 가지 마.

제발, 부탁이야…….

제발…….





꿈.
꿈을 꾼다.
몇 번이나 꿈을 꾼다.

지독하게 고통스런 꿈, 그녀가 가버리는 꿈을.

아, 그렇구나. 이건 꿈이었나. 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이야, 보기 좋은데?”

어떤 새끼냐, 이 빈정대는 말투의 주인공은. 젠장, 맘대로 씨부려라. 네 멋대로 해도 좋으니 물만 내놔 보란 말이다. 목말라 미칠 것 같아…….

“물…….”

“아직 안됩니다.”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대신 축축한 수건이 입술을 덮친다. 우신은 그 습한 감각에 자극 받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점점 색을 되찾자, 낯익은 얼굴들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일 젊은 남자 둘. 우신의 입술에 물 묻힌 손수건을 눌러준 남자가 뒤로 빠지자, 연결동작처럼 다른 남자가 앞에 나와 싱긋이 웃어 보였다.

“안녕, 탐정님. 미남도 진흙탕에 뒹굴면 지렁이가 되는 건가?”

약간(약간?)은 악의가 담긴 장난스런 목소리가 고막을 찔러온다.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이 목소리는…….

우신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서 대꾸했다.

“입 닥치지 않으면, 그 주둥이를 잡아 빼서 지렁이 길이만큼 늘여주지.”

“오오, 뇌진탕으로 골로 갈 뻔한 사람치고는 제법 팔팔한데?”

표치현. 우신과 같은 31세. 직업은 강력계 형사. 몇 차례의 험한 사건을 같이 겪으며 악연으로 얽힌 사이다. 상당한 근육질 체구에 걸맞게 취미는 헬스라나. 성질은 더럽고, 말발도 상당한 경지다. 심문상대를 회유하는 말과 협박하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할 줄 아는 머리 좋은 남자였다.

“정신이 들었으면, 슬슬 자세한 사정을 불어 보시지?”

“총소리가 나서 집 앞에 갔더니 문이 잠겨 있더라고……. 할 수 없이 문을 부수려고 부딪치는데……, 뒤로부터 머릴 맞은 모양이야. 병신 같은 꼴을 보인 셈이군……. 으윽…….”

말하는 동안에도 지독한 통증이 머리를 엄습해 와 우신은 신음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언제나의 일이잖아. 처음도 아니면서 엄살떨긴.”

한 치의 동정도 보이지 않는 말투로 치현이 말했다.

그나저나 망했군. 이미 경찰이 알아버렸다. 젠장, 이런 낭패가.

“넌 왜 거기서 죽치고 있었던 거지?”

이제 와서 발뺌해 봐야 소용없다.

“의뢰가 있었어. 현금 7억과 보석의 교환. 제3자는 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거다. 총성이 들리기 전까지는.”

“바보들. 경찰 없이 일을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어. 알아?”

치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리야?”

“살인, 이다.”

“뭐?”

우신은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가 신음을 내지르며 베개로 나자빠졌다. 그가 눈을 감고 둔통을 씹어 물고 있는데 치현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누운 채 들어. 네 의뢰인을 협박해 온 놈은 김성민이라는 스무 살짜리 빠가야. 비혈파란 조직 병아린데, 말썽 깨나 부려서 경찰서 유치장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하는 새끼였지. 그래도 나름대로 귀여운 짓만 해서 봐줄 수 있었는데, 후, 빙신! 이번에 작심하고 주제에 안 맞는 사고 치려다 자폭한 거다. 하여튼 지 그릇을 모르고 과식하는 놈들은 어디서나 문제라니까?”

“어떻게 됐지?”

“죽었어.”

Bang! 치현은 엄지와 검지로 총 쏘는 흉내를 내보였다.

“총에 맞았다고?”

우신의 질문에, 치현의 입가가 비죽이 비웃음을 띠었다.

“몰랐단 말야? 네 의뢰인인지 아니면 의뢰인 친군지 모를 양반이 총기를 불법소지하고 계셨단 말이다. 그딴 것도 몰랐다니, 탐정 때려 쳐라 응? 참, 네 것도 압수했다. 법을 물로 보나 원. 벌금 안 물린 걸 감사하게 생각해.”

어쩐지, 구한열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더라. 다 믿는 구석이 있었군.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이야기의 개요는 대충 이러했다.

구한열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무도 없을 거란 예상을 뒤엎고 김성민이 회칼을 들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총을 갖고 있던 구한열은 당황해서 총을 들어 쏘았고 그 총알은 정통으로 김성민의 이마를 꿰뚫었던 모양이다. 구한열이 당황해서 시체 쪽으로 가고 있을 때, 정체불명의 남자가 쳐들어와 구한열의 다리를 쐈던 것이다.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더군. 구한열은 바로 기절한 것 같아. 뭐, 아픔이 상당했겠지만, 그래봐야 김성민 꼬락서니에 비하면 양반이지. 얼굴 반쪽이 날라 갔더라고. 구한열이란 놈, 기본적으로 총을 쏠 줄 아는 종자야. 암튼 김성민이 비혈파 꼬봉이기 때문에 조직범죄 소탕에 힘쓰시는 우리 검사님도 혹시 뒤에 큰손이 있지 않나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하는 중이지.”

“전에 뵌 적 있죠? 서민호입니다.”

뒷전에 물러나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던 남자가 인사했다. 아까 자신이 물을 찾는 걸 만류하고, 물 묻힌 수건을 입에 대 준 남자다. 우신은 기억을 더듬었다. 서울지검 검사라고 했던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일 듯한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검사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가에 대해서는 치현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기억이다. 지독한 워커홀릭에다가 범죄자들 심문할 때는 치현보다 더 가차없단다. 근데 그런 거 다 빼고 제일 중요한 건 예쁜 마누라가 있다는 거지! 치현은 이 말을 덧붙이며 격분했었다. 이게 말이 되냐? 눈에 불을 켜고 일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진데, 왜 되는 사람은 어쩌다 돌아봐도 예쁜 여자랑 눈이 맞냐고!

“검사님, 흉한 꼴을 보여서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우신은 말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그답지 않게 생각이 늦었다.

“돈! 돈은?”

“돈?”

치현이 벙찐 표정을 했다.

“현금 7억! 여행 가방에 담겨 있던 거, 어떻게 됐어?”

“없어졌어.”

“뭐?”

우, 최악이군.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몰라. 김성민이야 머리 절반이 날아가서 죽어 있었고, 구한열은 부상이 아주 심한 건 아니라서 일단 퇴원은 시켰지만, 심문이 가능할 만큼 제정신은 아니라구. 거의 반 미쳤……, 어이,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우신은 머리를 손으로 누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의사가 달려와서 좀 더 안정해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고개를 젓는 동작조차 상당히 힘에 부치지만,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다. 빠른 동작으로 환자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은 그에게, 치현이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어딜 가는 거야?”

“돈 찾으러.”

우신은 그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면서 병실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부산하게 걸어가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네, 민우신입…….”

- 규해! 규해가 없어졌어요!

우신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진 것은, 겨우 가라앉으려던 두통을 재발시킬 정도로 날카롭게 각이 선 유하연의 쇳소리였다.







“아아, 와주셨군요!”

지난번과 달리, 유하연은 거의 맨발로 뛰어나와 우신을 마중했다. 하루 사이 몇 살이나 늙은 것 같다. 파리한 얼굴,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아드님이 없어졌단 말입니까?”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우신은 물었다. 유하연은 마치 흐느낌 같은 기묘한 숨소리를 토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두 분이 나간 후에 전 그 애 방으로 갔어요. 흥분해서 뺨을 때린 게 좀 미안하기도 해서……, 이래저래 얘기나 좀 하려고 갔는데……,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 열어보니……, 방에 없더군요. 집안 구석구석과 집 주변을 전부 뒤져봤지만, 그 애는 없었어요.”

우신은 조용히 물었다.

“실종, 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요 며칠간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려서……. 저, 전…….”

유하연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규해는 건방진 구석은 있지만, 보이는 것만큼 불량한 앤 아니에요. 이제 겨우 고1이고……, 연락 없이 집밖에서 자는 일은 없었다구요. 하물며 어제 같은 상황에서……, 멋대로……, 혼자 나갈 리가……, 없잖아요…….”

“진홍루의 도난과 아드님의 실종이 서로 관련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유하연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요.”

“특별히 짐작 가는 데는?”

“없어요.”

“경찰에는 전화하셨습니까?”

“아뇨.”

그녀는 고개 숙인 그대로 중얼거렸다.

“이번엔 하셔야합니다. 목걸이하곤 달리 사람의 안위가 걸린 문제니까요. 경찰력을 빌면 아드님을 더 빨리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우신의 말에, 유하연은 양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렇게 할게요. 밤까지만 기다려보고……, 그 때까지 규해가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전화하겠어요. 가능하면 그전까지 그 앨 찾아주세요, 제발.”

“어째서 저한테 부탁하시는 겁니까.”

“예?”

유하연이 고개를 들었다. 우신은 씁쓸하게 말했다.

“이미 전 어제 일에서 실수했습니다. 경찰의 귀에도 들어가 버렸고, 현금은 날렸고, 목걸이도 찾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구한열 씨는 다리부상까지 입도록 방치하고 말았지요. 이런 저한테 또 일을 맡기시겠다고요?”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어제의 봉투를 꺼내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

“제가 온 것은 계약금을 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유하연은 한참동안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토하고는, 봉투를 우신 앞으로 도로 밀어 놓았다.

“또 일을 맡기겠어요, 실수한 당신에게요. 그 대신 목걸이도, 제 아들도, 반드시 찾아 주세요. 한번 실수하신 대신, 추가금액을 지불할 필요 없이 이 계약금만으로도 충분하겠죠?”

“물론입니다.”

우신은 미소 지어 보였다.

“혹시, 따님에게는 연락하셨습니까?”

“예……?”

“아드님 말로 누나가 있다고……. 대학에 다니는 따님이 있다고 부인도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유하연은 갑자기 입술을 비틀더니, 어딘가 조소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우신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애는 말이죠,”

훗, 하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입술 틈으로 새어나온다.

“제 친 딸이 아니랍니다.”

“예?”

“죽은 남편과 전 부인 사이에서 난 아이지요. 저를 무척 싫어했어요. 제가 돈 때문에 남편과 결혼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저를 엄마라고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을 정도로 싫어했답니다.”

우신은 잠깐 침묵했다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는 겁니까?”

“실제로 대학이 멀기도 하고……. 하지만 걔가 이 집을 나갈 때 우리 둘의 관계는 최악이었어요.”

“아드님과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규해는……, 그 애랑 친했죠. 친남매처럼 잘 지냈어요. 그리고 지해도 저한테 하는 것과는 별개로 규해한테만큼은 잘해줬으니까…….”

“그럼, 아드님하고는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겠군요.”

그녀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우신을 보더니, 후, 하고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리고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토해내듯 말했다.

“그래요.”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

댓글 '4'

릴리

2004.06.18 13:47:15

유후~ 드디어 혀이가 아닌 하이인 지해를 만나게 되는 건가요.
어찌 변했을꼬.. 무척 기대되어요+_+

Junk

2004.06.19 00:52:56

아하하. 성격은 별로 변하지 않았답니다^-^

리체

2004.06.26 20:27:01

음, 흥미 진진해지네. 7억은 어디로, 누가 꿀꺽한 거야??

Junk

2004.06.28 22:45:56

그걸 벌써 알려주면 무슨 재미로 보냐(-_-).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제한 크기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완결소설은 가나다 순입니다 Junk 2011-05-11
98 붉은 다이아몬드 05. 야밤의 데이트 [4] junk 2004-06-20
97 붉은 다이아몬드 04. 2년만의 재회 [2] junk 2004-06-19
» 붉은 다이아몬드 03. 소년, 사라지다 [4] junk 2004-06-18
95 붉은 다이아몬드 02. 범인과의 접선 [2] junk 2004-06-17
94 붉은 다이아몬드 01. 진홍루(眞紅淚) [5] junk 2004-06-16
93 붉은 다이아몬드 00. 프롤로그 [1] junk 2004-06-16
92 불가항력의 결말 - 최 종 편 [35] Junk 2004-12-22
91 불가항력의 결말 - 제 15 편 [22] Junk 2004-11-08
90 불가항력의 결말 - 제 14 편 [13] Junk 2004-10-11
89 불가항력의 결말 - 제 13 편 [15] Junk 200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