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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8
2. 범인과의 접선
“아저씨, 진짜 탐정이에요?”
녹음장치를 설치하는 우신에게 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아니, 남자아이다.
진한 빨강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작은 키, 치켜 올라간 듯한 눈, 가늘고 우뚝한 코, 붉은 입술에 하얀 얼굴이 마치 여자아이 같다. 나이는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 머리카락을 눈에 띄게 염색한 걸 보면 도저히 학교에 다닐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팔짱을 척 낀 채 내려다보는 품이 꽤나 건방진 녀석이었다.
“그래.”
우신은 대답했다.
“모자 안 쓰나요?”
모자? 셜록 홈즈가 쓰는 헌팅캡 말인가? 어이, 지금은 21세기라고.
“파이프는 없구요?”
이건 분명 놀리는 거다. 건방진 자식.
“그런 거 없어. 담배는 피지만.”
“흐응.”
“상당히 걸리적거리니 거기서 비켜주련? 꼬마.”
이건 아까 ‘아저씨’라고 불린 데 대한 일종의 복수전이다.
“내 이름은 박규해예요. 말해두지만, ‘혀이’가 아니고, ‘하이’에요. 혹시 담에 봤을 때 ‘규혜’라고 부르면…….”
“부르면 뭐지?”
이름까지 여자 같군. 우신은 재미있단 듯 녀석을 봤다.
“용서 못해요!”
옆에서 구한열이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뭐야, 저 인간은 남의 집에 와서는 움직일 생각도 않고. 제 집인 양 자신에게 음료수를 대접하는 그의 모습이 영 거슬렸지만, 우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맡은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 것이다. 남의 집안사정에는 관심 없다.
녹음장치를 설치하고, 구한열이 갖다 준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 우신에게 유하연이 계약금을 봉투에 넣어 건넸다.
“화끈하시군요.”
우신은 봉투 안을 들여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잃어버릴까 봐 겁나시나요?”
그의 의뢰인도 웃으며 받아친다.
“현금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쳇, 여기도 돈독 오른 인간이 있었군.”
소파에 앉아 있던 규해가 붉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규해, 넌 네 방으로 돌아가.”
유하연이 규해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싫다면요?”
소파에서 일어선 규해가 유하연을 응시하며 막 비웃음을 날렸을 때였다.
짝!
거실 전체를 진동시킬 듯한 소음이 한차례 고막을 강타한 뒤. 정신이 든 우신이 앞을 고쳐보자, 빨갛게 손자국이 난 얼굴을 한 규해와 마찬가지로 빨갛게 변색한 손바닥을 쳐든 유하연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유하연이 입을 열었다.
“버릇없이 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때와 장소를 봐가며 행동해.”
역시 전 야쿠자 보스의 아내로군. 우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사건을 설명할 때의 연약한 태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몸이 떨릴 정도의 냉기가 그녀의 주변을 싸늘하게 감싸고 있다. 규해는 거의 살기를 품은 얼굴로 여자를 응시했지만, 이내 압도당한 듯 순순히 발길을 돌려 자기 방에 돌아갔다. 잠자코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우신에게 유하연이 고개를 숙였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아들애가 워낙 버릇이 없어서…….”
“상관없습니다.”
우신이 대꾸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절묘한 타이밍이군.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녹음장치를 작동시키고 자신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유하연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그녀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 여보세요?”
- 유하연 씨?
“네. 맞아요. 저…….”
유하연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딱딱한 질문이 나왔다.
- 거래를 할 생각은 들었나?
“해달라는 대로 다 해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 등대 근처 언덕에 있는 바다 횟집, 알고 있나?
“네, 알아요.”
- 그 횟집에 올라가는 길로 횟집에서 약 2백 미터 더 올라가면 작은 집이 있다. 주황색 지붕에 노랗게 변색된 벽으로 된 집이니 알아보기는 쉬울 거야. 지금부터 1시간 줄 테니 그 집에 돈을 놓고 가도록 해.
“모, 목걸이는…….”
남자는 귀찮은 듯 대꾸했다.
- 일단 돈이 이쪽 손에 들어오면 다시 전화하지. 다시 한번 말한다. 지금부터 정확히 1시간. 그 사이에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두 번 기회는 없다.
“정말 목걸이를 돌려줄 생각이 있기는 한 건가요?”
수화기 너머로 가벼운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 정 그렇게 못 믿겠다면 그만둘까?
“아, 아니에요! 저……, 저 대신 딴 사람을 보내도 되나요?”
- 경찰이라는 건 아니겠지.
“아뇨, 제 친구예요. 구한열 씨…….”
- 호오, 불륜상대한테 손을 빌리겠다?
“저, 저는 운전을 못해요……. 그래서…….”
- 좋아, 한번만 봐 주지. 대신 경찰이나 그밖에 딴 사람이 눈에 띄면 목걸이는 영영 당신 손에서 떠날 줄 알아. 알았나? 그럼 1시간 후에.
전화가 끊어졌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구한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녀오겠소. 탐정 양반, 당신은 이 집을 지켜 주시오.”
“안돼, 안돼요! 당신 미쳤어요? 혼자 절대 못 보내! 죽으면 어쩌려구요!”
유하연이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설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우신은 침착하게 말했다.
“범인이 무뇌아가 아니라면 굳이 일을 크게 만들 리 없겠죠. 구한열 씨, 범인은 당신과 유하연 씨 관계를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누군지 혹시 짐작 가는 데가 없습니까?”
구한열은 그를 보지 않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저었다. 우신은 녹음장치에서 테이프를 꺼내 확인해 본 후, 다시 집어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유하연 씨?
네. 맞아요. 저…….
방금 전의 대화가 그대로 재생 반복되는 걸 들으며 우신이 재차 물었다.
“유하연 씨, 그쪽도 들은 적이 전혀 없는 목소리입니까?”
유하연은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쪽은 어떠냐? 꼬마.”
우신이 돌아보자, 유하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입술 한쪽 끝을 비죽이 올린 채, 벽 뒤에 숨어 있던 규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하연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붉은 머리의 소년은 대답했다.
“난 몰라요.”
그의 눈은 똑바로 우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전적인 시선이었다.
“누나라면 모를까.”
“누나?”
우신은 유하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한번 사르르 감았다가 뜬다. 유하연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규해 누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집을 나가 자취하고 있답니다. 학교랑 집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왔다갔다하기 불편하다구요. 저 애 말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애 누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니까. 어쨌거나,”
그녀가 한숨을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범인이 누구인진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신은 차갑게 반문했다. 구한열이 말했다.
“중요한 건 목걸이요. 탐정님도 말했잖소. 범인이 무뇌아가 아니라면 일을 크게 만들 리 없다고. 범인이 누구인진 몰라도 돼, 목걸이만 무사하면.”
오, 거의 애인의 대변자시로군.
“대체 왜 절 부르신 겁니까?”
우신은 한숨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 이 두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경찰에는 알리고 싶지 않다, 돈을 갖다놓는 일은 구한열이 자진해서 하겠다지,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대체 탐정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한열 씨, 이 분이랑 같이 가세요. 제발요!”
거의 자기감정에 도취된 것처럼 울먹이며 유하연이 말했다.
놀고 있군.
우신은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다 문득 소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미움.
경멸.
불안.
분노.
딱 집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복합체 같은 시선. 규해는 잠자코 선 채 그렇게 자신의 엄마와 엄마의 애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오싹해질 정도로 냉랭한 시선이었다. 어쩌면…….
폭발사고로 죽은 아버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지도.
“부탁이에요. 여긴 이기사도 있고, 딴 사람들도 있으니 걱정 말고…….”
아들이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지고 방에 들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하연은 애인의 품에 매달린 채 슬프게 흐느끼고 있었다.
“알았어. 울지 마. 탐정 씨를 데려갈 테니 이제 그만 뚝!”
마침내 구한열은 그녀의 눈물에 백기를 들었다.
“내 차로 갑시다.”
구한열이 말했다.
“범인은 이쪽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으니, 못 보던 차로 가면 분명히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을 거라고 알아챌 거요.”
맞는 말이었다.
우신은 수긍하고 구한열의 차 뒷좌석에 몸을 숨겼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멀미의 이유가 운전자 구한열의 험한 운전 솜씨 때문인지, 우신이 늘 모는 재규어와 구한열이 모는 에쿠우스의 질적 차이 때문인지, 한국의 험한 도로사정 때문인지, 불편하게 몸을 구부린 현재 자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총 갖고 있소? 탐정 양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짓말이다. 우신은 구역질을 눌러 참으면서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거기 불룩한 것이 느껴진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5연발 리볼버였다.
“하긴 총기소지는 불법이니까.”
알면서 물어보는 이유는 뭡니까.
“총은 쏠 줄 아시오?”
“조금. 경찰에 있었으니까요.”
우신은 슬며시 짜증이 났다.
“사람을 죽인 적 있소?”
“한국에선 없습니다.”
실은 이쪽에선 총을 써 본 적도 거의 없다. 불법인데다가 거기까지 손을 뻗을 만한 일을 아직까지는 만나지 못했다. 조직폭력배 놈들과 붙은 기억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대체로 맨손이나 칼부림 수준에서 마무리됐으니까.
“그럼 외국에선 있었단 말이겠군. 탐정 양반, 외국에 살았었소?”
“탐정을 하기 전엔 NYPD에 있었습니다.”
운전석에서 구한열이 휘익, 하고 소리를 냈다.
“대단한 경력자 양반이었구먼. 잘난 척 할만도 해. 그래, 범인을…….”
우신은 귀찮다고 소리치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대꾸했다.
“입 좀 다물어 주시겠습니까? 상대가 망원경이라도 갖고 있어서 이쪽을 엿보기라도 할 경우엔 골치 아프게 됩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걸 명백히 알려주는 셈이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의심받을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구한열이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상태로 한참을 지나자 차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멀미기도 점점 심해져갔다. 아마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비가 오는군.”
구한열이 중얼거렸다. 가느다란 비인지, 소리는 나지 않는다.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차의 소음에 가려져서인지도 모른다.
그 소음이 멎었다.
“찾았습니까?”
한껏 몸을 움츠린 우신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음, 맞는 것 같소. 주황색 지붕에……, 노랗게 변색된 벽.”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구한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쩌실 생각입니까.”
구한열은 침을 삼켰다. 그는 잠시 침묵한 후, 결심한 듯 말했다.
“탐정 양반은 거기서 대기해 주시오. 저기 들어가서 5분이 지나도 내가 안 나오면, 그 때 가서 도와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우신은 별로 미덥지는 않았지만, 일단 대답했다. 실은 그 이상의 방법도 없는 것이다. 조심하란 우신의 당부를 뒤로하고, 구한열은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서 현금이 담긴 수트케이스를 꺼낸 그의 발소리가 이내 멀어진다. 우신은 그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도 꼼짝 않은 채 기다렸다. 사방은 조용했다. 그 조용한 공기를 뚫고 어떤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빗소리였다.
점점 볼륨을 키우는 빗소리.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아주 살짝 돌려 밖을 내다보니, 어둠에 파묻힌 하늘이 흐릿한 구름이 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차 보닛과 저 앞에 서 있는 가옥의 지붕을 가차 없이 요란하게 두들기는 빗소리. 사방은 온통 빗소리로만 가득 차 있…….
타앙!
‘아……?’
이건, 총소리?
……이런!
우신은 솟구치듯 차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엄청난 장대비가 그의 몸을 사정없이 덮치기 시작했다. 산언덕인 땅은 온통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그 진흙을 미친 듯이 밟으며 우신은 주황색 지붕의 집으로 달려갔다.
“젠장!”
문은 잠겨 있었다. 우신은 돌을 집어 그가 선 반대편으로 힘껏 던졌다. 빗속, 철제 지붕 저편에 돌이 맞아 기묘한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것과 함께 우신은 문을 부수기 위해 비에 젖은 몸을 돌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쿵!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우신은 깔깔한 감각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아니, 눈도 잘 뜰 수가 없다. 몸은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된 상태였다. 쓰러지면서 먼저 터진 입 안벽을 또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냄새가 비에 젖은 흙냄새를 뚫고 코를 찌른다.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머리를 가격했던 것임에 분명했다.
문을 박차고 안에 들어가려던 그 순간에.
“우…….”
자꾸만 눈앞이 깜깜해지려 했지만, 불굴의 정신력으로 우신은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런 그의 머리를 딱딱한 것이 재차 존재를 부딪쳐 왔고, 그것은 차안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던 구토감에 불을 질렀다.
“우욱!”
그리 듣기 좋지 않은 소리를 토하며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진흙탕에 얼굴을 박고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Fade Out.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