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98



사각지대의 키스




“피곤해.”

저절로 입에서 한숨 같은 소리가 새어나온다.

엘리베이터 옆벽에 박혀 있는 전자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윤희는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깜박이며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심야11시. 건물 내 불은 대부분 꺼져 있는 시각이다.

‘크리스마스 맞아?’

다시금 한숨이 새어나왔다.

경리 일을 맡고 있는 윤희에게 연말은 결코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때는 아니었다. 고객으로부터의 매상금액을 처리하는 업무를 담당한 그녀다. 연말과 연초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는 표현이 딱 맞는 시기였다.

게다가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웬 망년회 모임은 그리도 많이 쏟아지는 건지. 빠지려고 해도 빠질 수가 없는 종류로만 잔뜩 말이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인 윤희에게는 매일이 버거웠다.

바쁠 때일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을 잠시 망각하고 다급하게 서두른 것이 오늘의 실수였다.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해야 할 처지가 되 버렸던 것이다. 냉정침착의 표본 같은 최윤희가 이런 실수를 저지른 건 요 며칠 생리증후군에 시달린 탓도 컸다. 가장 끔찍한 사흘이 지나서 겨우 한시름 놓은 참이긴 했지만, 피곤에 지친 몸은 나른하고 빈혈기 어린 머리는 몽롱했다.

같은 과 동료들은 물론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크리스마스이브.

데이트가 있는 동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각기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실수를 커버하기 위해서 동료들을 희생시키는 건, 윤희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런 결과, 이런 시간까지 남게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땡!

몽롱한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온 것은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다. 윤희는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

순간적으로 핫, 하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소리가 새어나왔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안에 있던 사람도 윤희를 쳐다봤다. 일순, 서로의 얼굴에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이 스쳐간다.

진회색 롱코트가 멋지게 어울리는 훤칠한 몸.
일할 때는 주로 안경을 쓰고 있지만 지금은 어떤 여과도 없이 곧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날카로운 안광.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가 이 사내 전체에서 가장 싫어하는 남자, 서하인임에 틀림없었다.





「아으, 난 이런 숫자놀음엔 전혀 관심 없는데. 빨리 엄청 돈 많은 남잘 덜컥 물어서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

주먹을 불끈 쥐고 은영이 소리쳤다. 처절한 목소리는 진심이 분명하다.

「누군들 안 그렇겠니…….」

윤희의 말에 경리과 동기들 모두가 필요이상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 너무도 피곤해서 이대로 식당 테이블에 머리를 쳐 박고 잠을 자고 싶단 생각만 들었다. 이제 바로 사무실로 돌아가면,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업무가 히죽 웃어줄 테지. 피곤한 탓에 식욕이 없어 남아 있는 정식들을 앞에 두고 모두들 늘어져 있었다.

렌즈를 낀 눈이 뻑뻑하게 아려온다. 윤희는 제대로 도수가 맞는 안경을 사러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했다.

「어머!」

그 때, 은영이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낮게 감탄사를 발했다.

「응?」

윤희는 은영의 시선을 따라서 저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눈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미간을 조그맣게 찌푸렸다.

재킷을 팔에 걸친 남자. 언뜻 봐도 고급 브랜드임에 분명한 양복이 몸에 맞춘 듯이 잘 어울린다. 흔해빠진 푸른색 셔츠도 이 남자가 걸치면 뭔가 다르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에 맨 넥타이만 봐도 이 남자의 센스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대체 어디 제품일까.

장신.
신사복 모델을 해도 문제없을 정도의 외모와 몸매.

제1기획과 과장인 서하인이었다.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은영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정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남자는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불만스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워낙 잘생긴 얼굴이기 때문에 그것조차 그림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프로젝트가 어지간히 안 풀리나 봐요.」

경리과의 소식통인 경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윤희는 훗, 웃었다.

「천하의 서하인도 그럴 때가 있니?」

「언니두? 요즘 왕 불황이잖아요. 상황이 이런데 우리 회사 제품이라구 다를 바 있겠어요? 올해 지나서 3월 결산 때까지는 어떻게든 해야 된다고 다들 각오가 대단한가 보던데요.」

「서 과장님이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안 그래?」

식판을 들고 테이블에 앉는 서 과장을, 신뢰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은영이었다.

「넌 남자친구도 있는 애가 뭔 관심이 그렇게 많은 건데?」

윤희가 가시 돋친 한마디를 뱉자, 은영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윤희 너 진짜 못됐어. 내가 뭔 관심이 글케 많다구 그러냐? 니가 저번에 서 과장이랑 대판 싸운 건 내 알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삐딱한 거 아니다? 공은 공이구 사는 사! 너 그런 거 확실하잖아. 응?」

「하…….」

윤희는 어이없는 한숨을 흘렸다.

「내가 누구 땜에 그렇게 싸우게 됐는데? 말해 봐. 최은영. 누구 실수 땜에 내가 그렇게 싸워야 했던 건지.」

「췻.」

은영은 대꾸를 못하고 입만 내밀었다. 지난번에 은영이 계산을 잘못하는 바람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서 과장과 대판 싸운 윤희였다. 물론 은영의 잘못도 컸지만, 원칙에 맞지 않게 서 과장이 너무 급하게 일을 밀어넣은 탓도 솔직히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조목조목 따지는 윤희와 납득불가라며 싸늘하게 대꾸하는 서 과장. 고함소리 따윈 한번도 오가지 않았지만, 사무실 전체를 얼려버릴 듯한 냉기가 두 사람 주변을 떠돌고 있었지. 결국은 합의를 보고 일단락되었지만, 참으로 박진감 넘치는 한판 승부였다.

「어머머, 쟤네 뭐예요?」

서 과장을 보고 있던 경아가 얼굴을 찌푸린다.

「아우, 재수. 비서과 년들 또 시작이네?」

은영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테이블 앞에 자리한 서 과장 옆에서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 몇몇 여사원들이었다.

「아윽, 저 파운데이션 면상들. 긁으면 3cm는 파이겠다.」

「이쁘기만 하네 뭐.」

입가를 슬쩍 들어올린 윤희를 은영과 경아가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뭐, 아무리 그래도 비서과에 미인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서 과장 성격이 만만치 않든 아니든,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따르는 후배 사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여사원들에 대해 말하자면,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얼굴만 잘생기면 일단 기본 점수는 주고 들어가는 것. 당연히 서하인은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능력까지 있는 남자인 것이다. 매년 실적은 사내 최고를 달리고 해외지사까지 파견되었다가 최근 돌아온 이 남자의 앞길은 당연히 탄탄대로로 보였다. 비서과 여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 남자를 잡으려 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서 과장님 사귀는 여자 있지 않았어?」

은영이 경아에게 물었다.

「글쎄요? 서 과장님은 워낙 여자가 많잖아요. 근데 제대로 사귀는 여자는 하나두 없는 것 같애요. 손가락에 반지 한번 낀 걸 못 봤는 걸? 딱히 누구랑 사귄다, 그런 건 없는 것 같거든요. 왜 그럴까요? 저렇게 잘생기고 여자들이 가만 안 놔두는데 말이에요.」

「워낙에 바람둥이래서 한 여자에 정착을 못하나 보지.」

심드렁하게 말하는 윤희를 보며 다른 두 여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며칠 전의 분이 아직도 안 풀린 모양이다. 사실 윤희는 그 전부터 서 과장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항상 여자에 둘러싸여 있고 어딘가 모르게 완벽해 보이는 인간에게 그다지 정이 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은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최윤희, 그거 알어? 니가 좋아하는 남자들도 그렇게 바람직한 타입들은 아냐. 맨날 너 고생만 시키잖아. 난 대체 니가 남자 고르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구. 다 하나같이 너한테 딸리지, 그렇다고 엄청 잘해주길 하나.」

윤희는 은영을 노려봤지만 사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은영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다. 이상하게 남자를 석 달 이상 사귄 적이 없는 윤희였고, 대체로 헤어지자고 먼저 제안하는 건 의외로 남자 쪽이었다.

그리 잘생기지도, 능력 있지도 않은 남자들이었지만 윤희는 약점을 갖춘 그들에게 모성본능 비슷한 걸 느꼈다. 그런 그들을 보듬어주는 게 좋았다. 그렇지만 남자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경리과에서는 알아줄 정도로 능력 있는 여사원인 윤희를 버리고,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아니면 아예 더 나은 여자를 찾았다.

그리고 거리낌 없는 바이바이.

너무 짧아서 윤희 자신도 진심인지조차 모를 연애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 같아.

윤희는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을 그녀와 공유하고 있는 남자는 확실히 말해 윤희가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손톱 하나 들어갈 수 없이 잘난데다가 주변에 날파리처럼 꼬이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

잘생겼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싫어. 윤희는 가볍게 고개만 숙여 보였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묵묵히 답례.

“…….”

그리고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거북할 수가.

윤희는 숨쉬는 것조차 갑갑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사이보다 더 어색하다. 말을 걸고 싶지도 않고, 말할 거리도 없었다. 제발 한시라도 빨리 1층에 달해 주길 바라며 빳빳하게 앞만 응시하고 있을 때.

쿵!

갑자기 기묘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멎었다.

“앗!”

윤희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올렸다. 앞을 고쳐보자, 층 표시등에는 전혀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멈췄어.”

당황한 그녀의 귀에 서 과장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윤희는 애매한 소리를 올리다가, 문득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1층은 맞는 거 같은데?”

서 과장이 말하면서 열림 버튼을 몇 번이고 눌렀지만 문은 전혀 열리지 않는다. 결국 그는 포기했는지 비상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관리 센텁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는데요. 어찌된 일입니까?”

침착하게 서 과장이 물었다. 관리 센터 사람은 일단 사과하고 기술자를 불러오겠다고 말했다. 뭐? 기술자까지 불러와야 할 정도야? 윤희는 얼굴이 파랗게 빌려서 스피커와 층 표시등과 서 과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음.”

서 과장은 짧게 신음하고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 폴더를 열더니 번호를 눌러 본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포기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전화도 안 되는군.”

윤희도 자기 핸드폰을 들어 통화를 시도해 보았다. 정말이다.

‘아아, 미치겠네.’

윤희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가장 마주치기 곤란한 상대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 둘이……. 이게 웬 악몽인지 모르겠다.

냉정, 냉정하자. 윤희는 속으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상대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뒷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 희고 단정한 윤곽을 지닌 얼굴은 여느 때의 무표정으로 심드렁하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얄미운 인간 같으니라고. 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겁이 나?”

그 때, 서 과장이 갑자기 물어왔다.

“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아서.”

“아뇨, 전혀.”

윤희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서 과장은 빙긋 웃었다.

“하긴, 경리과 최고의 기센녀 최윤희 씨가 이깟 일로 겁낼 리 없나.”

“기센녀?”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누구야, 대체.

“초조해 보이는데, 오늘 약속 있어?”

“그런 거 없는데요. 빨리 가서 자고 싶어서요.”

사실이었다. 갑자기 마구 피곤기가 몰려온다. 사실 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윤희는 빳빳하게 몸을 지탱한 채 참았다.

“과장님은 약속 없으세요?”

예의상 물어주었다. 서 과장은 고개를 저으며 흐릿하게 미소했다.

“둘 다 한심하군. 그쪽도 일에 치여서 이 시간까지?”

“그래요.”

오늘 한 실수를 생각하니 속이 다 아려온다. 아, 어지러워.

“훗.”

갑자기 서 과장이 웃었다. 윤희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그는 웃음기를 그대로 얼굴에 머금은 채 말했다.

“아직까지 분이 안 풀린 듯싶어서.”

“네?”

“그쪽 말이야. 지난번에 나한테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 때 일은 분명히 과장님 쪽 잘못이 더 컸으니까요.”

윤희는 뾰족하게 대꾸했다.

“이것 봐. 그건 분명히 그쪽 동료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야.”

“네, 맞아요. 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밀려 있는 상황에서 억지로 일을 갖다 맡기신 그쪽 부서의 책임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도 급하게 요구하시니까 당황해서 제대로 검토도 못하고 제출한 거죠. 저희는 원칙대로 일하는 곳입니다. 어긋나면 계산이 맞지 않는, 절대적으로 원칙에 기대야만 하는 세계예요. 그러니 앞으로는 순서를 꼭, 지켜 주시기 바래요.”

윤희는 꼭, 에 힘을 불어넣고 말을 접었다. 아, 속 시원해. 그녀가 배를 쓰다듬고 있을 때 갑자기 스피커에서 말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여긴 관리센턴데요, 기술자가 도착할 때까지 한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힘드시죠?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헉! 30분?”

윤희는 일순 신음 같은 소리를 질렀다.

계속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다.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녀는 엘리베이터 도어를 붙들고 열어보려고 애썼다.

“뭐 하는 거야?”

서 과장이 물어왔다.

“전에 이렇게 했더니 열렸던 적이 있어요. 과장님도 멍하니 서 계시지만 말고 좀 도와주세요. 빨리요!”

“허, 참.”

서 과장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지만, 이내 윤희를 거들어 엘리베이터 문을 붙들고 용을 썼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자구.”

힘이 빠져서 벽에 기대 있는 윤희에게 서 과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윤희는 어이가 없어져서 서 과장을 응시했다. 며칠 전에 그렇게 싸웠는데 저렇게 환하게 자신을 보고 웃다니 어지간히 뻔뻔한 사람이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이브.”

그녀가 한숨을 쉬자, 과장이 물어왔다.

“무슨 말이야?”

“과장님이 저래두 그런 생각 안 할 수 없을걸요? 남들은 랄랄라 즐기는 이브 날까지 야근했죠, 데이트할 상대도 없죠, 그렇다고 직장 일이 마냥 잘 풀리는 것도 아니죠, 모처럼 일이 끝나서 쉬는가 했더니 며칠 전에 싸운 상대랑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어요. 보통 이런 상황을 최악이라지 않나요?”

“너무한데.”

서 과장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 입장도 생각을 좀 해 줘.”

“무슨 입장요?”

“나도 힘들다구.”

“과장님이 힘들게 뭐 있어요? 직장에선 능력을 인정받지, 여사원들에게 인기 좋지, 잘 나가는 인생의 표본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 나도 괴롭다구. 잘 나간다는 건 그만큼 안티가 많아진다는 뜻이지. 게다 이미 쌓아둔 기대치가 있어서 어긋나면 두 배로 비난이 쏟아진다구. 속으론 힘들어 죽겠는데, 절대 티도 못 내지. 여사원들? 겉으로만 어깨 편 내 모습을 보고 좋아할 뿐이라구. 게다가 일에 치여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겨우 퇴근하는 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같이 갇힌 사람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나. 괴롭지 않겠어?”

윤희는 가만히 서 과장을 바라봤다. 흐릿한 불빛에 비친 그림자가 슬쩍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정말로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죄송해요.”

윤희는 괜히 멋쩍어져서 웅얼거렸다.

“과장님 같은 사람도 고민이 있군요……. 앞만 보고 나아가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연하지. 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구.”

서 과장이 필요이상으로 힘을 주어 대꾸했다.

“근데 왜 그런 모습을 솔직히 보이지 않으시죠?”

“그야 자존심…….”

“드러내시면 되잖아요. 솔직히 힘들다고 말하면 다들 수긍해 줄 걸요? 아, 그러고 보니…….”

윤희는 고개를 꺄우뚱했다.

“저한테는 드러내도 된다는 거예요?”

서 과장은 날렵한 콧날 아래 선이 명료한 입술을 슬쩍 들어 미소했다.

“왠지 그쪽은 괜찮을 것 같았어.”

“…….”

윤희는 잠자코 있었다. 왠지 현실감이 없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단 둘이 갇혀 있는 상태에서 들리는 말은 왠지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게다가 저 서 과장인 걸? 냉정하기로 소문난 남자다.

“인연이란 걸 믿어?”

갑자기 서 과장이 침묵을 깼다.

“네? ……글쎄요.”

윤희는 놀라서 눈을 깜박깜박,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난 믿는데.”

정신이 들자, 서 과장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이렇게 밀폐된 공간에 단 둘이 갇히게 되었다는 거, 그런 걸 보통 사람들은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

“무, 무슨…….”

팔이 불쑥 뻗어왔다. 붙들리는가 했는데, 팔은 그녀의 어깨를 스쳐 뒷벽에 손바닥을 짚는다. 그것은 그녀가 엘리베이터보다 더 좁은, 그의 영역에 갇혔다는 것을 의미했다. 윤희는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푸른색은 붉은 색으로 변해간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뭐 하려는 거예……, 앗!”

남자의 얼굴이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순간적으로 윤희는 눈을 불끈 감아 버렸……지만, 얼굴은 의외로 완전히 다가오지 않았다.

아주, 아주 가까이. 그렇지만.

코끝이 부딪칠 것 같은 거리, 딱 그 정도.

그리고 멈췄다.

“왜 그러지?”

바리톤과 베이스, 딱 중간 톤의 낮은 음성이 귀에 흘러 들어온다. 마치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윤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왜냐니……오……, 과장님이…….”

“뭘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의 쉰 음성에 반문한 것은 어딘가 즐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기대하는 게 있었던 모양이지?”

“놀리는 거예요?”

“아니,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정말로 순진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목소리다. 순간적으로 넘어가 버릴 것 같은 자신을 깨닫고 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하지 마.
이 남자, 지금 날 놀리고 있는 거야.
봐, 저 얼굴에 서서히 피어오르는 미소를.
완전히 악동이잖아. 심술궂게 웃고 있잖아. 그렇잖아. 저 남자가 그 냉정한 서 과장이라고? 말도 안돼. 믿을 수가 없어. 아아, 뭐야. 최악이잖아.

“이 시점에서 뭔가를 하기를 기대했겠지. 아닌가? 그게 그쪽 상식이잖아. 이제까지 만나 온 놈들도 딱 그 정도 수준일테구.”

역시.

윤희는 눈을 뜨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얄미운 얼굴을 한껏 노려보며 대답했다.

“수준이 낮아서 참으로 죄송하네요. 수준 높은 분께서는 한시바삐 얼굴을 좀 치워 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럴 수야 없지.”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내가 그쪽 수준에 맞추면 되는 문제잖아?”

그리고 입술이 떨어졌다……!

콧등에.
그리고 그대로 미끄러져, 입술에.

아니, 닿지 않는다.
아니? 닿……, 역시 닿지 않는다.

눈꺼풀이 떨린다.
갑자기 혀가 아이스크림을 핥듯이 다가와 할짝.
아아, 가빠지는 숨결. 자신이 생각해도 지나치다.

이게 무슨……, 아! 들어왔어……?
아니, 다시 나갔다가, 몸을 빼기도 전에 이내 다가온다.

입술이 입술을 물고 혀는 막힌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치열로 옮아가, 하나하나 단 1밀리의 빈틈조차 남기지 않고 온전히 더듬는다. 그런 와중에도 느껴지는 숨결, 숨결.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상대의 것인지 모를 숨결.

아아, 어쩌지? 점점 가빠지고 있어. 바보처럼 다 열어 버렸다. 상대가 그렇게 만들어. 그러자 마치 파도처럼 순식간에 몰아쳐 밀려들어오는 상대의 온기. 이가 마찰하고 혀가 짜릿한 감각을 몰아 파고 들어온다.

아아, 너무 좋잖아.

아?

정신을 잃어버린 순간, 멈췄다.

“그만둘까? 싫으면 거부해도 좋은데.”

지금 웃고 있는 거야? 저 얼굴?
이, 이런. 이런 얄미운 남자 같으니라고! 지금 날 떠보는 거니?

“그만두면 절대 용서 못해요!”

윤희는 눈을 뜨고 거의 발악하듯 대꾸했다. 스스로도 목이 쉰 걸 알 수 있다. 추해. 전혀 귀엽지 않아. 이렇게 감정에 취하다니 수치야. 그렇지만, 할 수 없어. 제어가 안 되는 걸? 그러니까 부디…….

“고마워.”

상대는 빙긋 웃고 어느 순간부터 붙들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놓아줬다. 그리고 윤희는 방금 전까지 그의 손에 잡혀 벽에 대어져 있던, 허나 이제는 자유로워진 팔을 한껏 뻗어 그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다시 겹친다.

부드럽기만 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은 한층 강렬하다. 강한 흡입력으로 그가 자신의 입술을 빨아올리자, 몸의 중심부를 그대로 관통하는 듯한 울림이 뇌수에서 발끝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신음소리가 나올 것 같은데, 아니 자신의 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격하고도 달콤한 쾌감.

서로 혀가 얽혔다.

상대의 입안으로 끌려가는 것조차 아찔한 순간.

가볍게 깨물다가 다시 얽고, 또 깨물고. 되풀이되는 저 짜릿함에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다.

답답해……. 그런데……, 좋아.

어차피 이 공간은 산소가 충분치 않다. 그러니까 주변에 떠도는 산소를 몽땅 다 써버려서 숨이 막힐 때까지, 그래도 모자랄 것만 같아. 탐닉하면 탐닉할수록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그 목마름이 또한 더한 충족감이 되어 새로이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코의 점막을 점령한 것은 은은한 남자의 스킨 냄새. 남자의 향기가 이리도 매력적인 것인 줄 몰랐어. 마약에 취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자전하고, 좁은 사각지대가 방금 빅뱅을 겪은 우주공간처럼 무한대로 확장해간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긴 키스 후(입술이 부르텄을 거야!),

“맞는 거 같군.”

마지막으로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대는 동작을 끝내며 그, 서하인 과장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조사해 두길 잘했어.”

“무슨 말이에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윤희가 물었다. 상대를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다. 상대는 그녀를 팔 안에 끌어안으며 웃었다.

“경리과 최윤희. 남자의 강한 면모보다는 약점에 끌리는 타입.”

“누, 누가 그런 소릴!”

윤희는 너무 놀라 상대의 품안에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글쎄. 뭐 나름대로 정통한 소식통에 의한 거라서 어느 정도 신뢰했는데, 역시 조사한 보람이 있었군.”

말문이 막혔다. 안겨 있는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아, 그래도 아까 한 얘긴 진심이야. 하지만 그런 얘기를 의도 없이 아무 경우에나 하지는 않지.”

“……으.”

윤희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신음을 흘렸을 때였다.

쾅쾅!

‘아?’

쾅쾅! 쾅쾅!

문 너머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열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신 거죠?”

“예! 괜찮아요!”

살았다! 윤희는 순간적으로 남자를 밀치고, 문 쪽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밖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후우…….”

바깥공기. 아니, 아직은 빌딩 안이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윤희는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죄송합니다. 얼굴이 다 빨개지셨네요. 안이 더우셨나 보죠?”

기술자와 여기까지 쫓아온 관리센터 직원이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들의 사과에 대꾸하는 것도 일이었다. 윤희는 후끈후끈 달아오른 얼굴에 손을 갖다대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놀랍게도 단정한 코트 차림 그대로인 서 과장은 그녀와는 달리 태연하게 서 있었다. 몇십 분이라는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은 후, 엘리베이터에 얽힌 악몽(?)은 그제야 겨우 끝이 났다.





“이봐, 최윤희 씨! 그냥 갈 거야?”

뚜벅뚜벅.

힐 소리를 울리며 1층 회전문으로 향하는 그녀를 서 과장이 쫓아왔다. 윤희는 돌아보지도 않고, 될 수 있는 최대한 싸늘하게 그에게 말했다.

“뒷조사 얘길 하다니, 제가 바로 등 돌릴 거라곤 생각 안 해보셨어요?”

“솔직하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뿐인데. 싫었어?”

“하아…….”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야. 꺼져 들어갈 것 같은 그녀의 한숨에는 전혀 아랑곳 않고 그가 덧붙였다.

“앞으로 보여줄 약한 모습이 아직도 많거든. 강한 모습보단 훨씬.”

그리고 그, 서하인은 그녀의 앞으로 돌아와서 미소했다. 방금 전의 키스보다 더 매력적인 미소였다. 아무래도 계속 속고 있는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그녀를 향해 그가 말했다.

“한번 더 반박해 주겠어? 그 때 일은 분명히 과장님 쪽 잘못이 더 컸다고, 되도록 사납게 손톱을 세우고 말야.”

“네?”

윤희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더니, 그녀의 손을 붙든다. 그리고 진지하게, 너무도 진지하게 말했다. 너무도 진지해서 어린 소년처럼 순수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봐, 처음 나한테 소리쳤을 때부터 반해 버렸다구. 그러니까,”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책임져.”

할 말이 없다.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해? 침묵한 채 그를 올려다보는 게 고작인 그녀에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그가 말했다.

“이런. 자정이야. 벌써 크리스마스라고. 단골 바가 있는데, 거기라면 아마 내 자리를 아직까지 비워놨을 거야. 어때. 같이 가겠어?”

“칵테일 맛있어요?”

윤희는 토라진 목소리로 그렇게만 대꾸했다.

“물론. 보장할 수 있어.”

아무래도 이 남자는 웃는 게 너무 얄미워. 그렇지만 동시에 너무나 매력적. 할 수 없지. 크리스마스이브 날, 엘리베이터에나 갇혀버린 내 악운이라 생각하자. 악운 치곤 너무 달았지만 말이야.

“좋아요.”

윤희는 그의 팔짱을 끼었다. 자신의 대담한 행동에 스스로도 놀라면서. 내가 제 정신이 아니구나, 속으로 되뇌면서.

“맛없으면 책임지셔야 해요?”

남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하 주차장으로 가지.”

“또 엘리베이터를 타자는 건 아니시죠?”

“설마. 이번엔 계단을 이용해 주자구.”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단호히 대답했다.



사각지대의 키스/Fin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

댓글 '10'

리체

2004.03.28 00:22:21

아,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야. 나는 이런 지능적으로 애교스런 남자 캐릭터가 좋다구.^^

변신딸기

2004.03.30 10:46:43

아, 저도 좋아하는 거에요. 이렇게까지 지능적이지 않고 이렇게 까지 잘생기지 않아도...애교스런 남자 좋죠. 좋아요. 으흐흐

마리

2004.04.11 22:33:49

ㅋ..ㅋ 저루 이런 상큼한 스토리 좋아해요~ 칼쑤만 만빵일것 같은 남자의 애교라니
아~어디 이런 남자 없나요?

차칸여우

2004.04.23 11:13:08

다시 봐도... 역시나 정크님이심... ^^

쟈넷

2004.04.24 16:04:23

북피아 에서 봤었는데 다시 봐도 역시 재미나네요. 정크님 소설은 이걸로 첫대면을 했답니다.

레몬방울

2004.05.06 01:21:36

다시 봐도 좋아요... ㅋㅋ.. 정말 상큼한 글인거 같아요 ^^

아라베스크

2004.07.09 11:43:23

다시봐도 재밌네요 후훗 저런 남자 어디 없는지...ㅋㅋ

은기

2005.01.18 20:37:07

winter Fall .. 이랑 이 작품이요
정크님 작품인 줄 몰랐네요 ^^;;;;
정말 예전에 넘 넘 재밌게 읽었던 작품인데 다시 보니 반가워요
특히나 사각지대의 키스 .. ^^   [01][01][01]

sunny

2005.07.18 19:15:08

남주를 생각하면 웃음을 감출 수가 없네요.
흐믈믈.... ^o^   [07][08][07]

하늘지기

2006.07.15 14:09:55

오우~ 남주.. 정녕 멋지구리~   [0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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