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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탁!
삽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부딪쳤다. 삽에 묻어있던 흙이 미세한 파편이 되어 떨어져 나간다.
“왜…….”
왜…… 네가 그걸 갖고 있는데?
“형이 부탁했어. 갖다달라고.”
“선우 오빠가……?”
“너한테 돌려주라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 미안하다.”
힘이 풀렸다. 전신에서 기운이 스스스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머릿속이 물렁하게 풀어지는 느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열이 나는 것처럼 화끈거려, 낮은 외계의 기온에도 불구하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내려가자.”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듯, 그러나 힘겨워하는 감정이 엷게 비치는 얼굴. 긴 속눈썹이 내려와 어둡게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어째서 나랑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 거야.
“어제 일은 미안했다. 사과…… 받아주기도 싫겠지만 적어도 신경은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일단 돌아가자. 가서 네 거…… 돌려줄게.”
얼굴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 말을 마친 세욱은 몸을 돌렸다.
“날, 원망하고 있지.”
어딘가 막힌 듯한 소리가 자신의 목구멍에서부터 흘러나온다. 생소했다.
“원망?”
“오빠가 그렇게 아팠는데 한번 오지도 않았다고…… 원망하고 있잖아.”
말하는 심장 위로 칼날이 스치듯 지나갔다. 몸을 엄습하는 감기기운과는 또 다른 현기증이 발끝부터 치밀어 올라온다.
작게 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변명 같지만…… 몰랐어. 오빠가 아팠던 걸 처음 알게 된 시점과 오빠가 가버렸단 걸 안 시점이 같았으니까. 그 때 나…… 병원에 있었거든.”
“알고 있어.”
너무도 담담한 대답이 건조한 공기를 뚫고 흘러, 흘러 들어온다. 세욱은 희미하게, 약간 자조기가 섞인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사고 났었던 거, 알고 있어.”
……아.
생각해 보면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몰랐을 리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세욱이 알고 있는 일이라면 오빠도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내게 한번 연락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헤어졌다 해도. 경애가 말했었다.
- 선우 오빠, 죽었어. 네가 수술 받기 얼마 전에……. 백혈병이었대. 급성, 백혈병. 유진아……. 너…… 몰랐었니?
“선우 오빠도…… 알고 있었니?”
“…….”
세욱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독한 사람이었구나, 선우 오빠. 정말 독한 사람이었구나……. 나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원망해야 할 사람은 나였구나ㅡ 그랬구나.
“나 말이지, 꽤 오래 병원에 있었어. 눈을 다쳤거든. 각막이 상했다는데 그게 좀 심해서. 근데 이식수술에 제공받을 각막이 좀처럼 구해지질 않아서. 그래도 어찌어찌 운 좋게 수술 받을 수 있었어. 알고 있는 얘기니?”
세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끄덕이고, 또 물었다.
“그럼 이것도 알겠네? 나, 정신병원으로 옮겼던 거.”
그 말에 세욱은 처음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얼굴엔 놀라움이 어려 있어, 그가 거기까지는 몰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이미 다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수술은 분명히 잘 끝났는데, 문제가 생길 이유도 없는데, 갑자기 또 안 보이는 거야. 앞이 그저 흰색 일색이고, 정말 하나도…….”
그 때를 떠올리니, 갑자기 혀가 딱딱하게 굳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려. 다 나았잖아. 이젠 괜찮잖아. 숨을 삼키고, 덧붙였다.
“병명도 웃기게 길더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자신이 사고를 당했거나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서 충격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나는 두가지가 겹쳤으니 더 힘들 거라고.
그것은 정말로 고통스런 경험이었다. 전혀 음식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넣으면 바로 구역질이 나온다. 실은 안 먹어도 나왔다. 매일 토했다. 매일 토하고…… 목구멍이 막히고 심장이 멎는 듯 미칠 듯이 답답하고…… 공기 중 산소가 아니라 질소나 이산화탄소만을 흡수하는 듯한 기분. 몸은 위축되고 경직되어 그것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시 토하게 된다. 거의 발작 같았다.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대다 보면 쓰디쓴 위액이 목구멍을 통해 탁한 기운을 동반하며 흘러나온다.
그리고 발작이 끝나면, 눈은 어김없이 보이지 않았다.
약을 먹고 응급처치를 받고 잠을 자면 잃었던 시력이 돌아온다. 하지만 또 발작이 일어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또 치료를 받고, 그리고 나서도 또 발작이 일어난다. 악순환이었다. 질긴 괴로움의 재생과 반복이었다.
그 고통의 터널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왔을 때, 나는 미국으로 향했다.
도저히 학교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학교의 구석구석에 그와 나의 추억이 서려 있었기 때문에. 아니, 도시 전체가 그와의 추억을 연상시켜서. 그 전부를 똑바로 마주하면 또 다시 눈이 보이지 않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러니…… 조금만 덜 미워해 줘. 날 똑바로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하고 있는 거 알지만…… 내 얼굴을 마주보고 밉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만 미워해 줘…….”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 비어있는 머릿속과는 달리, 의지와는 별개로, 말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나는 세욱을 생각보다도 훨씬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저 약해진 마음의 발로일까.
그렇지만 더 이상 괴롭고 싶지 않았다. 운전대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된지 이제 겨우 3개월 째. 더는 자신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미워할 리 없잖아.”
세욱의 대사는 짧았음에도 성능이 좋지 않은 테이프나 CD를 들을 때처럼 조금씩 끊겨 들려왔다. 그가 어색하게 말하고 있는 건지, 내 귀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를 고쳐 올려다봤다.
“미워할 리 없잖아.”
그렇게 세욱은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
“거짓말.”
나는 말했다.
“날 똑바로 보지도 않으면서.”
그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그 눈동자가 감정의 동요를 억누르느라 노력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똑바로…… 볼 수 없어.”
그것은 마치 내가 아닌 세욱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그런 표정 짓지 마…….
“너는…….”
머뭇거림. 긴장을 담은 한숨을 눌러 참으려는 듯한 여백.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세욱의 얼굴이, 올라온 그의 손에 의해 반쯤 가려진다.
미처 참아내지 못한 한숨과 함께 그 말이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선우 형의 눈을 하고 있는 걸.”
전부가 멈춰버린 듯한 침묵.
그 고요함을 뚫고 어딘가에서 후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쌓인 눈이 떨어지는 것이 고막을 통해 가늘게 느껴진다.
“몰랐던 거야?”
세욱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너한테 각막을 제공한 사람이 선우 형일 거란 생각…… 한번도 해보지 않았어?”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전부 비밀로 하기로 돼 있다며 내 질문에 담담히 대답하던 의사선생님의 얼굴과 날 그저 말없이 다독이기만 하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거……였어요? 모두들 나한테…… 숨겼던 거였어……?
“네가 사고 난 거…… 선우 형도 알고 있긴 했어. 하지만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는 몰랐지. 말하지 않았어, 내가. 그 때 형은 이미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그런 사실까지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 형의 상태를 봤으면 너도 이해했을 거야. 정말…… 지독했어. 보기 전엔 몰라. 형도 너한테만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귀가 아파……. 웅웅거려…….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귓전을 타고 흘러 내려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네가 생각보다 심각하단 소식을 들었어. 망설이다 결국 형에게 얘기했지. 형은, 그 때 정말로 하루 이틀 남았을 때였어. 치료도 중단하고 있었고. 인간이 그러더라. 잘됐다고…… 너한테 전해주라고. 다만 비밀로 해달라고. 네가 알게 되면 자기한테 미안해할 거라며, 괴로워할 거라며. 내가 전했어. 너희 부모님에게도 그렇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지. 사실은 정말 이지 이가 악물렸지만. 당신들이 사윗감으로 절대 안 된다고 결사 반대한 그 인간은 죽어가면서까지 당신 딸만 생각하고 있다고.”
그만해. 이제 그만 말해……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귀를 막아줬으면 좋겠어……. 틀림없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을 내 표정 따윈 눈에 담지 않은 채, 세욱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투로,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 바보는 너한테 줄게 남아 있었다며 웃었어. 웃음이 나오냐고 한 대 쳐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잘 안됐다. 그러면서 지독하게…… 제길…… 지독하게 힘들었지. 왜냐구? 나 말이지, 너하고 형이 헤어졌을 때 속으로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지켜봤었어, 널. 하지만 네 상대가 형이니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야. 그게 안됐어. 그래서 네가 많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형한테는 별거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지. 두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체온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피크까지 올라간다. 오싹하고…… 그리고 뜨거워……. 눈이 흐릿해진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메아리처럼 울려서 들리고 있었다.
“근데 그 인간은 낼모레 하는 시점에서도 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자기 때문에 죄의식을 갖지 않기를, 괴로워하지 않길 바란다며, 그 바보는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젠장, 분하지만 난 도저히 이길 수 없어…….”
울고 있는 거야……? 지금…… 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하고 겨우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는 세욱의 모습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미움받아야 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야.”
- 같이 여행 갈래?
- 물론이지. 거기 센터 코트에서 우리의 오스트레일리안 포메이션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 멋지지 않냐? 산중에 오두막집이라니.
- 테니스, 그만 둘 거야.
어째서 생각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었던 걸까.
끼이이이이이익ㅡ!
순간, 어떤 환청이 귓전을 날카롭게 갈랐다. 피부가 떨려…… 수……숨이 막혀…… 심장이…… 심장이 부서질 것 같아……!
- 선우 오빠, 죽었어. 백혈병이었대. 급성, 백혈병. 너…… 몰랐었니?
몰랐었니……?
……몰랐었니……?
…………몰랐었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너……너무 탁해……. 공기가 자……잘 들어오지 않아……. 머리 한 부분이 구겨져서 그쪽으로만 피가 쏠리는 것 같은……. 몸이…… 마비되서…… 신경이…… 부서져……. 차라리 잘라버려…… 떼어버리라구……!
“어이! 왜 그래! 유진아!”
세욱의 목소리가 끊겨 들렸다. 심장이 뛴다…… 미친 듯이 뛴다……. 질식할 것 같아……! 가슴을 움켜쥐었다. 막혀 있던 목구멍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소리를 내보내려 애쓴다. 세욱의 팔이 내 몸을 붙드는 게 느껴졌다.
“유진아!”
“……세……나…….”
말을 이을 수가 없다. 필사적으로 굳어 있는 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세욱이 알아들었는지 나를 강하게 부축한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던 몸을 벽에 기대세우고 굴리듯 움직여서 겨우겨우 문을 빠져나갔다.
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아까부터 안쪽에서 치밀어 올라오던 것을 힘을 다해 밀어낸다. 구역질이 내장을 뒤틀고 내부를 휩쓸며 그대로 솟구쳐 올라왔다.
미친 듯이 토한다…… 그 언젠가처럼. 주……죽을 것 같아…… 이대로는 죽을 지도 몰라……. 그런데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난 힘을 다해 세욱의 가슴에 매달렸다. 이미 눈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몸이 괴로워서 그런 게 아니라 각막을 다쳤을 때의 상태로 돌아간 것처럼 나의 시선은 하얗게 부서지는 공간만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 보이지…….
“유진아! 차유진……!”
결국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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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은 세욱의 등, 그 단단한 감촉.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던 검은 파카가 내 위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사실. 괴로움으로 반쯤 의식을 잃은 나를 업은 채, 그는 내리는 눈과 내 위액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산장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허둥지둥 벨을 눌러대는 소리.
“세욱아! 이게…… 어머! 유진아! 괜찮은 거니? 유진아! 유진……!”
아주머니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키스해도 돼?」
「…….」
「유진아.」
「후우…… 그걸 꼭 물어봐야 돼?」
「……?」
「……돼.」
그러자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런 입맞춤을 끝낸 선우 오빠는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날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언젠가는 말이야…….」
빛이 눈꺼풀을 뚫고 스미는 것이 느껴진다.
아아…… 이것은 뭘까? 너무나도 기분 좋은 감촉……. 비록 힘이 다 빠져 나른하기는 하지만 손에 닿아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 아련한 감각을 전달해 와 난 저도 모르게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자, 눈에 보이는 것은 흰 천장……. 그리고 고개를 약간 틀자 액이 똑똑 흘러 떨어지는 링거 병이 보였다. 링거 병에서 연결된 줄을 따라 고개를 내리자 손등에 꽂혀 있는 주사바늘…… 그리고 주사바늘을 꽂은 손등 아래로 내 손바닥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다른 사람의 손이 눈에 들어온다. 따스한 체온은 바로 그 손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손의 주인은 내 몸을 건드리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진 자세에서 침대 가장자리에 다른 쪽 팔을 대고 그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몹시 피곤한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지 않고 누워 있는 자세에서 보이는 대로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옅은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얼굴을.
땡볕 아래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면서도 좀처럼 타지 않아서 선우 오빠를 비롯, 다른 선수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던 피부는 여전히 희었다. 그늘이 져 있는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지쳐 보였다.
세욱은 내 손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병원이란 사실에 생각이 미친 난, 온통 흰색 일색인 병실의 풍경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봤다. 1인실이 아닌데도 침대를 차지한 환자는 나 하나 뿐이었다. 그 넓은 병실을 살펴보고 있으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츰차츰 윤곽을 드러내며 생각이 되살아난다.
그래. 또 발작을 일으켰었지.
그런데,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비교적 푹 잔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몸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시력도 완전히 회복되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아마도 그것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자와 손바닥이 닿아 있는데도 이상하리 만치 어색하다거나 불편하지 않다.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정적조차 건드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조금, 두근거렸다. 그러면서 명치끝이 아려온다.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성격이 다른 아픔을 공유한 그를 이해하면서도, 한없이 막연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리고 그 원인 중 하나가 나란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소리 죽인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알아? 너도 참 별스런 사람이야. 그리고…… 못됐어. 내내 침묵하고 있다가, 며칠동안 한꺼번에 뒤흔들어 놓아도 되는 거니? 그것도 이제서야 겨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자신해서 돌아온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화내고, 멋대로 키스하고, 멋대로 말하고. 그렇게 멋대로 사람을 헤집어놓고, 이제 나더러 어쩌란 거야.
- 오랫동안 지켜봤었어, 널.
세욱은 말했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고. 나를 좋아했었다고. 어쩌면 나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확신이 들기 전에 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산장에 돌아왔던 건 아마도…….
순간, 그가 움직였다.
눈꺼풀을 조그맣게 움직이고 이어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더니, 내가 깨어나 있는 걸 깨닫고 당혹한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뗀다.
“언제 깬 거야.”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지금 막.”
“괜찮아?”
“응.”
누운 자세 그대로, 나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짧게 답했다.
“지금 몇시야?”
“아침 11시.”
세욱은 손목을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야.”
눈을 깜박였다.
그렇구나. 크리스마스구나. 나, 하루 가까이 자버린 모양이다.
“세욱아.”
“응?”
그는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부른 나를 고쳐봤다. 그 얼굴이 왠지 모르게 우스워서 나른한 상태에서도 조그맣게 킥킥 웃었다. 그러자 창피했던 건지, 기분이 나쁜 건지, 슬쩍 찌푸리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테니스, 아직 좋아하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 이런 말 할 권리는 없지만…… 네가 테니스 계속했으면 좋겠어.”
“…….”
침묵하는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엄마한테 전화할게. 산장을 비울 수가 없어서 먼저 돌아가셨거든. 너 깨어나자마자 전화해 달라고 했어.”
그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나 여기 와서 참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구나…… 하고.
세욱이 아주머니에게 전화하고 내가 링거를 다 맞고 난 후. 그는 아직도 걱정스런 눈치였지만 나는 고집을 부려 퇴원했다.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라, 이 경우에는 내가 내 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병력 같은 걸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을 뿐이다, 원래 위가 좀 안 좋다고 간단히 설명을 끝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의사에게 큰 이상이 있는지 나중에 꼭 검사 받겠다고 다짐한 후에야 난 병원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귀찮고 번거로운 과정. 나에 대해선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 너는 선우 형의 눈을 하고 있는 걸.
눈을 감았다. 손을 들어 눈꺼풀을 어루만진다. 이젠 가버렸어. 선우 오빠는 가버렸다고. 그렇지만 동시에 여기, 내 안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동시에 너무나 자신을 안심시키는 사실이었다.
사실은 이런 식의 강한 자극이 필요했던 거다, 나에게는. 그저 쉬쉬 덮어두는 게 아니라 전부를 들어내서 자신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의 시간은 내가 돌아봐야 하는 위치에서 멎어 있음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는 어떤 자극이 필요했었다. 과거의 행복한 순간은 더 이상 지금 현재가 아니며, 현재의 고통은 미래라 불리는 불확실한 어느 시점에 가면 희석되고 산화되어, 화석처럼 굳어진다는 것을,
멈춰진 그의 시간을 내 안에 담고서도 자신은 변해갈 수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오빠, 여기 있는 거야? 지금 여기, 내 옆에 있는 거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나……. 뭔가가 변해 가는 걸 느껴. 어떡하면 좋을까? 내가 어떡하면 좋겠어? 괴로운 건, 변해 가는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아…….
그것은 달콤하고도 쓰라린 자각이었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유진아. ……아, 그대로 누워 있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만류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아주머니가 스프 접시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이것 좀 먹어 봐. 먹을 수 있지?”
이 산장을 한번 찾은 사람들은 절대 잊지 못하는 것이 바로 아주머니의 손맛. 한식부터 양식, 중식, 일식까지 다양한, 콘도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푸짐한 음식들이 매일처럼 메뉴를 달리하며 나오는데 하나 버릴게 없을 정도.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란 건 아마 아주머니의 요리를 말하는 것일 거다. 그런 아주머니가 만든 완두콩 스프는 당연히 맛있을 터. 푸르스름한 녹색을 띈 스프를 보면서 나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 맛있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병원에 더 안 가봐도 돼?”
“그럼요. 보세요. 멀쩡하죠.”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딱히 아픈 데는 없는 거 맞지? 세욱이가 그냥 가벼운 빈혈일 거랬는데, 의사가 그랬어?”
“네.”
“아유, 젊은 아가씨가 그렇게 비실대서 어떡해? 어여 먹어. 먹고 기운 좀 차려. 이거 봐, 세상에. 허리가 한줌도 안되겠네. 그래, 그렇게. 식욕이 없다 그럴까 봐 걱정했는데 잘 먹으니 이쁘다.”
아주머니가 안심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대답했다.
“맛있어요.”
“다행이네. 빈속이라 우선 유동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좀 속이 회복된 것 같으면 딴 거 차려 올게.”
“……폐 끼쳐서 죄송해요.”
“에휴, 그런 소린 하지도 마. 난 아들만 둘이라서, 유진이 같은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맨날 생각하거든. 딸 같은 아가씨가 폐는 무슨.”
세욱에게는 형만 하나 있었다.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아주머니는 여자아기를 원하셨을 것 같기도 하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하고 고개를 들자,
“세욱이랑 뭔 일 있었어?”
나는 막 들려던 숟가락을 수프 접시에 다시 내리고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아주머니가 망설이고 망설인 듯한 투로 덧붙인다.
“아니, 좀 두사람 사이가 이상한 것 같아서.”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럼 다행이구.”
아주머니는 끄덕거리면서 어여 먹어, 하고 손짓을 해 보였다. 사실 마음이 무거워서 수프가 잘 먹히지 않았지만 걱정을 끼치는 것도 죄송해서 억지로 스프가 가득 담긴 숟가락을 입안에 넣는다. 그렇게 꾸역꾸역 열심히 입에 밀어 넣은 끝에 겨우 접시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선우 일은 안됐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머니의 눈은 침대 시트를 향하고 있었지만, 시트를 보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한 시선.
“참 좋은 총각이었는데. 아들은 으으, 정말 지겹지만(이 부분에서 그녀는 조그맣게 웃었다), 그런 아들이라면 하나 더 있어도 괜찮겠다 생각했거든? 유진이가 선우 여자친구란 말을 듣고도 좀 실망했지만, 그러려니 했지.”
“예?”
“아……아니, 여기 첨 왔을 때 나 굉장히 유진이가 맘에 들었었거든. 주책이지. 저런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며느리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욱이가 그러더라고. 선우 형 여자친구니까 엄마 꿈 깨시라고.”
아주머니는 쟁반에 내가 비운 접시를 옮기면서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내 옆에 앉으며 이불 위에 올려진 손을 쥐고 눈을 맞춘다. 어디까지나 다정한 미소가 과분할 만큼 따스한 기운을 담고 내 시야로 흘러 들어왔다.
“어쨌거나 옛날 일 갖고 너무 힘들어하지 마. 어차피 지나간 거니까. 세월이 보약이란 말도 있고, 도저히 잊지 못하는 일도 살다가 보면 잊기 마련이고, 잊지 못해도 그저 다 묻어두고 살아야 하는 게 사람 사는 거거든.”
아주머니는 일어섰다. 쟁반을 들고 나가기 전, 생각난 듯 살짝 뒤돌아 덧붙인다. 어쩌면 다 알면서 절반은 모르는 척 하는 걸 수도 있을 듯한 그녀의 웃는 얼굴이 가슴을 찌르며, 그렇지만 아름답게 반짝였다.
“내가 이렇게 잔소리 늘어 논 거, 세욱이한텐 아닌 척 해 줘?”
9
크리스마스의 하루는 조용하고 따뜻하게 지나갔다.
그 날 저녁, 식당에서 만난 세욱과 나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목구멍에 꽉 걸려서 좀처럼 나오지를 않는다. 너무 할 말이 많아서 그럴지도 몰랐다. 실은 눈을 제대로 맞추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사실은 계속해서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은 그쪽으로 가 있지 않은데, 마치 그가 자신의 시야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그대로 느껴져서……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가슴이 안타깝게 고동친다. 그 감각은 절반 정도는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실은 놀랍도록 달콤한 저림으로 결코 고통스럽다고 표현할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절반은 또한, 처음 느끼는 생경함과도 마구 뒤섞여 있어 괴롭지는 않았지만 혼란스러움을 어쩔 수가 없는 자신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이 감정이 어떤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그것은 선우 오빠에 대한 것과는 세부적인 부분에서 많이 달라서, 아니 그렇다기보다 감정을 메우고 있는 색조가 전혀 다르다고 해야할까.
몇번이나 헤쳐 분석해 보려고 했지만, 시도는 이내 지금 최고로 자신을 지배하는 한가지에 덮여져 버린다. 마침내 나는 이성적으로 자신을 해석해 보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러자 겨우 잠이 왔고. 마음이 완전히 편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산장에 와서 처음으로 나는 꿈에 시달리지 않은 채 수마(睡魔)에 완전히 몸을 맡길 수 있었다.
그저 한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ㅡ 자신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푹 좀 잤어? 근데, 뭘 그렇게 찾아?”
아침을 먹으러 내려온 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자 아주머니가 물었다.
“세욱이…… 어디 갔어요?”
“글세? 가봐야 할 데가 있다면서 새벽같이 나갔는데 아직 안 돌아오네?”
“그래요. ……아주머니.”
“응?”
“저 이제 서울 올라가려고요.”
“왜, 더 놀다 가지. 별루 놀지도 못했잖아.”
“가봐야 해요. 진작 떠났어야 하는 건데…….”
“세욱이 오거든 가지 그래. 걱정하는 눈치던데.”
“아뇨, 그냥 갈게요. 세욱이한테도 너무 폐만 끼쳐서 미안해요.”
그가 나에게 키스했다고, 고백했다고, 그리고 나를 걱정해 주었다고, 감정을 손쉽게 인정하기는 싫었다. 이미 결론은 나 있었지만, 좀 더 생각하고 생각해서 지금 내가 뭘 해야 하는 지를 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확실하다…….
나는, 조금씩 자신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그래. 할 수 없지, 그럼.”
아주머니는 뭔가 더 말하고픈 게 있는 눈치였지만, 이내 포기한 듯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세요.”
문밖으로 나오려는 아주머니를 만류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쉬워서 어떡하지?”
“또 올 거니니까요. 참, 이거. 며칠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말하면서 숙박비를 내밀었다.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젓는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주머니다웠다.
“아휴, 됐어. 세욱이 친구한테 무슨…….”
“받으세요.”
내가 반강제로 드리는 것을 겨우 받아드는 아주머니.
“담에 뵈요. 건강하시구요”
“그래, 유진이도 건강 좀 챙겨. 그만 비실거리구.”
“네.”
머쓱하게 웃었다.
차고 문을 열고, 차에 타 막 시동을 걸었을 때.
‘아……?’
다른 차가 차고로 들어서고 있었다. 세욱이 운전하는 밴. 내 차 옆자리에 멈추더니, 서두르는 동작으로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와 윈도우를 똑똑 두드린다. 창을 열었다.
“뭐 하는 거야.”
조금 다급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 조용히 대답했다.
“돌아가.”
“어이, 잠깐 기다려. 집에 들어갔다 올게.”
막는 것처럼 손을 든 세욱은 돌아서려다 다시 이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어?”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사라진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옮겨 앞을 바라본다. 그렇게 짧은 동안이지만, 혼자 있는 탓인지 꽤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후.
손에 커다란 물건 두개를 들고, 그가 돌아왔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낯이 익은 물건. 저도 모르게 도어를 열고 당연한 듯 몸을 내렸다.
“이거…….”
그가 물건들을 내민다. 나와 선우 오빠가 묻었던 두개의 양철상자. 그토록 찾으려 애썼는데 막상 받아들고 나니 어딘가 난처한 기분이 들어, 긴장을 담은 한숨이 짧게 배어 나오고 말았다. 그런 내게 세욱이 말한다.
“네가 묻었던 건, 너한테 돌려주라고 했어. 자기가 묻었던 건 그냥 버리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네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번엔 막지 않고 나오는 숨을 그대로 길게 토해낸 후 물었다.
“뭔지 알아?”
세욱은 고개를 저었다.
“열어보고 싶었지만…… 참았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상자는 번호입력식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나는 번호를 입력했다.
725. 914. 나의 생일. 그리고…… 선우 오빠의 생일. 사실 이 정도는 세욱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숫자. 그렇지만 나는 믿었다. 세욱이 정말로 열어보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핑크색으로 칠해진 상자부터 열었다. 상자 안에는 들어 있는 것은 미니 다이어리. 내가 약 1년 정도의 시간동안 선우 오빠에게 주기 위해 꾸준히 적어 왔던 물건, 그와 나의 추억이 가득 담긴 작은 수첩.
수첩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마음 속, 가볍게 출렁이는 수면 위로 추억의 영상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련하게 흐트러지며 사라지고 바뀐다.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은 예상외로 침착하고, 하지만 역시 가슴은 욱신거렸다.
감사한다. 이토록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한다.
“선우 오빠…… 봤을까?”
막힌 듯한 목을 가까스로 가다듬어 물었다. 세욱이 끄덕인다.
“내가 전해줬으니…… 그래, 분명히 봤을 거야.”
조금 위안이 된다. 다이어리를 원래 들어있던 상자에 돌려놓고 이번에는 푸른색으로 칠해진 상자를 열었다. 손이 멈칫거리며 뚜껑이 끼익, 소리를 낸다. 떨리는 걸 어쩔 수가 없어서, 힘을 다해 가까스로 그것을 들어내자.
- 언젠가는 말이야, 날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줄게.
선우 오빠가 그렇게 말했었다…….
작은 플라스틱 결정 안에 네잎 클로버를 담은 목걸이를 난 뚫어지게 응시했다. 첫 키스, 그리고 그는 말했었다. 언젠가 자신을 만나서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조그맣게 웃었다.
고마워, 오빠……. 오빠를 만나서 정말로 행운이었다고 나, 그렇게 생각해.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워…….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은 작은 곰 인형. 그 인형을 들어올렸을 때.
[ Will you marry me? ]
인형으로부터 소리가 흘러나왔다. 손가락에 눌린 바로 그 부분에서. 숨이 막히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누른다.
Will you marry me?
Will you marry me?
Will you marry me?
‘바보…….’
자신은 눈물이 나지 않는 체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손등 위에 떨어진…… 이것은 뭐지? 막을 수 없는 뭔가가 안에서부터 치밀어 올라와 그대로 흘러내린다. 나, 울 수 있었구나. 울 수…… 있었어.
세욱의 손이 내 어깨에 닿으려다 힘없이 내려가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에 울음기를 담지 않으려 애쓰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조금…… 기대게 해줄래?”
그리고 다가서서, 세욱의 팔에 머리를 묻었다. 그의 몸이 움찔 떨리는 듯 하더니, 이내 미끄러지듯 움직여 가까이 다가선다. 내 얼굴이 그의 가슴에 파묻히듯 닿았다. 눈물이 그가 입고 있는 반코트에 스며들어간다. 훈훈한 느낌이 들었다. 상통하는 아픔을 공유했기에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그의 배려가 한없이 고마웠다. 이런 온기는 3년만에 처음이다…….
단단하고 따스한 가슴에 안겨서 나는 흐느껴 울었다.
울 수 없던 3년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것처럼.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저번엔 내 파카를 다 버려놓더니, 이번엔 반코트냐?”
차안에 있던 티슈를 꺼내서 눈물콧물을 닦아내고 있는 내게 던진 세욱의 첫마디엔 그런 식으로 장난기 어린 퉁명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입을 삐죽이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와 자신도 놀라버린다.
“밴댕이 소갈딱지!”
“뭐?”
세욱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고쳐봤다.
“아, 선우 오빠가…….”
“선우 형이 그렇게 말하랬어?”
“응.”
- 세욱이 자식이 또 고깝게 굴면 이렇게 말해. 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아! 하고 말이야. 알았지?
둘이서 동시에 웃었다. 킥킥 웃고 있으려니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작고 투명한 결정으로 곱게 뭉쳤다가 부드럽게 녹아 내려간다.
“이젠 정말 가봐야겠다.”
그 결정이 완전히 녹아 내렸을 때, 나는 세욱에게 말했다.
“이거, 안 가져가?”
어깨를 붙들며 세욱은 양철상자를 가리킨다. 몸을 구부려 물건들을 곱게 상자 속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그에게 내민다.
“좀 맡아줄래?”
놀란 표정을 짓는 그에게, 상자를 내민 손을 좀 더 뻗으면서 덧붙였다.
“내가 이걸 봐도 지금처럼 힘들지 않게 될 때, 아무렇잖게 웃을 수 있게 되면 도로 찾아갈게. 부탁해……. 당분간은 좀 맡아 줘.”
할 수 없는 녀석이군,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피식 웃으며 상자를 받아들더니 생각난 것처럼 말을 던진다.
“우림 형 만나고 왔어.”
이번엔 내가 놀라 그를 올려다봤다.
“테니스, 다시 시작하는 거야?”
“아아, 아마도. ……뭐, 받아줄 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가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투로 대답했다. 나는 또 웃었다. 기쁘다.
“잘됐다.”
“저…….”
“응?”
“돌아가면…… 선 볼 거냐?”
아.
잊고 있었다.
“아니.”
눈을 똑바로 보면서 대답했다. 빛이 스미는 것처럼 그의 입가에 미소가 찬찬히 피어오른다. 안심한 표정. ……귀여워.
문득 세욱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정말, 귀엽다고.
“언제 출국할 거지?”
“글세…….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내 대답에 그의 얼굴이 결심한 것처럼 가볍게 굳어졌다. 한 호흡 가볍게 들이쉰 후, 그는 내 귀에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나, 서울 갈 거 같아. 우림 형과 같이.”
나는 그를 보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고개를 떨구고 빙긋 웃는다.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려 차안에 뒹굴고 있는 파란색 볼펜을 집어 올렸다.
“손 좀.”
그의 손을 잡고 손바닥 쪽을 위로 오게 해서, 볼펜으로 전화번호를 꾹꾹 눌러 적었다. 간지러운 모양인지 손바닥이 움츠러들려 했지만, 참을성 있게 내가 적기를 끝마치길 기다리고 있는 그.
볼펜 뚜껑을 닫으며, 그런 세욱에게 말했다.
“전화, 기다릴게.”
“……아아.”
그는 약간 텀을 두고 등을 찔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차에 올랐다. 아니, 오르려 했을 때.
돌려세워졌다.
키스……. 말없이, 감싸듯.
따뜻한 감촉이 입술을 가볍게 건드리듯 닿는다. 조심스럽게 그저 스치는 것처럼 몇번을 내리던 그 감촉이 내가 입술을 이끌리듯 벌리는 것과 동시에 좀더 선명하고 포근한 존재가 되어 입술 안쪽의 치열을 쓸어 내렸다. 달콤하게 감아 올리고, 부드럽게 헤집는다.
심장이 뛴다. 가슴이 고동친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아. 이것은 벌이 아니라 위로. 그리고 또 다른 고백. 상대를 받아들이는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두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동시에 고백하고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라는 걸 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섣불리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두글자의 단어로 정의하지 않아도 이런 식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그래, 그걸로 충분하니까.
자신이 살아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 한가지만으로.
‘또 보자.’
세욱의 말을 뒤로하고 차는 산장을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다. 편안한 기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은 아주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다. 손을 들어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수줍게 웃는다.
그렇게 앞을 고쳐봤다.
‘……아.’
깨달은 또 한가지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
한송이…… 두송이……. 눈발이 가볍게 흩날리는 광경이 시야에 비쳤다. 운전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드문드문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본다. 그 눈송이 사이로, 그래도 자신을 잃지 않은 태양이 보낸 빛이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메우고 따뜻한 흐름이 되어 투명하게 퍼져간다.
문득 느꼈다. 지금 순간, 눈으로 가득 덮인…… 그리고 한동안 계속해서 내리는 눈으로 가득 덮여 있을 세상, 시야에 비친 세계는 그럼에도 언젠가는 잃었던 색을 되찾고 당당히 재생한 모습을 보여줄 테지.
새로운 계절이 오면.
……알고 있다.
아름답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다시 드러날 색, 그리고 그 색을 보여줄 계절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순백의 시기는 바람에 휩쓸려
새로운 계절을 데려 온다
흘러나온 손바닥의 눈은 살짝 빛나고
색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거리
깨닫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눈을 감은 난 겨울의 차가움을
지금도 따뜻하게 느끼고 있다
설원의 대지에 둘만의 입김이 춤춘다
잡은 손가락 끝으로 소중한 느낌을 기억해 냈다
펼쳐진 세계에 마음을 빼앗겨
순수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리붓는 눈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감싸
난 영원을 기도했다
그녀가 응시하던
창가에 놓여 있는 유리세공
투명한 눈의 결정의 빛을
생각나게 하며 괴롭게 쌓인다
마음의 소용돌이를 계속 헤매는 내게
과오는 돌연 눈앞을 가로막고 비웃는다
순백의 시간은 바람에 휩쓸려
새로운 계절을 데려온다
지금도 가슴에 쌓이는 추억을 응시하곤
보이지 않는 한숨을 토해냈다
높이 솟은 하늘에 둘러 싸여
흔들리는 어깨를 위로할 수 없이
차가운 구름을 덮곤
무심한 얼굴로 타오르는 태양
정적의 저편에 더럽혀지지 않은 너를 응시해
너무 늦어버린 말은 아직 도달하지 못하네
매료되어 도약하는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고
순수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내리붓는 눈은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감싸
pieces of you pieces of you
lie in me inches deep
순백의 시기에 당신을 빼앗기고
평온한 햇살 속에서
나는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아내어
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높이 솟은 하늘에 둘러싸여, 무심한 얼굴로 타오르는 태양
에필로그
후둑…….
도심에서 꽤나 멀찍하게 떨어져 한적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통나무로 지어진 2층 집. 그 통나무집 옆에 동무처럼 친근하게 자리잡은 앙상한 나무, 뻗어 나온 긴 가지에서 흰 눈더미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화살표를 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지붕. 그 아래, 긴 통나무로 틈새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정교하게 엮어 내린 겉벽. 문을 들어가기 전 뵈는, 허리 정도까지 오는 나무 난간을 설치한 긴 테라스.
겨울철, 산 위 스키장에 놀러 오는 손님들이나 여름철, 계곡을 찾아오는 피서객들에게 민박을 주는 곳인 작은 통나무집 산장이 차 앞면 윈도우를 통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다.
차를 멈추고 몸을 내려 산장과 그 주변의 풍경을 죽 둘러보았다.
어제 내렸다던 눈이 소복하게 쌓인 깨끗한 땅과 나무, 그리고 그 위로 죽 이어진 산과 그 산 위로 마지막으로 올려다 보이는 약간 연한 채도를 지닌 하늘.
낯익은 풍경을 보며 미소짓다가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 딩……동…….
“어서 오세요.”
몇 년이 지나도 그 모습 그대로일 듯한 따뜻한 미소를 띄우며 중년여인이 맞는다. 관록 같은 엷은 주름과 업 스타일로 말아 올린 머리도 여전. 나를 보더니 표정이 확 풀리며 뒤로 돌아 소리쳤다.
“세욱아! 유진이 왔어! 세욱아!”
문을 들어서는 내 눈앞, 아주머니를 사이에 두고 저편에 누군가가 비친다. V자로 목 부분이 파인 풀색 스웨터를 걸친 모습.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온몸이 바스라질 것 같은 훈련 때문일까, 몇 년 전보다는 좀 더 그을린 듯 보이는 얼굴. 머리도 약간 짧아졌다. 하지만 투명한 느낌을 주는 갈색 눈과 날렵해 보이는 인상은 변함이 없다. 그 갈색 눈동자가 날 보며 웃었다.
“여어.”
나도 웃었다. 한 손에 계란 거품 내는 도구를 든 채 폼을 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앞치마까지 둘렀다.
아주머니가 투덜거린다.
“둘이서 케익을 만든다고 저 난리들이야. 나중에 니네가 부엌 치워! 절대 난 모른다? 알았지?”
“둘…이요?”
“으응, 누가 왔거든. 유진이도 알지? 강우림 씨.”
“세욱아. 다 된 거지? 이대로 오븐에 넣음 되는 거냐?”
아주머니의 대답에 박자라도 맞추듯 누군가의 우렁찬 소리가 들리고, 그 목소리의 장본인이 비죽 얼굴을 내밀었다. 날 보더니 입을 헤 벌린다.
“우왓,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었어요!”
핫 하고 이번에야말로 크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허옇게 밀가루 반죽이 묻어 있는 얼굴이 팍 풀어지는 모습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아하하. 보통의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훤칠한 키에 외모도 남부럽지 않게 번듯한 두사람의 지금 꼬락서니가 참을 수 없을 만치 우스워서, 난 가방도 옆에 떨궈둔 채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유진 씨, 반갑단 인사가 넘 요란한 거 아닙니까? 옷, 그렇다! 빨랑 들어오세요.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어서.”
아직도 웃고 있는 나를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짐 가방은 세욱에게 맡기고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거실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아……. 안녕하세요.”
그녀는 나를 보고, 앉은 자세 그대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마주 숙였다. 아니, 그녀는 앉아 있었으므로 마주 숙인다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의 경우에서라면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휠체어 위에 앉아 있었다.
“제 약혼녑니다.”
밀가루가 아직도 코끝에 허옇게 묻은 얼굴로 헤벌쭉 웃고 있는 강 선수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며 쑥스럽게 말한다. 그녀는 강 선수의 얼굴을 보더니 웃으며 이쪽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하지만 다정하게 덧붙였다.
“유 은이라고 합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상상한 그대로다, 오빠.”
“세욱이 놈한텐 좀 아깝지 않냐? 흐흐.”
“후……. 지금 뭐라고 하셨죠, 형?”
“아, 아냐. 둘이 울트라 나이스 캡숑 잘 어울린다구.”
손을 젓고 있는 강 선수와 약혼녀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때마침 거실로 들어온 세욱을 또 보면서 바보처럼 멍하게 되물었다.
“약혼…하셨었어?”
세욱이 대꾸하기도 전에 강 선수가 먼저 답했다.
“아하, 모르셨어요? 신문에도 났었는데. 얼마나 곤욕을 치뤘다구요. 하긴 유진 씨는 내내 미국에 있었으니 몰랐을 수도.”
“세상에. 축하드려요. 결혼은 언제쯤?”
“호주 오픈 끝나면요. 숨 좀 돌리고 한 4월쯤에 할겁니다. 우리 제법 잘 어울리죠? 예? 안 그렇습니까?”
못 참겠다는 듯, 유 은 씨가 강 선수를 쿡쿡 찔렀다.
“주책 좀 그만 떨어, 오빠. 반죽한 거 오븐에 넣었어?”
“옷. 참. 유진 씨, 기대하십쇼. 저랑 세욱이 녀석의 야심작, 애플 파운드 케익을 곧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가자, 세욱아.”
성시경의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를 흥얼거리면서 강 선수가 세욱을 끌고 부엌 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거의 비슷한 타이밍으로 아주머니가 홍차와 쿠키를 쟁반에 담아서 거실로 가져온다.
“코코아가 다 떨어졌어. 케익도 가져온다는데 괜히 앞서서 단 거 먹으면 식욕도 떨어지니까 홍차가 좋겠다고 생각해서. 유은인 홍차 괜찮아? 커피가 나으면 그걸로 가져올까?”
“아뇨.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벌써 유 은 ‘씨’가 아닌 유 은‘이’가 된 모양이다. 아주머니의 친화력이란! 나도 잘 먹겠습니다, 말하면서 속으로 미소지었다. 홍차를 한모금 마시고 있으려니, 언젠가 강우림 선수가 했던 말이 불쑥 생각났다.
-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도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어.
겨울, 눈발이 하나 가득 흩날리고 있는 테니스 코트 한복판에서.
그 말은 지금까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기억에 남았었다.
“그럼 미국에 혼자서만 내내 있었어? 외롭지 않아?”
“익숙해져서……. 참, 만화 그린댔지. 누구한테 배웠어? 독학?”
“응, 안지신 선생님한테. 지금은 관뒀지만.”
“어, 왜?”
“공모전에 당선됐거든. 지난여름부터 내 이름으로 연재하고 있어.”
거실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동갑내기인 ‘은’은 금새 친해졌다.
그녀에게는 뭐랄까, 정의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었다. 불편한 몸을 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누구보다 명랑한 미소를 지었는데,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과거 어느 순간, 바닥까지 절망했었던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고 만들어낸 그런 류의 미소여서, 그녀를 보면서 조금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그런 식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녀가 놀랄 만큼 반짝이고 있단 사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절망과 나의 절망은 그 성질에 있어서는 다를 테지만 절망했다는 사실만큼은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 나는 그녀란 사람이 얼마나 강한 인간인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간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전부 상처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을 터득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강해진다면 아프겠지만,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에서는 고마운 일이 될 거라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빛이 들어와 탁자로 비치고 그 위에 놓인 홍차물 위로 스며들어 미묘한 반짝임을 새긴다. 밖의 기온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실의 공기는 따스하고, 또 평온했다.
홍차를 다 마셔갈 때쯤. 부엌에서부터 케익이 구워진 걸 알리는 구수한 냄새가 스며들어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성공이다! 흥분 섞인 외침과 더불어 하이파이브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스레 들린다.
우리는 웃으면서, 두 남자가 케익을 가져오길 기다렸다.
“뭐해?”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난,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손에 든 세욱이 조용히 뒤에 서 있다.
“그냥 있어. 그게 뭐야?”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세욱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야 나는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이 뭔지 깨닫고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도…… 힘들어?”
세욱은 내 시선을 따라 자신도 상자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듯 물었다. 나는 잠시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나한테 돌려주려고 가져온 거지? 가져갈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듯 고개를 젓고, 그가 들고 있던 물건들을 받아들었다.
“괜찮아. 이제까지 맡아줘서 고마웠어.”
핑크색과 푸른색 양철상자. 나는 푸른색 상자 쪽 자물쇠 번호를 맞추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언제까지 쉴 수 있어?”
“글피까지. 그리고 나면 서울 올라가야 해. 다다음달에 시합이니까. 알지? 호주 오픈. 바로 현지 가서 훈련할 거야. 지금 거긴 여름이라서.”
“US오픈은 아까웠어. 한번만 더 이겼으면 16강에 들 수 있는 건데.”
“호주에선 진짜 잘 할 거야. 아, 티켓 보내줄 테니까…… 보러와라.”
“응.”
자물쇠를 떼어내고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곰 인형과, 그 목에 걸려 있는 네잎 클로버 목걸이.
하지만 이제 그것들을 보아도 더 이상 이전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은 않다. 그저, 가슴을 적실 뿐.
곰 인형을 집어들었다.
[ Will you marry me? ]
“결혼하자.”
……? 배를 누른 곰 인형이 낸 소리와 세욱의 말은 거의 동시에 겹치듯 흘러나왔다. 곰 인형을 손에 든 채,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뭐라고?”
“결혼하자.”
세욱은 차분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선우 형처럼 그렇게 근사한 프로포즈는 할 줄 몰라. 그리고 형만큼 널 즐겁게 해줄 수 없을 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테니까, 노력할 테니까, 나와 결혼해 줘.”
“…….”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곰 인형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어두워진 속에 테라스에 켜둔 흐린 불빛만이 눈에 반사되어 붉은 흔적을 만들고 있다. 그 불빛조차도 아주 미약했지만.
나는 어둠에서 눈을 떼어 하늘로 눈을 돌렸다.
거기, 달이 떠올라 있었다.
“난, 이 인형도 목걸이도 버릴 수 없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해 주기를 바랬다. 세욱이라면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버리는 건 나도 싫어.”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버리지 말고 거기 그냥 둬. 다만 나와 같이 지켜보면 되는 거야.”
그것은 정확하게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나는 말없이 곰 인형을 손에 든 그대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언제나 그렇듯 온기가 전해져온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손을 돌려 나를 꼭 안아주었다.
“사실은 반지를 사러 갔었는데…… 점원이 사이즈가 얼만데요? 하고 묻는 말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야. 아무래도 같이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서울 올라가면 같이 가야겠다고. 가줄 거지?”
“고마워.”
나는 대답했다. 진심을 담아.
향기를 머금은 듯한 공기 속, 우리의 입김이 스미듯 빠져 나와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라진다. 바람에 저편에 서 있는 길쭉한 나무들이 바스락 소리와 더불어 가볍게 흔들렸다. 그 나무 사이로 분명히 별들도 드문드문, 하지만 다른 곳보다는 훨씬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을 터였다.
“또 눈이 오려나 봐.”
“당연하지.”
“당연해?”
“여기 있으면 언제나 화이트 크리스마스더라구.”
그는 말하면서 날 안고 있는 팔에 한층 힘을 주었다. 나도 힘을 빼고 몸을 맡긴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부서지듯 흩날리는 감각이 영 거슬렸지만 그도 잠시, 이내 달콤하게 젖어들고 희미해져 간다.
정말로, 곧 눈이 내리겠지.
확신한다. 눈이 전부 덮어 줄 거라고. 보드라운 기쁨도, 아스라한 슬픔도, 쓰라린 아픔도, 한심하도록 순간적인 즐거움도. 기억은 그런 식으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만 남겨 놓고 사라져 가는 법이기에. 그리고 살아가는데는 중요하고 필요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므로. 나머지는 내려 쌓인 눈이 전부 가려줄 것이다.
그런 어렴풋한 생각에 둘러싸여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마법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일지. 그 때야말로 자신은 입을 열고 말할 수 있을 테지. 태어나 처음으로 상대에게 하는 세 글자의 말은 놀랄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거라고, 그렇게 확신한다.
그러니까…… 부디, 아무쪼록…… 화이트 크리스마스.
꼭 3년째의 겨울이었다.
Winter Fall/ Fin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