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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하얗다…….
하얗게 빛나고 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인 공간이 눈부실 만큼 투명하게 빛나는 흰색을 동공으로 비쳐 보낸다.
코끝을 얼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조차 계속 간직하고 싶을 정도의 아련함으로 이 순간 비쳐오는 건 아마도 지금의 이 공간을 그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자.”
갑자기 투명하게 시야를 메우고 있던 광경이 흐트러졌다. 장식처럼 눈이 가득 덮인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제야 몸으로 실감한다. 뭔가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돌리고,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뭐라고 했어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오빠?
“헤어지자.”
그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언제나 뭔가 제안할 때면 우스울 만치 자상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던 그는 그 순간,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잠자코 마주 응시했을 뿐.
그래서 알았다.
진심. 진심이야, 지금 말은……!
“거짓말 말아요.”
그런데도 억지를 부렸다. 부려보고 싶었다. 아니, 부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이 사람을 보낼 수는 없다고.
“알잖아. 나, 거짓말 같은 건 안 해.”
그렇게 웃지 마요. 웃지 않아도 좋아. 평생 웃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 그 말, 거짓말이라고 해 줘. 제발 부탁이니,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오빠, 우리 엄마가 와서 방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갔을 때도 포기 못하겠다고 했잖아. 우리 아버지가 와서 돈다발을 던지며 모욕적인 말을 했을 때도 기가 꺾이지 않고 웃어 보였잖아. 말했잖아, 오빠. 괜찮다고, 이 정도로 상처입지 않는다고, 반드시 세계적인 선수가 되서 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두고 보라고. 다 이겨낼 거라고. 두고 보라고.
“윔블던에 가겠다고 했잖아요. 날 객석에 앉히고 보란 듯이 잔디 코트를 밟고 서보이겠다고 그랬잖아……. 오빠, 어째서…….”
“테니스, 그만 둘 거야.”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앞에 한 말보다 더욱 믿을 수가 없는 한마디였다. 테니스를? 오빠가 테니스를 그만둬? 말도 안돼. 밥 먹는 것도 잊고 코트를 뛰어다니던 오빠가 테니스를 그만둔다고?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야. 지금 깨달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원하면 벌을 받는 거야.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었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붙들어야 하는데,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눈동자.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는 시선.
“난,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그러니…….”
발목까지 차 오른 눈이 싸늘한 기운을 보내왔다. 눈밭에 반사되어 들어온 빛에 순간적으로 세상이 색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야가 무색으로 변하기도 전, 가득 차 오른 물기를 깨닫고 입술을 물었다.
“헤어지자.”
엷은 색소의 하늘 속, 태양이 무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1
후둑…….
도심에서 꽤나 멀찍하게 떨어져 한적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통나무로 지어진 2층 집. 그 통나무집 옆에 동무처럼 친근하게 자리잡은 앙상한 나무, 뻗어 나온 긴 가지에서 흰 눈더미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화살표를 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지붕. 그 아래, 긴 통나무로 틈새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정교하게 엮어 내린 겉벽. 문을 들어가기 전 뵈는, 허리 정도까지 오는 나무 난간을 설치한 긴 테라스.
겨울철, 산 위 스키장에 놀러 오는 손님들이나 여름철, 계곡을 찾아오는 피서객들에게 민박을 주는 곳인 작은 통나무집 산장이 차 앞면 윈도우를 통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한다.
차를 멈추고 몸을 내려 산장과 그 주변의 풍경을 죽 둘러보았다.
어제 내렸다던 눈이 소복하게 쌓인 깨끗한 땅과 나무, 그리고 그 위로 죽 이어진 산과 그 산 위로 마지막으로 올려다 보이는 약간 연한 채도를 지닌 하늘.
모든 것이 낯익은 동시에, 한없이 낯설게 느껴진다.
어째서 자신은 여기 서 있는 것일까. 되살리기엔 너무 늦었는데, 대체 뭘 기대하고 여기 서 있는 것일까.
꼭, 3년이 흘렀다.
- 딩……동…….
그다지 시끄럽지 않은 맑은 벨소리는 어느 회사 제품인지 모르지만 사방이 눈인 자연 속에 덩그라니 자리잡은 이 작은 산장과 너무나 어울린다.
……? 벨을 눌렀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눌렀다.
- 딩……동…….
그 때서야 안에서부터 부산하게 이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눈가에 자리잡힌 주름조차 관록처럼 느껴질 만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 여인이 맞는다. 업 스타일 머리 모양을 한 그녀는 나를 보더니 어머,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혹시…….”
“안녕하세요.”
“역시 맞구나. 차유진…씨라고 불러야 하나, 이젠?”
“그냥 유진이라 부르세요.”
아주머니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실은 이전에 만났을 때 아주머니와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없음에도 그녀는 나를 곧바로 알아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다.
“어서 들어와요. 작년이랑 재작년 겨울엔 어디 근사한 곳에 갔나 보지? 한번 들르지도 않구.”
“아, 여러…… 일이 많아서요.”
나는 가볍게 얼머무렸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또는 차마 이곳에 올 면목이 없어서, 라고는 대답할 수가 없다.
화제를 돌렸다.
“근데 방이 있어요? 한창 바쁠 기간일텐데.”
“응, 아직은 괜찮아. 대학생들이야 막 방학을 시작한 참일 테고, 그래선진 몰라두 여긴 원래 크리스마스 직전엔 외려 손님이 적어.”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이틀 남았다.
집밖이고 집안이고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입구에는 놀랄 정도로 큰 진짜 소나무에 초, 별…… 그 밖에 갖가지 장식품으로 보기 좋게 장식해 놓은 트리가 서 있고, 입구의 문엔 동그란 도너츠 모양 한가운데 금종과 리본을 단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고, 거실에 있는 윈도우 창문엔 빨간 잎사귀가 길게 달려 있는 줄이 늘어져 있다.
“혼자 계시네요.”
“응, 세욱이가 여태 안 돌아오네. 돌아올 때가 됐는데. 시내에 이것저것 사러 나갔거든.”
세. 욱.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이다.
한. 세. 욱.
질투 날 만큼 그와 친했던, 그의 복식 파트너.
“요즘 뭐해? 전에 왔던 귀여운 아가씨 뭐하냐고 세욱이한테 물어봤더니, 아파서 휴학했다고 그 때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젠 복학했겠다, 그지?”
뜨겁게 데운 밀크 코코아가 담긴 머그 컵에 플라스틱 스푼을 꽂아 주며 아주머니가 묻는다.
“아뇨. 자퇴하고 미국 가서 공부해요.”
“어머, 학교 다시 들어간 거야?”
컵에 꽂은 스푼을 가볍게 저으며 예, 하고 대답했다.
“무슨 학굔지 물어 봐도 돼?”
“유시 버클리(U. C. Berkerly)라고요.”
“들어 본 일 있는 것 같애. 좋은 데잖아, 그지!”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코코아를 마시는 날 들여다봤다.
“아, 그냥…… 예.”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어색하니 웃었다.
“어디 있는 학교야?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잖아.”
“샌프란시스코요.”
“거기 따뜻한 곳이지? 샌프란시스코라면, LA서부터 2시간 정도뿐이 안 걸리잖아.”
“잘 아시네요.”
“친구가 LA 말고 그 아래 있는 샌디에고에 살고 있거든. 만나러 갔을 때 같이 가 봤었지. 바다 요리, 얼마나 맛있었던지. 한국엔 자주 들르고?”
“아뇨, 2년만에 처음 와 봐요.”
아주머니의 눈이 끝에 주름을 선명하게 그리며 웃음을 매단다.
“그렇구나. 간만의 방학을 여기서 보내는 거네.”
네, 하고 고개를 떨구며 쑥스럽게 미소짓고는 다시 머그 컵을 들어 입에 가져가다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저, 세욱이는요? 동계훈련 갔어요?”
“동계훈련?”
아주머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의아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다.
“아, 몰랐구나. 하긴 유학 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세욱이, 군대 갔다왔어. 테니스는…… 이제 관두겠다고.”
숨이 막혀왔다. 잊어야 하는데, 이제는 정말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워지지 않고 되살아난다. 그의 말, 그의 표정, 그의 목소리…….
- 테니스, 그만 둘 거야.
어째서 그런 거야. 어째서 다들 그렇게…….
“아이고, 좀 마셔. 다 식겠다. 너무 달아서 그래?”
아주머니가 말했을 때.
끼익ㅡ.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미성의 젊은 목소리가 입구에서부터 들려 온다.
“어머, 세욱이가 왔나 부네?”
아주머니가 몸을 일으켰을 때,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우리가 있는 중앙 거실까지 와 있었다. 검정에 가까운 진보라빛 얇은 스웨터에 두툼한 검정 파커. 연한 베이지빛 면바지에 검정 워커. 샤프한 턱선에 흰 피부. 존재만으로도 그를 연상하게 만드는, 또 다른「그」가 걸어 들어왔다.
“엄마, 좀 도와 주실래요? 사온 게 너무 많…”
하다가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잠시의 침묵.
그 동안, 그는 마치 포즈(pause)를 누른 화면처럼 박힌 듯 선 자세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세욱아, 기억하지? 유진이. 3년 전까지 왔었던 거 기억 안 나?”
“안 나요.”
세욱은 갑자기 무뚝뚝한 말투로 내뱉더니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어머. 갑자기 쟤가 왜 저러는 지 모르겠네. 이해해. 내 아들이지만 과히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라곤 할 수 없으니.”
“괜찮아요.”
“잠깐 나갔다 올게. 세욱이 짐 내리는 거 도와야 할 것 같거든.”
“아, 거들까요?”
“어머, 어떻게 손님한테 일을 시켜. 코코아나 마시면서 앉아 있어.”
“아니에요, 도와드릴게요.”
아주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내 차 바로 옆에 세워 둔 미니 밴에서 세욱이 박스를 내리고 있는 참이었다.
“엄마는 저기 앞에 둔 찬거리들을 먼저 들고 가세요. 가벼운 것만 먼저 가져가심 되요. 나머지는 제가 다 할 테니까. 아, 손님은 들어가시죠. 손님한테까지 일 시킬 만큼, 이 산장 형편없는 곳 아닙니다.”
“세욱아!”
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살짝 내려온 검은 앞머리 아래, 강한 자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형태의 눈. 그 안의 눈동자는 확실히 보통 사람에 비해 색소가 옅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그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그는 마치 도전하는 것 같은 투로 말을 던져왔다.
나는 말없이 옆에 서서 박스를 내리기 시작했다. 세욱이 처음부터 나를 싫어했었다는 사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이해했다. 세상에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아는 나의 부모가 자신의 복식 파트너였던 선우 오빠에게 입혔던 상처를 세욱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을 테니까. 그는 결코 말한 적이 없었지만, 세욱도 결코 물었던 적이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세욱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인정한다. 마지막까지 그에게 난,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해줄 수가 없었다…….
“됐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밴댕이 소갈딱지!
손목을 붙들린 채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래, 미울 거야. 밉기도 하겠지. 그렇다 해도 똑바로 보고 미워해도 되잖아. 꼭 그렇게 벌레를 피하듯 고개까지 돌려가며 눈을 피하고 말할 필요는 없잖아.
“세욱아!”
어느 사이엔가 아주머니가 옆에 와 있었다.
“유진이한테 뭐 하는 짓이니? 니 말대로 유진이가 손님으로 여기 왔다고 치자. 너, 손님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말해도 되는 거니?!”
아주머니의 질책에 세욱은 불만이 가득 담긴 눈을 옆으로 돌린 채,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을 뿐이다.
“죄송해요. 제가 들어갈게요.”
“미안해. 화 안 났지? 계속 여기 있을 거지? 저기, 나 좀 도와줄래? 사온 게 너무 많아서 말야.”
아주머니는 열린 밴 옆문 안쪽을 가리키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 역시 간신히 쥐어 짜낸 미소를 흘리면서 밴 옆쪽으로 몸을 옮겼다.
2
나무계단을 걸어 올라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방은 3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바닥뿐만 아니라 천장과 벽까지 온통 나무로 되어 있는 작은 침실. 바닥에는 단색의 작은 카페트가 깔려 있고 푹신해 뵈는 침대에는 푸른 색 시트와 이불이 깔끔하게 덮여 있고 그 옆의 탁자에는 작은 스탠드와 갈색 테디베어가 자칫 초라해 보일 수 있는 방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든다. 시트와 비슷한 느낌의 커텐이 반쯤 열린 상태로 창문에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느낌은 없지만 깨끗하고, 겨울에 딱 어울릴 따스한 분위기가 나는 방안에 나는 서 있었다.
“좀 있으면 저녁 시간이니까 내려와. 6시 반이 식사시간인 건 알 거고.”
날 여기까지 안내해 오긴 했지만 세욱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무뚝뚝했고, 그렇게만 말한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내려가려 했다.
“잠깐만.”
“……?”
그가 조용히, 그러나 어디까지나 차가운 몸짓으로 돌아본다. 3년 전보다는 그래, 많이 가라앉은 분위기다. 여전히 날렵한 인상이지만 한편으로 어딘가 단단히 굳어진 듯한 느낌.
시원하면서도 쾌활한 푸른빛을 자아내는 사파이어를 연상케 만드는 그와는 정말이지 대조적인, 견고하면서도 눈부시리 만치 투명한 빛을 반사하는 다이아몬드 원석. 미화시켜 표현한다면 대충 이렇겠지.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은 다듬어졌단 것 정도일까.
“저…….”
눈앞, 냉기 어린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영 묻기가 껄끄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토해냈다.
“테니스…… 왜 그만뒀어?”
세욱은 잠시동안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이 조금쯤 가늘어지는가 했더니 묘한 뉘앙스의 미소를 흘린다. 마치, 조소하는 것 같은 표정.
“너한테 말할 의무는 없다고 보는데.”
할말을 잃었다.
언제나 그랬다. 단 한마디로 상대를 벙어리로 만드는 세욱의 말투와 표정에는 언제나 탄복하게 돼.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세욱의 한마디에 쓰게 웃으며 두 손을 들곤 했었지. 단 한사람, 선우 오빠를 제외하고. 그는 세욱을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주 순박한 미소 한방.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 어, 그래?
그런데, 별로 어려운 말이 아닌데, 내가 말하는 건 힘들었다. 물론 내가 그 말을 해봤자 절대 먹히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란 건, 상대의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먹히는 거다. 처음부터 나를 탐탁하게 생각지 않던 세욱이 헤벌쭉 한번 웃는다고 곰살궂은 태도로 돌변할 리가 없다는 말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있다 갈 거냐.”
그는 역시나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막 나가려던 방 문지방에 비스듬히 걸터서서 팔짱을 낀 자세로, 침대 다리 쪽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날 똑바로 보는 것도 짜증나는 모양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글세, 한 일주일? 일단 집엔 그렇게 얘기하고 왔으니까. 그 전에 갈 수도 있겠지만.”
“웬일이냐. 딸 일이라면 울고저는 분들이 일주일씩이나 혼자 나가 있어도 괜찮다고 하시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의 투였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만일 그 때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엄마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풀어주는 일은 평생 가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까지 비꼬다니…….
밴댕이 소갈딱지!
“너한테 말할 의무는 없다고 보는데, 우리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던. 숙박료는 꼬박꼬박 지불할 거니까, 괜한 참견 끊어줬음 좋겠어.”
“아아. 그러십니까, 손님. 죄송합니다.”
여지없이 얄미운 톤이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슬쩍 미소를 풀어내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결코 웃고 있지 않은 그의 눈은 여전히 약간 내리깐 모양으로 침대 다리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구나. 선우 오빠에게…….”
특별히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저 흘러나왔다.
쓸데없이 비어져 나온 여분의 대사.
“…….”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밀어내려는 것처럼, 약간 한숨을 담은 듯한 저음이 들려온다. 힘이 풀린 듯 조용한 소리였다.
“늦지 않게 내려와라.”
탁ㅡ.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잠자코 침대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어 창 밖 저편에 비치는 눈 풍경을 응시한다. 3년 전과 같았다. 그리고, 처음 여기에 온 그 겨울과도 같았다. 그 때처럼 눈이 내리고, 그 눈이 쌓여서 손을 뻗어 만져 보면 그대로 지워질 것처럼 섬세한 모습으로 동공을 비춘다.
달라진 건, 그가 곁에 없다는 사실. 그 맑은 미소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서야 겨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3년이 흐른 이제서야, 겨우.
「같이 여행 갈래?」
믿을 수가 없었다. 추리닝 바지에 낡은 윈드 브레이커 차림, 훈련 후 샤워를 끝내자마자 머리도 안 말리고 달려 온 그의 추레한 모습을 바라봤다.
「왜, 왜 그래? 멍청한 표정을 하고.」
「오빠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구나…….」
「ㅡ무슨 뜻이야?」
「아, 아니. 별거 아냐. 어딘데?」
「세욱이네 산장.」
「엉? 그럼 혹시 세욱이도 와?」
내 말이 의외라는 듯 그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당연하지. 지네 산장인데. 너랑 세욱이랑 좀 사이가 안 좋단 건 알지만 넘 미워하지 마라. 알고 보면 좋은 놈이야. 표현력이 딸려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 자식도 너 좋아할 걸. 원래 괜히 틱틱대는게 그 자식 주특기니까 신경 쓰지 마. 갈구면 내가 가르쳐 준 거 있잖냐. 그걸로 한방 멕여버려.」
「누가 뭐래?」
「어이, 근데 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똥 씹은 표정으로.」
「둘만 가는 거…… 아니었어?」
「응? ……아하하, 너 이상한 생각했구나. 그치!」
「그럼 셋이서 놀잔 말이야, 사이좋게 쎄쎄쎄?」
「아니, 딴 놈들도 자기 친구들 데려온댔어. 좋잖냐, 다 함께 차차차.」
차차차는 무슨!
돈이고 시간이고, 여유란 하나 없는 주제에 주변에 바글바글 모이는 친구며 후배 놈들을 언제나 등 두드려 챙기던 그. 만인의 형, 만인의 수호천사.
그렇지만 연인으로선 최악의 조건을 갖춘 사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얼띤 남자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후배인 내 손을 잡는 데만 무려 2년이 걸린 바보 같은 남자. 키스도 ‘해도 되겠냐’고 굳이 물어 다 잡힌 분위기를 깨뜨리는 천하의 쑥맥. 덕분에 다른 커플들은 잘만 다녀오는 둘만의 밀월(?)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우리였다.
고등학교 때 홀어머니마저 여의고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맞선다는 표현이 딱 맞는 매일을 살아가던 그. 언제나 열심이었다. 테니스에, 아르바이트에, 하루가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그와 사귀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었지. 그럼에도 언제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던 그와, 바보처럼 언제나 그 한마디에 기분 좋아지던 나.
「약속해!」
산장 테라스 나무 난간에 기댄 채 앞으로 쭉 뻗어 있는 눈밭을 응시하며 그는 말했다. 언젠가는 꼭 둘만의 여행을 가자고.
「영국, 호주, 프랑스, 미국, 다 데려 간다. 아, 넌 전부 가봤댔나?」
「테니스 경기장엔 들어가 본 적 없어. 윔블던이 그렇게 근사하다던데.」
「좋아! 윔블던 앞, 초 특급호텔 스위트룸이 네가 묵을 방이 될 거야. ……어이, 못 믿겠어?」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쳐, 나는 농담으로도 웃지 못했다.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라면 절대 가능할 거라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아, 호주도 꼭 가야 돼? 까짓 거 봐준다, 거긴 싸가지 왕자 한세욱이 동행해도 용서해 줄게.」
「물론이지. 거기 센터 코트에서 우리의 오스트레일리안 포메이션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오스트레일리안 포메이션이란, 테니스 복식 기본 포메이션 중 하나를 말합니다. 호주가 테니스 복식의 강국이란 사실, 당근 감이 잡히시겠죠)
그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3년 전 여름과 가을, 그는 보란 듯이 추계 대항전을 비롯해 아마추어가 참가 가능한 각종 대회의 단식과 복식을 모조리 휩쓸었다. 국가대표 자격은 1학년 때 이미 획득했고, 대학을 자퇴하고 프로로 전향할까 하는 얘기도 나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시기.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꿈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런데 당연히 희망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그 해 겨울, 그는 갑자기 내게 이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테니스를 그만두었다.
왜 그가 그래야 했는지, 왜 그가 나한테 매몰차게 이별을 선언해야 했는지. 그걸 내가 알았을 때는 모든 건 돌이킬 수 없는 위치로 넘어가 있었다.
그가 죽었다, 급성 백혈병으로.
한숨이 나올 만큼 유치하고 또 진부하지만, 당한 당사자들과 그 주변인들에게는 거짓말처럼 황당해서 운명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다. 찾아보면 생각 외로 주변에 그런 류의 이야기는 다재한 법. 그가 죽기 전, 그리고 죽고 난 1년 동안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선우 오빠의 병을 알게 됐을 때는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런 것이다.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3년 전의 그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괴로웠다.
그런데 난, 어째서 여기 돌아온 것일까. 뭘 바라고……?
3
추웠다. 그리고 방금 깼는데도 몸이 아팠다, 굉장히.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추위와 통증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유진아!」
이 목소리는…… 엄마?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했다. 난 지금 어디에 있으며 왜 이렇게 누워 있는 거지? 어째서 이렇게 몸이 아픈 거야.
눈을 조심스레 깜박였다. 기력이 다 빠져서 잘 되지는 않았지만 치밀어 올라오는 궁금증 때문에 애써 있는 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유진아! 유진아! 괜찮니? 정신이 들어?」
엄마의 목소리가 얼굴 바로 가까이에서 들린다. 그런데…….
「엄마…….」
「그래, 엄마야. 많이 아프니?」
「엄마…….」
「아퍼?」
「괜…찮아요…….」
안도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손길이 느껴진다. 분명 엄마의 냄새였다.
「후우……. 그래도 천만다행이다, 이만하길.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차가 그렇게 엉망이 되도록 부딪쳤는데 이 정도길, 정말 다행이라고.」
「……엄마.」
나는 중얼거렸다. 머리가 울려서 크게 말할 수가 없다.
「왜, 의사 선생님 불러줄까?」
「……엄마. 나 지금 눈…뜨고 있어?」
「응? 그게 무슨 소리니?」
「나…… 눈 뜬 거 같은데…….」
「그, 근데 뭐! 왜 그래?」
「나, 엄마가 안 보여……. 앞이…… 하나도 안 보여…….」
“안 나가?”
아주머니, 세욱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산장은 상당히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창을 통해 가까운 리조트의 풍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세욱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계시다는,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리조트.
가득 뒤덮고 있는 흰 눈과 그 가장자리로 무성하게 자리를 메우는 나무들과 아래로부터 이어져 올라가는 리프트. 중앙거실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그저 응시하고 있을 따름인 내 앞에 머그 잔 하나가 놓인다.
커피가 담겨 있는 머그 잔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아주머니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다.
“저, 뭐라고…….”
“스키 안 타냐구.”
“아, 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손을 통해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 나간다.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하는 원두 향……. 이 작은 산장과 꼭 닮았다.
“스키,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옛날엔 그래도 좀 타지 않았어?”
그랬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땐 혼자 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에 아주머니의 표정이 당황한 듯 어둡게 일렁였다.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그 순간, 나도 깨달았다.
알고 계셨구나.
그녀의 얼굴이 미안한 듯 내 낯빛을 살피는 걸 보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미소지어 보였다. 3년이나 지났어요,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자 안심한 듯 아주머니의 표정이 풀어지더니 말을 잇는다.
“그래도 여까지 와서 스키도 안 타고 감, 좀 그렇잖아. ㅡ세욱아!”
예?
난 움찔 놀란 나머지, 아주머니를 만류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 끝에 있는 키친, 한 청년이 컵을 정리하고 있었다. 테니스로 단련된, 180을 훌쩍 넘어선 긴 다리 위에 얹혀 있는 날렵한 몸매. 팔을 길게 뻗어 글래스들을 높은 선반 위에 차곡차곡 올리고 있다.
“세욱아, 너 그만하고 나갔다 와. 나머진 내가 할 테니.”
“무슨 일인데요.”
세욱은 손은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슬쩍 돌리며 대꾸했다.
“유진이랑 스키나 타고 오지 그러니.”
그제야 그는 중앙거실 창가에 앉아 있는 내 쪽을 흘깃 봤다. 스치는 듯한 시선. 하지만 그것 뿐, 이내 세욱은 얼굴을 돌렸다.
거실에는 달리 아무도 없었다. 워낙에 아담한 규모의 산장이라, 나 외의 손님이라곤 신혼인 듯한 커플 하나와 남자들끼리 온 4인 그룹이 전부였고, 그들은 모두 당연한 것처럼 스키를 타러간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괜찮아요!”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 옆으로 뛸 듯이 걸어갔다.
“제가 싫어서 안 나간 거예요. 운동엔 젬병이라서요.”
사실이었다. 내노라하는 부잣집에 태어나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싶은 만큼 누리고 살아온 나는 대신, 엄마의 성화 덕에 레슨이란 레슨은 다 받아야만 했다. 별로 꾀부리는 성격이 아닌 탓에 공부는 어릴 때부터 죽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고 악기라든가 미술 같은 것도 제법 한다는 평을 받곤 했지만, 이상하게 운동만큼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운동치.
그건 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나와 너무나 다른 그에게 끌렸던 지도 모르지. 그는 테니스 뿐 아니라 운동이란 운동은 다 일가견을 자랑했었다, 특별히 배운 적 한번 없는데도. 그건 세욱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주머니가 가식 없는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세욱이 스키 잘 타. 좀 배워보지 그래?”
“배웠는데도 잘 안 되는 걸요. 정말 괜찮아요.”
말 안 해도 알고 있었다. 그래. 분명 선수급이었다, 세욱의 스키 실력은. 테니스 때려치면 스키강사나 해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니까.
“가자.”
“어?”
마지막 컵을 올려놓은 세욱이 한 말에 깜짝 놀라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옆 옷걸이에 걸어놨던 파카를 걸치면서 언제나 그렇듯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악의는 없어 보이는 투로 덧붙였다.
“계속 앉아만 있을 거야?”
“…….”
바보처럼 머리가 멍했다.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싫어하는 게 분명한데. 날 똑바로 보지도 않으면서, 아주머니한테 미워하는 걸 들키기 싫어서 그러는게 여실히 보이는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
그런 거…… 싫은데.
그런데도 버릇처럼 한심하게 답하고 있었다.
“옷, 가져올게.”
그 때였다.
“어? 손님 왔나보네?”
방금 들린 벨소리에 튕기듯 아주머니가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잠시 후 궁금증이 뒤섞인 부름이 문가에서부터 들려왔다.
“세욱아, 손님!”
“오랜만이다.”
싱글싱글, 이란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웃음과 더불어 젊은 남자가 손을 든 채 걸어 들어온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그러다 금새 생각이 났다. 우림 형? 하는 세욱의 중얼거림이 들리기도 전에.
“웬일로 오셨어요.”
“짜식, 근 3년 만인데 인사 꼬라지하고는. 그리워서 왔다, 떫냐?”
“그렇다면, 입가심 시켜 주실려구요?”
세욱의 입에서는 여전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남자는 별로 기분 상하지 않은 눈치였다. 대신 하하하, 하고 밝게 웃었을 뿐.
“그래 임마. 형이 이렇게 일부러 와 주셨는데 같이 안 나갈래? 군대에서 뒹구느라 빠져나간 영양보충 팍팍 시켜주마.”
강우림. 고교시절부터 늘상 선우 오빠와 단식 챔피언을 다투던 선수였다. 다른 대학에 다녔지만 오빠와 같은 학년이라 그런지 친했던 걸 기억한다.
게다가 워낙 눈에 띄는 얼굴이기도 했다.
“지금은 안되겠는데요.”
세욱은 말하면서 나를 봤다. 그러자 그 때까지 한쪽만 보고 있던 강우림 선수도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혹시…… 유진 씨?”
“안녕하세요.”
알아본 모양. 하지만 차마 선우 여자친구니 뭐니 하는 인사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민망한 듯 머리를 벅벅 긁는 남자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3년 전 추계대회 개인부 단식 결승전. 고교시절부터 라이벌로 유명했던 두사람의 시합에서 풀세트와 타이브레이크로 이어지는 접전에 접전 끝에 결국 승리를 차지한 건 선우 오빠였지만.
선우 오빠가 죽은 후로, 국내 단식 챔피언 자리는 당연한 것처럼 강우림 선수의 차지가 됐다.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을 면제받고 대학을 졸업한 재작년부터 그는 프로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고, 작년 와일드카드로 예선부터 밟고 올라온 US오픈에서 16강에 드는 쾌거를 이룩하며 완전한 스타로 자리 매김 했다.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아니 세계에서 주목받는 차세대 플레이어로.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던 나조차도 강우림 선수의 소식을 알고 있을 만큼 그의 US오픈 16강은 엄청난 화제였다.
모든 걸 잊고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미국에 간 때였다. 어릴 때 미국에서 살았던 나였지만, 미국 대학 중에서도 톱 레벨인 U. C 버클리의 수업을 쫓아가는 것은 버거웠다. 거기에 과거를 잊을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난 그 무렵 한국에 대해 완전 신경을 끊고 살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강우림 선수의 16강은 알고 있었다. 미국 신문 스포츠면 한구석에 꽤 크게 실렸었기 때문이다.
Unbelievable! No seed Kang from South Korea beats Sadic.
그 기사를 봤을 때,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선우 오빠일 수도 있었는데.’
“혹시 유진 씨랑 볼일이 있는 거야?”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강 선수가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희미하게 담고 있는 세욱의 얼굴로 눈을 돌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두분 얘기하세요.”
강 선수는 피식 웃으면서 옆의 나무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핫. 한잔 걸치면서 뭘 좀 물어볼랬더니 이 자식이 영 뻣뻣하네요? 한세욱. 좋아, 바로 본론을 꺼낼게. 너 전 선배 은퇴하는 건 알지? 오른 무릎, 그거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예.”
세욱이 그래서요?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즉, 난 복식 파트너를 잃은 거야. 새 파트너를 구할 지, 아니면 복식에서 손을 뗄지. 코치님은 후보로 몇사람을 제안해 주셨지만, 솔직히 별로 맘이 내키지 않더라구. 그러다 니 생각이 났다.”
강 선수가 잘생긴 눈썹을 움직이며 세욱을 슬쩍 고쳐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다시 돌아올 수 없겠냐? 너랑 복식, 뛰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세욱의 대답이었다.
“이유가 뭔데. 부상도 아니잖아, 너.”
“지겨워져서요.”
강 선수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
“내가 너를 안지 몇 년인 줄 안다면 그 따위 개소릴 곧이곧대로 들으라곤 못하리라 본다.”
“사실을 말하면…….”
고개를 든 세욱이 눈을 느릿하게 한번 깜박이는 게 보였다.
“기분 나쁘실 텐데요.”
말해 봐! 하고 묻는 것처럼 쏘아보는 시선을 차분한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한 호흡 쉬고 난 후 세욱이 말을 이었다.
“형은 김선우가 아니니까요.”
박힌 듯 선 채로 두사람을 바라보던 내 가슴을 순간 스쳐지나간 건 무엇이었을까. 눌러, 눌러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죽여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일시에 되살아나며 전신의 기운을 앗아갈 것 같은 아릿한 통증이 저 끝에서부터 심장을 치고 올라온다.
나만이 아니었어.
이렇게 기억하고 있어.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구! 어째서 그렇게 가 버린 거야…… 어째서…….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명해도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굳이 말하라면, 선우 형과 하던 플레이는 다른 사람하곤 절대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어서죠. 그 바보가 하듯 목숨까지 걸어가며 달려드는 거, 딴 사람은 절대 못합니다. 그런 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김선우 하나 뿐입니다.”
또박또박, 낮지만 또렷하게.
모르긴 몰라도 확실히 신경을 건드렸을 것이다. 당신은 고인만 못해, 제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따라잡지 못해, 라는 뉘앙스로 들릴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내게 세욱의 의도는 다르게 들렸다. 핑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 핑계를 대고 있다면 그건 뭣보다 스스로에 대해서일 것이다.
“…….”
잠시 조용했다. 그리고 대답이 흘러나왔는데…….
“꼭 네가 배울 수 있는 상대만 고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의외일 만치 웃음기가 섞인 대사. 화가 난 기색은 어디에도 없다. 강 선수는 자신도 뭔가를 곱씹고 있는 것처럼 차분히 말을 계속했다.
“말이지, 네 쪽에서 가르쳐 줄 수 있는 상대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이제까지 배우기만 했다면, 지금부터는.”
“…….”
“뭐, 됐어. 기다리겠다고 말하면 부담스럴테구. 모처럼 온 김에 한판 붙지 않을래? 우리 별장도 요 근처거든. 설마 이것까지 매몰차게 거절하진 않을 거지?”
세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억지로 긍정으로 돌리고 있는 건지…… 강 선수는 절대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쾌한 웃음을 날리면서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유진 씨, 같이 갑시다.”
“……? 제가요……?”
깜짝 놀랐다. 마치 내가 옆에 없는 것처럼 말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심판 좀 봐 주십쇼! 저 자식이 인을 보고 아웃이니, 아웃을 보고 인이니 하며 우김 골 아프잖습니까. 원래 한 우김 하는 놈인데. 부탁 좀 합니다. 괜찮으시죠?”
4
- 진짜 놀랬어. 집에 테니스 코트가 있더래니까?
기억한다. 그렇게 말하던 그의 얼굴에 부러움의 감정이 엷게 녹아 내리고 있는 모습을. 정말로 부러웠을 것이다. 벽치기 연습조차도 공간이 없어 불가능한, 너덜너덜 원룸에 살던 그는 매일 최대한도로 연습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곤 했었으니까.
팀 플레이 방식의 스포츠 특기생들은 학교에 따로 기숙사가 있어 거기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비교적 인기가 없는 종목인 테니스선수인 그는 대표훈련 합숙이나 하동계훈련 합숙시기를 제외하고는 늘 월세인 옥탑방 원룸에서 먹고 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는 확실히,
‘목숨을 거는 테니스’
를 하고 있었다. 전부였으니까. 그에게는 전부였으니까. 때로는 질투가 날 정도로 그에게는 테니스가 전부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뭐 드실래요, 유진 씨. 주스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커피?”
“주스요.”
“오렌지 주스죠? 세욱이 넌.”
“같은 걸로 주십시오.”
“아주머니, 주스 석잔 부탁합니다.”
“네, 도련님.”
산 아래쪽에 있는 강 선수의 별장은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세욱네 산장은 물론, 어지간한 규모의 펜션보다 더 컸다. 세욱네 산장과 마찬가지로 실내 벽난로가 분위기를 돋구는 거실에는, 그러나 세욱네 산장과 달리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와 대형 DVD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정원 한쪽에는 야외 바베큐장과 작은 골프연습장까지 만들어져 있는 최고급 별장.
그 곳에, 당연한 것처럼 테니스 코트가 있었다.
고교시절부터 줄곧 라이벌이었지만, 선우 오빠와 강우림 선수의 형편은 극과 극이었다. 유일한 가족이던 홀어머니마저 잃고 혈혈단신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선우 오빠와 20대 기업 안에 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갖은 지원을 받으며 최상의 환경에서 테니스를 배운 강우림 선수.
강 선수의 차로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커 봤자 별장은 별장인지라 몇 명의 고용인들밖에는 없는 한적한 곳. 내온 주스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던 세욱이 딱딱하게 말했다.
“이만 시작하죠. 제가 아직까지 쓸만한지 시험해보고 싶으신 거 아닙니까. 꿈은 빨리 깨드리고 싶은데요.”
“급하긴, 자식. 좋아, 가자구.”
쓰게 웃으며 일어서는 강 선수를 따라가면서 나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집에 테니스 코트가 있더래니까?’
별장에도 있네, 오빠. 와 본 적 있어? 오빠, 많이…… 부러웠어?
팡ㅡ!
“Forty Love(40-0).”
되도 않은 심판 노릇을 하려니 정말 쑥스러웠다. 높은 곳에서 두사람을 내려다보는 것도 못할 노릇이고. 치는 건 잘 못하지만 테니스 선수를 애인으로 둔덕에 고교시절부터 테니스를 계속 보아온 짬밥으로 그럭저럭 심판 볼 지식 정돈 있지만 좀 민망했다. 절로 목소리가 수그러든다.
“유진 씨, 소리 좀 높이세요! 제가 포인트 딴 게 못마땅해서 그러십니까? 너무 차별대우하시는 거 아니에요?”
강우림 선수의 넉살좋은 한마디에 굳어 있던 근육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엄청나다……. 자로 잰 것 같은 서비스 에이스. 공이 내리꽂히는 스피드에 기가 질릴 정도로 강력한 서브였다. 세욱은 세번의 서브에 손 한번 대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을 뿐. 라켓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군대기간의 공백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US오픈 16강에 든 플레이어는 역시 다른 걸까. 강우림 선수는 선우 오빠와 스타일이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강력한 서브와 네트 플레이로 승부 하는 서비스 앤 발리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베이스 라인에서 움직이지 않고 빠른 발과 스트로크의 정확성에 중점을 두는 베이스 라이너란 것이 두사람의 공통점. 선우 오빠가 말했었다.
- 강우림 녀석은 스타일이 나랑 너무 비슷해서 그 점이 까다로워. 포핸드가 비교적 강한 것도 그렇고, 국제무대에 나가기엔 서브가 좀 딸리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만 스피드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대로라면 나도 녀석도 윔블던은 절대 못 가. 딴 메이저라면 몰라도.
- 왜? 왜 하필 윔블던은 안 된다는 거야?
선우 오빠의 궁극의 꿈은 언제나 윔블던이었다. 테니스 대회 중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윔블던 센터 코트. 나의 질문에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 윔블던은 잔디코트니까. 바운드, 그러니까 튕겨 나온 볼도 속도가 줄지 않기 때문에 일반 하드코트보다 훨씬 강서버들한테 유리하단 말야. 클레이 코트(진흙으로 만든 코트)와는 정반대라구. 그러니 윔블던에 가려면 서브를 강화시키지 않으면. 이대론 안돼, 절대로.
그런데 지금의 강 선수는 자신의 최대약점이었던 서브의 파워조차 보완한 듯 보였다. 그래, 확실히 뭔가가 달랐다.
선우 오빠가 상대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떻게 됐을까.
강 선수가 다시 서브 준비를 했다. 오른팔로 경쾌하게 볼을 쳐 내린다.
팡! 세욱이 드디어 받아쳤지만, 공은 허무하게 솟구치고 말았다.
세트게임으로 치면 첫 세트라 아직 힘이 남아도는 때지만 그렇다고 해도 강 선수의 첫 서브는 이제껏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게임, 강우림.”
“이야, 진짜 잘하시는데요? 유진 씨. 동체시력도 뛰어나고. 아예 이 기회에 테니스 심판으로 나서 보시는 게 어때요?”
“그만 좀 놀리세요.”
솔직히 운동신경에 대해 칭찬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눈이 좋다는 거긴 하지만. 어쨌든 벌써 네게임째였다. 내리 네게임이 강 선수의 것으로 돌아간 것이다. 세욱은 상대 서비스 게임을 뺏긴 건 물론, 자신의 서비스 게임도 지키지 못했다. 별로 분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될 대로 되라지! 그런 감정이 담긴 얼굴이었다면 그럭저럭 비슷한 표현일까. 정말 테니스를 포기한 걸까. 정말로?
- 너한테 말할 의무는 없다고 보는데.
칫,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만두든 말든.
팡ㅡ!
“……유진 씨?”
“아? 아, 러브 피프틴이요…….”
“역시 제가 포인트를 딴 게 맘에 안 드시는 거죠?”
세욱의 서브를 언뜻 보기엔 우습게 보일 만큼 가볍게 백핸드로 때려낸 강 선수의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라인 가까이 떨어지는 걸 거의 놓칠 뻔했다.앗, 딴 생각은 금물. 집중, 집중. 어쨌거나 정말이지 받아칠 수가 없는 공격이다. 입을 내밀고 불만을 표시하는 강 선수의 말에 그저 웃었다.
눈이 깨끗이 치워진 코트지만, 뺨을 얼리는 것 같은 바람은 이곳도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산 위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뿌연 모양을 그리며 올라간다. 순간적으로 세차게 휘몰아친 바람에 난, 무심코 얼굴을 점퍼 안으로 파묻고 있었다.
“유진 씨, 괜찮습니까? 안에 들어가실래요?”
리시브 자세를 취하려던 강 선수가 허리를 펴며 물었다.
“심판 보라고 하셨잖아요.”
“심판이 문젭니까. 이러다 감기 걸리면 절 죽이실 거죠.”
“저 그렇게 허약체질 아니에요.”
“추우면 말씀하세요. 제가 안아드릴 테니까, 하하하.”
강 선수는 세욱 쪽을 힐끔 보면서 크게 소리내 웃는다. 장난이란 게 뻔한 말인데도 세욱의 얼굴은 순간 일그러지며, 무뚝뚝하게 말을 뱉었다.
“서브 넣습니다.”
“알았다, 자식. 하여간 성질하고는…….”
강 선수가 리시브 자세를 취하고 세욱이 공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팡ㅡ!
“폴트.”
볼이 네트에 부딪쳐 데구르르 굴렀다. 나는 심판석에서 내려와 공을 집어 들었다. 볼 보이가 따로 없으므로 코트 정 가운데 떨어진 공은 내가, 양쪽 사이드에 떨어진 공은 플레이하는 두사람이 간간이 줍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다시 심판석에 올라가자 세욱이 두번째로 서브를 넣는다.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지만, 상대는 여유 있게 포핸드로 사각지대에 찔러 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잖아, 이건. 애와 어른의 시합도 아니고. 한세욱, 뭐 하는 거야. 이 바보!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러브 서티(0-30).”
“한세욱 이 자식!”
내가 말하는 것과 강 선수가 소리지르는 것과는 거의 동시였다.
“너 정말 그 따위로밖에 못 치겠냐? 니가 그렇게 그리워 마지않는 김선우가 깨닫게 해 준 테니스란 꼴랑 그 따위 수준이었어? 잠깐 손을 놨다고 그 따위로 형편없이 전락하는 게 니가 배운 테니스야? 60살 먹은 노인도 지금 니가 때린 서브보단 잘 할 수 있을 거다. 존경하는 선배 욕 멕이고 싶지 않음 제대로 하란 말야, 자식아!”
그는 정말로 화난 얼굴이었다.
“…….”
세욱의 표정이 눈에 뚜렷이 보일 정도로 굳어졌다. 네트 너머에 서 있는 강우림 선수를 노려보고, 손에 든 라켓을 들여다보고, 심판석에 앉아 있는 나를 올려보고, 다시 손에 든 라켓을 내려다본다. 강 선수가 자기 걸 써도 된다고 했는데도 굳이 들고 온, 그 라켓이었다.
라켓 그물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쓸어 내린다. 마치 뭔가를 더듬고 있는 것처럼, 마치 뭔가를 묻고 있는 것처럼.
실은…… 내가 묻고 싶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어째서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선우 오빠는 잊으면 되잖아. 선우 오빠 아니면 게임이 안될 것 같아? 그건 네 착각이야. 큰 착각이라고. 죽은 사람 따윈 가볍게 잊어버려. 남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든 말든 그렇게 가버린 사람 따윈 잊어, 잊어버리고 모든 걸 새롭게 쌓아 가면 되잖아! 바보! 왜 못하니? 3년이나 지났는데.
나도…… 이제는…… 그렇게 할거니까…….
길게 살을 스치는 바람은 시든 향기를 품은 냉기를 싣고 마치 그 자체가 생명인 것처럼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참기 힘들 만치 얼굴이 시렸지만 난 고개를 파묻는 대신, 이번엔 하늘을 올려봤다. 아니, 노려봤다. 겨울하늘이란 게 원래 그렇겠지만 한낮인데도 유난히 어슴프레하니 한숨이 나올 것 처럼 흐릿한 색조를 띄고 있는 천공이 머리 위로 가득 펼쳐져 있다.
또 눈이 내릴 것 같은데…… 그런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아.
“갑니다.”
그 말에 고개를 내렸을 때, 이미 세욱은 아까와는 다른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공을 위로 던져 올리고, 그리고 내리꽂는다……!
팡ㅡ!
아?
강하다! 서비스 에이스?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최고 랭커답게 백으로 쳐서 받아넘긴 강 선수의 반격, 바깥으로 빠진 공…… 어느 새 쫓아와 포핸드로 쳐냈다…… 베이스 라인 가까이 깊숙하게 찌르고…… 하지만 받아쳐서 앞에 나와 있는 상대의 키를 넘긴 쇼트를 강하게……!
“피프틴 서티(15-30).”
내 목소리에서는 어색함이 묻어 나왔다. 처음으로, 세욱의 공격이 성공한 것이다. 비록 자신의 서비스 게임이긴 하지만.
“그래야 한세욱이지.”
강 선수의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당한 입장임에도 자신의 공격이 들어간 것처럼 느긋하게 웃고 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투명체에 가까운 솜털이 흩날리는 광경이 들어왔다. 산장에 온 후로 처음으로.
그래, 드디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통ㅡ 통ㅡ
볼을 땅에 튕기던 세욱이 두번째로 서브를 넣었다. 강 선수가 받아친 공이 왼쪽으로 날아간다. 세욱은 바운드되지 않은 공을 달려가 몸을 숙인 채로 받아쳤다. 아? 놀랄 만큼 베이스라인 가까이로 깊게 들어간다…… 보통 같으면 치기 힘들 정도로 바닥으로부터 낮게 튀어나온 공을 받아친 상대를 백핸드로 반격…… 아, 아니다, 어느 새 포핸드로 전환, 정면으로 찔렀다!
“30-30…….”
선우 오빠의 장기였는데, 방금 그건.
“30-40.”
겨우 동점을 만들었는데, 강 선수는 네트 플레이로 또 달아난다.
“듀스(40-40).”
그렇지만 세욱도 페인트(눈속임)를 이용해서 스트레이트로 찔러 반격.
“어드밴티지 강우림.” “듀스.” “어드밴티지 한세욱.” “
듀스.”
“……어드밴티지 한세욱.”
“후우…….”
어느 새 세욱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한겨울인데도 두사람이 풍기는 열기 때문에 추위가 많이 누그러진 듯 보인다. 그렇지만 눈발만은 아까보다도 한층 더 거세게 날리고 있었다.
팡! 한번 폴트가 있고 난 후 두 번째로 다시 서브가 들어갔다. 강 선수가 구석으로 찌른 걸 쫓아가 네트 근처로 쳐 내린다…… 오빠가 뭐랬더라…… 저런 걸 드롭샷이라고 한다고 그랬던가? 그렇지만 강 선수는 앞으로 나와 볼을 다시 쳐 올렸고 중심부로 떨어진 공을 세욱이 다시 뒤로 돌아가 받아친다……라기 보다 쳐 올렸다. 강 선수 뒤쪽 사각지대로 둥근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공. 받을 수가 없을 만큼 정확하게 라인 앞에 떨어지는.
“게임…… 한세욱.”
“멋진 로브였다.”
강우림 선수가 웃고 있었다. 세욱은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시야가 부옇게 물들어 있어 순간, 앞이 잘 뵈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단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제서야, 겨우.
“더는 못하겠는걸?”
하늘을 바라보는 강 선수의 머리에는 어느 새 눈이 조금씩 희미한 물방울을 만들며 얹혔고, 또 얹혀가고 있었다. 나도, 세욱도 마찬가지였다.
“끝내자. 유진 씨, 들어갑시다! 이러다간 정말 감기 걸리겠습니다.”
심판석에서 내려오는 나의 눈에 세욱 쪽으로 걸어가는 강 선수의 모습이 보였다. 흩어진 남은 공들을 박스 안에 넣는 그에게 던진 한마디는,
“못된 자식.”
이었다. 공을 다 던져 넣은 세욱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강 선수는 웃지도 않고 세욱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거짓말을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테니스, 계속 하고 있었지. 그게 2년 반 넘게 라켓을 손에 잡지 않았다는 사람의 스트로크냐?”
“군대에서 위엣 분 아들을 가르쳤을 뿐입니다. 군 생활 좀 편하게 해보려고요.”
담담한 대답.
“뭐라 해도 좋아. 너, 돌아오는 게 좋겠어. 정 복식이 싫다면 단식만으로라도 말이야. 알겠냐?”
“…….”
세욱은 아무 대답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치 조용한 얼굴. 일체의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는 서 있을 따름이었다. 흩날리는 눈처럼 흐트러져 버린 감정들……. 차분히 말이 이어진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고도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도 있어. 내가 보기에 넌 이제부터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그만 돌아와.”
세욱이 눈을 들었지만, 강 선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답을 종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뒤로 돌아, 그저 서 있을 뿐인 나를 보고 말했다.
“유진 씨, 저녁 드시고 가시죠. 차리라고 할 테니까.”
눈발이 코트를 하나 가득 메운 채 대기의 흐름을 타고 춤추고 있었다.
5
그 사고는 내게도 나를 들이받은 상대방에게도 잘못이 있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상대 쪽 잘못이 더 컸다. 나도 어느 정도 취해 있긴 했지만, 내가 운전하던 차를 들이받은 상대는 거의 명정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곤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목격자가 있어 바로 경찰이 뺑소니친 상대를 잡아내고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청승맞게 혼자 마신 이유.
그것은 선우 오빠가 ‘끝’을 말했기 때문이었다.
「유진아!」
나는 앞에 앉아 있는 사람, 같은 과 친구인 경애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수술이 잘 돼서 진짜 다행이다. 못된 기집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찾아와도 안 만나주고…….」
「……경애야.」
입을 열었다. 너무 기력이 빠져서 제대로 된 소리를 낼 기운이 없다. 힘을 다해 목구멍을 울렸다. 어지럽다.
「우리 엄마, 어디 갔니?」
「어? 어. 잠깐 나갔다 오신다구. 왜? 금방 오실 거랬는데. 힘드니?」
「아냐.」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있지, 이젠 잘 보이니? 나, 잘 보이는 거야?」
「응.」
「다행이다, 정말.」
「경애야.」
「응? 왜?」
「얘기 좀 해 줄래?」
다시 눈을 떴다. 흰색 일색인 병실 안의 풍경. 수개월 동안을 내내 캄캄한 세상에서 살던 탓에 시야에 들어오는 이것저것에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이 저토록 단조롭기 그지없는 광경일지라도.
「무슨, 얘기?」
「……선우 오빠…… 나 여기 입원하고 한번도 오지 않았어. 헤어졌어도 한번은 와줄 거라 생각했는데…….」
왔어도 만날 자신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래도 말이야.
「너한테 이런 말 묻기도 쑥스럽지만…… 잘 있니? 건강해?」
「유진아.」
「어, 알아. 매달리려는 거 아냐. 그냥, 궁금해서…….」
「유진아…….」
경애가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 눈을 피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다.
「왜 그래? 응? 오빠, 요즘 잘 안 풀리니? 아님 혹시, 딴 사람 생겼어? 나…… 괜찮아. 안 놀래. 말해 봐.」
「유진아.」
경애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난 말못하겠어……. 딴 사람한테 물어봐 줄래? 난, 말못하겠어…….」
「왜 그래! 선우 오빠, 뭔 일 있어? 응? 무슨 일 있는 거니?」
잠이 오질 않는다. 1시간 가까이를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결국 일어나 버렸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열었다. 다른 때라면 창을 통해 비치는 하늘은 별을 가득 담고 있을 텐데, 오늘밤은 바깥 가득히 흩날리는 눈 때문에 그것도 잘 보이질 않는다.
- 눈이 내렸다 그쳤다 하네? 내일은 스키 못 탈지도 모르겠다, 날씨 땜에. 일기예보 보니까 영 안 좋은 것 같애. 그러게 오늘 좀 타두지 그랬어?
저녁, 아주머니가 하신 말이 떠올랐다.
많이 쌓였을 테지. 그쳤다 다시 내리다 하긴 했지만 저녁 내내 왔으니까 이젠 꽤 쌓였을 거야. 강우림 선수의 별장에 있던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서양식으로 요리한 랍스터로 저녁을 마치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계속 내렸고, 산장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밖…… 많이 추울까…….
나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추울 게 분명하지만, 쌓인 눈을 디디면서 힘들게 걸어야 할 테지만, 나가보고 싶었다.
불을 켜고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상시계를 들여다봤다. 1시다. 방에 올라온 게 11시 반이었으니 그 정도 시간은 지났겠지. 옷걸이에 걸어둔 스웨터와 두툼한 코르덴바지를 입고 오리털 파카까지 껴입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완전무장을 하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언제나 얇게 입고 벌벌 떠는 내게 답답한 듯 잔소리하곤 했던 선우 오빠가 떠올랐다.
오빠, 오빠가 가고 나서야 이렇게 혼자 자신을 챙길 줄 알게 됐어. 너무 늦게 정신차렸지, 나.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왔다. 내가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밑에서 얘기를 나누며 아주머니가 만든 음식을 안주로 술을 먹고 있던 남자들은 어느 새 방으로 올라간 모양이다. 중앙거실의 불은 당연한 것처럼 꺼져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현관문을 열었다. 산중인데다 밤이라서 뱃속까지 서늘해질 정도의 바람이 정면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머플러로 얼굴 반쪽을 단단히 여미고 파카 후드를 머리에 씌운다. 그렇게 온몸을 완전히 가린 채 난, 아직도 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원래부터 있던 눈에다 더해서 쌓인 눈이 종아리 절반까지 차 오른다. 꼭 견딜 수 없이 춥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싹한 감각이 뇌를 스쳐, 난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아래로 내린 채 바닥만 보며 걷기 시작했다.
산장 뒤로 주인과 손님이 모두 이용하는 꽤 큰 차고가 있었다. 내가 몰고 온 차도, 세욱이 물건을 사올 때마다 쓰는 밴도 거기 세워져 있다. 별 생각 없이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그쪽으로 걸어갔을 때, 소리가 들렸다.
팡ㅡ!
이 소린?
소리는 바로 차고 안에서 나오고 있었다. 끌린 것처럼 난 차고 옆쪽,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고 안 천장에는 전구가 켜져 있었다. 한쪽에 나란히 세워진 차들…… 이런저런 잡동사니…… 낡은 가구…… 그리고…….
팡ㅡ!
벽이 울리는 소리, 그 둔탁한 음과 함께 퉁겨 나오는 공.
그 공을 친 사람의 그림자가 길고 옅은 그림자를 그리며 바닥으로 늘어져 벽까지 뻗어 올라간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의 주인공은 더 이상 볼을 받아치지 않았다. 대신 아래로 처져 있는 라켓을 천천히 올리곤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이쪽에는 등을 돌린 자세였지만, 약간 비틀어 측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가 눈에 그대로 비쳤다. 그 모습은 어둑한 공간 속, 붉은 기가 서린 전등 빛과 함께 희미한 막에 감싸인 듯 보였다.
“이거…….”
세욱이 입을 열었다.
“선우 형 거야.”
말하는 목소리는 낮고 조금 흐트러진 뉘앙스를 풍긴다. 나는 그가 산장에 돌아온 늦저녁 내내 맥주 캔을 손에 들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조금, 취한 것 같다. 그런데……?
“스트링(라켓 그물. 플레이 중 느슨해지는 일이 많아서 갈아주곤 합니다), 새로 쳤다며 좋아하곤 했었는데. 애인한테 새 옷 사준 기분이라던가?”
꼼짝 않고 선 채 그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테니스를 관두기로 결심한 날, 갖고 있던 걸 다 버렸다…… 내 물건은 말이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망할 인간이 자기 걸 죄다 남겨두고 가버린 거야. 괜찮으면 쓰라며. 네가 써주면 고맙겠다고, 웃으면서 말이야. 젠장, 웃으면서…….”
목소리가 서서히 꺼져든다. 세욱은 차고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허리를 굽혀 굴러간 공을 집어들었다.
“……버리면 되잖아.”
그것은 굳이 입밖에 내려고 의도한 대사는 아니었다.
공을 집은 세욱이 몸을 일으키는 연결동작처럼 내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눈을 돌려버린다.
“버려버려.”
말에 한숨을 담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수평으로 든 라켓 그물 위에 공을 올린 세욱이 그게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누르고 있는 듯한 소리를 토해내는 게 보인다.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있어.”
천장에 매달린 전구를 바라봤다. 태양을 보는 것처럼 괴로울 정도로 부신 건 아니지만, 어둑한 속에 덩그라니 켜져 있는 전구의 빛은 나름대로 눈에 자극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그 빛의 자극이 더해지면 차라리 좋겠다고, 나른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언젠가처럼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라면 좋겠다고. 정말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는데. 바보! 네가 그런 괴로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나…… 말하지 않았을 거야.
“나, 서울에 돌아가면 선 볼 거야. 그렇게 하겠다고 엄마한테 약속했거든. 정상적으로 대학에 다녔으면 벌써 졸업했을 나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값으로 나가야잖아.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래. 명문대 법댈 나왔고 졸업 전에 사시 패스했다구. 로펌 다니다 이제 로스쿨 갈 예정이라나? 나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딱이라고 그러더라. 뭣보다 집안이 엄청 좋고 부자라고ㅡ.”
순간, 말을 멈췄다. 외부를 메운 공기의 서늘함이 아닌, 직접적으로 심장을 눌러오는 싸늘함을 느낀다. 고개를 내려 앞으로 시선을 보냈을 때.
팡ㅡ!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가르며,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거의 찢는 듯한 속력으로 뭔가가 내 귓전을 스쳐 벽에 부딪쳤다. 공이 벽에 맞은 반작용으로 속도를 떨어뜨려 앞으로 튕겨 나온다. 무릎이 덜덜 떨렸다. 주저앉을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순간적으로 부서져버린 심장이 방금 받은 충격을 미처 흡수하지 못한 채 괴로움을 호소한다.
탁ㅡ…….
퉁긴 상태에서 뭔가에 다시 맞은 공이 바닥으로 떨어져 힘없이 굴러가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얼어붙은 것 같은 신경을 추스려 앞을 바라봤을 때, 어느새 라켓을 든 세욱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ㅡ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진한 감정을 담은 그의 눈은 이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지도 몰랐다.
무…무서운 눈을 하고 있어.
그의 눈을 봤을 때 목 끝까지 올라온 항의의 말은 그대로 삼켜져 버렸고, 어지러운 머리와 그에 박자를 맞추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는 데만도 엄청난 집중력을 요했다. 주저앉는 대신 겨우겨우 뒤로 물러섰다. 내가 뒤로 물러선 만큼 그가 앞으로 다가온다. 소리조차 낼 수 없어 현기증으로 머리가 들썩이는 걸 인식하면서도 난, 한걸음 두걸음 뒤로…… 뒤로, 발을 옮겨갔다. 그러다 결국은 쿵, 하고 차갑고 딱딱한 감각, 콘크리트가 등에 닿은 걸 깨닫고서야 멈췄다. 머플러가 스륵,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진다.
벽…이었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공간이 없다.
“아무나 괜찮단 얘긴가……?”
……탁.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라켓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손이 불쑥, 하고 위로 뻗어 올라왔다.
“ㅡ아……!”
양어깨가 단단하게 눌렸다. 딱딱한 벽에 자석처럼 붙어버린 자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 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몸을 비틀어보지만, 몸이 풀려나기는커녕 어깨를 붙들고 있던 팔은 아래로 내려와 내 양 손목을 붙들어 올리더니 벽에 대고 꽉 눌렀다. 그와 동시, 원래대로라면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할 그의 얼굴은 미끄러지듯 아래로 이동해 내 얼굴을 바로 정면약간 위에서 응시하고 있다. 아플 만치 혹독하게 내리꽂히는 시선…….
가슴이 턱 막혀든다. 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말해 봐. 아무나 상관없단 얘기……?”
약간 비틀린 모양으로 끝이 말려 올라간 입술. 낮고 조용한 음성이지만 격한 무언가로 꽉 메워진 듯한 어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눈을 감고 싶은 욕구를 애써 눌러 참으며,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아파……. 손목뼈에 금이 간 것처럼 고통스럽다. 온몸이 저려온다. 밑바닥으로부터 간신히 끌어올린 힘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상관없어.”
순간, 호흡이 완전히 정지했다. 입술이 입술에 눌린다……! 순간적인 충격에 놀라 움직이지 못한 내부로 물컹하고 더운 열기를 띤 뭔가가 격렬하게 쳐들어왔다. 거부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습적으로.
뿌연 기운이 서린 것처럼 앞이 뵈질 않았다. 흐릿하게 물들어 모든 것이 흐트러진 시야가 지독히 힘겹게 느껴져 난,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비집고 들어온 혀가 치열을 더듬고, 깊숙하게 파고들어 농락하듯 마비된 내부를 훑어 내린다. 뜨거운 설육이 날 거칠게 휘감아 빨아 당겼다.
“……읍…….”
차가워야 할 차고 안 공기가 달아올라 그대로 두사람을 감쌌다. 머리위로 후끈하게 열기가 치밀어 올라온다. 팔목의 고통 따윈 잊었다. 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 뜨겁고…… 괴롭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느낌……. 입술로부터 시작된 전류가 온몸을 휘감아 타고 퍼져 가는 그런 감상과 더불어 전신의 기운이 어딘가 증발해버리는 듯한.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런데 그것조차 몽롱하게 느껴진다. 부드러운 움직임은 절대 아닌데도. 지독하리 만치 격하고, 끈적하리 만치 농후한……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마치 분노의 감정을 실어 벌을 주려는 것 같은…….
벌? 벌……이라구?
아……!
순간, 신경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어 있던 머리로 일시에 밀려드는 상념의 덩어리들. 전신의 힘을 다해 몸을 뒤튼 순간, 마치 내 머릿속을 읽어낸 것처럼 혀가, 입술이, 내 안에서 떨어져 나갔다.
……!
놀라 눈을 떴다. 온 피부, 온 신경이 반동처럼 아직도 가늘게 흔들린다.
“하아…….”
막혀 있던 숨이 일시에 터지듯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깨달았다.
오빠……!
잊고 있었다, 선우 오빠를. 그리고 지금서야 생각이 났다. 한번도 이런 적 없었다. 선우 오빠는 항상 부드러웠다. 단 한번도 이렇게 거칠게 나를 몰아붙인 적…… 없었어. 눈앞에 있는 건, 한세욱이었다.
“……왜…….”
목이 막혀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뭘 묻고 싶은 지도 모르겠어. 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방금 나…… 뭐였지?
자신의 잘못은 밀쳐두고 한심하게도 난, 뒤로 물러나 있는 상대를 떨리는 목소리로 비난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생각하면서.
“너……답지 않아…….”
세욱은 더 이상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돌린 상태로, 그는 감정이건 이성이건, 일체의 무언가가 배제된 것처럼 텅 빈 눈동자를 허공에 띄운 채 한숨조차 쉬지 않고, 약간의 공백만 띄운 다음 나직하게 대꾸했다. 차고 안에 울리는 목소리는 놀랄 만큼 무감정한 톤.
“착각하지 마.”
비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혹스러워 보이지도 않는다. 비어 있는 눈동자는 말 그대로 비어 있었다.
잔혹하도록 높낮이가 없는 마지막 대사가 쐐기를 박듯 이어진다.
“꺼져 버려…… 내 앞에서.”
6
떠나자.
그렇게 생각했다.
떠나자ㅡ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이 밝아오면, 바로.
- 꺼져 버려…… 내 앞에서.
그래, 말대로 떠나줄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는 체질이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선우 오빠가 죽었단 이야기를 친구 경애로부터 들었을 때도, 눈물이 났던 기억은 없다. 기억이 없다는 거지, 실제 나 자신이 눈물을 흘렸는지 흘리지 않았는지는 물론 확실치 않지만 말이다.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게 아니지만.
어째서 난 여기에 온 것일까. 사람들을 피해서 온 거라면 굳이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라도 좋았을 것을.
대충 다 꾸려 놓은 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려 붙인다. 베개에 머리를 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차고에서의 그건…… 뭐였지?
키스……. 아아, 그래. 키스는 키스지. 혀와 혀를 섞는 행위. 하지만 아까 같은 강압적인 행위에서 키스의 본래 의미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거칠게 내리꽂힌 키스에는 그저 나에 대한 분노만이 실려 있었을 뿐.
꼭 그런 방식으로 조롱하지 않아도 좋았잖아…….
밴댕이 소갈딱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처방도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빠, 어떡하지? 소용이 없어…….’
「우와, 이런 곳이 있었어?」
「멋지지 않냐? 산중에 오두막집이라니.」
감탄사를 발하는 나를 보고,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 웃었다.
「오두막 치곤 괜찮다. 지나가다 비나 눈이 심해지면 여기서 피하라 만든 건가 봐, 그지.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네가 타임캡슐 만들자고 해서 온 거잖아.」
「응. 근데 그거랑 오두막이 왜?」
그는 문을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날 끌고, 옆으로 돌아왔다. 벽을 한번 두드리고, 그리고 선을 그리듯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땅을 가리킨다.
「여기 바로 옆에 묻어 두면 절대 잊어버릴 리 없을 것 같아서. 벽에다 표시해 둠 되잖아.」
「굿 아이디어! 그럼 되겠다.」
「야, 네가 묻을 건 뭐냐? 그 양철상자 안에 든 게 진짤 거 아냐.」
그가 손을 뻗었다. 품에 안고 있던 물건을 잡으려 해 나는 몸을 돌리고 고개를 저었다. 놀리듯 검지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노, 노, 아직 안돼. 내후년을 기약하라구요. 오빠가 가져온 건 뭔데?」
「훗, 별 거 아냐.」
그도 자신이 들고 있던 상자를 보면서 웃었다. 약간 멋쩍은 느낌의 웃음. 그 웃음이 좋았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웃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웃었다. 그가 웃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ㅡ
눈을 떴다. 아직도 새벽. 한겨울이라 길어진 밤은 아직도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나는 멍한 머리를 추스르며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가 상반신을 천천히 일으켜 앉았다. 짧은 동안 꾼 꿈이 그만 생각나게 해 버렸다. 내가 여기 온 이유. 어째서 지금서야 생각난 거지? 깨달아 버렸다…… 왜 자신이 여기까지 왔는지. 왜 여기에 와야만 했는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정신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지금은 여름이 아니란 사실. 오두막 옆 대지를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는 눈을 보니, 힘이 풀렸다. 눈이 아니더라도 아마도 땅이 온통 얼어 있어 도저히 팔 수 없을 테지.
바보!
하늘을 올려다봤다. 산장을 나올 때만 해도 잠시 멎어 있던 눈발이 다시 금 흩날리기 시작한다.
흐린 하늘이 갑자기 너무도 매정하게 느껴진다. 어째서 그렇게 무심하게 떨어뜨려야 하는 건데.
세욱의 산장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간 자리에,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외롭게 서 있는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다. 누가 만든 건진 모르지만, 허름한 그 오두막집까지 나를 처음 안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선우 오빠였다. 눈 따위는 전혀 찾아보기 힘든 한여름의 일.
나는 지금 그 오두막 옆에 서 있었다. 오두막 벽 위에 스프레이로 표시해 놓은 점은 흐릿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그 벽 밑으로 보이는 땅은 온통 얼음과 눈으로 가려져 있었다.
틀렸어.
이젠, 틀렸어…….
다리가 아파 왔다.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잡아먹었던 것이다. 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올라온 지금, 몸에서 갑자기 죽 힘이 빠져나가는 걸 깨닫고 당혹했다.
눈이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다. 몸을 으스스하게 덮치는 불쾌한 감각에 난, 어깨를 움츠렸다. 올라올 때만 해도 그저 내리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계속 한자리에 있으면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바람이 눈발과 더불어 정면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다.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에 온 진짜 이유는 전부를 접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하기 위해서, 잊기 위해서.
그래, 기회는 지금 뿐이야.
나는 옷을 단단히 여민 다음, 옆에 놔뒀던 삽을 들었다. 벽에 표시해 둔 자리 바로 아랫부분을 겨냥해서, 손에 들고 있던 삽으로 우선 가득히 땅을 덮은 눈을 헤친다. 삽은 이전에 그와 여기 올라왔던 수년 전의 여름에도 그랬듯 세욱의 차고 한쪽에 세워져 있던 연장상자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무겁고 큰 삽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내내 날 힘들게 만들었다.
헤쳤다. 헤치고, 헤치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쉬지 않고 헤친다. 눈에 파묻힌 종아리 부분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시려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절대 멈추면 안돼! 마음속의 자신이 강하게 말하고 있다.
마침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 보였다. 장갑을 끼긴 했지만 이미 양손은 곱아서 동상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다. 눈에 젖은 바지가 무겁게 늘어졌다. 아무래도 젖은 부분이 얼어붙기 시작한 듯한 감각마저 느껴진다.
이러다 정말 동상에 걸리는 거 아닐까.
엄살부리지 마! 고개를 흔들었다.
선우 오빠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더운 여름날, 물론 산이라 시원한 그늘 아래의 작업이긴 했지만, 땀을 흘리며 쉬지 않고 삽질을 해서 만든 자리. 타임캡슐이라니 너무 유치한 거 아냐? 하고 내 제안을 비웃으면서도 어느 새 더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던 그. 그런 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 흔적을 손에 넣고 난 다음,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이를 악물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잘 파지지 않는 땅은 삽을 꽂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밖엔 기회가 없으니까.
시간이 흘러간다. 삽질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땅도 조금씩 그 속살을 드러냈고, 조금씩 구덩이 모양 비스무리한 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상상 이상으로 체력과 인내력을 요구하는 작업에 나는 지쳐가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이쯤이면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하던 물건은 좀처럼 보이질 않고 있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면서 장갑 낀 손을 들어, 바람에 얼어붙은 얼굴을 문지르고 있을 때.
“뭐 하는 거야.”
덜컹.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눈을 디디고 올라오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 얼굴은 속이야 어떻든지 간에 얄미울 만큼 아무렇지도 않은 낯빛을 하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바람에 굳어버린 걸 수도 있지만.
세욱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앞에 섰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어.”
“보…보면 모르겠어?”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대꾸했다. 딱딱 이가 부딪치는 덕분에 말을 또박또박 하는 게 지독히도 힘들다. 자꾸만 기어 들어가려는 목소리를 잡아 뽑으려 있는 힘을 다하면서 나는 그를 노려봤다.
“그만해.”
“무슨 참견이야.”
세욱은 장갑도 목도리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퍼를 올리지 않은 파카 안에 걸친 니트는 브이넥이라서 드러난 피부 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무척이나 추워 보인다. 내 퉁명스런 대꾸를 듣고, 손을 들어 이마를 짚은 채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가만히 한 자세로 망설이다가ㅡ
“야!”
그가 손목을 붙들었던 것이다.
“놔! 이거!”
“싫으면 들어 와. 나도 억지로 이러고 싶진 않으니까.”
그가 힘을 늦추지 않은 채, 턱으로 오두막집을 가리켰다.
“놔! 내 발로 들어갈 거니까.”
그러자 이번엔 어이없을 만큼 간단히 힘이 풀려, 하마터면 비틀거리면서 무너질 뻔했다. 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아! 속으로만 씩씩거리면서 그를 따라 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벽과 바닥, 천장 외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오두막은 바깥 이상으로 썰렁하다.
“뭐야. 어떻게 알고 왔어.”
내 쪽에서 먼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이쪽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세욱은 그에 대해 덩달아 화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어 들어가지도 않은 채 그다운 짧은 대답을 말했다.
“발자국.”
아.
워낙에 깊게 패인 발자국이라, 내리는 눈에도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삽…….”
그의 말에, 자신의 손에 들린 걸 내려다 봤다. 계속 힘을 주고 있었던 탓에 팔 위엣 부분이 아릿하게 아파 오고, 그래도 바람은 막아주는 덕분일까 냉기에서 풀려난 다리가 그제야 본래 체온을 되찾는 반작용처럼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지독히도 불쾌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쓰고 곱게 돌려놓으려 했어.”
떫니? 하는 투로 대꾸하자, 조금은 뜬금없는 반응이 돌아온다.
“소용없어.”
“ㅡ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발끝부터 시작된 저림이 이제 무릎을 지나 허벅지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얼굴은 지금 퍽도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을 테지. 다행스럽게도 세욱은 이쪽을 보지 않은 채 조용히, 중얼거림처럼 덧붙일 따름이었다.
“아무리 파 봤자 소용없다고.”
“무슨 소리야?”
“찾으려는 게 있어서 온 거잖아. 아무리 파도 못 찾을 거란 얘기다.”
“어떻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오두막 안은 공기가 지나치게 건조했다. 숨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질거린다. 주머니를 뒤지다가 바보처럼 립크림을 가져오는 걸 잊었단 사실을 깨닫고, 손바닥을 신경질적으로 오므렸을 때.
“내가 갖고 있거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 안쪽이 따끔따끔하다.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아……. 이쪽을 보지 않은 채,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벽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세욱의 모습이 왠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몽롱한 귓전에 크지 않은 한마디가 스치듯 지나가려는 걸, 겨우 받아들인다.
“너하고 선우 형이 묻었던 것들…… 내가 갖고 있어.”
(하)로 계속.
* Junk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5-09 11:07)